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강 [3.4.1-24] 스콜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마음의 통회와 입의 고백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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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 3.4.1-24. (3권 169-212쪽)



스콜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마음의 통회와 입의 고백 비판


[『기독교 강요』, 3.4.1.]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스콜라 신학자들은 회개를 두 가지 측면에서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형식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어떤 외적인 표, 그리고 금식, 우는 것, 어떤 금욕, 이런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회개를 성례의 하나로 여기고, 그래서 로마 가톨릭의 7성례, 그 가운데 한 성례로서 다루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회개에는 세 요소가 있어야 효과적이다, 효과 있는 회개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마음의 통회’(contritio cordis)가 있어야 되고, 두 번째는 ‘입의 고백’(confessio oris)이 있어야 되고, 세 번째는 ‘행위의 보속’(satisfactio operis)이 있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음의 통회라는 것은 진정 충만하게, 완전하게 마음의 뉘우침, 돌이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입의 고백은 공적으로 자기의 죄를 선언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해 사제, 이런 공식적인 교회의 직분자 앞에서 자기 죄를 내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위의 보속은 잘못한 것에 대한 형벌, 그 형벌의 값을 치뤄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번에는 이 앞에 두 가지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이 세 가지 중에 첫 번째, 두 번째에 해당하는 그 마음의 통회와 입의 고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음의 통회에 대해서 로마 가톨릭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강요』, 3.4.2.]

그들[로마 가톨릭]은 통회가 마땅한 만큼 이루어지도록, 즉 합당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요구한다(eamque[contritionem] debitam exigunt, hoc est iustam et plen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2.

     ‘마음의 통회가 충분하리만큼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는 것이 다 우는 것이 아니요, 뉘우치는 것이 다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충분한 슬픔과 그리고 후회함, 이런 것들이 표현되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양심에 속한 일이란 말이에요.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회개가 없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데, 이들은 이 회개를 일단 공로적 요소로 봅니다, 로마 가톨릭은. 회개를 공로적 요소로 보기 때문에, 이 회개에 대한 각자의 태도, 또 각자가 그 회개를 향하여 드러내는 행위, 이런 것들이 공로로서 측량이 된다는 것이죠, 공로로서 헤아려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완전함을 채워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 완전함을 채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이나 하나님 앞에서 뉘우침, 이런 것을 어떻게 우리가 측량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그 완전한 분량을 누가 알겠어요. 

[『기독교 강요』, 3.4.3.]

우리는 죄인이 자기의 양심의 가책이나 자기의 눈물을 바라보지 말고 두 눈을 주님의 유일한 자비에 고정시켜야 한다고 가르쳤다(Peccatorem docuimus non in suam compunctionem, neque in suas lacrymas intueri, sed utrumque oculum in solam Domini misericordiam defige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3.

     그래서 칼빈은 ‘회개에서 우리는 자기의 눈물을 헤아리지 말고 하나님의 유일한 자비의 그 눈빛, 그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에 주목해야 된다,’ 이렇게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그리고 마음을 찢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이것이 이미 은혜라는 이 측면에서(사 61:1; 눅 4:18) 우리가 접근해야 되거든요. 불가항력적으로 이전의 것으로부터 뉘우치고, 돌이키고, 분함을 느끼고, ‘내가 왜 이랬을꼬?’ 그리고 ‘이게 옳구나!’ 올바른 데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회개의 일곱 가지 요소에서 봤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러한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통회를 하나의 공로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회개에는 돌이킴의 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적인 은혜로서, 회개의 은혜, 회심의 은혜, 돌이킴의 은혜, 불가항력적으로 나를 버리고 하나님 쪽으로 향하여 가는 그 ‘conversio,’ 전향, 회심,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거든요. 그래서 금방 우리가 이야기했듯이, ‘내 눈물을 헤아리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이것이 칼빈이 첫 번째 로마 가톨릭의 요소라고 하는 마음의 통회에 대하여 비판하는 부분입니다. 

[『기독교 강요』, 3.4.4.]

     이제 두 번째로 로마 가톨릭이 회개 요소로 삼고 있는 입의 고백, 이것은 제사장들, 소위 그들이 말하는 회개를 받는 고해 사제들 앞에서 공적으로 자기들의 죄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로마 가톨릭은 ‘나병 환자들이 자기들이 이제 나병이 낫고 회복되고 하면, 이제 그것이 이제 부정으로부터, 불결로부터 벗어났고 그때 제사장들에게 보내졌다(레 14:2-3). 그거 봐라. 그러니까 제사장들에게 고백한 거 아니냐,’ 이렇게 자주 인용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이나 이런 데 계속해서 이 말씀이 나오니까, 이러한 예식에 따라서 제사장들, 사제들에게 가서 고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벌써 우리가 한마디로 이 말씀은 그릇되죠. 모든 제사장 직분이 폐하여졌잖아요.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히 7:12). 이제는 우리의 유일하신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고, 그의 의로 우리가 온전함을 입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3.4.5.]

