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 15장에서 ‘사람의 창조’를 다루면서,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구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영혼은 두 기능, 혹은 두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오성’(悟性, intellectus)과 ‘의지’(voluntas)이다라고 말하면서, ‘오성’은 지식을 얻는 영혼의 기능(facultatesanimae), 그래서 정과 사, 선과 악, 그리고 시시비비를 가려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그것을 판단해서 아는 것, 그것이 오성의 기능이라고 했고, ‘의지’는 그 깨달아 안 바대로, 오성의 기능에 따라 올바른 것을 판단한 대로 행하는 그러한 과정에서의 영혼의 기능,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바대로 뜻을 세워서 행하는, 그때 작용하는 영혼의 기능, 이것을 의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성과 의지는 사실 이분법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성이 온전해야 이성(ratio)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는 거죠. 올바로 알고 뜻을 세우고 행하는 영혼의 기능이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올바른 의지의 작용’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를 이제 2권 2장에서 시작함에 있어서 칼빈은 먼저 이 부분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오성이 타락해서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없다면, 의지가 온전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오성의 타락’, ‘지식의 타락’은 인정하면서도 ‘의지의 타락’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러한 경향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아는 것’은 내가 올바르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뜻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예 칼빈은 먼저 이 부분의 논의를 함에 있어서 이 오성과 의지가 함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오성이 불완전하고, 오성이 올바른 기능을 못한다면 의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입장에 서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2.1.]
사람은 자기 수중에 어떤 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으며 사방으로 둘러싸여 가장 비참한 곤경에 처해 있다는 가르침을 받게 될 때에 오히려 자기에게 결여된 선과 자기가 빼앗긴 자유를 갈망하도록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
우리의 인생은 ‘타락’하였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다 타락하였습니다. 영혼의 어떤 기능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전적으로 타락했으니까, 그저 놀자, 눕자, 자자.’ 이러한 ‘나태함’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반면에, ‘아니야.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의’가 남아 있어, 우리는 여전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그런 ‘오성’과 ‘의지’의 온전함이 남아있어.’라고 하는 사람은 또 ‘교만’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내가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 나에게 선한 것은 나로부터 나온다.’ 이렇게 또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사실 이 두 극단이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할 수 없다 그러면서 나태하거나,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교만하거나.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을 다루면서 이 ‘나태함’과 ‘교만함’을 다 물리치고,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하신다. 우리의 빈곤함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빈곤함을 인정해라, 그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인정해라,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다.’ 그래서 나태해서도 안 되고 교만해서도 안 되는 그 우리의 모습.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목적이고 복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될 선함이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갈대 지팡이에 비교하는 것조차 과도한 것이다. 허영에 찬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공상하고 수다를 떠는 것들은 그것들이 무엇이든 연기(煙氣)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본 주제에 부합하게, 자유의지는 그것을 변호하는 자들에 의해서 견고해지기보다 더욱 짓밟힌다는 유명한 말을 자주 반복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
칼빈이 자주 쓰는 표현에, ‘우리 인생의 능력은 갈대 지팡이만큼도 되지 않는다.’ 갈대가 지팡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갈대 지팡이밖에 되지 않는다. ‘갈대 지팡이라고 비교하는 것조차 과하다.’ 이렇게 아주 강한 어조로 우리의 ‘무능함’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은 주장을 하고, 또 주견(主見)을 내세우는 것이 다 연기(煙氣)에 불과하다. 다 쓸데없이 지나가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2.2.2.]
이러한 철학자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영혼의 기능들’(facultatesanimae)은 ‘정신’(mens)과 ‘마음’(cor)에 있고, ‘이성’(ratio)과 ‘의지’(voluntas)와 ‘지각’(sensus)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성이 ‘오성’(intellectus)을 부여하는바, 의지의 ‘욕구’(appetitus)는 이성을 좇으면 ‘덕성’(virtus)에 이르고 감각을 좇으면 ‘육욕’(libido)에 이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 각주 88.
