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우리는 칭의에 대해서 그릇된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첫째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두 번째는 명목적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 세 번째는 위선적인 사람,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3.14.9.]
이제 네 번째 부류로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원에 이른, 그야말로 하나님의 참 자녀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칼빈은 하나님의 참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의롭다 함을 받고, 칭의되고, 거룩해지는, 성화되는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한가,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먼저 다루고, 그리고 이제 칭의로부터 성화로 역동적으로 이렇게 연결해 가면서 설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중적 은혜를 다루는 칼빈의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우리 개혁신학에서 이중적 은혜는 『기독교 강요』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본격적으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의 서론적인 장을 열어가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먼저 올바른 칭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그 모습이 어떠한가? 그러니까 이 올바른 칭의를 누리는 사람은 자연히 거룩함으로 나아간다는 것, 이것을 먼저 칼빈은 이곳에서 다루고, 그리고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논한다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로 인하여 화목하게 된 자, 바로 존재, 신분, 그 자신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 그들은 죄 사함을 값없는 은혜로 누립니다. 그리고 그 죄 사함을 누리면 곧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것이 되는 중생, 새로운 생명을 뜻하는데, 그 새로운 생명 가운데 이제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생활이 따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삶의 참된 순수함으로 분별되는 성도로서의 삶을 사는, 이전에는 율법이 저주였다면, 이제는 생명을 얻고, 그 율법의 저주, 율법의 사망의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된 자로서 이제는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그 율법을 지키는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 곧 선행,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모든 방편을 다하여 오직 그의 영광만을 바라며 진보해 가는 것이 우리의 으뜸가는 뜻이 된다(Ut haec sit praecipua nostra voluntas, voluntati eius servire, ac eius duntaxat gloriam modis omnibus provehe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4.9.
‘모두 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가운데서의 진보가 있다.’ 이것을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누리는 것입니다. 다 은혜입니다. 생명도 생활도 은혜인데, 그 가운데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나아감이 있다. 그래서 의인은 그저 의롭다라고 기록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신분을 얻고 의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그래서 썩을 육체에 악취가 나는 이전의 것을 버리고, 이제 새로운 것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경주하고, 또 하나님 앞에 푸른 초장에서 누리고, 이러한 삶의 은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4.10.]
그리하여서 우리를 우리 자신이 보고, 우리를 우리 자신이 헤아리면, 여전히 부족한 것, 또 죄에 속한 것, 허물에 속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 10절에서 말하듯이 ‘모든 것을 다 지킨 자라도 한 가지를 범하면 또 다 어긴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고, 모든 죄가 아니라 한 가지 죄에 대한 삯이 다 사망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생명을 얻고 생활을 누리게 되는 이 진보, 나아가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을 다 지킴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진다면, 그 누구도 이러한 진보 가운데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칼빈은 칭의 가운데 우리가 누리는 그 생명의 의는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데, 이 은혜로 주어지는, 의의 전가로 말미암은 것이 생활로도 나아간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의로, 그 값으로 우리 생명을 사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생활도 온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율법의 조문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내가 율법에 대해서 순종할 수 있는 자질을 철저하게 갖게 됨에 있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계명이 달라진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제는 은혜로, 율법이 우리에게 행위의 의가 아니라 ‘은혜의 의’ 가운데서 율법이 우리에게 규범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우리가 율법을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율법을 대하는 우리의 행위가 바뀐 것이 아니라, 율법에 묻어 있는 언약의 법으로서의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은혜의 계명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됐는데,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자질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살아가는 완전한 삶을 우리가 행하기 때문에, 그 선행을 행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은혜 가운데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매번 날마다 살아갈 때, 율법 앞에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완전함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그리스도의 의에 완전함이 있고, 그리고 그 완전함 가운데서 우리가 누리는, 결국은 성화가 은혜가 된다는 이 그리스도인의 누리는 그 삶의 모습을 칼빈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칭의의 의를 온전히 누리는 사람은 그 의의 역사가, 단회적으로 생명을 얻지만 그 단회적으로 주어진 생명에는 생활의 은혜가 계속되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율법을 저주로 보지 않고, 율법을 우리가 자원해서, 기쁜 마음에서 지키는 자리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자질, 내 행위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율법을 우리가 지키는, 은혜로 율법 앞에 서게 되는 그것이 바로 성화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금 칭의를 다루는 곳인데 벌써 칭의와 성화를 연결시키는 이런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14.11.]
