[율법의] 세 번째 용법은 주요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서 마음에 이미 하나님의 영이 살아서 다스리는 신자들에게서 그 자리를 가진다(Tertius usus, qui et praecipuus est, et in proprium legis finem propius spectat, erga fideles locum habet, quorum in cordibus iam viget ac regnat Dei spirit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2.
율법의 제3용법은 거듭난 사람들을 위하여 율법이 어떤 작용을 하느냐, 어떤 기능을 하느냐,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세 번째 용법이 ‘주요하고 또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가까운 용법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입니다(『기독교 강요』, 2.7.1).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고 신령합니다(롬 7:12, 14). 율법은 본래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자녀가 살아갈 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마땅한 규례, 준칙,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규범으로 주셨다는 것이죠.
이렇게 볼 때 율법의 제1용법, 정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이것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허물로 말미암아 율법이 정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언약의 법이므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한다는 이런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이것은 율법의 본래적인 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왜냐하면 본래 율법은 정죄가 아니니까 [그러합니다.]
그리고 제2용법은 일반법적 용법, 시민법적 용법,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용법입니다. 제2용법은 외부적 행위만 관계되는 용법이니까요.
그러면 제3용법은 이제 거듭난 사람에게 율법은 본질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죠. 이제 중심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기 때문에, 다시 율법이 정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규범, 예배의 규범,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규범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제3용법을 가장 주요하고 고유한 용법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로마서 8장 9절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를 이제 우리 것 삼아 주시는 신약시대 보혜사 성령, 그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율법의 의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으로 쓰신 듯이 우리의 마음(cor)에 율법을 새겨 주시고(렘 31:33; 히 10:16), 그리고 성령의 지도(directio)를 받아서, 성령의 감동(affectus), 감화에 따라서 그 율법을 지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적인 기능을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율법의 제3용법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들이 자기들이 열망하는 주님의 뜻이 어떠한지를 날마다 더욱 잘 그리고 더욱 확실히 배우도록 해주고 그것을 이해하는 가운데 확정하게 해주는 최고의 기관(器官)이다(Est…illis optimum organum, quo melius in dies ac certius discant qualis sit Domini voluntas, ad quam aspirant, atque in eius intelligentia confirmen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2.
칼빈은 특별히 율법의 제3용법을 이야기하면서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 번째는 율법이 바로 하나님의 규범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곧 가르침(doctrina)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 확실히 배우게 해 주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계획과 또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그 최고의 기관이 율법이다’[라고]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질서, 규범 곧 율법의 교양(eruditio)으로 우리의 거듭난 사람의 삶이 진보한다(progredi)는 것이죠.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쫓아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빈번히 묵상함으로써 경성되어 순종에 이르고, 그 가운데서 강하여지며, 범법하도록 미끄러지게 하는 것으로부터 돌이키게 될 것이다(frequenti eius meditatione excitetur ad obsequium, in eo roboretur, a delinquendi lubrico retraha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2.
이러한 율법의 가르침은 단지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행하게끔 하는 권고(exhortatio)의 기능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여기서 첫 번째는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두 번째는 권고를 이야기합니다. 권하여서 행함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죠. 율법은 단지 지식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깊은 말씀 묵상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아는 것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순종하는 자리로, 행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죠.
칼빈은 이와 같이 율법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자에게 율법은 가르침이 될 뿐만 아니라 권고가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율법 그 자체의 능력이 있어서일까요? 아니죠. 율법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 그의 은혜가 역사하는 것이죠. 그의 은혜가 이기는 것이고 그의 은혜가 힘이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날마다 알게 되고, 새기게 되고, 나는 할 수 없으나 은혜로 이루는 그 은혜의 법을 알게 되므로, 단지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담대히 아는 바대로, 알게 된 바대로, 행함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우리가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마치…육체의 채찍과 같다”(carni lex flagmm est)[는] 이런 표현도 씁니다. 이때 채찍은 나쁜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마가편’(走馬加鞭)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달리는 말에 편자로 친다.’ [율법이] 채찍으로 치고, 그리고 “부단히 찌르는 가시”(assidus aculeus)라고도 합니다, 칼빈이.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편자를 보면 뒤에 가시같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을 모는 사람이 툭툭 치면 말이 더 잘 달려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율법이] 육체의 채찍과 같고 부단히 찌르는 가시와 같다[고 칼빈이 말합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능하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툭툭 이렇게 양을 몰듯이 말입니다. 여기 채찍은 양을 모는 막대기, 지팡이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율법이 채찍과 같고 부단히 찌르는 가시와 같다[고 칼빈이 말합니다].