철학자들은 여전히 ‘이성’을 신뢰하고 이성이 정신(mens)에 자리 잡은 ‘등불’과 같고, 이성이 마치 ‘여왕’과 같이 우리의 모든 마음(cor)과 정신과 육체를 제어하고 이끈다라고 이렇게 철학자들은 생각하지만, 우리의 이성은 ‘타락’에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타락에서 지각(sensus)으로 보고 느끼고, 또 우리가 이러한 오감각으로 받아들인 것들이 이성에 잘 전달되고, 그리고 이성에서 좋은 것을 생각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각조차 다 썩었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통찰력이 있다라고 철학자들은 말하지만, 그 통찰력이 온전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지각도 타락했고. 칸트(Immanuel Kant)는 지각을 순수한 지식의 그러한 도구로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성, 지각, 이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칼빈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타락한 인류는 지각조차도 잘못되었고, 그리고 그 잘못된 지각에 잘못된 욕구(appetitus)를 덧붙입니다. 그 잘못된 욕구를 덧붙여서, 그것을 이성이라고, 어떤 최고의, 인간 사고 구조의 최고의, 아까 표현했죠, 여왕이고, 면류관이다, 이성이. 그래서 철학자들은 다 ‘이성지상주의’ 아닙니까? 그래서 이성으로 그것을 다 포장해서, 그래서 의지로 나간다, 행위로 나간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에는 이러한 지각과 욕구에 따르는 그러한 이성적 판단, 그 가운데 인간이 올바른 행위를 하는 의지의 작용, 철학자들은 이런 것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2.3.]
그러나 칼빈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논쟁의 여지조차 없다. 우리가 어떤 덕성(virtus)과 선행, 이런 것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택하여서 선한 것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 탓이고, 그리고 우리가 악한 것을 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이고, 이렇게 철학자들은 회피 논리를 펴는 거죠. 내가 할 수 있으면 ‘내 공로’이고, 내가 할 수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니 인간에게 무슨 탓을 돌릴 수 있겠느냐? 철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제대로 작용하는, 그리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오성, 그리고 그 오성에 따른, 깨달음에 따른 행위로 나아가는 의지, 이런 것들을 다 온전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2.4.]
그러나 우리가 초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서도 보듯이, 우리의 선행에는 어떤 우리의 공로도 섞일 수가 없습니다. 무엇 하나라도 합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점에 있어서 철저했습니다. 우리는 지각조차도, 욕구조차도, 그리하여 이성조차도, 그리하여 의지조차도 우리는 다 타락해서 ‘오염’되어있다는 것이죠.
모든 교회 저술가는 사람이 지닌 이성의 건전성이 죄로 인해서 심각하게 상처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과 의지가 악한 욕심들에 의해 심하게 예속되었다는 사실 두 가지를 모두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철학자들에게 너무나 가까이 나아갔다. 그들 가운데 초기 사람들은…사람들의 상식적인 판단에 모순되는 것은 그 무엇도 가르치지 않으려고 그들은 성경의 교리와 철학자들의 신념을 절반씩 모아서 조화시키고자 애썼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4.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는 ‘하나님은 선한 것들과 악한 것들을 우리 권세 안에 두셨으므로,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셨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비판합니다. 아니라는 것이죠. 선한 것들과 악한 것들이 우리 권세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또 신학자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우리의 일은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시작한 일을 완성한 것이다.’ 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까 크리소스토무스로 말하면, 우리의 것을 우리가 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를 채운다는 것이고, 히에로니무스의 생각은 시작은 우리가 하고 하나님이 나머지 일은 완성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신학자들의 입장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의 일,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영역, 이것에 대해서 인간은 전혀 어떤 것도 행할 수 없는 ‘무능’의 상태, 그래서 ‘자연적인 은사들은 남아는 있으나 부패했고,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제거되었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합니다. 달리 표현해서, 일반은총의 영역에서는 남아는 있으나 그것조차 ‘부패’해 있고, 특별은총의 영역에서는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다 ‘제거’되어 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의지’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단언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면, 그 자유의지는 은혜의 도움을 받아 선을 선택하고, 은혜가 없으면 악을 선택하는 영혼의 기능이다. 이성과 의지의 기능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은혜’가 없으면 ‘자유’가 없다는 거죠. ‘은혜’가 있어야 ‘자유’가 있다는 거죠. 달리 말해서, 타락한 인류에게는 ‘자유의지가 상실’되어 있다는 거죠. 이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으면 다시 우리 안의 ‘자유의지가 회복’된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2.5-7.]
그 저술가들[참조. 『기독교 강요』, 2.2.4]이 자유의지에 대해서 논할 때 국가적이거나 외부적인 행위들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탐구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5.
