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멀리해야 할 금지령이 아담에게 떨어졌다(창 2:16-17). 그 나무가 있게 된 것은 아담의 순종을 시험하고 그가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 거하며 그것에 따르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실로 그 나무의 이름 자체가 보여 주듯이, 그 명령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사악한 정욕에 빠져 우쭐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사람을 통하여 지정의(知情意)의 ‘인격적인 순종’을 받기 위함이셨습니다. 사람은 알고 느끼고 뜻하는 가운데, 곧 지정의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그러한 ‘인격적 순종의 주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서 그 ‘순종’(obedientia)을 받으시고 사람을 ‘자녀’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 ‘자녀 삼으심’이 ‘영생’입니다. 영생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에게 자녀가 되는 영생의 열매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사망이 들어와서 모든 인류가 다 ‘죽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아담과 언약(foedus)을 맺으신 것은 아담의 순종을 통하여서 영광받기 위하심이였습니다. 아담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품속에 거하기를 기뻐하는지를 하나님은 아담의 지정의를 통하여, 인격적 순종을 통하여 확인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인격적 순종’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조물주요, 창조주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고, 그 순종을 받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교만이 모든 악의 시작이었다(superbiam…malorum omnium fuisse initium).”라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말한 것은 참으로 옳다. 왜냐하면 만약 야심이 사람을 허용된 한계와 정당한 범위 너머로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의 본래 위치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뱀의 사술에 이끌린 여자는 불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으므로, 불순종이 파멸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은(initium ruinae…fuisse inobedientiam) 이미 명백하다. … 불충이 배역(背逆)의 뿌리였던 것이다(infidelitas radix defectionis fuit).
아담은 자기에게 과분하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그 큰 후하심을 수치스럽게 내차버리고 부여된 것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배은망덕에 연이어 야심과 교만을 자기 속에 불러일으켰다[참조. 『기독교 강요』, 2.1.4. 각주 20.].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교만’(superbia)함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순종’(inobedientia)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교만이 모든 악의 시작이다.’ 그리고 ‘불순종이 파멸(ruina)의 시작이다.’ 이러한 말들을 합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것이죠. 바울은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속하고 망하게 되었다고 로마서 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참조. 롬 5:19). ‘아담은 죄를 지은 것이 단순히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은 ‘자기 의지’에 따른 것이요, ‘배은망덕’한 것이요, ‘불충’(infidelitas)한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그러한 충성스러운 마음, 신실한 마음이 사라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교만과 배은망덕과 불충이 다 함께 어우러지고, 그 가운데 야심(ambitio)이 차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야심에 가득차서, 그래서 칼빈은 “불충으로 야심의 문이 열린 것이다.야심은 오만불손함의 어머니였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은 교만의 문을 열었습니다. 불충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문’을 열어야 되죠.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해야 되죠. 중세에 베르나르두스(Bernardus)는 그래서 아담이 사탄에게 길을 열었을 때 타락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복음의 길’을 열어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길’을 열어서 ‘구원의 문’을 열어야 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의를 기경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들에 복종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어디에도 없으며 행복한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에게 사랑받는 데 있다. 이것이 심중의 모든 정서를 올바르게 조절하는 최고의 굴레였다(Optimum scilicet hoc erat fraenum ad omnes affectus rite temperandos, nihil melius esse quam Dei mandatis parendo colere iustitiam; deinde ultimam felicis vitae metam esse ab ipso diligi).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저주들에 사로잡힌 아담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하나님의 영광을 소진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
우리 인생의 최고의 특권이 무엇이겠습니까? 최고의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imperium)하시고 지시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이용하시고자 하심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이루시고자 말씀으로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면 ‘자녀 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말씀의 뜻은, 명령의 뜻은 우리에게 단지 육신의 삶을 살고 지상의 삶을 사는 데 머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그 영적인 생명,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1.5.]