첫째,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의 잣대로 시험해 본다면 경건한 사람의 행위라고 하더라도 하나 예외 없이 저주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nullum unquam exstitisse pii hominis opus quod, si severo Dei iudicio examinaretur, non esset damnabile).
둘째, 그럴 리 없지만, 사람에게 완전한 행위가 설혹 발견된다손 치더라도 그 행위자 자신이 부대끼고 있는 죄들 때문에 그것은 악화되고 때가 묻어 더러워지며 결국 은혜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Ad haec si tale aliquod detur quod possibile homini non est, peccatis tamen, quibus laborare autorem ipsum certum est, vitiatum ac inquinatum gratiam perde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4.11.
그래서 먼저 우리가 심판의 잣대로 봤을 때는 어떤 사람도 여전히 온전치 않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혹 우리에게 완전한 행위가 있다 하더라도, 사실 그 무슨 행위조차도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는 완전하다, 철저하다고 할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은혜가 어디까지 미치느냐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어떻게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일단 화목하게 된 그 사람은 자기의 선행으로 인하여서 의를 이루고, 그리고 그 공로로 온전해지는 자리로 나아간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그래서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신인합력설’ 혹은 ‘인신합력설’인데, 그들은 뭔가 하면, 바로 거듭난 사람의 의라는 개념이 이미 행위 가운데 은혜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상 전적 은혜가 아니죠. 그 행위 가운데 누리는 것이고 행위가 자라가면서 더 누리는 것이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이 스콜라 신학자들, 로마 가톨릭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가 연결이 되지 않아요. 사실상 섞여 버려요. 구별이 되어야 되는데 구별되지 않아요. 칭의와 성화가 전부 다 성화의 영역에 들어가 버려요. 그래서 처음도 행위가 있어야 되고, 계속해서 행위가 있어야 되고.
우리의 입장은 뭡니까? 바로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는데, 칭의는 생명의 의기 때문에 단번에 주어지고, 그런데 성화는 생활의 의기 때문에 계속적인데, 그래서 생명과 생활이 구별이 되듯이 구별은 되는데, 이 성화의 은혜가 칭의 은혜와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칭의의 중심성 가운데서 성화의 은혜가 계속된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입장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를 이야기할 때는 생명이든 생활이든 전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이 개념은 살아날 때의 의도 믿음으로 얻는 것이고, 살아갈 때의 의도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것이에요. 물론 살아갈 때는 우리 행위가 있어야 되죠. 그러나 그 행위까지도 은혜로써 우리에게 역사한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이 사함을 받는 자들은 복이 있다’라고 로마서 4장 7절에서 이야기할 때, ‘불법의 사함’이라는 것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생명에 그치지 않고, 일생 동안 누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칼빈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지만,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어떤 면에서? 모두 그리스도의 의라는 것, 그 면에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구별은 되느냐? 칭의는 생명이고 단회적이고 법정적이고, 성화는 생활이고 계속적이고 반복적이고, 여기에서 구별은 된다. 그래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
‘그의 씻음과 무름과 속죄와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불법이 가려진다.’ ‘씻음’, ‘abolutio’, 그 다음에 ‘무름’, ‘satisfactio’, 그 다음에 ‘속죄’, ‘expiatio’, 그리고 ‘완전한 순종’, ‘perfecta obedientia’,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불법을, 허물을 가린다. 이것이 생명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도 관계된다. 그래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9). 그래서 자연히 지금 칭의로부터 계속 나아가는 진보 가운데서의 성화 개념이 자연스럽게 역동적으로 연결되는 이것이 바로 개혁신학의 이중은혜론, 칭의와 성화에 대한 역동적 이해입니다.
