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두 요소로서 ‘mortificatio’, ‘vivificatio,’ 이전 것, 옛 것의 죽임과 새 것, [곧] 거듭난 것의 살림, 이 두 요소가 있음을 지난 시간에 보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3.3.5.]
믿음이 없는 참 회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진정 ‘회개’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을 향한 회심 전체가 포함된다. 나에게 이에 대한 어떤 불명함도 없다. 믿음은 회심의 마지막 끄트머리가 아니다(Equidem nec me latet, sub poenitentiae nomine totam ad Deum conversionem comprehendi, cuius pars non postrema fides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5.
회개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 ‘conversio,’ 우리는 회심이라고 하는데요, 우리 한자에는 마음 ‘심’(心) 자가 들어가 있지만 사실상 이 단어 그 자체의 의미는 그냥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돌이킴이다, 이렇게 우리가 표현할 때 회개는 회심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회심 전체를 포괄한다고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육 간의 회심[입니다]. 어떤 단순히 객관적인 신분적 회심, 그것이 먼저 있지만 그와 함께 전체적인 회심이 일어나는 이 점에서는 칼빈이 회심과 중생을 아주 가까이 다루면서 회개를 이야기하는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 보면 칼빈이 회개와 중생을 거의 동일시하는 그런 표현도 하거든요. 이것은 회개와 중생이 동일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구별합니다. 그러면서도 회개의 본질적 요소가 전체적 회심이라고 볼진대, 전체적 회심은, 전체적 돌이킴은 곧 거듭남이거든요. 그래서 [회개]는 중생과 통한다, 이렇게 칼빈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회개라는 것은 ‘다시 돌아온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고요. 헬라어로서는 회개라는 단어는 어떤 ‘마음과 계획이 변화된다,’ 이런 것에서 유래합니다. 회개를 하려면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떠나야 됩니다. 이전의 것, 옛 것을 떠나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것을 벗어 버리고, 이전의 마음을 벗겨 내고, 새로운 것을 입는 것, 새로운 마음을 입는 것, 이것이 회개의 총체적인 의미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고 진지한 경외로부터 나오는, 그를 향한 우리의 삶의 참된 회심으로서, 우리의 육체와 옛사람을 죽임과 성령의 살림으로 이루어진다([poenitentiam] esse veram ad Deum vitae nostrae conversionem, a sincero serioque Dei timore profectam, quae carnis nostrae veterisque hominis mortificatione et spiritus vivificatione const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5.
그래서 칼빈은 회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고 진지한 경외로부터 나오는 그를 향한 우리의 삶의 참된 회심으로서 우리의 육체와 옛 사람을 죽임과 성령의 살림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설명해 본다면, ‘신실하고 진지한 경외로부터 나온다’[에서] 경외라는 것은 뭡니까? 내가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두려움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는 나를 지으신 분이시요 나는 그의 피조물이고,’ 이 1차적인 피조성에 대한 인식과 그리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를 떠났다는 그러한 죄성에 대한 인식과, [곧] 피조성과 죄성에 대한 인식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끌려갑니다. 피조성과 죄성으로써 하나님을 멀리하는 그 옛 습성으로부터 하나님께 이끌려가는 그게 경외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회개에 경외가 있음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나여 망하였도다”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서. 그래서 칼빈은 [회개란] 진지한 경외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돌이킴이라[고 합니다]. 아까 회심이라고 했죠. ‘conversio’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timor’, 내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이미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떠날 텐데, 죄를 짓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 이것은 이미 은혜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선포가 있고, 복음의 권능이 있고, 그리고 돌이킴이 있는 것이죠. 사실 회심이 있고 복음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역사가 있음으로 회심이 있는 것이죠. 그 가운데 이전 것을 죽이고 새 것을 살리는 [곧] 죽임과 살림으로 이루어진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6.]
지난 시간에 우리가 ‘회개의 힘’에 대해서 칼빈이 말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는데요. 이 회개에는 이러한 이전 것을 지워 버리는 요소와 새 것을 끌어들이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회개의 힘에는 분명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 이것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을 향한 삶의 회심”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외적 행위들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에 있어서도 변화를 필요로 한다(Primum, quum vitae ad Deum conversionem nuncupamus, transformationem requirimus non in operibus tantum externis, sed in anima ipsa).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6.
