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율법은 헛것이다’(『기독교 강요』 2.7.1.)라고 칼빈은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언약의 법’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 가운데 모세의 율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아무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악해서 율법이 저주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경찰 앞에서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죄가 있는 자만이 경찰을 피해 도망칠 것입니다. 경찰이 나쁜 것이 아니라 죄가 나쁜 것입니다. 피한다는 것이 저주라고 볼 때,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 저주라고 볼 때, 그 저주 상태는 죄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이 무서워서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7.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 십계명, 이러한 도덕법(lex moralis)은 우리로 하여금 핑계치 못하게(inexcusabiles) 합니다. 죄에 대한 책임, 사망의 형벌, 그리고 전적인 무능과 전적인 부패의 오염 상태, 그 타락의 비참한 우리의 상태가 다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고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우리의 잘못인 것입니다. 율법 가운데 죄를 깨달아 알고 율법으로는 죄가 더함이라는 것은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율법 앞에 설 때 올바로 보이고, 우리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가를 알게 되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게 하는 것입니다. 애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슬픔에 잠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아무도 온전치 못하므로, 낙담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녀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일체의 변명을 내려놓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하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우리는 율법 가운데서 의의 완전함을 배우게 된다. 이로부터 율법에 대한 완전한 준수가 하나님 앞에서의 의라는 사실이 귀결된다(Si verum est perfectionem iustitiae in lege nos edoceri: istud etiam consequitur, absolutam eius observationem perfectam esse coram Deo iustiti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3.
율법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의 완전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율법의 의(iustitia)는 나쁜 뜻이 아닙니다. 죄가 없다면 율법의 의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율법의 의는 결코 우리 안에서 온전히 작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과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한 순종을 받기를 원하십니다(참조. 막 12:30). 하나님이 원하는 율법의 순종은 인격적인 순종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힘을 다하는, 정성을 다하는, 마음과 뜻을 다하는 순종이어야 됩니다. 아무도 이러한 순종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자유의지 상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전히 율법의 의를 추구해야 되겠습니까? 율법의 의는 우리를 깨닫게 하지만 율법의 의를 추구해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자 없습니다. 율법의 완전함은 분명히 우리에게 우리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능력 없음을 바라보게 합니다. 율법이 완전하게 우리에게 계시될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공표할 때 하나님은 두 가지를 동시에 알게 하셨습니다(신 30:19). 첫 번째는 생명과 의에 속한, 복에 속한 부분입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누릴 것이요, 신령한 복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하는 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 거룩함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살리라’, [즉] 생명을 누릴 것이고 언약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율법을 어기는 자는 사망에 이를 것이요, 저주의 상태에 놓일 것이라고 또한 율법은 알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는 분명합니다. 하나도 어김없이 완전하게 순종했을 때 그 율법은 생명에 이르는, 복에 이르는 도구가 됩니다. 궁극적으로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율법의 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그 누구도 완전한 순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율법의 순종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율법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의 은혜를 받아서,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그런 자의 것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옳다 하면서 스스로 나의 능력과 자질을 내세우고 ‘내가 스스로 지킬 수 있다’라고 하는 자는 결코 지킬 수도 없을 것이요, 이미 중심이 합한 바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지도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심과 함께, 생명을 주시는 것과 함께 생활도 거룩하게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 자체가 주는 은혜가 아니라 율법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율법이 지혜롭게도 하고, 율법이 꿀송이같이 달콤하고, 율법을 통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참 경건의 도와 예배의 도를 배우고, 이러한 것은 율법 자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주어진 언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그 은혜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율법의 연약함이(legis imbecillitas) 드러난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준수한 자가 발견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생명의 약속들로부터 제외되어 오직 저주로만 전락해 들어간다(Nam quia in nullo nostrum ilia legis observantia deprehenditur, a vitae promissionibus exclusi in solam maledictionem recidi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3.
그래서 칼빈은 ‘율법의 연약함이다’라고 표현하면서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온전히 율법을 준수하는 자가 없으므로 다 생명의 약속들로부터 제외되어 있고 오직 저주(maledictio)로만 전락해 들어간다’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하여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현존하는 죽음일 뿐(mors praesentissima)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판단하고 식별하게 하는 것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죽음이 나에게 임하였도다,’ 그 죽음의 현존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7.4.]
