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중생의 접점.” 지난 시간에 제가 마지막으로 쓴 표현입니다.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회개와 중생의 접점, 이 개념은 전체적인 돌이킴에 있습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 이제는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다, 여기에 중요한 연결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것이 그 연합입니다.] 그 의가 전체 우리 삶의 역사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도 거룩하게 합니다. 이 점에서 회개가 전적인 돌이킴이라면, 중생은 전적인 새 사람으로서 살아감이기 때문에, 이 접점을 갖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10.]
이렇듯 하나님의 자녀는 중생을 통하여 죄의 예속으로부터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이 더 이상 육의 괴롭힘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유를 획득하여 완전하게 소유하는 데 이른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움거리가 항구적으로 남아 있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훈련을 받게 된다. 단지 훈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연약함도 더 잘 배우게 된다(Sic ergo a peccati servitute liberantur filii Dei per regenerationem, non ut quasi plenam libertatis possessionem iam adepti nihil amplius molestiae a carne sua sentiant, sed ut illis maneat perpetua certaminis materia, unde exerceantur; neque exerceantur modo, sed infirmitatem quoque suam melius disca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0.
이제 칼빈은 중생, 회개, 이것을 같이 다루면서 이것이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 풀려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된다, 그리고 한 번 거듭남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가 새로워져야 된다, 거룩해져야 된다,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회개의 훈련을 받는다, 혹은 중생의 훈련을 받는다[라고 합니다]. 칼빈이 ‘회개의 경기장’이라는 표현을 썼지 않습니까? 우리는 중생의 경기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중생이라는 개념은 전체적으로 한 번 객관적으로 거듭났다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가 중생이란 말은 그렇게 자주 반복해서 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 중생에 있어서도 우리가 날마다의 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에게도 영구적으로 욕정을 일으켜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하는 악의 부싯깃이 남아 있[다](manere in nomine regenerato mali fomitem, unde perpetuo scateant cupiditates, quae ipsum ad peccandum illiciant et exstimule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0.
우리 사람에게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부싯깃이, 악의 부싯깃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사노라, 죽고 사는 것이 중생 아닙니까? 그것이 성화 단계에서 그렇게도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날마다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악의 부싯깃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부싯깃’이 뭡니까? 옛날에 이렇게 불을 당길 때, 그때 조각, 거기에 불을 붙여 확 타는, 그러니까 금방 자극을 주면 확 타오르는 그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율법을 거스르는 욕망이 우리 가운데서 여전히 있습니다. 조금만 자극이 되어도 이것이 곧 활활 탑니다. 욕망 그 자체가 사실상 죄입니다. 우리가 ‘탐심을 갖지 말라,’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말라,’ 이런 말씀들을 생각했을 때 이미 욕망 이 자체가 우리에게 죄입니다. 그래서 내가 탐심을 가지고 무슨 행위를 해서 남 것을 훔치고 또 누구를 죽이거나 해코지해야 죄가 되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자체가, 그러한 경향 자체가 여전히 죄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서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11.]
‘그러면 회개하고 거듭난 중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똑같은 것입니까?’ 이렇게 우리가 질문할 수 있겠죠. 그게 아니죠. 우리는 이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죄의 질료”(materia peccati)가 완전히 우리에게서 다 뽑혀 나간 것은 아닙니다. 죄의 질료는 다 뽑혀 나가지 않았어요. 그러나 죄의 노예는 아니에요, 사망의 노예는 아니에요. 그래서 칼빈은 ‘죄의 질료가 아니라 죄책(reatus)이 우리에게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죄책이 바로 사망의 형벌이거든요. 더 이상 우리는 사망에 속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죄책은 우리에게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죄책이 뭐예요? 사망이 뭐예요? 우리를 지배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말이에요.
실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중생시키심으로써 이 일을 수행하시는바, 그 결과 죄의 지배권이 그들 가운데서 소멸된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 압도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이 이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승리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지배하지 못할 뿐 그들 가운데 여전히 거주하기를 멈추지 않는다(Praestat hoc quidem Deus, suos regenerando, ut peccati regnum in ipsis aboleatur. Virtutem enim spiritus subministrat, qua superiores in certamine victoresque fiant. Sed regnare tantum, non etiam habitare desin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1.