첫 번째는 회개의 열매로서 하나님을 향한 삶의 회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우리가 계속 나 자신만을 바라보거든요.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고 타인을 바라보는데, 궁극적으로 한마디로 하면 자기애(自己愛)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려고 타인을 바라보거든요. 나 자신을 바라보려고 사물을 바라보거든요. ‘amor sui caecus,’ 칼빈이 그 말을 썼잖아요. ‘맹목적 자기애.’ 이게 타락한 인류의 모습이에요. ‘맹목적 자기애.’ 모든 것을 통하여 자신을 보는 거예요. 맹목적으로 자기만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회개는 뭐예요? 하나님을 향하여 회심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conversio,’ 그래서 우리 안에 뭐예요? 새로운 마음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돌 같은 마음이 살 같은 마음이 되는데, 돌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나의 아집, 나를 사랑하는 마음,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살과 같은 마음은 뭐요? 이제 부드러워지고 말랑말랑 해져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고, 기원을 향하고, 시작을 향하고, 영원을 향하고, 창조주를 향하고, 구속주를 향하는 그것이 바로 새로운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 회개의 첫 번째 요소로서, 이 합당한 열매의 요소로서 새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회심을 우리에게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미 구약에서도 “마음의 할례”(신 10:16; 30:6)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고,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고,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렘 4:1, 3-4) 이것은 바로 정직한 마음, 그리고 돌이키는 마음,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부인(否認)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거든요. 새 마음, 이것이 첫 번째 열매라고 하고요.
[『기독교 강요』, 3.3.7.]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죄인의 마음은 회개로 기울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에 자극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ex serio Dei timore…ipsam proficisci. Prius enim quam ad resipiscentiam mens peccatoris inclinetur, divini iudicii cogitatione excitari oport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7.
두 번째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외라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진지한 경외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진지한 경외. “ex serio Dei timore”(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로부터).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요. 바로 ‘진지한 경외,’ [곧] ‘serious fear.’ ‘fear’란 말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움이라 하지만, 성경에서도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한 거룩한 두려움, 하나님께 이끌려 가는 두려움, 그 진지한 경외, 진지한 경외로부터 바로 이 회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어떠한 우리의 근저가 되고, 그리고 회개의 열매가 된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끝없는 심판과 그리고 불같이 일어나는 사르는 불, 이런 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망쳐야 되고 숨어야 됩니다. 그러나 회개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느데,] 이게 바로 진지한 경외입니다. 이 근심이 경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뭘까요?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서, 하나님께 이끌려 가는 근심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경외라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두려움이란 말이에요. 이건 이미 은혜죠. 이미 은혜죠. 은혜가 아니고서야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도망치지, 누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 여기에 회개가 있고, 또 이것이 회개의 열매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나타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참 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로> 우리가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하나님을 찾는 그 예배로 우리가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8.]
회개가 두 부분, 즉 육체를 죽임과 영을 살림으로 이루어진다(poenitentiam duabus partibus constare: mortificatione scilicet carnis et spiritus vivification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8.
세 번째는 바로 회개의 그 합당한 열매로서 이미 우리가 다루었지만, 육체를 죽임과 영을 살리는 이 두 가지의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육체’라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아닙니다. 단순히 육신이 아니라, 이전 것, 옛 것[을 가리킵니다]. 그다음에 ‘영’이라는 것은 거듭난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을 죽이고 새 것을 살리는 그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전 것이 죽지 않으면 새 것이 살 수가 없습니다. 흙탕물과 새 물이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정의와 자비가 우리에게 옷 입혀지려면, 이전의 불의와 그리고 이전의 진노와 이전의 불의가 사라져야 됩니다. 그래서 옛 것을 벗어버리고 새 것을 입어야 됩니다. 옛 정욕을 가지고 선한 성령의 소욕을 쫓을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다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이게 회개의 열매로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열매라고 하지만 동시적으로 바로 그렇게 일어나고 그렇게 열매 맺는 것이죠. 다 은혜죠, 이게. 그렇지 않겠습니까? 회개라는 것이 우리에게 뭐라고 존재하고 그래서 우리가 여차여차하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영으로, 회개의 힘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으면, 그것이 곧 회개고, 그것이 곧 회개의 결과물이죠, 소산이죠,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기본 원리들”(initia pietatis)이 회개에 있다고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강요』, 3.3.9.]