‘단지 율법만을 고려하면’ 우리 영혼은 낙담하고, 혼동에 빠지며, 좌절할 수밖에 없다. 율법으로부터 우리 모두는 정죄되었으며 저주받았다(si legem duntaxat intuemur, nihil aliud possumus quam animum despondere, confundi ac desperare, quum ex ea damnemur omnes ac maledicam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4.
이는 언약의 은혜가 없는 ‘벌거벗은 율법’(lex nuda)을 칭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4, 각주 388.
율법을 문자로만 바라본다면 우리 영혼은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우리는 정죄를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주를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율법의 약속들은(promissiones legis) 조건적인 이상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perfecta legis obedientia)에 의지하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 완전한 순종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약속이 헛되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부여하시므로, 자기의 그 자애로우심의 정점 위에 이 선하심을 또한 부착시키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것이 반쯤 찬 순종이라고 배척하지 아니하시며 완성에 미치지 못한다고 불용(不容)하지 아니하신다. 그리하여 마치 우리가 율법의 약속들의 조건을 충족시키기라도 한 듯이 그 열매를 얻게 하신다(Sic enim tum omnia nobis gratuito confert, ut hoc quoque ad cumulum suae beneficentiae adiungat, quod semiplenam nostram obedientiam non respuens, et quod deest complemento remittens, perinde atque a nobis impleta conditione, legalium promissionum fructum percipere nos fac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4.
율법의 약속들을 바라보지 않고 율법의 규범들만 바라보고, 그 규범을 내 자질로 순종할 수 있다라고 교만하게 나간다면, 율법의 의는 결코 우리에게 선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봐야 됩니다. 복음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이루셔서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그 생명의 구원의 복음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함께 하나님의 규범의 선하심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그의 인자와 그의 자비를 간구하지 않는 자로서 어찌 하나님의 법이 은혜로운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만이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는, 은혜로 율법의 의를 이루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시듯이 우리의 부족한 행위라도 받아 주십니다. 우리의 것이 반쯤 찬 순종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배척하지 아니하시고,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불용하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받아 주십니다.
율법의 조건들이 우리로부터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룰 때 하나님이 모든 율법의 불순종에 대한 죄 값을 치르고 그리고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법을 지키심으로 그 아들을 통하여서 우리를 대신하는 의를 이루심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우리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은혜를 누리는 그것이 율법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그러한 믿는 백성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후에 보듯이 칼빈은 거듭난 자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용법, 제3의 용법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기독교 강요』 2.7.12.).
[『기독교 강요』. 2.7.5.]
율법은 우리 앞에서 불가능한 것(impossibilis)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주 안에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빌 4:13).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사망에 속한 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무기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썩었음을, 오염되었음을,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우리가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 가닿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즉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율법은 언약의 법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어 의로 여김을 받는 것은,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고 우리가 볼진대,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좌절할 때, 우리는 즉시 율법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이 정하신 사랑의 목표(scopus dilectionis), [즉]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목표에 가닿지 못합니다(참조. 막 12:30).
그러나 은혜[의 하나님]는 능히 그것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므로, 그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순종코자 하는 백성의 부족한 순종이라도 받으시는, 우리가 완전해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순종의 완전함을 누리는 자리에 우리를 세우심으로, 우리의 순종을 받으시는 그 은혜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예수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뚱어리를 바라본다면, 아무도 우리는 목표점(meta)에 도달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솔로몬이 ‘죄를 범하지 않은 의인은 세상에 없다. 전혀 죄를 범하지 않은 그러한 의인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전 7:20; 참조. 왕상 8:46). 다윗도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시 143:2)[라고 말합니다]. 사람끼리는 서로 의롭다 하고, 그렇게 키 재기를 하고, 선인이니 악인이니 하지만, 주의 면전에서는 아무도 선한 인생이 없다[고 말합니다]. 욥도 또한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참조. 욥 9:2; 25:4). 우리는 다 악하여 죽음에 있다고 욥이 바라본 것입니다. 바울도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고 했습니다(갈 5:17). 육체의 소욕이 뭡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 그대로 있는 것,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뭡니까?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스스로 그저 진노의 자녀로 있다면 어찌 율법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진노의 자녀인데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이 어떻게 은혜가 되겠습니까? 악한 사람에게 어찌 올바른 것이 올바른 것이 되겠습니까? 내가 굽어 있는데 어찌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온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자신이 저주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율법도 저주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갈 3:10; 참조. 신 27:26).