그[아담]의 배역함으로 천지의 모든 자연 질서가 뒤틀어졌을 뿐 아니라 그의 종족인 인류가 파멸에 내던져졌다는 사실은 결코 기이하지 않다(참조. 창 3:15-19).
… 우주 전 지역에 창궐한 저주가 위로나 아래로나 흘러넘치는 것은 아담의 죄과(罪科) 때문이므로 그것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퍼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논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Quum ergo sursum et deorsum ex eius culpa fluxerit maledictio, quae grassatur per omnes mundi plagas, nihil a ratione alienum, si propagata fuerit ad totam eius sobolem). … 이것은 물려받는 오염(haereditaria corruptio)이며 옛사람들은 이를 “원죄”(peccatum originale)라고 불렀다[참조. 『기독교 강요』, 2.1.4. 각주 2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이제 ‘사망’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육신의 죽음’이 들어온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사망’에 다 이르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사망’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양을 조금만 떠나도 추위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류에게는 ‘형벌의 고난’이 미쳤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덕성’과 ‘거룩’과 ‘진리’와 ‘의’라는, 이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니까 ‘무지몽매’(無知蒙昧)하고 ‘무능’하고 ‘불순’하고 ‘헛’되고 ‘불의’한, 이것이 다 ‘고난’입니다. ‘옳은 길을 가지 않는 것’,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고난’입니다. 이러한 ‘비참한 상태’, 이것이 우리에게 다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의 죄로 ‘언약의 대표의 원리’에 따라 전가(轉嫁, imputatio)됩니다, 이제. 그래서 우리는 ‘타고난 죄’ 가운데, ‘원죄’(peccatum originale) 가운데, ‘전가된 죄’(peccatum imputatam), 곧 원죄 가운데 ‘사망의 형벌’에 속하고 ‘오염’ 가운데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태어날 때부터 ‘죽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오염’되어서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 할 능력도 없고, 아주 흉물스럽고, 아주 흉악한 그 모습, 바로 오그라들고 찌그러든 그 모습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인다는 것이죠. 이러한 것이 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로되, ‘아담의 죄는 우리의 죄’입니다. 남의 죄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적 전가’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고 아담을 ‘머리’(caput)로 삼으셨기 때문에, ‘아담의 죄가 모든 후손에게 미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는 ‘타고난 것’이요, 우리에게 사망은 ‘태생적’(胎生的)인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 아담 자신은 저주를 받았지만 그의 후손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참람한 사술을 들고 등장한 펠라기우스 … 그러나 처음 사람으로부터 모든 후손에게 죄가 옮겨졌다는 사실이(peccatum a primo homine transiisse in totam posteritatem) 성경의 분명한 증언에 의해 드러나자(롬 5:12) 펠라기우스는 그것이 번식이 아니라 모방을 통해 옮겨졌다고(per imitationem, non propaginem) 얼버무렸다[참조. 『기독교 강요』, 2.1.5. 각주 31].
이를 보고 선한 사람들은, 누구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외래적(外來的) 악에 의해 부패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래적(生來的) 허물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nos non ascita nequitia corrumpi, sed ingenitam vitiositatem ab utero matris afferre) 보여 주려고 애썼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
아우구스티누스와 논쟁을 했던 펠라기우스(Pelagius)는 죄는 ‘모방’을 통해서 온다라고 해서, 죄는 ‘후천적’으로 배워서 짓는 것이다라고 해서 원죄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물려받은 생래적(生來的)인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51편 5절에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그렇게 노래합니다. 욥기 14장 4절에서는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우리가 더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 중에 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기독교 강요』. 2.1.6.]
