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 구원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의 은혜요, 과정도 하나님의 은혜요, 끝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으실 만한 것은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만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거듭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도 찾으십니다, 의지도 찾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만 찾으십니다. 칼빈은 ‘자유의지’를 논하면서 이 부분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견인’의 은혜가 자유의지에 미친다는 것이죠. 그래서 값없는 선물로 우리에게 새 마음, 새 영, 부드러운 마음을 심어 주시는 하나님이, 거듭난 마음을 주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도 선물로 부여하시고 한 번 자유의지의 선물을 주셨으면 그 끝까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종들을 부요하게 하시고 날마다 그들에게 자기의 은혜의 선물들을(dotibus) 쌓아 주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1.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에게 날마다 ‘은혜의 선물들’을 쌓아 두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서 더 풍족하게 되고, 사실 잘 받아 누리기만 하면 “잘하였도다, 착한 종아” 이렇게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적용. 마 25:21, 23; 참조. 눅 19:17). 선행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행에 대한 상급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잘하였도다”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이야기할 때 이 자유라는 것은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잘 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 어떤 은혜를 효과적이 되게 하지 못합니다. 은혜는 전적으로, 오직, 무조건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역사합니다. 은혜는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능력이자 작용입니다. 은혜에 그 무엇도 우리가 더하여 은혜를 증가시키거나, 은혜를 감소시키거나 할 수도 없습니다. 전적인 뜻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은혜를 전적으로 베푸시되 하나님은 우리를 그 뜻 가운데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도, 의지도, 또 이성도, 오성도 부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 그리고 그 마음 씀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써서, 의지를 발동해서 선한 행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 그것도 주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인자하심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역사하는 은혜’(gratia operans)와 ‘합력하는 은혜’(gratia cooperans)라는 것을 구별해서 [말하기를,] 처음에 사람이 시작할 때는 하나님이 시작할 때 도와주시는 은혜가 있다. 그래서 그건 ‘역사하는 은혜’다. 그리고 일단 시작하고 나면 열매를 맺어야 되는데, 열매 맺을 때도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그건 ‘합력하는 은혜’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하는 은혜’, ‘합력하는 은혜’ 또 이렇게 나누어서 일의 시작도 내가 하고, 일의 과정과 끝까지 내가 하는데, 일을 시작할 때 도와주는 그 ‘역사하는 은혜’, 그리고 열매 맺을 때 도와주는 ‘합력하는 은혜’ 이렇게 나눕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역사하심으로써 시작하신 것을 협력하심으로써 완성하신다(Deum cooperando perficere quod operando incipit).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1.
그러나 이런 것이 다 무익하고 헛되고 거짓됩니다. 왜요? 우리 편에는 어떤 합력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역사하심으로[써] 시작하신 것을 협력하심으로[써] 완성하신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협력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 가운데, 우리가 뜻하여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 이런 행위의 전 과정, (뭐 이런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선행의 일생, 선행의 전 과정이 다 은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은혜의 배가(倍加, multiplicatio)”다[라고 말합니다]. 계속 ‘은혜 위에 은혜’, ‘grace upon grace’, 요한복음 1장 16절, 은혜 위에 은혜를 계속 배가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쌓는 것이라고도 칼빈은 표현해요. “은혜의 선물을 쌓아” 가는 것이다[라고 칼빈이 말합니다]. 뜻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작용도 해 주시고, 열매 맺을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이 다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를 그 자리에 두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빌 2:13).
은혜가 시작이고 은혜가 끝입니다. 은혜가 시작될 때 우리가 준비하는 것도 아닙니다. 준비하는 공로 없습니다. 은혜로 열매 맺을 때 우리가 더하는 것도 없습니다. 은혜로, 은혜로. 시작도 은혜였고 끝도 은혜입니다. 자유의지를 논하면서 칼빈은 사실 계속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시작하시고 은혜로 마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12.]
그래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의 역사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나와 협력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협력자’(cooperatrix, cooperarius)가 아닙니다. 은혜는 자유의지의 협력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지 않았습니까? ‘의지는 은혜를 수종든다.’ ‘의지는 은혜의 수종자다’(참조. 『기독교 강요』, 2.3.7). 은혜가 있고 의지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의 그 말씀은] 하나님은 [바울] 자기에게 현존하는 “은혜가 모든 것의 효과적 원인[자](effectrix)”이 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역사하셔서 지금 우리 앞에 현존하는 그 은혜가 모든 것의 효과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어디서 저런 힘이 생기지? 어디서 이런 능력이 있어서 이러한 일을 우리가 이루었을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많은 선물들보다 앞선다. 그러나 모든 것에 있어서 그렇지는 않다. 앞서는 그 의지 자체도 그 선물들 가운데 속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2.