거듭난 우리는, 회개한 우리는 죄책으로부터 벗어난다, 죄에 대한 책임, 곧 사망의 형벌, 그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이 말은 죄의 지배권으로부터 벗어난다, 이 말이에요. 이것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죄의 법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폐지되고, 은혜의 법이 작용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육신의 소욕은 남아 있고, 내 마음의 법과 육체의 법이 다툰다고 했잖아요. 그런 측면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의 완전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 다시 살아남을 이야기하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러한 계명을 우리가 이제는 달콤하게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나아가는 거죠. 이게 바로 뭐예요?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거예요.
[『기독교 강요』, 3.3.12-13.]
죄의 지배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의 율법이 저주입니다, 그 자체로 저주예요. 그러나 죄의 법에서 벗어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그 자체가 이제 저주는 아니지만은 여전히 우리 안에 온전치 못한 악의 부싯깃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율법이 시시각각 우리에게 죄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은 어떤 한 율법에 대한 그것을 우리가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그것보다도, 우리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느냐, 이제는 거듭나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리고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느냐, 이것이 귀한 것이죠. 그러므로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을 버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을 가지고서는 어떤 순수한 것도, 어떤 신실한 것도 우리로부터 나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거듭나야 됩니다, 거듭나야 되고 회개해야 됩니다. 이 거듭남, 중생에 의해서 죄의 법이 이제는 은혜의 법으로, 이제는 율법 아래 우리가 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선한 것을 거스르는 악한 것이 있고, 의로운 것을 거스르는 불의한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죄를 없이 하라는 것의 전제는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14.]
그렇기 때문에 성령 가운데서 우리가 거듭났을 때 이제는 내가 이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자발성과 내 자력으로 의를 이룬다, 그 측면이 아닙니다. 거듭나고 회개했다는 것은 은혜 안에 거하고 은혜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거듭나고 회개했다는 것이 내 능력으로, 내 자질로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세례파는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재세례파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그 순수한 가운데서, 정결한 가운데서 우리의 공로로, 의로 신비한 계시적 체험과 함께 그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윤리주의, 신령주의 이런 것들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남과 회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듭남과 회개입니다. 아담 안에서의 저주는 이전 것으로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새 것이 바로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죄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죄 사함에 속한 것, 은혜에 속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난 자가 마땅히 누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에 매여서 그 가운데, 억압 가운데 죄의 노예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대로 우리가 순종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인 회개가 있고, 그리고 계속적인 회개 가운데서 열매를 맺고, 그것이 바로 중생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중생의 은혜라는 것은 돌이킴의 은혜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돌이킴의 은혜인데, 우리가 한 번 돌이키고 이제 그 지점에서 내가 산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내 능력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나 회개는 뭐예요? ‘conversio,’ 회심이라고 했잖아요, 칼빈이. 돌이킴입니다. 그러면 회개의 돌이킴이 날마다 우리 가운데 나타납니다. 내가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날마다 다시 살고,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사노라,’ 이게 뭐예요? 우리의 중생도 그런 측면을 갖는다는 것이죠. 한 번 죽고 한 번 살아난다면, ‘이제는 내가 살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죽고 계속해서 살아난다고 한다면, 우리는 뭐예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중생과 회개의 그러한 본질은 뭔가 하면 내가 내 뜻대로 사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서 날마다 성령의 소욕대로 사는 것,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서 그리스도의 의로 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칼빈이 강조하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이 돌이킴이라면, 그 회심이 중생과 함께 맞닥뜨리는 지점은 뭔가 하면 <바로> 중생 가운데서 우리가 날마다 돌이킴을 아멘 한다는 거예요, 돌이킴을. 그러니까 돌이킴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이만큼 됐으니까 내가 산다, 이것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돌이키는 회개를 통하여서 내가 중생됨을 아멘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는 것은 돌이킴입니다. 돌이킴에 대한 아멘이 바로 ‘날마다 죽노라’[인데], 그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서 매끼 하나님께 감사하듯이, 우리가 돌이킴의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회개와 중생이 회심이라는 측면에서, 돌이킴이라는 측면에서 맞닥뜨리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고, 여기에서 바로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성령이 역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칼빈은 성령을 이곳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이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부여되심으로 우리는 불결과 더러움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는 데 이른다. 이러한 순종이 제대로 되려면 저 사람들이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 주려 했던 정욕을 먼저 길들이고 굴복시켜야 한다(nobis in sanctificationem datum esse, quo ab immunditiis et inquinamentis purgatos in obedientiam divinae iustitiae deducat, quae obedientia constare nequit nisi domitis subactisque concupiscentiis, quibus isti habenas laxare volu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4.