중세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도 이 부분을 언급은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말하지 않고 ‘인간의 공로’를 섞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은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시작하고 하나님이 보충하거나, 우리가 시작하고 하나님이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과 끝이 다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식조차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조차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을 지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능력을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뜻한 바를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죠.
실로 사람은 강제로 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노예가 되어 자기 의지를 죄의 족쇄에 묶이도록 한다니, 그 얼마나 대단한 자유인가!…사람의 천성은 자발적으로 거짓에 기우는 경향이 있어서 다수의 말들을 통하여 진리를 이끌어 내기보다 한 짧은 단어에서 오류를 불러내는 데 더 기민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라는 너무나 짧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 기대 이상으로 확실하게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저 고대 저자들의 뒤를 이은 계승자들은 거의 모두가 이 단어의 어원에만 집착한 나머지 파멸적인 자기 신뢰로 빠져들고 말았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7.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타락한 이후 죄로부터의 자유도 없고 죄로 인한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도 없습니다. 모두 우리는 ‘죄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한 비참함, 죄의 상태, 죄의 노예의 상태, 바로 ‘저주’의 상태, 육체의 일, 그 현저한 여러 범죄와 악행 상태, 그 가운데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강압받지 않고 스스로 무엇을 행할 자유는 남아 있는데, 그 자유는 곧 ‘죄를 짓는 자유’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할 자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됩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 신학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는 우리가 효과적인 선을 원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은혜, 그것을 ‘역사하는 은혜’(gratiaoperans)라고 불렀고, 그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또 하나님이 후속적으로 도와주는 은혜, 그것은 ‘합력하는 은혜’(gratiacooperans)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계획할 때 도와주는 역사하는 은혜, 그리고 우리가 계획하고 나면 도와주는 합력하는 은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는데, 이것은 맞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는 준비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열매 단계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처음과 끝이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헤아릴 일이지, 우리의 ‘능력’과 ‘공로’를 헤아려서 우리 오성은 물론, 의지의 자유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은혜’이고, 그리고 뜻하는 것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능을 인식하면, ‘무능하니까 무엇을 하겠냐?’ 하면서 ‘나태’의 기회로 삼거나, 혹 무엇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여기면, ‘그래. 나는 할 수 있어.’라고 하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영예를 가로채는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그래서 ‘교만’하거나 ‘절망’하거나 두 가지 상태에 놓여진다.
두 번째,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 신뢰해서 이성이 면류관이고 여왕이고, 이성에 따른 깨달음, 그것을 또 ‘오성’이라고 하면서, 그 깨달음은 온전하고 그 깨달음으로부터 의지의 욕구가 생기고, 이 욕구는 또한 선한 것이고 선한 충동에 따른 것이고, 그리하여 끝내 스스로 인간은 ‘자기 덕성’에 이르고. 다만 인간이 주의 할 것은 지나친 감각적인 욕구는 절제해야 된다. 철학자들은 이런 면에서 절제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기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그 과대망상에서 나온 절제 개념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는 가운데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셋째, 타락한 인류는 자연적 은사는 ‘부패’하고, 초자연적 은사는 ‘제거’되었습니다. 일반은총의 영역에 하나님의 선물 그것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패’했습니다. 특별은총 영역에 하나님의 선물, 구원의 영역,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영생의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은사는, 곧 선물은 ‘제거’되었습니다. 타락한 이후 그 누구도 이 특별한 구원의 은혜에 설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베푸시는 ‘중생’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우리 영혼은 온전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을 행할 이성과 의지를 지닐 수 없습니다.
넷째, 타락한 인류에게는 자기 뜻대로 무엇을 행할, 그러한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하는데,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나도 선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다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죄로 인한 ‘비참함’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기껏 자유 선택을 한다고 한들 그것은 죄에 속한 것이고, 이것이 우리 인류의 비참한 모습인 것입니다.
47강 결론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능을 인식하면 이를 나태의 기회로 삼고, 무엇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여기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영예를 가로챕니다.