[『기독교 강요』, 3.14.12.]
로마 가톨릭은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은혜’라고 해서, ‘gratia acceptans’라고 해서 받아들이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 받아들이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합력적인 공로’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아들이는 그 받아들임에 공로가 있다. 행위가 있다는 거예요. 받아들임의 공로, 행위가 바로 믿음으로 작용해요. 믿음이 공로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내 공로로 내가 이루기 때문에, 이미 자질의 개념이기 때문에, 자질로 나가니까 자질이 찬다는 개념이 나와요, 로마 가톨릭은. 우리는 전적인 은혜이기 때문에 내 자질이 차서 이 자질이 넘친다, 이런 개념이 없잖아요.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고요. 어떤 사람은 그러한 자질이 충만해서 평균적으로 요구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넘어서서 누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나에게 있다, ‘gratia acceptans’, 받아들이는 그 은혜가 나에게 있다.
[『기독교 강요』, 3.14.13-16.]
받아들이는 은혜에서 받아들이는 게 내 공로란 말이에요. 받아들이는 게 내 공로이기 때문에, 그 공로가 이미 차서 넘치는 사람에게는 잉여 공로가 있다는 아주 해괴한 교리가 나오는 거죠. 잉여 공로 사상이 나오는 거죠. 그 잉여 공로가, 남은 공로가 특별히 성자들, 로마 가톨릭의 성인들이라고도 하고 그런 사람들, 그다음에 마리아, 또 사제들, 그 잉여 공로들이 교회의 창고에 가득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로의 보고다, 공로의 창고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보속론’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 가톨릭의 회개를 다룰 때, 세 번째 요소가 바로 행위의 보속이라고 할 때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잉여 공로 개념이나 이런 것은 있을 수 없죠. 여러분, 은혜가 아니고 공로라면 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 공도가 남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구원받고 남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남는 것을 남에게 빌려줄 수도 있고, 그런 사상에서 나온 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의 보속 사상이고, 연옥 사상이고 그런 것이란 거죠. 그래서 우리는 잉여 공로의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노예들의 재산과 같은 처지에 있다. 그 마땅한 권리는 주인 자신에게 속한다(nostra omnia eandem habere conditionem cum servorum peculiis, quae iure ipso deberi domino constat). -크리소스토무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4.15.
크리소스토무스가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노예들이 주인에게 베풂을 받는 자리에 있는 것과 같다.’ 물론 고대적 개념의 주인과 노예, 이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바로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은 주인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은 우리에게 그 자신과 함께 그 자신께 속한 것을 주신다. 그 자신을 주시는 것이 생명의 개념이라면, 그 자신에 속한 것을 주는 것은 바로 거룩의 개념, 생활의 개념이다.
그래서 칭의라는 개념은 분명히 신분이고 존재이고 생명이지만, 그 생명과 존재와 신분에는 필히 생활이 따른다는 거죠. 생활이 따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생명이 은혜이듯이 생활도 은혜이고,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은혜이고, 우리 각자에게 합당하게 하나님이 부여해 주시고, 달란트를 각각에 맞추어 주시듯이, 그래서 잉여 개념은 없습니다. 합력 개념도 없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공로 개념도 없고, 전적인 은혜입니다. 전적인 은혜로 우리가 누리게 된다. 이것을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해서 칼빈은 서서히 칭의와 성화를 연결시켜 가는 그것을 여기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
자 이 부분은 잠시 정리해 본다면,
첫째,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로 죄 사함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말씀을 지키는 거룩하고 순수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요는 이 둘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칭의도 은혜고, 성화도 은혜고. 금방 우리가 또 덧붙여서 말할 수 있죠, 견인. 그래서 생명도 생활도 끌고 가신다, 이끄신다.