우리가 이 오염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찾으려면 그 원천이 되는 모든 사람의 첫 번째 부모에게 필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분명히 견지해야 할 바는, 아담은 단지 우리의 선조일 뿐만 아니라 인성의 뿌리로서 그의 오염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응당 사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
모든 인류는 아담을 ‘언약의 머리’(caput foederis)로 삼는 그 ‘언약의 대표의 원리’에 따라서 아담이 타락한 ‘죄의 전가’로, ‘원죄’로 다 ‘사망’에 속하고 다 ‘오염’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의 의와 그것에 기인한 생명이 우리에게 교통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다면, 이로부터 즉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이 둘을 모두 잃어버렸으나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들을 되찾았다는 사실과 진정 죄와 죽음이 아담을 통하여 우리에게 잠입하였으나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소멸되었다는 사실이 필히 파생된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들이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에는 어떤 모호함도 없다(롬 5:19). 여기에 이 둘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있으니, 아담은 그의 죄에 우리를 연루시켜 우리를 그와 함께 멸망에 이르게 했고 그리스도는 그의 은혜로 우리를 회복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quod hic nos suo exitio involutos secum perdidit, ille nos sua gratia in salutem restituit)[참조. 『기독교 강요』, 2.1.6. 각주 39].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
이 대표의 원리가 어디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까? 바로 ‘로마서 5장 12-21절’까지 잘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롬 5:12).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회복된다(롬 5:17).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롬 5:18).
바로 아담이 ‘첫 언약의 머리’라면, 그리스도가 바로 ‘새 언약의 머리’, 아담이 죄를 지어 그의 죄가 우리의 죄가 되었다면, 그리스도가 모든 의를 이루셔서 ‘그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서 ‘상실’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아담에게서 ‘약속’으로만 있었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취’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아담은 언약에 불순종하여 ‘영생의 의’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이제 우리는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 짓기 전의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 짓기 전의 아담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언약을 ‘성취’한 상태로까지 우리는 나아가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담보다 우리의 상태가 더 높은 것입니다.
여기에서[“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3] ‘본질상’(natura)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본성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사악해진 본성을 가르키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죽음의 조성자로 삼는 것보다 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아담은 자기를 오염시켜 자기로부터 자기의 모든 후손에게 전염이 되게 한 것이다(Sic ergo se corrupit Adam, ut ab eo transierit in totam sobolem contagi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본질’이라는 말은 ‘타락한 본성’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실 때는 ‘순전’(純全)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죽음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지정의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타락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어서 사망에 속하고, 모든 행하는 것이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물 마시듯이 하고, 고개만 돌려도 악을 생각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7.]
우리는 여호와가 인성에 부여되기를 원하셨던 선물들을 아담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아담이 여호와에게서 받았던 그 선물들을 잃어버렸을 때, 그 상실은 그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일어났다(quum [dotes] acceptas perdidit, non tantum sibi perdidisse, sed nobis omnibus). 아담이 잃어버린 저 화려한 장식들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받았던 것들이라는 사실과 그것들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맡겨졌던 것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듣게 되는바, 누가 영혼의 유전에 대해서 개의할 것인가[참조. 『기독교 강요』, 2.1.7. 각주 4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
아담이 여호와에게서 받았던 ‘선물’들을 다 ‘상실’했습니다. 그 아담이 상실한 것이, 그 ‘비참함’이 우리에게 다 상실감으로, 비참함으로 고스란히 우리의 것으로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 곧 ‘영생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우리로부터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담의 죄의 전가, 그 오염, 그것의 전염은 모든 것에 다 미칩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나, 보이는 것도 흉물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행동도, 움직임도,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사고도, 의지도, 전부 다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타고난 죄’ 가운데, ‘원죄’ 가운데, 그 ‘죄의 책임’, 그것을 우리가 다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오염되어 하나도 볼품이 없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저 인간이 더불어 사는 가죽옷을 입혀 준 정도의 ‘일반은총’은 누리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신령한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썩은 존재, 부패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남이 영적인 사망’이요, 그것이 ‘저주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나, 이제 마귀, 사탄의 그 굴레에 속하여서, ‘죄의 종’이 되어서, ‘사탄의 하수’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그것이 ‘영적인 사망’인 것입니다. 인류의 타락으로 보편적인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이 저주가 임하였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특별한 은총’이 있어야 되죠. 자연적인 것으로 되지 않죠. ‘초자연적인 은총’이 있어야 되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책은 본성으로부터 나오나 성화는 초자연적인 은총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담이 ‘주어진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순종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영광 받으심’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언약을 불순종하고, 교만의 자리, 배은망덕의 자리, 불충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둘째, 아담의 죄는 그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 ‘불순종’은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불순종인 것입니다, 그의 말씀에 불순종함은. 그래서 교만과 오만, 불순이 인간의 야심으로 말미암아 들어왔습니다.
