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강 [2.2.8-11] 아우구스티누스와 정통 교부들의 자유의지 상실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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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2.2.8-11. (2권 62-69페이지)



아우구스티누스와 정통 교부들의
자유의지 상실 주장




     칼빈은 영혼의 기능을 ‘오성’과 ‘의지’라고 말하고, 오성은 지식에 대한 깨달음, 의지는 그 깨달아 아는 바대로 행하고자 하는 영혼의 기능, 혹은 영혼의 선한 욕구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의지에는 이미 오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올바로 알아야 올바로 행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식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없는데 그것에 기초한 올바른 행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칼빈은 자유의지 논쟁에서 오성과 의지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기독교 강요』. 2.2.8.]

     ‘자유의지’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할 의지’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받아들이시는.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중심이 합해야 그 행위를 받으십니다. 타락한 인류는 이미 저주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그 타락한 인류가 그냥 있는 그대로 뜻을 세워서 아무리 겉보기에는 좋은 일이라고 해도, 선한 일이라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 논쟁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자유의지가 상실’된 것입니다. 왜?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할 그러한 오성도 없고 의지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자유의지 상실’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의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그[아우구스티누스]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유의지”를 “노예”(servum)라고 부른다. … “그 의지가 그것이 빠져든 악에 지배되었을 때에 사람의 본성은 그 자유에 흠결을 갖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람이 자유의지를 나쁘게 사용하였을 때에 자기 자신과 자기의 의지가 모두 파멸되었다.” 
…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은 조성될 때에 자유의지의 큰 힘을 받았으나 죄를 지음으로써 그것을 잃어버렸다(hominem magnas liberi arbitrii vires quum conderetur accepisse, sed peccando amisisse).”라고 어느 곳에서 단언한다. 이 간단한 말에 자유의지가 자유를 잃고 노예가 된 모든 원인이 죄라는 사실이 뚜렷이 천명되어 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8.

     우리 인생에게도 의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도 뜻을 세워서 국가에 충성도 하고, 남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자선도 하고 구제도 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이러한 모든 일반 사람들의, 믿지 않는 사람들의, 또 우리 인류가, 타락한 인류가 타고난 그러한 타락한 본성 가운데 가지고 있는 의지는 전부 ‘노예의지’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노예의지’가 무엇일까요? 바로 ‘악에 매여 있다’는 것이죠. 로마서 6장으로 말하면, ‘죄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그[아우구스티누스]의 분명한 고백이 있다. “성령이 없다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속박하고 지배하는 욕심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자유롭게 하지 않은 것은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liberum non fore, quod non Dei gratia liberaverit).” 또한 “하나님의 의는 율법이 명령하고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듯이 할 때가 아니라 자유롭지 않았던 의지가 성령이 도우시므로 하나님에 의해서 자유롭게 되어 순종할 때에 성취된다.” 
… 이제 자유의지를 다시 구성하려면 은혜가 필히 있어야 한다. 은혜가 없는 곳에는 자유의지가 없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8.

     그러므로 ‘성령’이 없다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여 역사했을 때, ‘자유’ 개념이 있다는 거죠. 이미 매여 있다는 거예요. 이미 굴레 아래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은혜가 역사하지 않으면, 성령이 임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의 의지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타락한 인류는 자유의지를 상실했고, 이제 타락한 인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노예의지’일 뿐이다. 자유를 잃고 노예가 된 의지. 노예의지라는 것은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그래서 ‘사망의 그늘’ 아래에 있는 그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있으려면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는 곳에는 자유의지가 없다. 자유의지를 다시 우리가 회복하려면 은혜가 필요하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성령이 임해야 자유가 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인격적 순종’입니다. 자유 가운데, 의지의 결단 가운데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자리에 나갈 수 없습니다. 왜? 중심이 썩었기 때문에, 본질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다시 자유의지가 회복됩니까? ‘특별한 은혜’를 받아야죠. 어떻게 특별한 은혜를 받습니까? ‘성령이 임재’해야죠.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서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 성령이 임하여, ‘진리의 영’이 임하여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죠. 

‘자유의지’라는 말을 지니고 있으면 교회에 아주 큰 위험이 생길 수밖에 없으나 그것이 없어진다면 교회에 큰 유익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8.

     그러므로 타락한 인류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큰 위험이고, 그러한 말은 교회 안에서 결코 회자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유의지 상실을 칼빈은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우리에게서 상실되었다는 것, 우리는 겉보기에는 자유롭고, 겉보기에는 아주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 결단해서 행하는 듯하는, 소위 세상에서 칭찬받는 결단력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오히려 ‘자유 없음’을 드러내는, ‘자유의 손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직 ‘자유의지의 회복’은 ‘성령의 은혜’에,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에 우리가 ‘의지’하고 나아갈 때, 그때 자유의지가 회복된다. 그래서 ‘오직 은혜’에서만 피난처를 찾으라라고 이렇게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2.9.]

