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강 [2.5.1-5]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헛된 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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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2.5.1-5 (2권 145-155페이지)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헛된 구실들


[『기독교 강요』. 2.5.1.]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는 죄가 전가되고, 또 전가된 죄 가운데 각자가 자기의 범죄를 저지르고, 이러한 죄의 멍에 가운데, 굴레 가운데 곧 죄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마귀 사탄은 죄를 사용해서 사망의 쏘는 것의 역사를 이루고, 그래서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여 죄의 종이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이죠. 타락한 인류는 전적 무능, 전적 부패 해서 그 누구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끼리 서로 보기에는 좀 더 착해 보이고 의로워 보일 때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타락한 인류, 그 본성이 사악해진 인류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앞장세워야 합니다. 은혜가 먼저 있고 자유가 있으며, 은혜가 먼저 있고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Pelagians)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신다’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자질의 척도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필연적으로(necessario) 죄를 짓는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합당치 않다.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면 그 죄는 사람의 탓이 아닐 것이다. 마지못해 강제로 죄를 짓는다면 어찌 죄를 짓는 사람을 탓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스스로 자원해서(voluntarie) 죄를 짓는다면 그 죄를 짓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 이래서 사람들은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 가운데 자기 자질로, 공로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 스스로 상급(praemia)을 얻을 만한 일을 행할 수 있다고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경)는 본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죠. ‘타락한 인류는 필히 죄를 짓는, 그 죄의 ‘필연성’(necessitas)하에 있지만 그 죄는 자원해서 짓는 것이다. 강제로 짓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지는 죄를 짓는 의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짓는 것이 타락한 본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필히 죄를 짓지만, 죄의 필연성이 있지만 자원해서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죄에 대해서 변명치 못한다. 죄는 자기 죄다. 자기가 원해서 자기가 짓는 자기 죄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에 얽매여 악한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원할 수 없는 것은 창조로부터가 아니라 본성의 부패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이다(non ex creatione esse sed naturae corruptela, quod homines peccato mancipati nihil velle possunt nisi mal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1.

     하나님은 창조 때 사람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순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부여하셔서 사람이 원함에 따라, 택함에 따라 선을 이루기도 하고 또 악을 이루기도 하는 그 자리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불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인격체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고유한 뜻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꾀를 내고, 자기 계획대로 교만에 빠져서 범죄했던 것입니다. 그 범죄의 속성은 불순종이죠. 그래서 불순종한 죄를 지어서 “본성의 부패”(corruptela naturae)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죄는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본성의 부패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성의 부패가 있게 된 것이지, 본성적으로 부패가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순전하게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5.2.]

     자유로운 선택에 속하지 않는 것도, 사람들이 스스로 그 멍에에, 그 굴레에, 그 속박에 노예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은 가운데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그 죄는 자원해서 짓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이것을 내세워서 자기 죄를 변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자유의지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중심이 거듭난 신자들이 행하는 행위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은혜로 이루신 그 일이지만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자기의 은사에 면류관을 씌우신다(Non merita nostra Deum coronare, sed sua dona). 
‘상급’이라고 불리는 것은 우리의 공로에 빚진 것이 아니라 이미 부여된 은혜에 보답되는 것이다(praemia autem vocari, non quae meritis nostris debeantur, sed quae gratiis iam collatis retribuantur).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2.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자기의 은사에 면류관을 씌우신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했습니다. ‘자기가 베푸신 은사, 거저 주시는 선물에 면류관을 또 씌어 주신다. 우리에게 자유의지 주시고, 은혜로 자유의지 주시고, 또 은혜로 이루게 하시고, 은혜로 열매 맺게 하시고, 그리고 그 열매에 또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상급이라는 것은 우리의 공로에 빚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은혜 위에 은혜”죠(요 1:16). 은혜를 잘 우리가 누렸다고 또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죄는 당신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공로는 하나님의 것이다. 당신은 징벌을 빚지고 있다. 상급이 나타날 때 당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에 면류관이 씌워질 것이다(nibil es per te; peccata sunt tua, merita autem, Dei; supplicium tibi debetur, et quum praemium venerit, sua dona coronabit, non merita tua).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2.