셋째, 원죄는 바로 아담의 죄과(罪科), 아담의 죄행(罪行), 그것에 대한 죄책(罪責)이 모든 인류에게 미치는 사망의 형벌과 함께, 하나님을 떠난 그 영혼의 멸망, 그 오염, 그 무능, 그 부패가 함께 인류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전가는 ‘죄책’, 곧 ‘사망의 형벌’의 전가와 ‘오염’, 곧 ‘전적 무능’과 ‘전적 부패’의 전가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아담의 불순종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죄의 전가죠.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의 의를 전가’ 받은 사람은 모든 사람, 이 모든 사람은 ‘택함’ 받은 사람이죠. 그 택함 받은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대표의 원리’요, 로마서 5장 12절에서 21절에까지 전하는 바인 것입니다.
45강 결론
하나님은 아담이 주어진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셔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으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충과 배은망덕,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자 한 교만과 오만불손이 낳은 야심 탓이었습니다.
원죄로 아담의 죄과로 인한 죄책이 미쳐 인류 모두가 사망의 형벌에 놓이게 되었고, 하나님을 떠나 영혼의 멸망(영적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며, 처음 인류에게 부여된 순전한 본성을 상실하고 타고난 오염에 젖어 선하고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사망에 이르렀으나(죄의 전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의 의를 전가받은 사람 모두에게 생명이 회복됩니다(의의 전가).
45강 | 2.1.4-7. (2권 29-38페이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책과 오염의 전가
[『기독교 강요』. 2.1.4.]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멀리해야 할 금지령이 아담에게 떨어졌다(창 2:16-17). 그 나무가 있게 된 것은 아담의 순종을 시험하고 그가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 거하며 그것에 따르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실로 그 나무의 이름 자체가 보여 주듯이, 그 명령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사악한 정욕에 빠져 우쭐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사람을 통하여 지정의(知情意)의 ‘인격적인 순종’을 받기 위함이셨습니다. 사람은 알고 느끼고 뜻하는 가운데, 곧 지정의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그러한 ‘인격적 순종의 주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서 그 ‘순종’(obedientia)을 받으시고 사람을 ‘자녀’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 ‘자녀 삼으심’이 ‘영생’입니다. 영생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에게 자녀가 되는 영생의 열매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사망이 들어와서 모든 인류가 다 ‘죽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아담과 언약(foedus)을 맺으신 것은 아담의 순종을 통하여서 영광받기 위하심이였습니다. 아담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품속에 거하기를 기뻐하는지를 하나님은 아담의 지정의를 통하여, 인격적 순종을 통하여 확인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인격적 순종’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조물주요, 창조주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고, 그 순종을 받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교만이 모든 악의 시작이었다(superbiam…malorum omnium fuisse initium).”라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말한 것은 참으로 옳다. 왜냐하면 만약 야심이 사람을 허용된 한계와 정당한 범위 너머로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의 본래 위치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뱀의 사술에 이끌린 여자는 불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으므로, 불순종이 파멸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은(initium ruinae…fuisse inobedientiam) 이미 명백하다. … 불충이 배역(背逆)의 뿌리였던 것이다(infidelitas radix defectionis fuit).