47강 | 2.2.1-7. (2권 47-62페이지)
자유의지 옹호자들의
그릇된 철학적 입장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 15장에서 ‘사람의 창조’를 다루면서,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구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영혼은 두 기능, 혹은 두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오성’(悟性, intellectus)과 ‘의지’(voluntas)이다라고 말하면서, ‘오성’은 지식을 얻는 영혼의 기능(facultates animae), 그래서 정과 사, 선과 악, 그리고 시시비비를 가려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그것을 판단해서 아는 것, 그것이 오성의 기능이라고 했고, ‘의지’는 그 깨달아 안 바대로, 오성의 기능에 따라 올바른 것을 판단한 대로 행하는 그러한 과정에서의 영혼의 기능,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바대로 뜻을 세워서 행하는, 그때 작용하는 영혼의 기능, 이것을 의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성과 의지는 사실 이분법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성이 온전해야 이성(ratio)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는 거죠. 올바로 알고 뜻을 세우고 행하는 영혼의 기능이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올바른 의지의 작용’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를 이제 2권 2장에서 시작함에 있어서 칼빈은 먼저 이 부분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오성이 타락해서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없다면, 의지가 온전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오성의 타락’, ‘지식의 타락’은 인정하면서도 ‘의지의 타락’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러한 경향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아는 것’은 내가 올바르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뜻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예 칼빈은 먼저 이 부분의 논의를 함에 있어서 이 오성과 의지가 함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오성이 불완전하고, 오성이 올바른 기능을 못한다면 의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입장에 서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2.1.]
사람은 자기 수중에 어떤 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으며 사방으로 둘러싸여 가장 비참한 곤경에 처해 있다는 가르침을 받게 될 때에 오히려 자기에게 결여된 선과 자기가 빼앗긴 자유를 갈망하도록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
우리의 인생은 ‘타락’하였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다 타락하였습니다. 영혼의 어떤 기능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전적으로 타락했으니까, 그저 놀자, 눕자, 자자.’ 이러한 ‘나태함’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반면에, ‘아니야.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의’가 남아 있어, 우리는 여전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그런 ‘오성’과 ‘의지’의 온전함이 남아있어.’라고 하는 사람은 또 ‘교만’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내가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 나에게 선한 것은 나로부터 나온다.’ 이렇게 또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사실 이 두 극단이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할 수 없다 그러면서 나태하거나,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교만하거나.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을 다루면서 이 ‘나태함’과 ‘교만함’을 다 물리치고,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하신다. 우리의 빈곤함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빈곤함을 인정해라, 그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인정해라,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다.’ 그래서 나태해서도 안 되고 교만해서도 안 되는 그 우리의 모습.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목적이고 복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될 선함이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갈대 지팡이에 비교하는 것조차 과도한 것이다. 허영에 찬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공상하고 수다를 떠는 것들은 그것들이 무엇이든 연기(煙氣)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본 주제에 부합하게, 자유의지는 그것을 변호하는 자들에 의해서 견고해지기보다 더욱 짓밟힌다는 유명한 말을 자주 반복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
칼빈이 자주 쓰는 표현에, ‘우리 인생의 능력은 갈대 지팡이만큼도 되지 않는다.’ 갈대가 지팡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갈대 지팡이밖에 되지 않는다. ‘갈대 지팡이라고 비교하는 것조차 과하다.’ 이렇게 아주 강한 어조로 우리의 ‘무능함’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은 주장을 하고, 또 주견(主見)을 내세우는 것이 다 연기(煙氣)에 불과하다. 다 쓸데없이 지나가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2.2.2.]
이러한 철학자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영혼의 기능들’(facultates animae)은 ‘정신’(mens)과 ‘마음’(cor)에 있고, ‘이성’(ratio)과 ‘의지’(voluntas)와 ‘지각’(sensus)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성이 ‘오성’(intellectus)을 부여하는바, 의지의 ‘욕구’(appetitus)는 이성을 좇으면 ‘덕성’(virtus)에 이르고 감각을 좇으면 ‘육욕’(libido)에 이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 각주 88.