사람의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많은 선물들보다 앞섭니다. 그러나 그 의지조차도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donum)입니다. 긍휼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마음을 정하는 의지, 뜻하는 것이 앞서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러나 그 의지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자비가 나를 앞서며”(적용. 시 59:10), “그의 인자가 나를 따르리니”(적용. 시 23:6). 참 귀한 말씀입니다. 자비가 앞서고 인자가 따르고. 자비와 인자. 구약으로 말하면 헤세드, 신약으로 말하면 아가페. 긍휼, 인애 그것이 앞서고 뒤서고 다 같은 말 아닙니까? 자비나 인자(仁慈), 동의어 아닙니까? 자비가 나를 앞서고 인자가 나를 따르리니, 처음도 끝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자랑할 것은 우리의 무능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득불 자랑하노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고후 12:1-10)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자유의지의 본질적인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아닙니다. 내 영의 소욕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영의 소욕, 성령의 영의 소욕이라는 것이에요. 그 가운데 진정한 자유자의 의지를 갖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사라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하갈의 종의 의지가 아니라 사라의 자유자의 의지, 그것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13.]
그(아담)는 할수 있기 위한 원함을(velle, ut posset) 갖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원함(velle)과 능함(posse) 두 가지 모두를 위한 은총이 부여되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3.
아우구스티누스는 할 수 있기 위한 ‘원함’을, 무엇을 이루기 위한 ‘능함’을 모두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원함’도 ‘능함’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해 보는 ‘원함’도, ‘그래 이제 시작했으니 할 수 있겠다’ 하는 ‘능함’도 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 인류에게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그 가능성의 상태라면 이제 회복된 우리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그 의미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왜[냐하면], 은혜가 우리 안의 역사이기 때문에 다시 죄의 종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그 의미로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곧 죄를 지을 수 없는 그 상태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는 죄의 노예의 의지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의의 자유의 의지, 곧 자유의지에 속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서 새롭게 함으로, 거듭나게 함으로 진정 ‘원함’도 ‘행함’도 하나님의 뜻에 합한 바 됩니다. 그때 작용하는 것이 자유의지인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자유의지는 이미 그 정의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이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고는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이미 종이지 않습니까? 거듭나지 않은 자는 다 노예이지 않습니까? 노예가 어찌 자유의지를 갖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본질을 보시는데요. 그렇게 보면 자유의지는 오직 택함 받아 구원을 얻어 그 거듭난 자에게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죠. 타락한 인류는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상실했다는 것이죠. 선택하고 또 행하고 하는 이러한 원함과 행함에 있어서 모두 무능하다는 것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일반은총적인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능력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조차도 부패한 것입니다. 자연적인 은총은 부패하였고 초자연적인 은총은 제거되었다(참조. 『기독교 강요』, 2.2.4.)[라고 말했었습니다]. 특별한 구원의 그 은총, 초자연적의 은총은 제거되었죠. 우리가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은 이 특별한 은총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14.]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의지를 선하게 변화시키며(mutari) 선한 의지에 도움을 준다고(adiuvari) 말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4.
은혜가 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의지를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 거듭난 의지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 의지로 자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은혜의] 자유로 의지에 이릅니다. 그 자유는 은혜를 받아야 해방되는 것이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인용됩니다. “사람의 의지는 자유로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자유를 얻는다.” 은혜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다면 의지는 하나님을 향하지도 않고 돌이키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 품속에 거하게 된다. 그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게 자유자입니다. 그게 사라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 곧 그리스도의 것이 아브라함의 것이다[라는] 갈라디아서 3장 29절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믿고 뜻하고, 곧 의지하고, ([즉] 의지, 자유의지,) 행함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 선행도 선물이고 선행에 앞서는 선한 의지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뜻하고 행하는 자에게 현존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원함도, 뜻함도, 행함도 이 하나님의 은혜가 효과적인 원인입니다.
셋째, 구원을 받은 자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 은혜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로운 자로서 다시금 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불가항력적인 은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죄를 지을 수 없는 그러한 상태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은혜의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넷째, 사람의 의지는 자유로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은혜를 전제하지 않고 일반적인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철학적인 의지를 말하는 것은 무익하고 헛될 뿐입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중심이 합한 바 되는 의지, 그 의지는 거듭남이 없이는 애초 말할 바가 못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의지의 논쟁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54강 결론
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믿고, 뜻하고, 행함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행도 선물이고 선행에 앞서는 선한 의지도 선물이니, 뜻하고 행하는 자에게 현존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모두의 효과적인 원인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할 것이니, 그가 누리는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자유, 즉 불가항력적인 은혜 아래에 있는 자유입니다.
사람의 의지는 자유로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자유를 얻는바, 거듭남의 은혜를 전제함 없이 의지에 대하여 일반적 논의를 하는 것은 무익하고 헛됩니다.