시편 19편 7-8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본래 율법은 이렇습니다. 이 본래적 기능이 이제 거듭난 우리에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소성, 마음의 즐거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는, 그래서 꿀송이가 보다 더 단 그 율법에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라고] 시편 119편 105절에 말씀했는데, 거듭난 자에게는 율법이 이런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요. 아무도 율법을 스스로 순종하여 의에 이를 수 없지만, 은혜로 구원받아,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여김을 받은 사람은 이제 율법을 통하여 교훈들(praecepta)을 얻을 뿐만 아니라 약속(promissio)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율법은 은혜의 법이요, 언약의 법이요. 율법이 우리를 깨달아 알게 하면, 율법을 통하여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깨달으면, 은혜로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가르침과 권고의 그러한 기능을 율법이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다윗은 자기가 율법 안에서 중보자를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없다면 어떤 즐거움도 달콤함도 없다는 사실을 특별히 보여 준다(Praesertim vero ostendit David, se in lege mediatorem apprehendisse, sine quo nulla est oblectatio vel suavita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2.
칼빈은 여기에서 다시 ‘중보자가 없이는’(absque mediatore),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이 시편 19편, 119편, (우리가 시편 119편은 율법에 대한 가장 긴 노래를 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의 요약을 시편 19편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시편에서 율법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가 중보자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보자가 없이는 어떤 즐거움도, 달콤함도 없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중보자가 없이는 율법의 어떤 즐거움[도 없습니다]. 즐거움은 열매를 뜻합니다. 과즙이 꽉 차 있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중보자 그리스도가 있을 때 율법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과즙이 꽉 차 있습니다. 이를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oblectatio’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보자가 계셔야 달콤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달콤함은 ‘suabitas’라고 합니다. 율법의 달콤함은 뭘까요?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그 명령하신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때, 그때 달콤하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은 달콤하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자가 없이는 즐거움도 없고 달콤함도 없다. 예수님이 함께 계셔야 율법이 즐겁고, 열매 맺고, 과즙이 꽉 찬 그런 ‘juicy’한 열매를 맺고, 그리고 중보자가 함께 하시면, 나는 할 수 없으되 중보자가 하시므로 내가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가운데서 행한, 은혜로 행한 것에 또 상급도 주시고, 그것이 달콤함이라는 것이죠. 내가 한 것은 상급 없습니다. 은혜로 한 것만이 상급이 있습니다. 왜요? 내가 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혜로 한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만이 상급이 됩니다.
[『기독교 강요』. 2.7.13.]
우리는 이 칼빈의 율법의 제3용법을 통하여서 율법은 신자들이 따라가야 될 그 모범을 분명히 알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실 때, 그것은 헛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가운데 이루어 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이 됩니다. 신명기 32장 46-47절 부분에 보면 “모든 말을 마음에 두고…자녀에게 명령하여…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에 이른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자녀에게 율법이 생명이 되는 것은, 자녀에게 우리가 율법을 지켜 행하라고 하는 것은, 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율법을 지키는 자리로 우리 자신을 몰고 가는 것은, 그렇게 간구하고 나아가는 것은 바로 생명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그 은혜를 생명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베푸신다는 우리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올바르고 의롭게 살아가는 삶의 규범”(recte iusteque vivendi regulam)이요, 이 의인의 삶(vita iusti hominis)은 은혜의 삶이요, 율법에 대한 묵상(meditatio legis)은 은혜의 묵상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율법을 묵상하다 침상을 적실 정도로 기뻐하는, 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절망도 있지만 은혜로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그것이 있어서 침상을 적셔 가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삶 전체(vita tota)가 율법에 순종하는 삶이 되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의 삶의 달음질(stadium, 경주장)이다라고 고린도전서 9장 24-26절에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7.14.]