철학자들은 여전히 ‘이성’을 신뢰하고 이성이 정신(mens)에 자리 잡은 ‘등불’과 같고, 이성이 마치 ‘여왕’과 같이 우리의 모든 마음(cor)과 정신과 육체를 제어하고 이끈다라고 이렇게 철학자들은 생각하지만, 우리의 이성은 ‘타락’에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타락에서 지각(sensus)으로 보고 느끼고, 또 우리가 이러한 오감각으로 받아들인 것들이 이성에 잘 전달되고, 그리고 이성에서 좋은 것을 생각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각조차 다 썩었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통찰력이 있다라고 철학자들은 말하지만, 그 통찰력이 온전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지각도 타락했고. 칸트(Immanuel Kant)는 지각을 순수한 지식의 그러한 도구로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성, 지각, 이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칼빈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타락한 인류는 지각조차도 잘못되었고, 그리고 그 잘못된 지각에 잘못된 욕구(appetitus)를 덧붙입니다. 그 잘못된 욕구를 덧붙여서, 그것을 이성이라고, 어떤 최고의, 인간 사고 구조의 최고의, 아까 표현했죠, 여왕이고, 면류관이다, 이성이. 그래서 철학자들은 다 ‘이성지상주의’ 아닙니까? 그래서 이성으로 그것을 다 포장해서, 그래서 의지로 나간다, 행위로 나간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에는 이러한 지각과 욕구에 따르는 그러한 이성적 판단, 그 가운데 인간이 올바른 행위를 하는 의지의 작용, 철학자들은 이런 것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2.3.]
그러나 칼빈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논쟁의 여지조차 없다. 우리가 어떤 덕성(virtus)과 선행, 이런 것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택하여서 선한 것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 탓이고, 그리고 우리가 악한 것을 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이고, 이렇게 철학자들은 회피 논리를 펴는 거죠. 내가 할 수 있으면 ‘내 공로’이고, 내가 할 수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니 인간에게 무슨 탓을 돌릴 수 있겠느냐? 철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제대로 작용하는, 그리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오성, 그리고 그 오성에 따른, 깨달음에 따른 행위로 나아가는 의지, 이런 것들을 다 온전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2.4.]
그러나 우리가 초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서도 보듯이, 우리의 선행에는 어떤 우리의 공로도 섞일 수가 없습니다. 무엇 하나라도 합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점에 있어서 철저했습니다. 우리는 지각조차도, 욕구조차도, 그리하여 이성조차도, 그리하여 의지조차도 우리는 다 타락해서 ‘오염’되어있다는 것이죠.
모든 교회 저술가는 사람이 지닌 이성의 건전성이 죄로 인해서 심각하게 상처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과 의지가 악한 욕심들에 의해 심하게 예속되었다는 사실 두 가지를 모두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철학자들에게 너무나 가까이 나아갔다. 그들 가운데 초기 사람들은…사람들의 상식적인 판단에 모순되는 것은 그 무엇도 가르치지 않으려고 그들은 성경의 교리와 철학자들의 신념을 절반씩 모아서 조화시키고자 애썼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4.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는 ‘하나님은 선한 것들과 악한 것들을 우리 권세 안에 두셨으므로,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셨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비판합니다. 아니라는 것이죠. 선한 것들과 악한 것들이 우리 권세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또 신학자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우리의 일은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시작한 일을 완성한 것이다.’ 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까 크리소스토무스로 말하면, 우리의 것을 우리가 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를 채운다는 것이고, 히에로니무스의 생각은 시작은 우리가 하고 하나님이 나머지 일은 완성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신학자들의 입장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의 일,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영역, 이것에 대해서 인간은 전혀 어떤 것도 행할 수 없는 ‘무능’의 상태, 그래서 ‘자연적인 은사들은 남아는 있으나 부패했고,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제거되었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합니다. 달리 표현해서, 일반은총의 영역에서는 남아는 있으나 그것조차 ‘부패’해 있고, 특별은총의 영역에서는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다 ‘제거’되어 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의지’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단언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면, 그 자유의지는 은혜의 도움을 받아 선을 선택하고, 은혜가 없으면 악을 선택하는 영혼의 기능이다. 이성과 의지의 기능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은혜’가 없으면 ‘자유’가 없다는 거죠. ‘은혜’가 있어야 ‘자유’가 있다는 거죠. 달리 말해서, 타락한 인류에게는 ‘자유의지가 상실’되어 있다는 거죠. 이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으면 다시 우리 안의 ‘자유의지가 회복’된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2.5-7.]
그 저술가들[참조. 『기독교 강요』, 2.2.4]이 자유의지에 대해서 논할 때 국가적이거나 외부적인 행위들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탐구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5.
중세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도 이 부분을 언급은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말하지 않고 ‘인간의 공로’를 섞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은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시작하고 하나님이 보충하거나, 우리가 시작하고 하나님이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과 끝이 다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식조차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조차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을 지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능력을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뜻한 바를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죠.