“성령이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부여되심으로.” 여기 왜 갑자기 성화가 나오느냐, 그것만 제가 설명을 했죠. 칼빈은 회개, 회심,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화조차도, 물론 성화는 이제 구원서정에 있어서 칭의와 연결되는 다음 단계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 또 전체적인 돌이킴이라는 측면, 성도의 견인이라는 측면, 이런 데서는 함께 나타나죠. 그래서 성령이 첫 번째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성화 가운데서 “불결과 더러움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는 데” 이르게 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의를 따르고 그 가운데 우리의 정욕을 먼저 길들인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서 우리가 이제는, 사실 정욕을 길들인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에요. 죄와 사망의 권세에 있으면 정욕의 종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러니까 첫 번째는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해서 정욕을 길들인다, 이 말이에요.
둘째, 우리는 성령에 의한 성화로 인하여 깨끗하게 되지만, 우리의 몸덩어리에 갇혀 있는 한에 있어서는 많은 악과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완전과는 아주 동떨어진 우리는 항상 앞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악의 덫에 걸려 있지만 그것과 날마다 씨름해야 한다(deinde sic nos eius sanctificatione purgari, ut multis vitiis multaque infirmitate obsideamur quamdiu inclusi sumus mole corporis nostri. Quo fit ut longo intervallo a perfectione dissiti proficere semper aliquid et vitiis irretiti cum illis quotidie luctari necesse habea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4.
그리고 두 번째는 성령으로, 그 성화의 역사로 우리가 깨끗하게 되지만은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연약함 가운데 둘러싸여 있다, 이제는 그 정욕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날마다 앞을 향하여 씨름하며 나아가야 된다, 그리고 사탄의 사자가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나를 경성시켜서, 날마다 씨름하게 하고, 경주하게 하고, 아까 ‘회개의 경기장’이라는 표현도 있었지만은 그러한 우리의 은혜의 역사가 있다, 그래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진해진다, 이렇게 고린도후서 12장 9절의 말씀을 칼빈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론]
이 부분을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는 중생을 통하여 죄의 예속으로부터 풀려나지만, 여전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악의 부싯깃이 남아 있으므로, 회개의 경기장에서 일생 동안 뛰어야 됩니다.
두 번째, 중생한 자들은 죄의 지배권을 벗어나고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지만, 죄의 질료와 죄의 법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들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세 번째, 율법의 규범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 미치므로 오염된 본성으로부터는 순수한 것이 나올 수 없고 중생한 자들에게는 죄의 법이 남아 있지만, 죄의 법이, 죄가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넷째,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써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고, 성령에 의한 성화는 우리의 정욕을 다스리게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많은 악과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날마다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continual repentance,’ [곧] 계속적 회개를 해야 된다, 이렇게 칼빈이 말하고 있습니다.
105강 결론
하나님의 자녀는 중생을 통하여 죄의 예속으로부터 풀려나지만 여전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악의 부싯깃이 남아 있으므로 회개의 경기장에서 일생 동안 뛰어야 합니다.