아담은 자기에게 과분하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그 큰 후하심을 수치스럽게 내차버리고 부여된 것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배은망덕에 연이어 야심과 교만을 자기 속에 불러일으켰다[참조. 『기독교 강요』, 2.1.4. 각주 20.].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교만’(superbia)함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순종’(inobedientia)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교만이 모든 악의 시작이다.’ 그리고 ‘불순종이 파멸(ruina)의 시작이다.’ 이러한 말들을 합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것이죠. 바울은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속하고 망하게 되었다고 로마서 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참조. 롬 5:19). ‘아담은 죄를 지은 것이 단순히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은 ‘자기 의지’에 따른 것이요, ‘배은망덕’한 것이요, ‘불충’(infidelitas)한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그러한 충성스러운 마음, 신실한 마음이 사라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교만과 배은망덕과 불충이 다 함께 어우러지고, 그 가운데 야심(ambitio)이 차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야심에 가득차서, 그래서 칼빈은 “불충으로 야심의 문이 열린 것이다.야심은 오만불손함의 어머니였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은 교만의 문을 열었습니다. 불충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문’을 열어야 되죠.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해야 되죠. 중세에 베르나르두스(Bernardus)는 그래서 아담이 사탄에게 길을 열었을 때 타락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복음의 길’을 열어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길’을 열어서 ‘구원의 문’을 열어야 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의를 기경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들에 복종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어디에도 없으며 행복한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에게 사랑받는 데 있다. 이것이 심중의 모든 정서를 올바르게 조절하는 최고의 굴레였다(Optimum scilicet hoc erat fraenum ad omnes affectus rite temperandos, nihil melius esse quam Dei mandatis parendo colere iustitiam; deinde ultimam felicis vitae metam esse ab ipso diligi).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저주들에 사로잡힌 아담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하나님의 영광을 소진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
우리 인생의 최고의 특권이 무엇이겠습니까? 최고의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imperium)하시고 지시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이용하시고자 하심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이루시고자 말씀으로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면 ‘자녀 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말씀의 뜻은, 명령의 뜻은 우리에게 단지 육신의 삶을 살고 지상의 삶을 사는 데 머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그 영적인 생명,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1.5.]
그[아담]의 배역함으로 천지의 모든 자연 질서가 뒤틀어졌을 뿐 아니라 그의 종족인 인류가 파멸에 내던져졌다는 사실은 결코 기이하지 않다(참조. 창 3:15-19).
… 우주 전 지역에 창궐한 저주가 위로나 아래로나 흘러넘치는 것은 아담의 죄과(罪科) 때문이므로 그것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퍼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논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Quum ergo sursum et deorsum ex eius culpa fluxerit maledictio, quae grassatur per omnes mundi plagas, nihil a ratione alienum, si propagata fuerit ad totam eius sobolem). … 이것은 물려받는 오염(haereditaria corruptio)이며 옛사람들은 이를 “원죄”(peccatum originale)라고 불렀다[참조. 『기독교 강요』, 2.1.4. 각주 2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이제 ‘사망’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육신의 죽음’이 들어온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사망’에 다 이르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사망’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양을 조금만 떠나도 추위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류에게는 ‘형벌의 고난’이 미쳤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덕성’과 ‘거룩’과 ‘진리’와 ‘의’라는, 이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니까 ‘무지몽매’(無知蒙昧)하고 ‘무능’하고 ‘불순’하고 ‘헛’되고 ‘불의’한, 이것이 다 ‘고난’입니다. ‘옳은 길을 가지 않는 것’,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고난’입니다. 이러한 ‘비참한 상태’, 이것이 우리에게 다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의 죄로 ‘언약의 대표의 원리’에 따라 전가(轉嫁, imputatio)됩니다, 이제. 그래서 우리는 ‘타고난 죄’ 가운데, ‘원죄’(peccatum originale) 가운데, ‘전가된 죄’(peccatum imputatam), 곧 원죄 가운데 ‘사망의 형벌’에 속하고 ‘오염’ 가운데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태어날 때부터 ‘죽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오염’되어서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 할 능력도 없고, 아주 흉물스럽고, 아주 흉악한 그 모습, 바로 오그라들고 찌그러든 그 모습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인다는 것이죠. 이러한 것이 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로되, ‘아담의 죄는 우리의 죄’입니다. 남의 죄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적 전가’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고 아담을 ‘머리’(caput)로 삼으셨기 때문에, ‘아담의 죄가 모든 후손에게 미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는 ‘타고난 것’이요, 우리에게 사망은 ‘태생적’(胎生的)인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 아담 자신은 저주를 받았지만 그의 후손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참람한 사술을 들고 등장한 펠라기우스 … 그러나 처음 사람으로부터 모든 후손에게 죄가 옮겨졌다는 사실이(peccatum a primo homine transiisse in totam posteritatem) 성경의 분명한 증언에 의해 드러나자(롬 5:12) 펠라기우스는 그것이 번식이 아니라 모방을 통해 옮겨졌다고(per imitationem, non propaginem) 얼버무렸다[참조. 『기독교 강요』, 2.1.5. 각주 31].