펠라기우스와 그를 따르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는 행할 자질이 있기 때문에 주었다. [즉,] 지킬 만하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하여서 은총을 구한다면 그것이 불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정반대로 생각한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는 우리에게 찾을 것이 있어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주시려고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것을 찾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것을 찾는다. 주님은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25)라고 했을 때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이 말씀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러한 입장인 것이죠.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
사랑은 지식에 뒤따르는 것이므로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을 충만히 가지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완전히 사랑할 수 없다.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사는 동안 우리는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본다(고전 13:12).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불안전하다는 결론이 나온다(Amor…notitiam ita sequitur, ut Deum amare nemo perfecte possit, qui non cognitam prius ad plenum habuerit eius bonitatem. Nos, dum in mundo peregrinamur, cernimus per speculum et in aenigmate; sequitur ergo imperfectum esse nostrum amorem).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5.
사랑은 지식에 뒤따르는 것이므로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을 충만히 가지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사랑할 수 없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지금은 희미하게 보지만 점차 점차 하나님을 가까이 마주 보고, 이것이 은혜 아닙니까? 거듭나지 않고는 어떻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볼 것입니까?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규범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의 말씀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은 의의 완전함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의로운 순종에는 구원의 영원한 보상이 기다립니다. 이것을 율법의 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둘째, 율법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아무도 율법에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인데, 타락한 인류는 아무도 그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이죠. 율법을 통하여는 그저 저주에 직면할 뿐이고 현존하는 죽음을 식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 은혜를 얻어 복음으로 율법의 약속을 누리게 됩니다.
넷째,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하지만 그 사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예수님의 성취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불완전한 것도 받으십니다. 그리고 나아가게 하십니다. 진보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끝내 구원을 끝까지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62강 결론
율법은 의의 완전함을 가르치며, 율법에 대한 의로운 순종에는 구원의 영원한 보상이 기다립니다.
율법의 연약함: 아무도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없으므로 율법 자체를 통하여서는 저주에 직면하여 현존하는 죽음을 식별할 뿐입니다.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어 은혜를 얻는 복음으로 율법의 약속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하지만 그 사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여 그가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이루십니다.
62강 | 2.7.3-5 (2권 203-207페이지)
타락한 인류는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음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율법은 헛것이다’(『기독교 강요』 2.7.1.)라고 칼빈은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언약의 법’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 가운데 모세의 율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아무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악해서 율법이 저주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경찰 앞에서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죄가 있는 자만이 경찰을 피해 도망칠 것입니다. 경찰이 나쁜 것이 아니라 죄가 나쁜 것입니다. 피한다는 것이 저주라고 볼 때,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 저주라고 볼 때, 그 저주 상태는 죄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이 무서워서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7.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 십계명, 이러한 도덕법(lex moralis)은 우리로 하여금 핑계치 못하게(inexcusabiles) 합니다. 죄에 대한 책임, 사망의 형벌, 그리고 전적인 무능과 전적인 부패의 오염 상태, 그 타락의 비참한 우리의 상태가 다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고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우리의 잘못인 것입니다. 율법 가운데 죄를 깨달아 알고 율법으로는 죄가 더함이라는 것은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율법 앞에 설 때 올바로 보이고, 우리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가를 알게 되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게 하는 것입니다. 애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슬픔에 잠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아무도 온전치 못하므로, 낙담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녀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일체의 변명을 내려놓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하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우리는 율법 가운데서 의의 완전함을 배우게 된다. 이로부터 율법에 대한 완전한 준수가 하나님 앞에서의 의라는 사실이 귀결된다(Si verum est perfectionem iustitiae in lege nos edoceri: istud etiam consequitur, absolutam eius observationem perfectam esse coram Deo iustiti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3.