크리소스토무스가 “모든 사람은 본성상 죄인일 뿐만 아니라 전부가 죄다.”라고 말할 때에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만약 우리 안에 어떤 선도 없다면, 만약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적으로 죄라면, 만약 우리에게 의지의 기능이 어디까지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선행에 대한 공적을 나눌 수 있겠는가?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9.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주 온당한 말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본성상 죄인일 뿐만 아니라 전부가 죄다.” 본성상 죄인이란 말은 타락한 인간, 인간 자체가 ‘타락한 인간’이다 이 말이에요. 아예 우리의 명찰이 타락한 인간으로 붙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부 죄다. 이런 것을 우리가 ‘전적 타락’, 곧 ‘전 인격적, 전체적 타락’, 이것을 전적 타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타락했다. 그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다. 

[『기독교 강요』. 2.2.10.]

자신의 재앙, 빈곤, 헐벗음, 불명예를 자각함으로써 극심하게 거꾸러지고 경악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그 자각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가장 많은 진보를 이루게 된다(『기독교 강요』, 2.2.1).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회복해야 한다고 배울 때에만 자기의 것을 과하게 빼앗길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0.

     우리 자신의 죄악과 빈곤과 헐벗음과 불명예와. 사람은 무엇 하나도 스스로에게 취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 안에서 얻은 것만. 아이가 어머니의 품 안에서 수유하듯이, 젖을 먹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만 다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자유의지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뜻을 정한다 하지만, 그 뜻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것을 하나님께 되비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이 모든 구절[렘 17:5; 시 147:10-11; 사 40:29-31]이 의미하는 바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적용. 약 4:6; 참조. 벧전 5:5; 잠 3:34)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면 우리 자신의 용맹을 의지하는 그 어떤 작은 억측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 이 구절들[사 44:3; 55:1]은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의 궁핍을 절실하게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리로 나아올 수 없다고 증언한다. … 분명히 여호와는 해와 달의 광채를 자기 종들로부터 취해 가지 않으신다[사 60:19; 참조. 계 21:23; 22:5]. 그는 오직 그 자신만이 그들 가운데 영광스럽게 드러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들의 주견(主見)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것들조차도 전혀 확신하지 못하게 하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0.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온 것을 찾지 아니하시고, 예레미야 17장 5절에,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마음이 여호와께 붙어 있으면서 그 가운데 의지를 발동하는, 시편 147편 10절과 11절에서는,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회복되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그 자유의지는 ‘하나님께 구하려는 자유’요,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유’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인자를 간구하는 자를 기뻐하시는도다. 이사야 40장 29절에서 31절에 보면,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그리고 야고보서 4장 6절,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리고 이사야 44장 3절,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이사야 55장 1절. 그리고 이사야 60장 19절에, 바로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고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이러한 말씀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새로운 시대, 새 언약의 시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임마누엘의 영’이 우리에게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온전한 그 ‘의의 전가’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구하여 얻는 그것이 자유의지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서 하나님께 의뢰하는, 여호와께 나아가는 의지, 여호와께 구하는 의지, 여호와께 의존하고 의뢰하고 신뢰하고 바라고, 그리고 그의 것을 누리고, 그 가운데 감사하고, 그래서 예배에 이르는, 진정한 경건에 이르는 의지. 

[『기독교 강요』. 2.2.11.]

우리 철학의 근본은 겸손이라고 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말은 나를 항상 즐겁게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더욱더 그러했다. “어느 수사학자는 웅변의 규범들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화술’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두 번째도 ‘화술’, 세 번째도 ‘화술’이라고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기독교의 규범들에 관해서 묻는다면 나는 항상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하기를 좋아했을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1.

     여기에서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을 인용합니다. ‘철학의 근본은 겸손이다’ 말한 사람이 크리소스토무스라고 한다면,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해서, ‘수사학자들에게 있어서 첫 번째가 화술이요, 두 번째도 화술이요, 세 번째도 화술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말 잘하는 수사학자들은 첫째도 화술이요, 둘째도 화술이요, 셋째도 화술이요. 그래서 소크라테스(Socrates)나, 소피스트(Sophist)나 보면 다 그 변증법, 산파술, 그 전부 다 말하는 것 아닙니까? 말. 말로 설득하는 것 아닙니까? 첫째도 화법이요, 두 번째도 화법이요, 세 번째도 화법, 화술이요. 우리는 무엇이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이 교만과 자만을 삼가기는 하되 여전히 자기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겸손이라고 할 수 없다고 여기는 반면, 겸손 외에는 어떤 피난처로도 도망칠 수 없음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는 것을 겸손으로 여긴다고 선언한다. 그는 또 말한다.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을 부풀리지 말게 하자. 사람은 자기가 그 자신에 관하여 사탄이다. 그에게 복된 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당신이 스스로 가진 것은 죄 외에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네 자신의 죄로부터 네 자신을 멀리하라. 그리해야 하나님의 의가 존재한다.” … “… 당신이 자기 안에서 약해질수록 여호와는 더욱더 당신을 받아들이실 것이다.” 시편 70편 해석에서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를 기억하는 것을 금하여 하나님의 의를 알도록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 스스로는 죄 외에 아무것도 아니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는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1.