54강 | 2.3.11-14. (2권 124-130페이지)
자유의지로 선을 행함은
은혜의 열매이자 효과
[『기독교 강요』. 2.3.11.]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 구원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의 은혜요, 과정도 하나님의 은혜요, 끝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으실 만한 것은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만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거듭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도 찾으십니다, 의지도 찾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만 찾으십니다. 칼빈은 ‘자유의지’를 논하면서 이 부분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견인’의 은혜가 자유의지에 미친다는 것이죠. 그래서 값없는 선물로 우리에게 새 마음, 새 영, 부드러운 마음을 심어 주시는 하나님이, 거듭난 마음을 주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도 선물로 부여하시고 한 번 자유의지의 선물을 주셨으면 그 끝까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종들을 부요하게 하시고 날마다 그들에게 자기의 은혜의 선물들을(dotibus) 쌓아 주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1.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에게 날마다 ‘은혜의 선물들’을 쌓아 두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서 더 풍족하게 되고, 사실 잘 받아 누리기만 하면 “잘하였도다, 착한 종아” 이렇게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적용. 마 25:21, 23; 참조. 눅 19:17). 선행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행에 대한 상급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잘하였도다”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이야기할 때 이 자유라는 것은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잘 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 어떤 은혜를 효과적이 되게 하지 못합니다. 은혜는 전적으로, 오직, 무조건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역사합니다. 은혜는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능력이자 작용입니다. 은혜에 그 무엇도 우리가 더하여 은혜를 증가시키거나, 은혜를 감소시키거나 할 수도 없습니다. 전적인 뜻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은혜를 전적으로 베푸시되 하나님은 우리를 그 뜻 가운데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도, 의지도, 또 이성도, 오성도 부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 그리고 그 마음 씀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써서, 의지를 발동해서 선한 행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 그것도 주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인자하심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역사하는 은혜’(gratia operans)와 ‘합력하는 은혜’(gratia cooperans)라는 것을 구별해서 [말하기를,] 처음에 사람이 시작할 때는 하나님이 시작할 때 도와주시는 은혜가 있다. 그래서 그건 ‘역사하는 은혜’다. 그리고 일단 시작하고 나면 열매를 맺어야 되는데, 열매 맺을 때도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그건 ‘합력하는 은혜’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하는 은혜’, ‘합력하는 은혜’ 또 이렇게 나누어서 일의 시작도 내가 하고, 일의 과정과 끝까지 내가 하는데, 일을 시작할 때 도와주는 그 ‘역사하는 은혜’, 그리고 열매 맺을 때 도와주는 ‘합력하는 은혜’ 이렇게 나눕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역사하심으로써 시작하신 것을 협력하심으로써 완성하신다(Deum cooperando perficere quod operando incipit).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1.
그러나 이런 것이 다 무익하고 헛되고 거짓됩니다. 왜요? 우리 편에는 어떤 합력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역사하심으로[써] 시작하신 것을 협력하심으로[써] 완성하신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협력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 가운데, 우리가 뜻하여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 이런 행위의 전 과정, (뭐 이런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선행의 일생, 선행의 전 과정이 다 은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은혜의 배가(倍加, multiplicatio)”다[라고 말합니다]. 계속 ‘은혜 위에 은혜’, ‘grace upon grace’, 요한복음 1장 16절, 은혜 위에 은혜를 계속 배가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쌓는 것이라고도 칼빈은 표현해요. “은혜의 선물을 쌓아” 가는 것이다[라고 칼빈이 말합니다]. 뜻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작용도 해 주시고, 열매 맺을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이 다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를 그 자리에 두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빌 2:13).
은혜가 시작이고 은혜가 끝입니다. 은혜가 시작될 때 우리가 준비하는 것도 아닙니다. 준비하는 공로 없습니다. 은혜로 열매 맺을 때 우리가 더하는 것도 없습니다. 은혜로, 은혜로. 시작도 은혜였고 끝도 은혜입니다. 자유의지를 논하면서 칼빈은 사실 계속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시작하시고 은혜로 마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12.]
그래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의 역사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나와 협력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협력자’(cooperatrix, cooperarius)가 아닙니다. 은혜는 자유의지의 협력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지 않았습니까? ‘의지는 은혜를 수종든다.’ ‘의지는 은혜의 수종자다’(참조. 『기독교 강요』, 2.3.7). 은혜가 있고 의지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의 그 말씀은] 하나님은 [바울] 자기에게 현존하는 “은혜가 모든 것의 효과적 원인[자](effectrix)”이 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역사하셔서 지금 우리 앞에 현존하는 그 은혜가 모든 것의 효과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어디서 저런 힘이 생기지? 어디서 이런 능력이 있어서 이러한 일을 우리가 이루었을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많은 선물들보다 앞선다. 그러나 모든 것에 있어서 그렇지는 않다. 앞서는 그 의지 자체도 그 선물들 가운데 속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2.