     또 로마 가톨릭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그때, ‘나사로가 동인 것을 풀고 자유롭게 하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했다(요 11:44)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들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게 했다, 제자들에게 그것을 드러내게 했다, 고백받게 했다, 이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뭐 굳이 우리가 여러 개를 들지 않더라도 이런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기독교 강요』, 3.4.6.]

     요한의 세례로 나온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고(마 3:6), 야고보서에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것(약 5:16)은 상호 간의 권고와 또 권징과 또 상호 간의 어떤 위로, 이런 것을 위한 것이지 죄를 사함 받는 것을 그 고백 가운데 하나의 요소로서 삼는 그러한 고백은 결코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위하여 자기 죄를 내려놓고, 그리고 서로 고백하는 이런 것은 기도하는 가운데서 서로 그들을 위로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함을 꾀하고 하는 그런 것이지, 로마 가톨릭이 성례화하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고 모든 입을 막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만 나아가서 토설하고 그것이 죄 사함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것이죠. 이미 은혜 가운데 그러한 토설이 있는 것이지, 토설 가운데 은혜가 뒤따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독교 강요』, 3.4.7.]

     칼빈은 이러한 것이 고대의 법에도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자기들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그릇된, 형식적인 예식에 불과하다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3.4.8.]

당신의 죄를, 그것을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말하십시오. 그것을 당신의 침상에서 고백하십시오.…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이 고백하는 것을 보게 하십시오.…당신의 상처를 가장 뛰어난 의사이신 하나님께 보이십시오. 그리고 그에게서 처방을 찾으십시오. 꾸짖지 않고 가장 자상하게 고쳐 주시는 그에게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dicito Deo qui curat ea; peccata tua super stratum confitere … solus Deus te confitentem videat … ostende Domino, praestantissimo medico, tua vulnera, et pete ab eo medicamentum; ostende ei qui nihil opprobret, sed humanissime curet). -크리소스토무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8.

     초대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토무스는 “당신의 죄를, 그것을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말씀하십시오. 그것을 당신의 침상에서 고백하십시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이 고백하는 것을 보게 하십시오.” “당신의 상처를 가장 뛰어난 의사이신 하나님께 보이십시오. 그리고 그에게서 처방을 찾으십시오. 꾸짖지 않고 가장 자상하게 고쳐 주시는 그에게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하되, 주님 앞에 고백하면 됩니다. 죄를 사해 주시고, 죄를 잊으시고 지워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주님이 의사이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9-10.]

     다윗은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였나이다”라고 시편 32편 5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는 미쁘시고…우리 죄를 사하시며,” 요한일서 1장 9절의 말씀은, 이것은 분명 사적인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주님께 하는 고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여호와 앞에, 사무엘하 12장 13절에, 자기 죄를 토설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4.11-13.]

     통상적으로 교회에 그러한 회개가 있고, 또 회중의 회개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서로 간에 죄를 내어놓고 하는 그런 것은 로마 가톨릭의 사적인 고백을 공적화하는 이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내가 사사로이 사제를 찾아가서 고백하고, 그것의 어떤 공공성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공적 고백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회개에 대한 사상은 결코 올바르지 않은 것이죠. 
     우리는 항상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내어놓고, 그리고 우리가 서로 이웃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형제들에게 죄를 지었을 때, 먼저 제단에 나가기 전에 형제와 화목하고 예물을 드리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마 5:23-24), 이럴 때는 ‘내가 잘못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은 바로 뭐예요? 화해를 위한 것이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죠. 이것을 어떻게 고해성사하듯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기독교 강요』, 3.4.14.]

     로마 가톨릭은 ‘열쇠의 권한’(potestas clavium)이라고 해서 사제가 묶으면 하늘에도 묶이고, 사제가 풀면 하늘에도 풀리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린다’(마 18:18),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말씀의 권능을 이야기하는 거지, 열쇠의 문제는 한 사제가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내어놓아서 그가 받아주면 하늘에서도 받아주시는 것이고, 그가 그것을 배척하면 하늘도 배척한다는 그러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열쇠의 문제가 제기될 때 언제나 우리는 복음의 선포와 분리된 어떤 재능을 꿈꾸지 말도록 주의해야 한다(vero quum de clavibus agitur, semper cavendum est ne facultatem aliquam somniemus ab evangelii praedicatione separat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14.

     소위 열쇠라는 것은,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가] 고백하는 가운데 주셨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선포와 관계된 것이지, 복음의 선포와 관계되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꿈도 꾸지 마라, 이렇게 칼빈은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4.15.]

     열쇠의 권한을 자의적으로 활용해서 교회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예수의 자리에 앉는 그러한 사제중보주의의 극단적인 폐해가 이 고해성사, 여기에 공적인 고백에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보고’(thesaurus ecclesiae) 교리에 근거해서 열쇠의 권한을 ‘복음의 선포’와 무관한 것으로 변질시켰습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15, 각주 405번.