실로 사람은 강제로 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노예가 되어 자기 의지를 죄의 족쇄에 묶이도록 한다니, 그 얼마나 대단한 자유인가!…사람의 천성은 자발적으로 거짓에 기우는 경향이 있어서 다수의 말들을 통하여 진리를 이끌어 내기보다 한 짧은 단어에서 오류를 불러내는 데 더 기민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라는 너무나 짧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 기대 이상으로 확실하게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저 고대 저자들의 뒤를 이은 계승자들은 거의 모두가 이 단어의 어원에만 집착한 나머지 파멸적인 자기 신뢰로 빠져들고 말았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7.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타락한 이후 죄로부터의 자유도 없고 죄로 인한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도 없습니다. 모두 우리는 ‘죄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한 비참함, 죄의 상태, 죄의 노예의 상태, 바로 ‘저주’의 상태, 육체의 일, 그 현저한 여러 범죄와 악행 상태, 그 가운데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강압받지 않고 스스로 무엇을 행할 자유는 남아 있는데, 그 자유는 곧 ‘죄를 짓는 자유’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할 자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됩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 신학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는 우리가 효과적인 선을 원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은혜, 그것을 ‘역사하는 은혜’(gratia operans)라고 불렀고, 그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또 하나님이 후속적으로 도와주는 은혜, 그것은 ‘합력하는 은혜’(gratia cooperans)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계획할 때 도와주는 역사하는 은혜, 그리고 우리가 계획하고 나면 도와주는 합력하는 은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는데, 이것은 맞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는 준비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열매 단계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처음과 끝이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헤아릴 일이지, 우리의 ‘능력’과 ‘공로’를 헤아려서 우리 오성은 물론, 의지의 자유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은혜’이고, 그리고 뜻하는 것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능을 인식하면, ‘무능하니까 무엇을 하겠냐?’ 하면서 ‘나태’의 기회로 삼거나, 혹 무엇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여기면, ‘그래. 나는 할 수 있어.’라고 하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영예를 가로채는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그래서 ‘교만’하거나 ‘절망’하거나 두 가지 상태에 놓여진다.
두 번째,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 신뢰해서 이성이 면류관이고 여왕이고, 이성에 따른 깨달음, 그것을 또 ‘오성’이라고 하면서, 그 깨달음은 온전하고 그 깨달음으로부터 의지의 욕구가 생기고, 이 욕구는 또한 선한 것이고 선한 충동에 따른 것이고, 그리하여 끝내 스스로 인간은 ‘자기 덕성’에 이르고. 다만 인간이 주의 할 것은 지나친 감각적인 욕구는 절제해야 된다. 철학자들은 이런 면에서 절제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기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그 과대망상에서 나온 절제 개념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는 가운데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셋째, 타락한 인류는 자연적 은사는 ‘부패’하고, 초자연적 은사는 ‘제거’되었습니다. 일반은총의 영역에 하나님의 선물 그것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패’했습니다. 특별은총 영역에 하나님의 선물, 구원의 영역,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영생의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은사는, 곧 선물은 ‘제거’되었습니다. 타락한 이후 그 누구도 이 특별한 구원의 은혜에 설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베푸시는 ‘중생’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우리 영혼은 온전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을 행할 이성과 의지를 지닐 수 없습니다.
넷째, 타락한 인류에게는 자기 뜻대로 무엇을 행할, 그러한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하는데,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나도 선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다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죄로 인한 ‘비참함’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기껏 자유 선택을 한다고 한들 그것은 죄에 속한 것이고, 이것이 우리 인류의 비참한 모습인 것입니다.
47강 결론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능을 인식하면 이를 나태의 기회로 삼고, 무엇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여기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영예를 가로챕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오성을 부여하는바, 의지의 욕구가 이성을 좇으면 덕성에 이르나 감각을 좇으면 육욕에 이른다고 봅니다.
타락한 인류는 자연적 은사는 부패하고 초자연적 은사는 제거되었으므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중생의 은혜가 없으면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할 이성과 의지를 지닐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류에게는 자기 뜻대로 무엇을 행할,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는 있으나, 죄로부터의 자유도 없고, 죄로 인한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도 없으니, 자유 선택으로 죄를 지을 의지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