두 번째, 로마 가톨릭은 중생하게 된 사람은 선행의 공로로써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우리의 행위는 완전하지 않으며 그 불법이 그리스도의 씻음, 무름, 속죄, 완전한 순종으로만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공로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덧붙여서, 우리의 공로가 완전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질, 공로는 언제나 완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것이 더해져서 내 것이 완전해진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 것은 처음부터 없고 주님의 완전한 것이 내 안에서 역사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주님의 완전한 것이 내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로마 가톨릭은 잉여 행위의 공로에 근거해서 보속을 이야기하지만은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의는 내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고, 그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잉여 공로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족한 것이지 내 공로가 족한 적이 없습니다.
네 번째, 은혜를 받아들임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따라서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받아들여짐이다, 말이에요. 수동성이란 말이에요. 받아들이는 것도 내 공로가 아니다, 말이에요. 로마 가톨릭은 받아들이는 공로가 있다고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세상에 은혜를 누리는 공로를 어떻게 말할 수가 있냐, 이 말이에요, 우리가. 배가 고파서 음식을 거저 주어서 내가 먹었는데, 내 먹은 공로를 이야기할 수 있냐 말이에요. 누린 은혜가 전직인 거죠. 그래서 받아들이는 공로의 협력으로 받아들이는 은혜, 받아들이는 공로 개념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무조건, 전적으로 베풀어지는 은혜밖에 없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 칭의와 성화를 연결시키는 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126강 결론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로 죄사함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말씀을 지키는 거룩하고 순수한 삶을 살게 됩니다.
로마 가톨릭은 중생하게 된 사람은 선행의 공로로써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우리의 행위는 완전하지 않으며 그 불법이 그리스도의 씻음, 무름, 속죄, 완전한 순종으로만 가려집니다.
로마 가톨릭은 잉여 행위의 공로에 근거해서 보속을 주장하나, 우리는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하는 것이니 행함에 남는 공로는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들임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따라 받아들여짐이며, 받아들이는 공로의 협력으로 받아들이는 은혜를 누림이 아닙니다.
126강 | 3.14.9-16. (3권 430-442쪽)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되어
참된 거룩함을 추구하는 자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칭의에 대해서 그릇된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첫째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두 번째는 명목적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 세 번째는 위선적인 사람,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3.14.9.]
이제 네 번째 부류로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원에 이른, 그야말로 하나님의 참 자녀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칼빈은 하나님의 참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의롭다 함을 받고, 칭의되고, 거룩해지는, 성화되는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한가,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먼저 다루고, 그리고 이제 칭의로부터 성화로 역동적으로 이렇게 연결해 가면서 설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중적 은혜를 다루는 칼빈의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우리 개혁신학에서 이중적 은혜는 『기독교 강요』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본격적으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의 서론적인 장을 열어가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먼저 올바른 칭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그 모습이 어떠한가? 그러니까 이 올바른 칭의를 누리는 사람은 자연히 거룩함으로 나아간다는 것, 이것을 먼저 칼빈은 이곳에서 다루고, 그리고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논한다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로 인하여 화목하게 된 자, 바로 존재, 신분, 그 자신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 그들은 죄 사함을 값없는 은혜로 누립니다. 그리고 그 죄 사함을 누리면 곧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것이 되는 중생, 새로운 생명을 뜻하는데, 그 새로운 생명 가운데 이제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생활이 따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삶의 참된 순수함으로 분별되는 성도로서의 삶을 사는, 이전에는 율법이 저주였다면, 이제는 생명을 얻고, 그 율법의 저주, 율법의 사망의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된 자로서 이제는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그 율법을 지키는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 곧 선행,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모든 방편을 다하여 오직 그의 영광만을 바라며 진보해 가는 것이 우리의 으뜸가는 뜻이 된다(Ut haec sit praecipua nostra voluntas, voluntati eius servire, ac eius duntaxat gloriam modis omnibus provehe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4.9.