율법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의 완전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율법의 의(iustitia)는 나쁜 뜻이 아닙니다. 죄가 없다면 율법의 의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율법의 의는 결코 우리 안에서 온전히 작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과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한 순종을 받기를 원하십니다(참조. 막 12:30). 하나님이 원하는 율법의 순종은 인격적인 순종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힘을 다하는, 정성을 다하는, 마음과 뜻을 다하는 순종이어야 됩니다. 아무도 이러한 순종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자유의지 상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전히 율법의 의를 추구해야 되겠습니까? 율법의 의는 우리를 깨닫게 하지만 율법의 의를 추구해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자 없습니다. 율법의 완전함은 분명히 우리에게 우리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능력 없음을 바라보게 합니다. 율법이 완전하게 우리에게 계시될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공표할 때 하나님은 두 가지를 동시에 알게 하셨습니다(신 30:19). 첫 번째는 생명과 의에 속한, 복에 속한 부분입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누릴 것이요, 신령한 복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하는 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 거룩함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살리라’, [즉] 생명을 누릴 것이고 언약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율법을 어기는 자는 사망에 이를 것이요, 저주의 상태에 놓일 것이라고 또한 율법은 알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는 분명합니다. 하나도 어김없이 완전하게 순종했을 때 그 율법은 생명에 이르는, 복에 이르는 도구가 됩니다. 궁극적으로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율법의 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그 누구도 완전한 순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율법의 순종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율법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의 은혜를 받아서,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그런 자의 것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옳다 하면서 스스로 나의 능력과 자질을 내세우고 ‘내가 스스로 지킬 수 있다’라고 하는 자는 결코 지킬 수도 없을 것이요, 이미 중심이 합한 바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지도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심과 함께, 생명을 주시는 것과 함께 생활도 거룩하게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 자체가 주는 은혜가 아니라 율법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율법이 지혜롭게도 하고, 율법이 꿀송이같이 달콤하고, 율법을 통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참 경건의 도와 예배의 도를 배우고, 이러한 것은 율법 자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주어진 언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그 은혜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율법의 연약함이(legis imbecillitas) 드러난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준수한 자가 발견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생명의 약속들로부터 제외되어 오직 저주로만 전락해 들어간다(Nam quia in nullo nostrum ilia legis observantia deprehenditur, a vitae promissionibus exclusi in solam maledictionem recidi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3.
그래서 칼빈은 ‘율법의 연약함이다’라고 표현하면서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온전히 율법을 준수하는 자가 없으므로 다 생명의 약속들로부터 제외되어 있고 오직 저주(maledictio)로만 전락해 들어간다’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하여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현존하는 죽음일 뿐(mors praesentissima)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판단하고 식별하게 하는 것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죽음이 나에게 임하였도다,’ 그 죽음의 현존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7.4.]
‘단지 율법만을 고려하면’ 우리 영혼은 낙담하고, 혼동에 빠지며, 좌절할 수밖에 없다. 율법으로부터 우리 모두는 정죄되었으며 저주받았다(si legem duntaxat intuemur, nihil aliud possumus quam animum despondere, confundi ac desperare, quum ex ea damnemur omnes ac maledicam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4.
이는 언약의 은혜가 없는 ‘벌거벗은 율법’(lex nuda)을 칭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4, 각주 388.
율법을 문자로만 바라본다면 우리 영혼은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우리는 정죄를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주를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율법의 약속들은(promissiones legis) 조건적인 이상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perfecta legis obedientia)에 의지하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 완전한 순종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약속이 헛되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부여하시므로, 자기의 그 자애로우심의 정점 위에 이 선하심을 또한 부착시키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것이 반쯤 찬 순종이라고 배척하지 아니하시며 완성에 미치지 못한다고 불용(不容)하지 아니하신다. 그리하여 마치 우리가 율법의 약속들의 조건을 충족시키기라도 한 듯이 그 열매를 얻게 하신다(Sic enim tum omnia nobis gratuito confert, ut hoc quoque ad cumulum suae beneficentiae adiungat, quod semiplenam nostram obedientiam non respuens, et quod deest complemento remittens, perinde atque a nobis impleta conditione, legalium promissionum fructum percipere nos fac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4.
율법의 약속들을 바라보지 않고 율법의 규범들만 바라보고, 그 규범을 내 자질로 순종할 수 있다라고 교만하게 나간다면, 율법의 의는 결코 우리에게 선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봐야 됩니다. 복음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이루셔서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그 생명의 구원의 복음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함께 하나님의 규범의 선하심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그의 인자와 그의 자비를 간구하지 않는 자로서 어찌 하나님의 법이 은혜로운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만이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는, 은혜로 율법의 의를 이루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시듯이 우리의 부족한 행위라도 받아 주십니다. 우리의 것이 반쯤 찬 순종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배척하지 아니하시고,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불용하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받아 주십니다.