     상급이 보상으로 주어진다면, 보상이 없는 우리가 무슨 상급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상급이 우리의 공로(meritum)에 대한 값으로 주어진다면, 아무 공로 없는 우리에게 무슨 값을 치르는 상급이 있겠습니까? 오직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은혜를 잘 누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고 또 상급 주시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빚진 형벌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헤아리시고 책망하기보다 우리의 부족함을 용서하시고 온전케 하셔서, 다만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가 자랑하게 하시는, 내 자질이 아니라, 내 공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 또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그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 안에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 능력의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베푸신 은사에 또 면류관을 씌워 주신다. 내 공로에 면류관을 씌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아 누린 은혜에, 은사에, 선물에 면류관을 씌워 주신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로로부터 은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부터 공로가 존재한다(non gratiam ex merito, sed meritum ex gratia esse docet). … 하나님은 자기의 은사로 모든 공로에 앞서 행하신다. 그 은사로부터 그는 자기 자신의 공로를 이끌어 내신다. 그는 전적인 은혜로 베푸신다(Deum suis donis merita omnia praecedere, ut inde eliciat sua merita, et prorsus gratis dare).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2.

     “공로로부터 은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부터 공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은사로 모든 공로에 앞서 행하시고 은사로부터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이끌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질보다, 공로보다, 자유보다, 의지보다, 은혜와 은사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은사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먼저 은혜의 선물이 주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지도 주시고, 선행도 하게 하시고, 열매도 맺게 하시고, 이 모든 것이 다 은혜인데, “은혜 위에 은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급도 주신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전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전적인 은혜 가운데 있으면, 이제 막 살고, 그저 죄를 짓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요? 은혜로, 은혜로 나아가기 때문에, “은혜 위에 은혜”를 쌓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면류관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저 누리는 것이 가장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이니까 하찮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가장 귀한 것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은금보다, 어떤 보화보다 귀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가운데서,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날마다 선행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이야기하면 행위가 없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으므로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고,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우리에게 복됨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우리에게 의지를 주시고,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을 감사하는 자만이 진정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행위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다함없고 다양한 자애와 후하심이 마치 우리 자신의 덕성이라도 되는 듯이, 그 자신이 우리의 것으로 만드셔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은혜들에 대해서 보상을 하신다(Sed tamen ut inexhausta et multiplex est Dei beneficentia ac liberalitas, quas gratias in nos confert, quia nostras facit, perinde ac nostras virtutes remunera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2.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채워 주셔서, 자신의 것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그 부여해 주신 것에 상급을 또 치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적인 은혜, 처음부터 끝이 다 은혜인 그러한 시종이 동일한 은혜, 그 은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5.3.]

     이 전적 은혜, 오직 은혜, 이 알파요 오메가요,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실족하고 말 것입니다. 은혜가 있어야 선행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은혜가 있어야 우리가 마귀 사탄의 종노릇을 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선을 행할 의지가 자리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뭔가를 생각하고 결단해야 그것이 가치가 있고, 그것이 고유하고, 그것이 남과 나를 구별시켜 주는 탁월함이요 우월함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잘 누리느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그때만 인간은 선한 행위를 한다는 것이요, 그래서 선행은 감사와 예배와 경배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되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고, 내 마음도 내 뜻도 내 의지도 하나님이 새롭게 하심을 알고 감사하면서 선행해 나아갈 때, 선행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삶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5.4.]