‘모두 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가운데서의 진보가 있다.’ 이것을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누리는 것입니다. 다 은혜입니다. 생명도 생활도 은혜인데, 그 가운데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나아감이 있다. 그래서 의인은 그저 의롭다라고 기록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신분을 얻고 의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그래서 썩을 육체에 악취가 나는 이전의 것을 버리고, 이제 새로운 것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경주하고, 또 하나님 앞에 푸른 초장에서 누리고, 이러한 삶의 은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4.10.]
그리하여서 우리를 우리 자신이 보고, 우리를 우리 자신이 헤아리면, 여전히 부족한 것, 또 죄에 속한 것, 허물에 속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 10절에서 말하듯이 ‘모든 것을 다 지킨 자라도 한 가지를 범하면 또 다 어긴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고, 모든 죄가 아니라 한 가지 죄에 대한 삯이 다 사망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생명을 얻고 생활을 누리게 되는 이 진보, 나아가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을 다 지킴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진다면, 그 누구도 이러한 진보 가운데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칼빈은 칭의 가운데 우리가 누리는 그 생명의 의는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데, 이 은혜로 주어지는, 의의 전가로 말미암은 것이 생활로도 나아간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의로, 그 값으로 우리 생명을 사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생활도 온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율법의 조문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내가 율법에 대해서 순종할 수 있는 자질을 철저하게 갖게 됨에 있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계명이 달라진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제는 은혜로, 율법이 우리에게 행위의 의가 아니라 ‘은혜의 의’ 가운데서 율법이 우리에게 규범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우리가 율법을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율법을 대하는 우리의 행위가 바뀐 것이 아니라, 율법에 묻어 있는 언약의 법으로서의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은혜의 계명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됐는데,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자질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살아가는 완전한 삶을 우리가 행하기 때문에, 그 선행을 행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은혜 가운데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매번 날마다 살아갈 때, 율법 앞에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완전함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그리스도의 의에 완전함이 있고, 그리고 그 완전함 가운데서 우리가 누리는, 결국은 성화가 은혜가 된다는 이 그리스도인의 누리는 그 삶의 모습을 칼빈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칭의의 의를 온전히 누리는 사람은 그 의의 역사가, 단회적으로 생명을 얻지만 그 단회적으로 주어진 생명에는 생활의 은혜가 계속되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율법을 저주로 보지 않고, 율법을 우리가 자원해서, 기쁜 마음에서 지키는 자리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자질, 내 행위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율법을 우리가 지키는, 은혜로 율법 앞에 서게 되는 그것이 바로 성화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금 칭의를 다루는 곳인데 벌써 칭의와 성화를 연결시키는 이런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14.11.]
첫째,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의 잣대로 시험해 본다면 경건한 사람의 행위라고 하더라도 하나 예외 없이 저주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nullum unquam exstitisse pii hominis opus quod, si severo Dei iudicio examinaretur, non esset damnabile).
둘째, 그럴 리 없지만, 사람에게 완전한 행위가 설혹 발견된다손 치더라도 그 행위자 자신이 부대끼고 있는 죄들 때문에 그것은 악화되고 때가 묻어 더러워지며 결국 은혜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Ad haec si tale aliquod detur quod possibile homini non est, peccatis tamen, quibus laborare autorem ipsum certum est, vitiatum ac inquinatum gratiam perde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4.11.
그래서 먼저 우리가 심판의 잣대로 봤을 때는 어떤 사람도 여전히 온전치 않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혹 우리에게 완전한 행위가 있다 하더라도, 사실 그 무슨 행위조차도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는 완전하다, 철저하다고 할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은혜가 어디까지 미치느냐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어떻게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일단 화목하게 된 그 사람은 자기의 선행으로 인하여서 의를 이루고, 그리고 그 공로로 온전해지는 자리로 나아간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그래서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신인합력설’ 혹은 ‘인신합력설’인데, 그들은 뭔가 하면, 바로 거듭난 사람의 의라는 개념이 이미 행위 가운데 은혜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상 전적 은혜가 아니죠. 그 행위 가운데 누리는 것이고 행위가 자라가면서 더 누리는 것이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이 스콜라 신학자들, 로마 가톨릭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가 연결이 되지 않아요. 사실상 섞여 버려요. 구별이 되어야 되는데 구별되지 않아요. 칭의와 성화가 전부 다 성화의 영역에 들어가 버려요. 그래서 처음도 행위가 있어야 되고, 계속해서 행위가 있어야 되고.