율법의 조건들이 우리로부터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룰 때 하나님이 모든 율법의 불순종에 대한 죄 값을 치르고 그리고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법을 지키심으로 그 아들을 통하여서 우리를 대신하는 의를 이루심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우리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은혜를 누리는 그것이 율법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그러한 믿는 백성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후에 보듯이 칼빈은 거듭난 자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용법, 제3의 용법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기독교 강요』 2.7.12.).
[『기독교 강요』. 2.7.5.]
율법은 우리 앞에서 불가능한 것(impossibilis)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주 안에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빌 4:13).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사망에 속한 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무기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썩었음을, 오염되었음을,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우리가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 가닿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즉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율법은 언약의 법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어 의로 여김을 받는 것은,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고 우리가 볼진대,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좌절할 때, 우리는 즉시 율법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이 정하신 사랑의 목표(scopus dilectionis), [즉]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목표에 가닿지 못합니다(참조. 막 12:30).
그러나 은혜[의 하나님]는 능히 그것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므로, 그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순종코자 하는 백성의 부족한 순종이라도 받으시는, 우리가 완전해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순종의 완전함을 누리는 자리에 우리를 세우심으로, 우리의 순종을 받으시는 그 은혜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예수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뚱어리를 바라본다면, 아무도 우리는 목표점(meta)에 도달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솔로몬이 ‘죄를 범하지 않은 의인은 세상에 없다. 전혀 죄를 범하지 않은 그러한 의인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전 7:20; 참조. 왕상 8:46). 다윗도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시 143:2)[라고 말합니다]. 사람끼리는 서로 의롭다 하고, 그렇게 키 재기를 하고, 선인이니 악인이니 하지만, 주의 면전에서는 아무도 선한 인생이 없다[고 말합니다]. 욥도 또한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참조. 욥 9:2; 25:4). 우리는 다 악하여 죽음에 있다고 욥이 바라본 것입니다. 바울도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고 했습니다(갈 5:17). 육체의 소욕이 뭡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 그대로 있는 것,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뭡니까?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스스로 그저 진노의 자녀로 있다면 어찌 율법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진노의 자녀인데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이 어떻게 은혜가 되겠습니까? 악한 사람에게 어찌 올바른 것이 올바른 것이 되겠습니까? 내가 굽어 있는데 어찌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온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자신이 저주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율법도 저주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갈 3:10; 참조. 신 27:26).
펠라기우스와 그를 따르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는 행할 자질이 있기 때문에 주었다. [즉,] 지킬 만하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하여서 은총을 구한다면 그것이 불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정반대로 생각한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는 우리에게 찾을 것이 있어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주시려고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것을 찾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것을 찾는다. 주님은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25)라고 했을 때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이 말씀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러한 입장인 것이죠.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
사랑은 지식에 뒤따르는 것이므로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을 충만히 가지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완전히 사랑할 수 없다.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사는 동안 우리는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본다(고전 13:12).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불안전하다는 결론이 나온다(Amor…notitiam ita sequitur, ut Deum amare nemo perfecte possit, qui non cognitam prius ad plenum habuerit eius bonitatem. Nos, dum in mundo peregrinamur, cernimus per speculum et in aenigmate; sequitur ergo imperfectum esse nostrum amorem).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5.
사랑은 지식에 뒤따르는 것이므로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을 충만히 가지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사랑할 수 없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지금은 희미하게 보지만 점차 점차 하나님을 가까이 마주 보고, 이것이 은혜 아닙니까? 거듭나지 않고는 어떻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볼 것입니까?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규범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의 말씀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은 의의 완전함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의로운 순종에는 구원의 영원한 보상이 기다립니다. 이것을 율법의 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둘째, 율법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아무도 율법에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인데, 타락한 인류는 아무도 그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이죠. 율법을 통하여는 그저 저주에 직면할 뿐이고 현존하는 죽음을 식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 은혜를 얻어 복음으로 율법의 약속을 누리게 됩니다.
넷째,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하지만 그 사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예수님의 성취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불완전한 것도 받으십니다. 그리고 나아가게 하십니다. 진보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끝내 구원을 끝까지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62강 결론
율법은 의의 완전함을 가르치며, 율법에 대한 의로운 순종에는 구원의 영원한 보상이 기다립니다.
율법의 연약함: 아무도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없으므로 율법 자체를 통하여서는 저주에 직면하여 현존하는 죽음을 식별할 뿐입니다.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어 은혜를 얻는 복음으로 율법의 약속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하지만 그 사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여 그가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이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