중생한 자들은 죄의 지배권을 벗어나고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지만 죄의 질료와 죄의 법이 여전히 남아 있어 그들 자신이 연약함을 의식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율법의 규범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데 미치므로 오염된 본성으로부터는 순수한 것이 나올 수 없으며, 중생한 자들에게는 죄의 법이 남아 있지만, 죄가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써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며, 성령에 의한 성화는 우리의 정욕을 다스리게 하나 우리는 여전히 많은 악과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105강 | 3.3.10-14. (3권 136-145쪽)
거듭나서 성화 과정에 있는 자들도
여전히 불완전함
“회개와 중생의 접점.” 지난 시간에 제가 마지막으로 쓴 표현입니다.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회개와 중생의 접점, 이 개념은 전체적인 돌이킴에 있습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 이제는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다, 여기에 중요한 연결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것이 그 연합입니다.] 그 의가 전체 우리 삶의 역사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도 거룩하게 합니다. 이 점에서 회개가 전적인 돌이킴이라면, 중생은 전적인 새 사람으로서 살아감이기 때문에, 이 접점을 갖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10.]
이렇듯 하나님의 자녀는 중생을 통하여 죄의 예속으로부터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이 더 이상 육의 괴롭힘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유를 획득하여 완전하게 소유하는 데 이른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움거리가 항구적으로 남아 있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훈련을 받게 된다. 단지 훈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연약함도 더 잘 배우게 된다(Sic ergo a peccati servitute liberantur filii Dei per regenerationem, non ut quasi plenam libertatis possessionem iam adepti nihil amplius molestiae a carne sua sentiant, sed ut illis maneat perpetua certaminis materia, unde exerceantur; neque exerceantur modo, sed infirmitatem quoque suam melius disca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0.
이제 칼빈은 중생, 회개, 이것을 같이 다루면서 이것이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 풀려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된다, 그리고 한 번 거듭남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가 새로워져야 된다, 거룩해져야 된다,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회개의 훈련을 받는다, 혹은 중생의 훈련을 받는다[라고 합니다]. 칼빈이 ‘회개의 경기장’이라는 표현을 썼지 않습니까? 우리는 중생의 경기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중생이라는 개념은 전체적으로 한 번 객관적으로 거듭났다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가 중생이란 말은 그렇게 자주 반복해서 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 중생에 있어서도 우리가 날마다의 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에게도 영구적으로 욕정을 일으켜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하는 악의 부싯깃이 남아 있[다](manere in nomine regenerato mali fomitem, unde perpetuo scateant cupiditates, quae ipsum ad peccandum illiciant et exstimule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0.
우리 사람에게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부싯깃이, 악의 부싯깃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사노라, 죽고 사는 것이 중생 아닙니까? 그것이 성화 단계에서 그렇게도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날마다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악의 부싯깃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부싯깃’이 뭡니까? 옛날에 이렇게 불을 당길 때, 그때 조각, 거기에 불을 붙여 확 타는, 그러니까 금방 자극을 주면 확 타오르는 그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율법을 거스르는 욕망이 우리 가운데서 여전히 있습니다. 조금만 자극이 되어도 이것이 곧 활활 탑니다. 욕망 그 자체가 사실상 죄입니다. 우리가 ‘탐심을 갖지 말라,’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말라,’ 이런 말씀들을 생각했을 때 이미 욕망 이 자체가 우리에게 죄입니다. 그래서 내가 탐심을 가지고 무슨 행위를 해서 남 것을 훔치고 또 누구를 죽이거나 해코지해야 죄가 되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자체가, 그러한 경향 자체가 여전히 죄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서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11.]
‘그러면 회개하고 거듭난 중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똑같은 것입니까?’ 이렇게 우리가 질문할 수 있겠죠. 그게 아니죠. 우리는 이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죄의 질료”(materia peccati)가 완전히 우리에게서 다 뽑혀 나간 것은 아닙니다. 죄의 질료는 다 뽑혀 나가지 않았어요. 그러나 죄의 노예는 아니에요, 사망의 노예는 아니에요. 그래서 칼빈은 ‘죄의 질료가 아니라 죄책(reatus)이 우리에게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죄책이 바로 사망의 형벌이거든요. 더 이상 우리는 사망에 속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죄책은 우리에게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죄책이 뭐예요? 사망이 뭐예요? 우리를 지배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말이에요.
실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중생시키심으로써 이 일을 수행하시는바, 그 결과 죄의 지배권이 그들 가운데서 소멸된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 압도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이 이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승리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지배하지 못할 뿐 그들 가운데 여전히 거주하기를 멈추지 않는다(Praestat hoc quidem Deus, suos regenerando, ut peccati regnum in ipsis aboleatur. Virtutem enim spiritus subministrat, qua superiores in certamine victoresque fiant. Sed regnare tantum, non etiam habitare desin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1.