우리의 입장은 뭡니까? 바로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는데, 칭의는 생명의 의기 때문에 단번에 주어지고, 그런데 성화는 생활의 의기 때문에 계속적인데, 그래서 생명과 생활이 구별이 되듯이 구별은 되는데, 이 성화의 은혜가 칭의 은혜와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칭의의 중심성 가운데서 성화의 은혜가 계속된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입장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를 이야기할 때는 생명이든 생활이든 전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이 개념은 살아날 때의 의도 믿음으로 얻는 것이고, 살아갈 때의 의도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것이에요. 물론 살아갈 때는 우리 행위가 있어야 되죠. 그러나 그 행위까지도 은혜로써 우리에게 역사한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이 사함을 받는 자들은 복이 있다’라고 로마서 4장 7절에서 이야기할 때, ‘불법의 사함’이라는 것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생명에 그치지 않고, 일생 동안 누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칼빈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지만,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어떤 면에서? 모두 그리스도의 의라는 것, 그 면에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구별은 되느냐? 칭의는 생명이고 단회적이고 법정적이고, 성화는 생활이고 계속적이고 반복적이고, 여기에서 구별은 된다. 그래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
‘그의 씻음과 무름과 속죄와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불법이 가려진다.’ ‘씻음’, ‘abolutio’, 그 다음에 ‘무름’, ‘satisfactio’, 그 다음에 ‘속죄’, ‘expiatio’, 그리고 ‘완전한 순종’, ‘perfecta obedientia’,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불법을, 허물을 가린다. 이것이 생명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도 관계된다. 그래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9). 그래서 자연히 지금 칭의로부터 계속 나아가는 진보 가운데서의 성화 개념이 자연스럽게 역동적으로 연결되는 이것이 바로 개혁신학의 이중은혜론, 칭의와 성화에 대한 역동적 이해입니다.
[『기독교 강요』, 3.14.12.]
로마 가톨릭은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은혜’라고 해서, ‘gratia acceptans’라고 해서 받아들이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 받아들이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합력적인 공로’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아들이는 그 받아들임에 공로가 있다. 행위가 있다는 거예요. 받아들임의 공로, 행위가 바로 믿음으로 작용해요. 믿음이 공로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내 공로로 내가 이루기 때문에, 이미 자질의 개념이기 때문에, 자질로 나가니까 자질이 찬다는 개념이 나와요, 로마 가톨릭은. 우리는 전적인 은혜이기 때문에 내 자질이 차서 이 자질이 넘친다, 이런 개념이 없잖아요.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고요. 어떤 사람은 그러한 자질이 충만해서 평균적으로 요구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넘어서서 누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나에게 있다, ‘gratia acceptans’, 받아들이는 그 은혜가 나에게 있다.
[『기독교 강요』, 3.14.13-16.]
받아들이는 은혜에서 받아들이는 게 내 공로란 말이에요. 받아들이는 게 내 공로이기 때문에, 그 공로가 이미 차서 넘치는 사람에게는 잉여 공로가 있다는 아주 해괴한 교리가 나오는 거죠. 잉여 공로 사상이 나오는 거죠. 그 잉여 공로가, 남은 공로가 특별히 성자들, 로마 가톨릭의 성인들이라고도 하고 그런 사람들, 그다음에 마리아, 또 사제들, 그 잉여 공로들이 교회의 창고에 가득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로의 보고다, 공로의 창고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보속론’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 가톨릭의 회개를 다룰 때, 세 번째 요소가 바로 행위의 보속이라고 할 때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잉여 공로 개념이나 이런 것은 있을 수 없죠. 여러분, 은혜가 아니고 공로라면 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 공도가 남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구원받고 남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남는 것을 남에게 빌려줄 수도 있고, 그런 사상에서 나온 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의 보속 사상이고, 연옥 사상이고 그런 것이란 거죠. 그래서 우리는 잉여 공로의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노예들의 재산과 같은 처지에 있다. 그 마땅한 권리는 주인 자신에게 속한다(nostra omnia eandem habere conditionem cum servorum peculiis, quae iure ipso deberi domino constat). -크리소스토무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4.15.