경건의 기본 원리, 그것은 바로 우리가 경건에 대해서 많이 살펴봤지만, 말씀을 받고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래서 칼빈은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께] 동참해야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강요』 1권 2장을 다룰 때 경건에 대해서 그렇게 논했습니다. 말씀을 내려받고 예배를 올려드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믿음 가운데 사는 것, 그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죽임과 살림]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만약 우리가 그의 죽음과 실제로 교통하려면 우리 옛사람이 그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이 죽어야 한다. 그리하면 부패한 처음 본성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부활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일으킴을 받아 하나님의 의에 상응하는 삶의 새로움에 이르게 될 것이다(Utrumque ex Christi participatione nobis contingit. Nam si vere morti eius communicamus, eius virtute crucifigitur vetus noster homo, et peccati corpus emoritur, ne amplius vigeat primae naturae corruptio. Si resurrectionis sumus participes, per eam suscitamur in vitae novitatem, quae Dei iustitiae responde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9.
여기서 회개의 두 요소인 ‘죽임’과 ‘살림’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따른,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음이 뚜렷이 천명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9, 각주 255번.
여기에서도 바로 칼빈이 “그리스도께 동참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죽음과 실제로 교통하고, 그리고 그의 부활에 동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죽음의 능력으로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고 예수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한마디로 회개를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바, 중생의 목표는 다름 아닌 아담의 위반 이후로 더러워지고 거의 지워지다시피 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일신(一新)하는 데 있다(Uno ergo verbo poenitentiam interpretor, regenerationem, cuius non alius est scopus nisi ut imago Dei quae per Adae transgressionem foedata, et tantum non obliterata fuerat, in nobis reforme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9.
이 점에서 전체적인 회심, 돌이킴, 그래서 칼빈은 “나는 한마디로 회개를 중생이라고 해석”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신학적으로 자주 인용이 되는 부분입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회개와 중생을 칼빈이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보지 마시고, 회개의 전적인 돌이킴이라는 측면에서 중생과 회개를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주관적인 측면이고 중생은 객관적인 측면이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회개는 내 안에서의 변화고 중생은 내 자신의 변화거든요. 그런데 칼빈은 벌써 회개를 <뭐예요> 전체적인 회심이라고 봤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회개와 중생을 이렇게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측면, 신학교 측면을 우리가 헤아려야 됩니다.
그래서 중생의 목표는 뭐냐? ‘아담의 위반 이후로 지워지다시피 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가운데 일신(一新)하는’ 것이 바로 중생[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중생은 뭡니까? 새로 나는 것이지 않습니까? 새로 나는 게 뭐예요? 십자가에 이전 것이 못 박[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 동참하여 다시 사는 것, 그래서 옛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것, 이 점에서 바로 회개와 중생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 24절을 칼빈은 인용합니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거는 중생에 해당하는 말이에요. 회개에 해당한다는 거예요, 칼빈이. 그러니까 회개와 중생을 같이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의 말씀, 이 말씀도 이런 측면에서 같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 중생과 회개에 대한 이해[는] 구원서정적으로 봤을 때는 분명히 구별합니다, 칼빈도. 구별하는데, 맥락에서 봤을 때 분명히 동시에 일어나잖아요, 전체적으로 일어나잖아요.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것이잖아요. 보통 우리가 회개는 이전이 지나간 것만 이야기하고 중생은 새 것이 되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틀렸다는 것이죠. 그렇죠. 회개와 중생의 공히 두 요소는 뭐냐, ‘mortificatio’, ‘vivificatio,’ [즉] 이전 것이 죽고 새 것이 사는 이 두 가지가 다 회개와 중생의 요소라는 거죠. 회개는 지우기만 하고 중생은 덧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회개와 중생은 같이 일어난다는 이 점에서 칼빈은 정확하게 보고 있는 거예요. 정확하게 보고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 점에서 회개와 중생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그 형상을 온전하게 하는, 회복하게 하고, 그리고 일생 동안 회개 가운데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게 소위 계속적 회개 개념이거든요. 계속적 회개가 있으려면 어떻습니까? 거듭나야 돼요. 거듭나면, 어제 거듭났다가 오늘 거듭나지 않고 그게 아니에요. 이미 견인이에요. 그래서 거듭남이 있을 때 계속적 회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거룩한 삶에 이르는 회개, [곧] 계속적 회개가 있다는 측면, 이 측면은 또 뭐예요? 바로 칭의와 성화가 역동적으로 이해되는 측면이에요.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 전체적으로 구원서정이 역동성을 갖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이 점이에요. 이미 견인(堅忍)이 들어오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들어오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회개를 설명하고 중생을 설명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칭의와 성화가 설명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디서 가장 강조가 됩니까? 3권 1장에서 이미 강조가 되죠. 3권 1장에[서] 성령을 다룰 때, 우리는 이미 나누었어요, 그리스도의 연합을 내세워요, 칼빈이 강조한다고요.