율법은 신자들에게 권고하는 힘(vis exhortationis)을 가지고 있습니다, 깨쳐서 일어나게 합니다, 순종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마음을 정하게 합니다, 힘을 얻게 합니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 힘이라’(느 8:10). 은혜를 바라보고 여호와를 즐거워하면서 율법의 규범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일점일획이라도 폐하지 않고 완전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마 5:17-18). 그것이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다 이루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다 준수하셨습니다. 그가 오신 목적은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가르침은 불가침한 것으로서 머문다. 율법은 가르침으로써, 훈계함으로써, 책망함으로써,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빚고 준비시킨다(Manet igitur per Christum inviolabilis legis doctrina, quae nos docendo, admonendo, obiurgando, corrigendo, ad omne opus bonum formet ac compar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4.
칼빈은 갈라디아서 3:19-20 설교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와 율법의 관계를 ‘율법의 중보자 그리스도’([Christ] le Mediateur de la Loy)라는 말로 표현합니다.…그리고 갈라디아서 3:19 주석에서는 그리스도가 “화목의 중보자”(mediator reconciliationis), “중재의 중보자”(mediator patrocinii), “가르침의 중보자”(mediator doctrinae)로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고, 적용하시고, 깨닫게 하심으로써, 율법의 수여와 작용의 전 과정을 중보하심을 천명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4, 각주 421.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율법의 가르침은 오히려 불가침한 것으로 머문다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으니까 우리는 더 율법을 붙듭니다, 더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나를 찔러주소서, 찔러주소서.’ 율법이 찌르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오히려 감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더 율법의 가르침은 더 견실해지고 불가침한 것이 됩니다. “율법은 가르침으로써, 훈계함으로써, 책망함으로써,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빚고 준비시킨다”[라고] 이렇게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여 율법이 자유롭게 됩니까, 어떻게 하여 율법이 우리에게 온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닙니까?
[『기독교 강요』. 2.7.15.]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갈 3:13; 신 21:23). 이것은 신명기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저주의 죽음을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가 율법 아래 여자의 후손으로 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갈라디아서 4장 4-5절에서 말씀하고 있어요.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의 명분을 얻고, 그 가운데 [그가] 우리를 속량하시고, 그가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함과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가져가시고, 이제 우리가 담대하게 율법을 순종하는 자리에 서게 하신 이것이 율법의 제3용법의 요체라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은 율법은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의 규범을 알고 순종하게끔 가르침과 권고의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율법의 고유하고 주요한 용법에 가까운 것이다.
두 번째, 율법의 교훈에는 은혜의 약속이 수반됩니다. 중보자가 없으면 율법은 그 어떤 달콤함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세 번째, 신자들의 삶은 그 전체가 달음질과 같습니다. 율법은 가시와 채찍과 같이 우리를 부단히 자극하고 재촉합니다. 우리에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권고합니다. 그리하여 끝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게 하십니다. 선한 일에 힘쓰게 하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그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려고 율법 아래에 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율법의 모든 의를 이루셔서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 은혜로 그 율법을 지키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 그래서 율법을 폐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을 더 불가침한 하나님의 은혜의 법으로 삼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이 불완전해서 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를 다 이루어서 율법을 지킬 백성을 조성함에 있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64강 결론
율법의 세 번째 용법: 율법은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의 규범을 알고 순종하게끔 ‘가르침’과 ‘권고’의 역할을 합니다. 이는 율법의 주요하고 고유한 용법에 더욱 가깝습니다.
율법의 교훈에는 은혜의 약속이 수반되는바, 중보자가 없다면 율법에는 그 어떤 즐거움도 달콤함도 없습니다.
신자들의 삶은 그 전체가 달음질과 같아서 율법의 가시와 채찍으로 부단한 자극과 재촉을 받아 올바른 길에 서서 모든 선한 일에 힘씁니다.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여 그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으므로 오직 그를 통하여 율법은 불가침한 것으로 머물게 됩니다.