     왜 자유의지를 다루면서 이 부분을 이야기할까요? 이것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께 얻는 것,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구하여 얻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다. 그것이 본질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그 자신에 관하여 사탄이다.” 내가 나를 의지하는 것이 사탄이다. 사탄을 따라가서 사탄이 아니라, 나를 신뢰하고, 나를 믿고, 내 능력을 구하는 것이 사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야 된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겸손의 무릎을 꿇자.’ 이런 말이 있었잖아요. 그때도 ‘겸손의 무릎.’ 오늘 여기서도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겸손’의 덕목이 처음이요 끝이다. 우리에게 모든 복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우리가 가진 것은 죄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우리가 할 말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겸손이 그의 높음이 되듯이, 겸손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준비된 그의 자비를 준비된 처방으로 삼는다. 여기서 나는 … 눈이 멀어 자기 자신을 마땅한 수준보다 더 높게 여기는 사람에게 자기애와 야망이라는 병을(morbo) 버리고 성경의 진실한 거울에서 자기 자신을 바르게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참조. 갈 6:3; 약 1:22-25).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1.

     “우리의 겸손이 그의 높음이 되듯이”, 이렇게 또한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납작 엎드리고 하나님을 높일 때, 그 우리가 높인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우리가 높아지는 것이죠. 그것이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는 어떤 나를 내세우는 그러한 방종이 아니다. 겸손으로부터 비롯되는 ‘거듭난 의지’, ‘감사의 의지’,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의 의지, 그것이 자유의지다. 
     사람은 눈이 멀어서 마땅히 자기 자신의 수준 이상을 항상 ‘자랑’하고 ‘교만’에 빠져 있는, ‘자기애’와 ‘야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된다. 마땅한 수준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그것을 버리는 거죠. 보통 우리가 저 사람 뜻이 강하다, 의지가 강하다고 하면 주로 교만과 연결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것을 바라고 누리고, 그리고 감사하고 송축하는 그것이 자유의지의 본질이다. 

     이제 이 부분을 맺어보겠습니다. 
     첫째,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타락한 인류의 의지는 악의 노예가 되어서 성령의 역사로 은혜가 부여되지 않으면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자유의지’는 이미 정의상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중심이 타락한 인류는 중심이 거듭나지 않으면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의지 회복은 ‘거듭남’이 앞서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앞서고 의지가 따른다는 것, 은혜가 앞서고 자유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서 은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서 자유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크리소스토무스가 말하듯이, 모든 사람은 본성상 죄인일 뿐만 아니라, 전부가 죄인이다. ‘우리 자신’이러면 ‘타락한 인간’. 우리는 이것을 ‘인격적 타락’이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이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고, 이것을 우리가 바로 ‘전체적 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격적 타락’과 ‘전체적 타락’을 합하여서 ‘전적 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류는 전적 타락했다. 
     세 번째, 사람이 상실된 자유의지를 회복하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도피처를 삼아야 된다. 자유의지는 이미 정의상, 본질상 중심이 하나님께 합해야 되기 때문에, 본질에 거듭남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를 본질상 거듭나게 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 삼아야 우리가 거듭납니다. 그 은혜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 그 영이 우리에게 임했을 때,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고 진리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리라. 바로 그 진리로 자유롭고 그 자유로 거룩으로 나아가는 그때 우리의 행실이, 우리의 행함과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의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곧 자유의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넷째, 사람은 자기가 그 자신에 대하여 사탄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애와 야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버리고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해야 됩니다. 사탄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나에 대한 사탄입니다. 나를 신뢰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입니다. 나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나에 대한 야망과 자기애 이런 것을 버리고, 오직 겸손히 납작 엎드리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하는 그때, 우리 영혼의 뜻함, 그것이 자유의지의 최고의 모습이다. 
     이것이 칼빈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부분인 것입니다. 




48강 결론


  1.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타락한 인류의 의지는 악의 노예가 되어 성령의 역사로 은혜가 부여되지 않으면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2. 크리소스토무스가 말하듯이, 모든 사람은 본성상 죄인일 뿐만 아니라 전부가 죄입니다. 
  3. 사람이 상실된 자유의지를 회복하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도피처로 삼아야 합니다. 
  4. 사람은 자기가 그 자신에 대하여 사탄인바, 자기애와 야망이라는 병을 버리고 오로지 겸손해야 하며, 겸손만이 그의 높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