그리고 3권 2장에서 믿음을 이야기할 때도 바로 믿음의 제1요소는 지식이고, 그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고,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했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고, 이렇게 전개되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바로 칼빈의 구원론의 아주 중요한 점입니다. 칭의와 성화, 그리고 전체 구원서정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이게 개혁구원론이거든요.
신자들이 그곳에 이르도록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의 경기장을 맡기셔서 그들이 일생 동안 그곳에서 뛰어가도록 하신다(Huc ut perveniant fideles, stadium poenitentiae, in quo tota vita currant, illis Deus assign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9.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회개의 경기장에서 일생 동안 뛴다’[라고 말합니다]. 보통 회개를 우리가 생명의 회개에, 거기에 머물러 놓거든요. 그게 아니라 ‘일생 동안 회개의 경기장에서 뛴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
자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회개는 우리 자신을 떠나 하나님을 향하는 회심 자체와 그 합당한 열매를 맺음을 다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두 번째, 회개의 첫째 요소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영혼이 변화되고 새로운 마음을 가짐에 있습니다. 이전 것을 떠나는 돌이킴[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둘째 요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심중에 새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예배하는 데까지 이르는 두 번째 요소는 뭐라고 했습니까? 경외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세 번째 요소는 육체를 죽임과 영을 살림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동참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이러한 세 요소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날마다 회복하여서 심령이 새롭게 되고, 의와 진리와 거룩함 가운데서 날마다 새 사람으로서 평생 회개의 경기장에서 [뜁니다.] 이 점에서 회개와 중생의 접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의 회개론이자 중생론이다, 이렇게 우리가 살펴보는 것입니다.
104강 결론
회개는 우리 자신을 떠나 하나님을 향하는 회심 자체와 그 합당한 열매를 맺음을 포괄합니다.
회개의 첫째 요소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영혼이 변화되고 새로운 마음을 가짐에 있습니다.
회개의 둘째 요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심중에 새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지한 경외에 있습니다.
회개의 셋째 요소는 육체를 죽임과 영을 살림에 있으니,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심령이 새롭게 되며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누리고 지식에조차 새롭게 되는 새사람이 됨에 있는바, 이 점에서, 중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104강 | 3.3.5-9. (3권 129-136페이지)
회심, 경외, 옛 사람을 죽임과 새 사람을 살림
회개의 두 요소로서 ‘mortificatio’, ‘vivificatio,’ 이전 것, 옛 것의 죽임과 새 것, [곧] 거듭난 것의 살림, 이 두 요소가 있음을 지난 시간에 보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3.3.5.]
믿음이 없는 참 회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진정 ‘회개’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을 향한 회심 전체가 포함된다. 나에게 이에 대한 어떤 불명함도 없다. 믿음은 회심의 마지막 끄트머리가 아니다(Equidem nec me latet, sub poenitentiae nomine totam ad Deum conversionem comprehendi, cuius pars non postrema fides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5.
회개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 ‘conversio,’ 우리는 회심이라고 하는데요, 우리 한자에는 마음 ‘심’(心) 자가 들어가 있지만 사실상 이 단어 그 자체의 의미는 그냥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돌이킴이다, 이렇게 우리가 표현할 때 회개는 회심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회심 전체를 포괄한다고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육 간의 회심[입니다]. 어떤 단순히 객관적인 신분적 회심, 그것이 먼저 있지만 그와 함께 전체적인 회심이 일어나는 이 점에서는 칼빈이 회심과 중생을 아주 가까이 다루면서 회개를 이야기하는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 보면 칼빈이 회개와 중생을 거의 동일시하는 그런 표현도 하거든요. 이것은 회개와 중생이 동일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구별합니다. 그러면서도 회개의 본질적 요소가 전체적 회심이라고 볼진대, 전체적 회심은, 전체적 돌이킴은 곧 거듭남이거든요. 그래서 [회개]는 중생과 통한다, 이렇게 칼빈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회개라는 것은 ‘다시 돌아온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고요. 헬라어로서는 회개라는 단어는 어떤 ‘마음과 계획이 변화된다,’ 이런 것에서 유래합니다. 회개를 하려면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떠나야 됩니다. 이전의 것, 옛 것을 떠나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것을 벗어 버리고, 이전의 마음을 벗겨 내고, 새로운 것을 입는 것, 새로운 마음을 입는 것, 이것이 회개의 총체적인 의미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고 진지한 경외로부터 나오는, 그를 향한 우리의 삶의 참된 회심으로서, 우리의 육체와 옛사람을 죽임과 성령의 살림으로 이루어진다([poenitentiam] esse veram ad Deum vitae nostrae conversionem, a sincero serioque Dei timore profectam, quae carnis nostrae veterisque hominis mortificatione et spiritus vivificatione const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5.