거듭난 우리는, 회개한 우리는 죄책으로부터 벗어난다, 죄에 대한 책임, 곧 사망의 형벌, 그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이 말은 죄의 지배권으로부터 벗어난다, 이 말이에요. 이것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죄의 법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폐지되고, 은혜의 법이 작용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육신의 소욕은 남아 있고, 내 마음의 법과 육체의 법이 다툰다고 했잖아요. 그런 측면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의 완전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 다시 살아남을 이야기하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러한 계명을 우리가 이제는 달콤하게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나아가는 거죠. 이게 바로 뭐예요?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거예요.
[『기독교 강요』, 3.3.12-13.]
죄의 지배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의 율법이 저주입니다, 그 자체로 저주예요. 그러나 죄의 법에서 벗어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그 자체가 이제 저주는 아니지만은 여전히 우리 안에 온전치 못한 악의 부싯깃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율법이 시시각각 우리에게 죄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은 어떤 한 율법에 대한 그것을 우리가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그것보다도, 우리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느냐, 이제는 거듭나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리고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느냐, 이것이 귀한 것이죠. 그러므로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을 버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을 가지고서는 어떤 순수한 것도, 어떤 신실한 것도 우리로부터 나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거듭나야 됩니다, 거듭나야 되고 회개해야 됩니다. 이 거듭남, 중생에 의해서 죄의 법이 이제는 은혜의 법으로, 이제는 율법 아래 우리가 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선한 것을 거스르는 악한 것이 있고, 의로운 것을 거스르는 불의한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죄를 없이 하라는 것의 전제는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14.]
그렇기 때문에 성령 가운데서 우리가 거듭났을 때 이제는 내가 이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자발성과 내 자력으로 의를 이룬다, 그 측면이 아닙니다. 거듭나고 회개했다는 것은 은혜 안에 거하고 은혜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거듭나고 회개했다는 것이 내 능력으로, 내 자질로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세례파는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재세례파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그 순수한 가운데서, 정결한 가운데서 우리의 공로로, 의로 신비한 계시적 체험과 함께 그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윤리주의, 신령주의 이런 것들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남과 회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듭남과 회개입니다. 아담 안에서의 저주는 이전 것으로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새 것이 바로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죄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죄 사함에 속한 것, 은혜에 속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난 자가 마땅히 누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에 매여서 그 가운데, 억압 가운데 죄의 노예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대로 우리가 순종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인 회개가 있고, 그리고 계속적인 회개 가운데서 열매를 맺고, 그것이 바로 중생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중생의 은혜라는 것은 돌이킴의 은혜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돌이킴의 은혜인데, 우리가 한 번 돌이키고 이제 그 지점에서 내가 산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내 능력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나 회개는 뭐예요? ‘conversio,’ 회심이라고 했잖아요, 칼빈이. 돌이킴입니다. 그러면 회개의 돌이킴이 날마다 우리 가운데 나타납니다. 내가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날마다 다시 살고,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사노라,’ 이게 뭐예요? 우리의 중생도 그런 측면을 갖는다는 것이죠. 한 번 죽고 한 번 살아난다면, ‘이제는 내가 살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죽고 계속해서 살아난다고 한다면, 우리는 뭐예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중생과 회개의 그러한 본질은 뭔가 하면 내가 내 뜻대로 사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서 날마다 성령의 소욕대로 사는 것,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서 그리스도의 의로 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칼빈이 강조하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이 돌이킴이라면, 그 회심이 중생과 함께 맞닥뜨리는 지점은 뭔가 하면 <바로> 중생 가운데서 우리가 날마다 돌이킴을 아멘 한다는 거예요, 돌이킴을. 그러니까 돌이킴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이만큼 됐으니까 내가 산다, 이것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돌이키는 회개를 통하여서 내가 중생됨을 아멘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는 것은 돌이킴입니다. 돌이킴에 대한 아멘이 바로 ‘날마다 죽노라’[인데], 그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서 매끼 하나님께 감사하듯이, 우리가 돌이킴의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회개와 중생이 회심이라는 측면에서, 돌이킴이라는 측면에서 맞닥뜨리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고, 여기에서 바로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성령이 역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칼빈은 성령을 이곳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이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부여되심으로 우리는 불결과 더러움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는 데 이른다. 이러한 순종이 제대로 되려면 저 사람들이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 주려 했던 정욕을 먼저 길들이고 굴복시켜야 한다(nobis in sanctificationem datum esse, quo ab immunditiis et inquinamentis purgatos in obedientiam divinae iustitiae deducat, quae obedientia constare nequit nisi domitis subactisque concupiscentiis, quibus isti habenas laxare volu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4.