64강 | 2.7.12-15 (2권 217-223페이지)
신자들에게 가르침과 권고로 작용하는 율법의 용법
[『기독교 강요』. 2.7.12.]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은 주요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서 마음에 이미 하나님의 영이 살아서 다스리는 신자들에게서 그 자리를 가진다(Tertius usus, qui et praecipuus est, et in proprium legis finem propius spectat, erga fideles locum habet, quorum in cordibus iam viget ac regnat Dei spirit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2.
율법의 제3용법은 거듭난 사람들을 위하여 율법이 어떤 작용을 하느냐, 어떤 기능을 하느냐,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세 번째 용법이 ‘주요하고 또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가까운 용법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입니다(『기독교 강요』, 2.7.1).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고 신령합니다(롬 7:12, 14). 율법은 본래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자녀가 살아갈 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마땅한 규례, 준칙,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규범으로 주셨다는 것이죠.
이렇게 볼 때 율법의 제1용법, 정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이것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허물로 말미암아 율법이 정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언약의 법이므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한다는 이런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이것은 율법의 본래적인 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왜냐하면 본래 율법은 정죄가 아니니까 [그러합니다.]
그리고 제2용법은 일반법적 용법, 시민법적 용법,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용법입니다. 제2용법은 외부적 행위만 관계되는 용법이니까요.
그러면 제3용법은 이제 거듭난 사람에게 율법은 본질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죠. 이제 중심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기 때문에, 다시 율법이 정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규범, 예배의 규범,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규범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제3용법을 가장 주요하고 고유한 용법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로마서 8장 9절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를 이제 우리 것 삼아 주시는 신약시대 보혜사 성령, 그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율법의 의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으로 쓰신 듯이 우리의 마음(cor)에 율법을 새겨 주시고(렘 31:33; 히 10:16), 그리고 성령의 지도(directio)를 받아서, 성령의 감동(affectus), 감화에 따라서 그 율법을 지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적인 기능을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율법의 제3용법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들이 자기들이 열망하는 주님의 뜻이 어떠한지를 날마다 더욱 잘 그리고 더욱 확실히 배우도록 해주고 그것을 이해하는 가운데 확정하게 해주는 최고의 기관(器官)이다(Est…illis optimum organum, quo melius in dies ac certius discant qualis sit Domini voluntas, ad quam aspirant, atque in eius intelligentia confirmen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2.
칼빈은 특별히 율법의 제3용법을 이야기하면서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 번째는 율법이 바로 하나님의 규범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곧 가르침(doctrina)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 확실히 배우게 해 주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계획과 또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그 최고의 기관이 율법이다’[라고]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질서, 규범 곧 율법의 교양(eruditio)으로 우리의 거듭난 사람의 삶이 진보한다(progredi)는 것이죠.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쫓아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빈번히 묵상함으로써 경성되어 순종에 이르고, 그 가운데서 강하여지며, 범법하도록 미끄러지게 하는 것으로부터 돌이키게 될 것이다(frequenti eius meditatione excitetur ad obsequium, in eo roboretur, a delinquendi lubrico retraha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2.
이러한 율법의 가르침은 단지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행하게끔 하는 권고(exhortatio)의 기능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여기서 첫 번째는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두 번째는 권고를 이야기합니다. 권하여서 행함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죠. 율법은 단지 지식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깊은 말씀 묵상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아는 것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순종하는 자리로, 행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죠.
칼빈은 이와 같이 율법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자에게 율법은 가르침이 될 뿐만 아니라 권고가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율법 그 자체의 능력이 있어서일까요? 아니죠. 율법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 그의 은혜가 역사하는 것이죠. 그의 은혜가 이기는 것이고 그의 은혜가 힘이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날마다 알게 되고, 새기게 되고, 나는 할 수 없으나 은혜로 이루는 그 은혜의 법을 알게 되므로, 단지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담대히 아는 바대로, 알게 된 바대로, 행함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우리가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마치…육체의 채찍과 같다”(carni lex flagmm est)[는] 이런 표현도 씁니다. 이때 채찍은 나쁜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마가편’(走馬加鞭)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달리는 말에 편자로 친다.’ [율법이] 채찍으로 치고, 그리고 “부단히 찌르는 가시”(assidus aculeus)라고도 합니다, 칼빈이.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편자를 보면 뒤에 가시같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을 모는 사람이 툭툭 치면 말이 더 잘 달려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율법이] 육체의 채찍과 같고 부단히 찌르는 가시와 같다[고 칼빈이 말합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능하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툭툭 이렇게 양을 몰듯이 말입니다. 여기 채찍은 양을 모는 막대기, 지팡이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율법이 채찍과 같고 부단히 찌르는 가시와 같다[고 칼빈이 말합니다].