그래서 칼빈은 회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고 진지한 경외로부터 나오는 그를 향한 우리의 삶의 참된 회심으로서 우리의 육체와 옛 사람을 죽임과 성령의 살림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설명해 본다면, ‘신실하고 진지한 경외로부터 나온다’[에서] 경외라는 것은 뭡니까? 내가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두려움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는 나를 지으신 분이시요 나는 그의 피조물이고,’ 이 1차적인 피조성에 대한 인식과 그리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를 떠났다는 그러한 죄성에 대한 인식과, [곧] 피조성과 죄성에 대한 인식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끌려갑니다. 피조성과 죄성으로써 하나님을 멀리하는 그 옛 습성으로부터 하나님께 이끌려가는 그게 경외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회개에 경외가 있음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나여 망하였도다”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서. 그래서 칼빈은 [회개란] 진지한 경외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돌이킴이라[고 합니다]. 아까 회심이라고 했죠. ‘conversio’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timor’, 내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이미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떠날 텐데, 죄를 짓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 이것은 이미 은혜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선포가 있고, 복음의 권능이 있고, 그리고 돌이킴이 있는 것이죠. 사실 회심이 있고 복음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역사가 있음으로 회심이 있는 것이죠. 그 가운데 이전 것을 죽이고 새 것을 살리는 [곧] 죽임과 살림으로 이루어진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6.]
지난 시간에 우리가 ‘회개의 힘’에 대해서 칼빈이 말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는데요. 이 회개에는 이러한 이전 것을 지워 버리는 요소와 새 것을 끌어들이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회개의 힘에는 분명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 이것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을 향한 삶의 회심”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외적 행위들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에 있어서도 변화를 필요로 한다(Primum, quum vitae ad Deum conversionem nuncupamus, transformationem requirimus non in operibus tantum externis, sed in anima ipsa).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6.
첫 번째는 회개의 열매로서 하나님을 향한 삶의 회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우리가 계속 나 자신만을 바라보거든요.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고 타인을 바라보는데, 궁극적으로 한마디로 하면 자기애(自己愛)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려고 타인을 바라보거든요. 나 자신을 바라보려고 사물을 바라보거든요. ‘amor sui caecus,’ 칼빈이 그 말을 썼잖아요. ‘맹목적 자기애.’ 이게 타락한 인류의 모습이에요. ‘맹목적 자기애.’ 모든 것을 통하여 자신을 보는 거예요. 맹목적으로 자기만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회개는 뭐예요? 하나님을 향하여 회심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conversio,’ 그래서 우리 안에 뭐예요? 새로운 마음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돌 같은 마음이 살 같은 마음이 되는데, 돌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나의 아집, 나를 사랑하는 마음,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살과 같은 마음은 뭐요? 이제 부드러워지고 말랑말랑 해져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고, 기원을 향하고, 시작을 향하고, 영원을 향하고, 창조주를 향하고, 구속주를 향하는 그것이 바로 새로운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 회개의 첫 번째 요소로서, 이 합당한 열매의 요소로서 새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회심을 우리에게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미 구약에서도 “마음의 할례”(신 10:16; 30:6)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고,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고,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렘 4:1, 3-4) 이것은 바로 정직한 마음, 그리고 돌이키는 마음,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부인(否認)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거든요. 새 마음, 이것이 첫 번째 열매라고 하고요.
[『기독교 강요』, 3.3.7.]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죄인의 마음은 회개로 기울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에 자극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ex serio Dei timore…ipsam proficisci. Prius enim quam ad resipiscentiam mens peccatoris inclinetur, divini iudicii cogitatione excitari oport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7.