오, 사람이여! 교훈 가운데, 당신이 해야 할 것을 인식하라(o homo, in praeceptione cognosce quid debeas agere). 책망 가운데, 당신이 가지지 못한 이유가 당신의 악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라(in correctione cognosce tuo te vitio non habere). 기도 가운데, 당신이 가지고자 원하는 것을 어디로부터 취할 것인지를 인식하라(in oratione cognosce unde accipias quod vis habere).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가운데 우리가 행할 것을 인식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망하신다면 책망 가운데 우리의 악도 인식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간구하게 하실 때, 기도 가운데 진정 영의 소욕이 무엇인지, 우리가 진정 무엇을 가져야 되는지, 원해야 되는지를 인식하라’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할 때, 교훈으로건 책망으로건 역사할 때, 우리는 온전한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게 되고 마땅히 빌 바를 알고 기도하게 됩니다. 알려 주심으로 알게 됩니다. 그때 우리 안에 온전한 의지가 작용합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은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하는 것이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고전 3:7)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서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시고 갱신시키셔서(겔 36:26), 하나님의 가르침이 우리 안에 역사하게 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5.5.]

심지어 지금도 권고는 그들의 양심을 치고 두드린다([exhortationes] quin etiam iam nunc illorum conscientiam verberant ac feriu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5.

     주님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의지에 ‘권고’(exhortationes)를 더하십니다. 권고라는 것은 자극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권고하십니다. 주님은 자기 영을 통하여 모든 것을 행하시되 우리를 도구로 삼으셔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십니다. 이 과정에 우리의 의지가 있고 우리의 선행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택함 받은 자들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즉 속으로는 영을 통하여, 밖으로는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intus, per spiritum; extra, per verbum). 영으로, 그는 그들의 마음을 조명하시고 가슴에 의를 사랑하고 연마하는 싹이 트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Spiritu, mentes illuminando, corda in iustitiae amorem cultumque formando, novam eos creaturam facit). 말씀으로, 그는 그들이 이와 동일한 갱신을 기대하고, 찾고, 얻게끔 자극한다(Verbo, ad eandem renovationem expetendam, quaerendam, asse quendam excitat). 이 둘로써 하나님은 자기 경륜의 방식에 따라 자기 손의 효과를 얻으신다(Utroque manus suae efficaciam pro dispensationis suae modo exer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5.

     칼빈은 하나님이 두 가지 방식으로 일한다고 했습니다. ‘속으로는 영을 통하여, 밖으로는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우리 개혁신학의 두 축은 말씀과 성령입니다. 왜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면서 칼빈이 이 이야기를 할까요?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새 마음을 주신 그 마음 밭에 말씀이 떨어져서, 우리가 진정한 것을 뜻하고 행위로 나아가게 되는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성령의 역사요, 말씀의 역사요. 말씀에 따른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우리 영혼이,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합한 바를 원하고 뜻하고 수행하는 그 과정에서 자유의지가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유의지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택함 받은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론]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펠라기우스는 필연적으로 지을 수밖에 없는 죄는 죄가 아니고 죄가 자원적인 이상 피하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죄는 창조의 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본성의 부패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타락한 인류는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만 자원해서 짓는 것입니다. 다 내 탓인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를 베푸셔서 자신의 공로로 우리의 공로를 삼아 주시고, 그 공로 삼은 것에 상급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혜 위에 은혜요, 상급도 은혜인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명령하실 때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행할 능력도 부여하십니다. 성령과 말씀이 함께 역사함으로 영의 역사로 지시하시면, 그 말씀을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속으로는 성령으로, 밖으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심으로, 그 성령과 말씀의 역사 가운데 자유의지를 부여하심으로, 이 둘이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57강 결론


  1. 펠라기우스는 필연적으로 지을 수밖에 없는 죄는 죄가 아니며, 죄가 자원적인 이상 피하면 된다고 주장하나, 죄는 창조의 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본성의 부패로 말미암는바, 타락한 인류는 필연적으로 죄를 지으나 자원해서 짓습니다.
  2.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를 베푸셔서 자신의 공로로 우리의 공로를 삼으시고 그 공로에 보상하시므로 상급도 은혜입니다.
  3. 하나님은 명령하실 때 자기 자녀가 그것을 성취하도록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4. 하나님은 속으로는 영을 통하여, 밖으로는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바, 이 둘이 모두 하나님의 고유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