이를 보고 선한 사람들은, 누구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외래적(外來的) 악에 의해 부패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래적(生來的) 허물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nos non ascita nequitia corrumpi, sed ingenitam vitiositatem ab utero matris afferre) 보여 주려고 애썼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5.
아우구스티누스와 논쟁을 했던 펠라기우스(Pelagius)는 죄는 ‘모방’을 통해서 온다라고 해서, 죄는 ‘후천적’으로 배워서 짓는 것이다라고 해서 원죄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물려받은 생래적(生來的)인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51편 5절에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그렇게 노래합니다. 욥기 14장 4절에서는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우리가 더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 중에 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기독교 강요』. 2.1.6.]
우리가 이 오염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찾으려면 그 원천이 되는 모든 사람의 첫 번째 부모에게 필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분명히 견지해야 할 바는, 아담은 단지 우리의 선조일 뿐만 아니라 인성의 뿌리로서 그의 오염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응당 사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
모든 인류는 아담을 ‘언약의 머리’(caput foederis)로 삼는 그 ‘언약의 대표의 원리’에 따라서 아담이 타락한 ‘죄의 전가’로, ‘원죄’로 다 ‘사망’에 속하고 다 ‘오염’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의 의와 그것에 기인한 생명이 우리에게 교통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다면, 이로부터 즉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이 둘을 모두 잃어버렸으나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들을 되찾았다는 사실과 진정 죄와 죽음이 아담을 통하여 우리에게 잠입하였으나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소멸되었다는 사실이 필히 파생된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들이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에는 어떤 모호함도 없다(롬 5:19). 여기에 이 둘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있으니, 아담은 그의 죄에 우리를 연루시켜 우리를 그와 함께 멸망에 이르게 했고 그리스도는 그의 은혜로 우리를 회복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quod hic nos suo exitio involutos secum perdidit, ille nos sua gratia in salutem restituit)[참조. 『기독교 강요』, 2.1.6. 각주 39].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
이 대표의 원리가 어디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까? 바로 ‘로마서 5장 12-21절’까지 잘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롬 5:12).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회복된다(롬 5:17).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롬 5:18).
바로 아담이 ‘첫 언약의 머리’라면, 그리스도가 바로 ‘새 언약의 머리’, 아담이 죄를 지어 그의 죄가 우리의 죄가 되었다면, 그리스도가 모든 의를 이루셔서 ‘그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서 ‘상실’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아담에게서 ‘약속’으로만 있었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취’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아담은 언약에 불순종하여 ‘영생의 의’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이제 우리는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 짓기 전의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 짓기 전의 아담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언약을 ‘성취’한 상태로까지 우리는 나아가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담보다 우리의 상태가 더 높은 것입니다.