“성령이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부여되심으로.” 여기 왜 갑자기 성화가 나오느냐, 그것만 제가 설명을 했죠. 칼빈은 회개, 회심,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화조차도, 물론 성화는 이제 구원서정에 있어서 칭의와 연결되는 다음 단계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 또 전체적인 돌이킴이라는 측면, 성도의 견인이라는 측면, 이런 데서는 함께 나타나죠. 그래서 성령이 첫 번째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성화 가운데서 “불결과 더러움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는 데” 이르게 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의를 따르고 그 가운데 우리의 정욕을 먼저 길들인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서 우리가 이제는, 사실 정욕을 길들인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에요. 죄와 사망의 권세에 있으면 정욕의 종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러니까 첫 번째는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해서 정욕을 길들인다, 이 말이에요.
둘째, 우리는 성령에 의한 성화로 인하여 깨끗하게 되지만, 우리의 몸덩어리에 갇혀 있는 한에 있어서는 많은 악과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완전과는 아주 동떨어진 우리는 항상 앞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악의 덫에 걸려 있지만 그것과 날마다 씨름해야 한다(deinde sic nos eius sanctificatione purgari, ut multis vitiis multaque infirmitate obsideamur quamdiu inclusi sumus mole corporis nostri. Quo fit ut longo intervallo a perfectione dissiti proficere semper aliquid et vitiis irretiti cum illis quotidie luctari necesse habea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4.
그리고 두 번째는 성령으로, 그 성화의 역사로 우리가 깨끗하게 되지만은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연약함 가운데 둘러싸여 있다, 이제는 그 정욕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날마다 앞을 향하여 씨름하며 나아가야 된다, 그리고 사탄의 사자가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나를 경성시켜서, 날마다 씨름하게 하고, 경주하게 하고, 아까 ‘회개의 경기장’이라는 표현도 있었지만은 그러한 우리의 은혜의 역사가 있다, 그래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진해진다, 이렇게 고린도후서 12장 9절의 말씀을 칼빈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론]
이 부분을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는 중생을 통하여 죄의 예속으로부터 풀려나지만, 여전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악의 부싯깃이 남아 있으므로, 회개의 경기장에서 일생 동안 뛰어야 됩니다.
두 번째, 중생한 자들은 죄의 지배권을 벗어나고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지만, 죄의 질료와 죄의 법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들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세 번째, 율법의 규범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 미치므로 오염된 본성으로부터는 순수한 것이 나올 수 없고 중생한 자들에게는 죄의 법이 남아 있지만, 죄의 법이, 죄가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넷째,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써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고, 성령에 의한 성화는 우리의 정욕을 다스리게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많은 악과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날마다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continual repentance,’ [곧] 계속적 회개를 해야 된다, 이렇게 칼빈이 말하고 있습니다.
105강 결론
하나님의 자녀는 중생을 통하여 죄의 예속으로부터 풀려나지만 여전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악의 부싯깃이 남아 있으므로 회개의 경기장에서 일생 동안 뛰어야 합니다.
중생한 자들은 죄의 지배권을 벗어나고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지만 죄의 질료와 죄의 법이 여전히 남아 있어 그들 자신이 연약함을 의식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율법의 규범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데 미치므로 오염된 본성으로부터는 순수한 것이 나올 수 없으며, 중생한 자들에게는 죄의 법이 남아 있지만, 죄가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써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며, 성령에 의한 성화는 우리의 정욕을 다스리게 하나 우리는 여전히 많은 악과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