시편 19편 7-8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본래 율법은 이렇습니다. 이 본래적 기능이 이제 거듭난 우리에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소성, 마음의 즐거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는, 그래서 꿀송이가 보다 더 단 그 율법에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라고] 시편 119편 105절에 말씀했는데, 거듭난 자에게는 율법이 이런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요. 아무도 율법을 스스로 순종하여 의에 이를 수 없지만, 은혜로 구원받아,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여김을 받은 사람은 이제 율법을 통하여 교훈들(praecepta)을 얻을 뿐만 아니라 약속(promissio)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율법은 은혜의 법이요, 언약의 법이요. 율법이 우리를 깨달아 알게 하면, 율법을 통하여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깨달으면, 은혜로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가르침과 권고의 그러한 기능을 율법이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다윗은 자기가 율법 안에서 중보자를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없다면 어떤 즐거움도 달콤함도 없다는 사실을 특별히 보여 준다(Praesertim vero ostendit David, se in lege mediatorem apprehendisse, sine quo nulla est oblectatio vel suavita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2.
칼빈은 여기에서 다시 ‘중보자가 없이는’(absque mediatore),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이 시편 19편, 119편, (우리가 시편 119편은 율법에 대한 가장 긴 노래를 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의 요약을 시편 19편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시편에서 율법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가 중보자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보자가 없이는 어떤 즐거움도, 달콤함도 없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중보자가 없이는 율법의 어떤 즐거움[도 없습니다]. 즐거움은 열매를 뜻합니다. 과즙이 꽉 차 있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중보자 그리스도가 있을 때 율법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과즙이 꽉 차 있습니다. 이를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oblectatio’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보자가 계셔야 달콤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달콤함은 ‘suabitas’라고 합니다. 율법의 달콤함은 뭘까요?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그 명령하신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때, 그때 달콤하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은 달콤하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자가 없이는 즐거움도 없고 달콤함도 없다. 예수님이 함께 계셔야 율법이 즐겁고, 열매 맺고, 과즙이 꽉 찬 그런 ‘juicy’한 열매를 맺고, 그리고 중보자가 함께 하시면, 나는 할 수 없으되 중보자가 하시므로 내가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가운데서 행한, 은혜로 행한 것에 또 상급도 주시고, 그것이 달콤함이라는 것이죠. 내가 한 것은 상급 없습니다. 은혜로 한 것만이 상급이 있습니다. 왜요? 내가 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혜로 한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만이 상급이 됩니다.
[『기독교 강요』. 2.7.13.]
우리는 이 칼빈의 율법의 제3용법을 통하여서 율법은 신자들이 따라가야 될 그 모범을 분명히 알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실 때, 그것은 헛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가운데 이루어 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이 됩니다. 신명기 32장 46-47절 부분에 보면 “모든 말을 마음에 두고…자녀에게 명령하여…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에 이른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자녀에게 율법이 생명이 되는 것은, 자녀에게 우리가 율법을 지켜 행하라고 하는 것은, 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율법을 지키는 자리로 우리 자신을 몰고 가는 것은, 그렇게 간구하고 나아가는 것은 바로 생명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그 은혜를 생명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베푸신다는 우리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올바르고 의롭게 살아가는 삶의 규범”(recte iusteque vivendi regulam)이요, 이 의인의 삶(vita iusti hominis)은 은혜의 삶이요, 율법에 대한 묵상(meditatio legis)은 은혜의 묵상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율법을 묵상하다 침상을 적실 정도로 기뻐하는, 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절망도 있지만 은혜로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그것이 있어서 침상을 적셔 가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삶 전체(vita tota)가 율법에 순종하는 삶이 되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의 삶의 달음질(stadium, 경주장)이다라고 고린도전서 9장 24-26절에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7.14.]