여기에서[“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3] ‘본질상’(natura)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본성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사악해진 본성을 가르키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죽음의 조성자로 삼는 것보다 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아담은 자기를 오염시켜 자기로부터 자기의 모든 후손에게 전염이 되게 한 것이다(Sic ergo se corrupit Adam, ut ab eo transierit in totam sobolem contagi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본질’이라는 말은 ‘타락한 본성’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실 때는 ‘순전’(純全)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죽음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지정의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타락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어서 사망에 속하고, 모든 행하는 것이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물 마시듯이 하고, 고개만 돌려도 악을 생각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7.]
우리는 여호와가 인성에 부여되기를 원하셨던 선물들을 아담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아담이 여호와에게서 받았던 그 선물들을 잃어버렸을 때, 그 상실은 그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일어났다(quum [dotes] acceptas perdidit, non tantum sibi perdidisse, sed nobis omnibus). 아담이 잃어버린 저 화려한 장식들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받았던 것들이라는 사실과 그것들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맡겨졌던 것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듣게 되는바, 누가 영혼의 유전에 대해서 개의할 것인가[참조. 『기독교 강요』, 2.1.7. 각주 4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
아담이 여호와에게서 받았던 ‘선물’들을 다 ‘상실’했습니다. 그 아담이 상실한 것이, 그 ‘비참함’이 우리에게 다 상실감으로, 비참함으로 고스란히 우리의 것으로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 곧 ‘영생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우리로부터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담의 죄의 전가, 그 오염, 그것의 전염은 모든 것에 다 미칩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나, 보이는 것도 흉물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행동도, 움직임도,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사고도, 의지도, 전부 다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타고난 죄’ 가운데, ‘원죄’ 가운데, 그 ‘죄의 책임’, 그것을 우리가 다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오염되어 하나도 볼품이 없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저 인간이 더불어 사는 가죽옷을 입혀 준 정도의 ‘일반은총’은 누리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신령한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썩은 존재, 부패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남이 영적인 사망’이요, 그것이 ‘저주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나, 이제 마귀, 사탄의 그 굴레에 속하여서, ‘죄의 종’이 되어서, ‘사탄의 하수’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그것이 ‘영적인 사망’인 것입니다. 인류의 타락으로 보편적인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이 저주가 임하였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특별한 은총’이 있어야 되죠. 자연적인 것으로 되지 않죠. ‘초자연적인 은총’이 있어야 되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책은 본성으로부터 나오나 성화는 초자연적인 은총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담이 ‘주어진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순종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영광 받으심’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언약을 불순종하고, 교만의 자리, 배은망덕의 자리, 불충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둘째, 아담의 죄는 그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 ‘불순종’은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불순종인 것입니다, 그의 말씀에 불순종함은. 그래서 교만과 오만, 불순이 인간의 야심으로 말미암아 들어왔습니다.
셋째, 원죄는 바로 아담의 죄과(罪科), 아담의 죄행(罪行), 그것에 대한 죄책(罪責)이 모든 인류에게 미치는 사망의 형벌과 함께, 하나님을 떠난 그 영혼의 멸망, 그 오염, 그 무능, 그 부패가 함께 인류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전가는 ‘죄책’, 곧 ‘사망의 형벌’의 전가와 ‘오염’, 곧 ‘전적 무능’과 ‘전적 부패’의 전가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아담의 불순종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죄의 전가죠.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의 의를 전가’ 받은 사람은 모든 사람, 이 모든 사람은 ‘택함’ 받은 사람이죠. 그 택함 받은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대표의 원리’요, 로마서 5장 12절에서 21절에까지 전하는 바인 것입니다.
45강 결론
하나님은 아담이 주어진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셔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으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충과 배은망덕,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자 한 교만과 오만불손이 낳은 야심 탓이었습니다.
원죄로 아담의 죄과로 인한 죄책이 미쳐 인류 모두가 사망의 형벌에 놓이게 되었고, 하나님을 떠나 영혼의 멸망(영적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며, 처음 인류에게 부여된 순전한 본성을 상실하고 타고난 오염에 젖어 선하고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사망에 이르렀으나(죄의 전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의 의를 전가받은 사람 모두에게 생명이 회복됩니다(의의 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