사람의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많은 선물들보다 앞섭니다. 그러나 그 의지조차도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donum)입니다. 긍휼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마음을 정하는 의지, 뜻하는 것이 앞서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러나 그 의지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자비가 나를 앞서며”(적용. 시 59:10), “그의 인자가 나를 따르리니”(적용. 시 23:6). 참 귀한 말씀입니다. 자비가 앞서고 인자가 따르고. 자비와 인자. 구약으로 말하면 헤세드, 신약으로 말하면 아가페. 긍휼, 인애 그것이 앞서고 뒤서고 다 같은 말 아닙니까? 자비나 인자(仁慈), 동의어 아닙니까? 자비가 나를 앞서고 인자가 나를 따르리니, 처음도 끝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자랑할 것은 우리의 무능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득불 자랑하노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고후 12:1-10)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자유의지의 본질적인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아닙니다. 내 영의 소욕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영의 소욕, 성령의 영의 소욕이라는 것이에요. 그 가운데 진정한 자유자의 의지를 갖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사라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하갈의 종의 의지가 아니라 사라의 자유자의 의지, 그것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13.]
그(아담)는 할수 있기 위한 원함을(velle, ut posset) 갖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원함(velle)과 능함(posse) 두 가지 모두를 위한 은총이 부여되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3.
아우구스티누스는 할 수 있기 위한 ‘원함’을, 무엇을 이루기 위한 ‘능함’을 모두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원함’도 ‘능함’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해 보는 ‘원함’도, ‘그래 이제 시작했으니 할 수 있겠다’ 하는 ‘능함’도 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 인류에게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그 가능성의 상태라면 이제 회복된 우리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그 의미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왜[냐하면], 은혜가 우리 안의 역사이기 때문에 다시 죄의 종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그 의미로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곧 죄를 지을 수 없는 그 상태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는 죄의 노예의 의지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의의 자유의 의지, 곧 자유의지에 속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서 새롭게 함으로, 거듭나게 함으로 진정 ‘원함’도 ‘행함’도 하나님의 뜻에 합한 바 됩니다. 그때 작용하는 것이 자유의지인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자유의지는 이미 그 정의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이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고는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이미 종이지 않습니까? 거듭나지 않은 자는 다 노예이지 않습니까? 노예가 어찌 자유의지를 갖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본질을 보시는데요. 그렇게 보면 자유의지는 오직 택함 받아 구원을 얻어 그 거듭난 자에게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죠. 타락한 인류는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상실했다는 것이죠. 선택하고 또 행하고 하는 이러한 원함과 행함에 있어서 모두 무능하다는 것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일반은총적인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능력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조차도 부패한 것입니다. 자연적인 은총은 부패하였고 초자연적인 은총은 제거되었다(참조. 『기독교 강요』, 2.2.4.)[라고 말했었습니다]. 특별한 구원의 그 은총, 초자연적의 은총은 제거되었죠. 우리가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은 이 특별한 은총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14.]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의지를 선하게 변화시키며(mutari) 선한 의지에 도움을 준다고(adiuvari) 말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4.
은혜가 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의지를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 거듭난 의지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 의지로 자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은혜의] 자유로 의지에 이릅니다. 그 자유는 은혜를 받아야 해방되는 것이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인용됩니다. “사람의 의지는 자유로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자유를 얻는다.” 은혜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다면 의지는 하나님을 향하지도 않고 돌이키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 품속에 거하게 된다. 그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게 자유자입니다. 그게 사라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 곧 그리스도의 것이 아브라함의 것이다[라는] 갈라디아서 3장 29절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믿고 뜻하고, 곧 의지하고, ([즉] 의지, 자유의지,) 행함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 선행도 선물이고 선행에 앞서는 선한 의지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뜻하고 행하는 자에게 현존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원함도, 뜻함도, 행함도 이 하나님의 은혜가 효과적인 원인입니다.
셋째, 구원을 받은 자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 은혜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로운 자로서 다시금 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불가항력적인 은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죄를 지을 수 없는 그러한 상태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은혜의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넷째, 사람의 의지는 자유로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은혜를 전제하지 않고 일반적인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철학적인 의지를 말하는 것은 무익하고 헛될 뿐입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중심이 합한 바 되는 의지, 그 의지는 거듭남이 없이는 애초 말할 바가 못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의지의 논쟁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54강 결론
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믿고, 뜻하고, 행함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행도 선물이고 선행에 앞서는 선한 의지도 선물이니, 뜻하고 행하는 자에게 현존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모두의 효과적인 원인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할 것이니, 그가 누리는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자유, 즉 불가항력적인 은혜 아래에 있는 자유입니다.
사람의 의지는 자유로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자유를 얻는바, 거듭남의 은혜를 전제함 없이 의지에 대하여 일반적 논의를 하는 것은 무익하고 헛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