율법은 신자들에게 권고하는 힘(vis exhortationis)을 가지고 있습니다, 깨쳐서 일어나게 합니다, 순종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마음을 정하게 합니다, 힘을 얻게 합니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 힘이라’(느 8:10). 은혜를 바라보고 여호와를 즐거워하면서 율법의 규범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일점일획이라도 폐하지 않고 완전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마 5:17-18). 그것이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다 이루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다 준수하셨습니다. 그가 오신 목적은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가르침은 불가침한 것으로서 머문다. 율법은 가르침으로써, 훈계함으로써, 책망함으로써,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빚고 준비시킨다(Manet igitur per Christum inviolabilis legis doctrina, quae nos docendo, admonendo, obiurgando, corrigendo, ad omne opus bonum formet ac compar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4.
칼빈은 갈라디아서 3:19-20 설교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와 율법의 관계를 ‘율법의 중보자 그리스도’([Christ] le Mediateur de la Loy)라는 말로 표현합니다.…그리고 갈라디아서 3:19 주석에서는 그리스도가 “화목의 중보자”(mediator reconciliationis), “중재의 중보자”(mediator patrocinii), “가르침의 중보자”(mediator doctrinae)로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고, 적용하시고, 깨닫게 하심으로써, 율법의 수여와 작용의 전 과정을 중보하심을 천명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4, 각주 421.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율법의 가르침은 오히려 불가침한 것으로 머문다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으니까 우리는 더 율법을 붙듭니다, 더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나를 찔러주소서, 찔러주소서.’ 율법이 찌르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오히려 감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더 율법의 가르침은 더 견실해지고 불가침한 것이 됩니다. “율법은 가르침으로써, 훈계함으로써, 책망함으로써,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빚고 준비시킨다”[라고] 이렇게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여 율법이 자유롭게 됩니까, 어떻게 하여 율법이 우리에게 온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닙니까?
[『기독교 강요』. 2.7.15.]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갈 3:13; 신 21:23). 이것은 신명기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저주의 죽음을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가 율법 아래 여자의 후손으로 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갈라디아서 4장 4-5절에서 말씀하고 있어요.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의 명분을 얻고, 그 가운데 [그가] 우리를 속량하시고, 그가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함과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가져가시고, 이제 우리가 담대하게 율법을 순종하는 자리에 서게 하신 이것이 율법의 제3용법의 요체라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은 율법은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의 규범을 알고 순종하게끔 가르침과 권고의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율법의 고유하고 주요한 용법에 가까운 것이다.
두 번째, 율법의 교훈에는 은혜의 약속이 수반됩니다. 중보자가 없으면 율법은 그 어떤 달콤함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세 번째, 신자들의 삶은 그 전체가 달음질과 같습니다. 율법은 가시와 채찍과 같이 우리를 부단히 자극하고 재촉합니다. 우리에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권고합니다. 그리하여 끝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게 하십니다. 선한 일에 힘쓰게 하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그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려고 율법 아래에 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율법의 모든 의를 이루셔서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 은혜로 그 율법을 지키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 그래서 율법을 폐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을 더 불가침한 하나님의 은혜의 법으로 삼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이 불완전해서 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를 다 이루어서 율법을 지킬 백성을 조성함에 있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64강 결론
율법의 세 번째 용법: 율법은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의 규범을 알고 순종하게끔 ‘가르침’과 ‘권고’의 역할을 합니다. 이는 율법의 주요하고 고유한 용법에 더욱 가깝습니다.
율법의 교훈에는 은혜의 약속이 수반되는바, 중보자가 없다면 율법에는 그 어떤 즐거움도 달콤함도 없습니다.
신자들의 삶은 그 전체가 달음질과 같아서 율법의 가시와 채찍으로 부단한 자극과 재촉을 받아 올바른 길에 서서 모든 선한 일에 힘씁니다.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여 그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으므로 오직 그를 통하여 율법은 불가침한 것으로 머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