두 번째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외라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진지한 경외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진지한 경외. “ex serio Dei timore”(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로부터).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요. 바로 ‘진지한 경외,’ [곧] ‘serious fear.’ ‘fear’란 말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움이라 하지만, 성경에서도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한 거룩한 두려움, 하나님께 이끌려 가는 두려움, 그 진지한 경외, 진지한 경외로부터 바로 이 회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어떠한 우리의 근저가 되고, 그리고 회개의 열매가 된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끝없는 심판과 그리고 불같이 일어나는 사르는 불, 이런 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망쳐야 되고 숨어야 됩니다. 그러나 회개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느데,] 이게 바로 진지한 경외입니다. 이 근심이 경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뭘까요?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서, 하나님께 이끌려 가는 근심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경외라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두려움이란 말이에요. 이건 이미 은혜죠. 이미 은혜죠. 은혜가 아니고서야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도망치지, 누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 여기에 회개가 있고, 또 이것이 회개의 열매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나타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참 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로> 우리가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하나님을 찾는 그 예배로 우리가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8.]
회개가 두 부분, 즉 육체를 죽임과 영을 살림으로 이루어진다(poenitentiam duabus partibus constare: mortificatione scilicet carnis et spiritus vivification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8.
세 번째는 바로 회개의 그 합당한 열매로서 이미 우리가 다루었지만, 육체를 죽임과 영을 살리는 이 두 가지의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육체’라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아닙니다. 단순히 육신이 아니라, 이전 것, 옛 것[을 가리킵니다]. 그다음에 ‘영’이라는 것은 거듭난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을 죽이고 새 것을 살리는 그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전 것이 죽지 않으면 새 것이 살 수가 없습니다. 흙탕물과 새 물이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정의와 자비가 우리에게 옷 입혀지려면, 이전의 불의와 그리고 이전의 진노와 이전의 불의가 사라져야 됩니다. 그래서 옛 것을 벗어버리고 새 것을 입어야 됩니다. 옛 정욕을 가지고 선한 성령의 소욕을 쫓을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다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이게 회개의 열매로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열매라고 하지만 동시적으로 바로 그렇게 일어나고 그렇게 열매 맺는 것이죠. 다 은혜죠, 이게. 그렇지 않겠습니까? 회개라는 것이 우리에게 뭐라고 존재하고 그래서 우리가 여차여차하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영으로, 회개의 힘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으면, 그것이 곧 회개고, 그것이 곧 회개의 결과물이죠, 소산이죠,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기본 원리들”(initia pietatis)이 회개에 있다고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강요』, 3.3.9.]
경건의 기본 원리, 그것은 바로 우리가 경건에 대해서 많이 살펴봤지만, 말씀을 받고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래서 칼빈은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께] 동참해야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강요』 1권 2장을 다룰 때 경건에 대해서 그렇게 논했습니다. 말씀을 내려받고 예배를 올려드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믿음 가운데 사는 것, 그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죽임과 살림]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만약 우리가 그의 죽음과 실제로 교통하려면 우리 옛사람이 그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이 죽어야 한다. 그리하면 부패한 처음 본성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부활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일으킴을 받아 하나님의 의에 상응하는 삶의 새로움에 이르게 될 것이다(Utrumque ex Christi participatione nobis contingit. Nam si vere morti eius communicamus, eius virtute crucifigitur vetus noster homo, et peccati corpus emoritur, ne amplius vigeat primae naturae corruptio. Si resurrectionis sumus participes, per eam suscitamur in vitae novitatem, quae Dei iustitiae responde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9.
여기서 회개의 두 요소인 ‘죽임’과 ‘살림’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따른,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음이 뚜렷이 천명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9, 각주 255번.
여기에서도 바로 칼빈이 “그리스도께 동참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죽음과 실제로 교통하고, 그리고 그의 부활에 동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죽음의 능력으로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고 예수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한마디로 회개를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바, 중생의 목표는 다름 아닌 아담의 위반 이후로 더러워지고 거의 지워지다시피 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일신(一新)하는 데 있다(Uno ergo verbo poenitentiam interpretor, regenerationem, cuius non alius est scopus nisi ut imago Dei quae per Adae transgressionem foedata, et tantum non obliterata fuerat, in nobis reforme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9.