     교회는 그러한 모든 공로의 보화를 가지고 있는 보물창고니까, 교회를 통하여 사함을 받아야 되고, 교회를 통하여서 값을 대신 지불받아야 되고, 이러한 것은 그릇된 것이죠. 이것은 철저히 비성경적이고 인본화된, 그러한 이교적인 사상이죠. 

[『기독교 강요』, 3.4.16-18.]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깨끗케 하소서’(시 19:12).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 38:4). ‘내가 짓밟혔으며 묻혔으며 질식당했나이다. 스올의 문이 나를 둘렀나이다. 내가 수령에 빠졌나이다. 내가 연약하고 죽어가니 나를 당신의 손으로 건지소서’(시 18:5; 69:2-3, 15-16).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이 어찌 사람 앞에 나타날 수 있겠고 사람 앞에 능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은밀히 우리가 고백하는 것이죠. 
     ‘허물을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정하게 하옵소서’(시 19:12).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우리를 정하게 하고, ‘악인이 신음할 때마다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노니’(겔 18:21-22). 무슨 사람이 중간에 서서 그것을 헤아려서 판단합니까? 악인이 신음하는 것은 하나님이 들으시지, 어떻게 그 신음을 사람이 입으로 토설하겠습니까? 

[『기독교 강요』, 3.4.19.]

우리가 보듯이, 이러한 청죄(聽罪) 고백(auricularis confessio, 귓속말로 하는 고백)이 매우 해롭고 아주 여러 모양으로 교회에 독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저주하고 우리 가운데서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Nihil itaque mirum si auricularem istam confessionem, rem adeo pestilentem totque nominibus ecclesiae noxiam, damnamus, ac sublatam e medio cupi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19.

     로마 가톨릭은 이것을 “청죄(聽罪) 고백”이라고 합니다. 속삭이듯이 귀에 대고, 사제의 귀에 대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매우 해롭고 아주 여러 모양으로 교회의 독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4.20-24.]

     고해 사제들이 열쇠의 권한을 가진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파선된 배의 ‘고물’과 ‘이물’이라고 하면서, [곧] 자기들이 배의 시작과 끝이고, 그 파선된 배를 자기들이 온전히 한다고 하면서 이것은 얼마나 성도들을 억압하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성령을 주셔서 성령이 우리를 매고 푸는 것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지, 열쇠의 판정관이며 주관자는 성령이신 거지, 어떻게 인간이 인간의 죄를 사하고 풀고 매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극도로 무지하고, 극도로 패역한 것, 이것이 로마 가톨릭의 회개의 사상이고 그 회개를 성례화하는 그러한 철저히 로마 교회 중심의 잘못된 의식이 이 로마 가톨릭의 성례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고백을 강요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 이것은 참을 수 없는 모독이고. 나중에 우리가 『기독교 강요』 4권에 가면 또 나오겠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고해성사 때문에 얼마나 공포에 빠져서 사는지 모릅니다, 1년 내내. 왜냐하면 의무적으로 고백을 해야 되거든요. 의무적으로. 1년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해야 되거든요.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로마 가톨릭은 회개의 은혜보다 외부적 훈련과 훈육을 강조하고 회개의 세 가지 요소로서 마음의 통회, 입의 고백, 행위의 보속을 말합니다. 
     둘째, 그들은 마음의 통회가 합당하고 충분해야 죄 사함의 회개에 이른다고 하나, 회개 없는 죄 사함은 없지만, 회개가 죄 사함의 원인은 아닙니다. 분명히 회개가 있습니다, 죄 사함에는. 그렇지만 회개가 죄 사함의 원인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가 원인이죠. 
     셋째, 그들이 말하는 입의 고백은 사제에게 하는 공적인 고백을 뜻하나, 성경은 죄와 허물에 대한 고백을 친히 사해 주시고 친히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께 고백하라고 명령합니다. 
     넷째, 교회에 부여된 열쇠의 권한은 복음의 선포에 있으며, 그 판정관과 주관자는 성령이심으로 구원은 은혜에 있지, 고백에 있지 않습니다.





108강 결론


  1. 로마 가톨릭은 회개의 은혜보다 외부적 훈육과 훈련을 강조하며, 회개의 세 가지 요소로서 마음의 통회, 입의 고백, 행위의 보속을 말합니다.
  2. 그들은 마음의 통회가 합당하고 충분해야 죄사함의 회개에 이른다고 하나, 회개 없는 죄사함은 없지만, 회개가 죄사함의 원인은 아닙니다.
  3. 그들이 말하는 입의 고백은 사제에게 하는 공적인 고백을 뜻하나, 성경은 죄와 허물에 대한 고백을 친히 사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께 하라고 명합니다.  
  4. 교회에 부여된 열쇠의 권한은 복음의 선포에 있으며 그 판정관과 주관자는 성령이시니, 구원은 은혜에 있으며 고백에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