크리소스토무스가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노예들이 주인에게 베풂을 받는 자리에 있는 것과 같다.’ 물론 고대적 개념의 주인과 노예, 이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바로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은 주인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은 우리에게 그 자신과 함께 그 자신께 속한 것을 주신다. 그 자신을 주시는 것이 생명의 개념이라면, 그 자신에 속한 것을 주는 것은 바로 거룩의 개념, 생활의 개념이다.
그래서 칭의라는 개념은 분명히 신분이고 존재이고 생명이지만, 그 생명과 존재와 신분에는 필히 생활이 따른다는 거죠. 생활이 따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생명이 은혜이듯이 생활도 은혜이고,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은혜이고, 우리 각자에게 합당하게 하나님이 부여해 주시고, 달란트를 각각에 맞추어 주시듯이, 그래서 잉여 개념은 없습니다. 합력 개념도 없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공로 개념도 없고, 전적인 은혜입니다. 전적인 은혜로 우리가 누리게 된다. 이것을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해서 칼빈은 서서히 칭의와 성화를 연결시켜 가는 그것을 여기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
자 이 부분은 잠시 정리해 본다면,
첫째,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로 죄 사함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말씀을 지키는 거룩하고 순수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요는 이 둘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칭의도 은혜고, 성화도 은혜고. 금방 우리가 또 덧붙여서 말할 수 있죠, 견인. 그래서 생명도 생활도 끌고 가신다, 이끄신다.
두 번째, 로마 가톨릭은 중생하게 된 사람은 선행의 공로로써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우리의 행위는 완전하지 않으며 그 불법이 그리스도의 씻음, 무름, 속죄, 완전한 순종으로만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공로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덧붙여서, 우리의 공로가 완전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질, 공로는 언제나 완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것이 더해져서 내 것이 완전해진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 것은 처음부터 없고 주님의 완전한 것이 내 안에서 역사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주님의 완전한 것이 내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로마 가톨릭은 잉여 행위의 공로에 근거해서 보속을 이야기하지만은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의는 내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고, 그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잉여 공로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족한 것이지 내 공로가 족한 적이 없습니다.
네 번째, 은혜를 받아들임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따라서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받아들여짐이다, 말이에요. 수동성이란 말이에요. 받아들이는 것도 내 공로가 아니다, 말이에요. 로마 가톨릭은 받아들이는 공로가 있다고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세상에 은혜를 누리는 공로를 어떻게 말할 수가 있냐, 이 말이에요, 우리가. 배가 고파서 음식을 거저 주어서 내가 먹었는데, 내 먹은 공로를 이야기할 수 있냐 말이에요. 누린 은혜가 전직인 거죠. 그래서 받아들이는 공로의 협력으로 받아들이는 은혜, 받아들이는 공로 개념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무조건, 전적으로 베풀어지는 은혜밖에 없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 칭의와 성화를 연결시키는 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126강 결론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로 죄사함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말씀을 지키는 거룩하고 순수한 삶을 살게 됩니다.
로마 가톨릭은 중생하게 된 사람은 선행의 공로로써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우리의 행위는 완전하지 않으며 그 불법이 그리스도의 씻음, 무름, 속죄, 완전한 순종으로만 가려집니다.
로마 가톨릭은 잉여 행위의 공로에 근거해서 보속을 주장하나, 우리는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하는 것이니 행함에 남는 공로는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들임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따라 받아들여짐이며, 받아들이는 공로의 협력으로 받아들이는 은혜를 누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