이 점에서 전체적인 회심, 돌이킴, 그래서 칼빈은 “나는 한마디로 회개를 중생이라고 해석”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신학적으로 자주 인용이 되는 부분입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회개와 중생을 칼빈이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보지 마시고, 회개의 전적인 돌이킴이라는 측면에서 중생과 회개를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주관적인 측면이고 중생은 객관적인 측면이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회개는 내 안에서의 변화고 중생은 내 자신의 변화거든요. 그런데 칼빈은 벌써 회개를 <뭐예요> 전체적인 회심이라고 봤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회개와 중생을 이렇게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측면, 신학교 측면을 우리가 헤아려야 됩니다.
그래서 중생의 목표는 뭐냐? ‘아담의 위반 이후로 지워지다시피 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가운데 일신(一新)하는’ 것이 바로 중생[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중생은 뭡니까? 새로 나는 것이지 않습니까? 새로 나는 게 뭐예요? 십자가에 이전 것이 못 박[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 동참하여 다시 사는 것, 그래서 옛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것, 이 점에서 바로 회개와 중생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 24절을 칼빈은 인용합니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거는 중생에 해당하는 말이에요. 회개에 해당한다는 거예요, 칼빈이. 그러니까 회개와 중생을 같이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의 말씀, 이 말씀도 이런 측면에서 같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 중생과 회개에 대한 이해[는] 구원서정적으로 봤을 때는 분명히 구별합니다, 칼빈도. 구별하는데, 맥락에서 봤을 때 분명히 동시에 일어나잖아요, 전체적으로 일어나잖아요.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것이잖아요. 보통 우리가 회개는 이전이 지나간 것만 이야기하고 중생은 새 것이 되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틀렸다는 것이죠. 그렇죠. 회개와 중생의 공히 두 요소는 뭐냐, ‘mortificatio’, ‘vivificatio,’ [즉] 이전 것이 죽고 새 것이 사는 이 두 가지가 다 회개와 중생의 요소라는 거죠. 회개는 지우기만 하고 중생은 덧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회개와 중생은 같이 일어난다는 이 점에서 칼빈은 정확하게 보고 있는 거예요. 정확하게 보고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 점에서 회개와 중생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그 형상을 온전하게 하는, 회복하게 하고, 그리고 일생 동안 회개 가운데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게 소위 계속적 회개 개념이거든요. 계속적 회개가 있으려면 어떻습니까? 거듭나야 돼요. 거듭나면, 어제 거듭났다가 오늘 거듭나지 않고 그게 아니에요. 이미 견인이에요. 그래서 거듭남이 있을 때 계속적 회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거룩한 삶에 이르는 회개, [곧] 계속적 회개가 있다는 측면, 이 측면은 또 뭐예요? 바로 칭의와 성화가 역동적으로 이해되는 측면이에요.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 전체적으로 구원서정이 역동성을 갖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이 점이에요. 이미 견인(堅忍)이 들어오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들어오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회개를 설명하고 중생을 설명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칭의와 성화가 설명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디서 가장 강조가 됩니까? 3권 1장에서 이미 강조가 되죠. 3권 1장에[서] 성령을 다룰 때, 우리는 이미 나누었어요, 그리스도의 연합을 내세워요, 칼빈이 강조한다고요.
그리고 3권 2장에서 믿음을 이야기할 때도 바로 믿음의 제1요소는 지식이고, 그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고,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했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고, 이렇게 전개되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바로 칼빈의 구원론의 아주 중요한 점입니다. 칭의와 성화, 그리고 전체 구원서정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이게 개혁구원론이거든요.
신자들이 그곳에 이르도록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의 경기장을 맡기셔서 그들이 일생 동안 그곳에서 뛰어가도록 하신다(Huc ut perveniant fideles, stadium poenitentiae, in quo tota vita currant, illis Deus assign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9.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회개의 경기장에서 일생 동안 뛴다’[라고 말합니다]. 보통 회개를 우리가 생명의 회개에, 거기에 머물러 놓거든요. 그게 아니라 ‘일생 동안 회개의 경기장에서 뛴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
자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회개는 우리 자신을 떠나 하나님을 향하는 회심 자체와 그 합당한 열매를 맺음을 다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두 번째, 회개의 첫째 요소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영혼이 변화되고 새로운 마음을 가짐에 있습니다. 이전 것을 떠나는 돌이킴[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둘째 요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심중에 새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예배하는 데까지 이르는 두 번째 요소는 뭐라고 했습니까? 경외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세 번째 요소는 육체를 죽임과 영을 살림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동참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이러한 세 요소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날마다 회복하여서 심령이 새롭게 되고, 의와 진리와 거룩함 가운데서 날마다 새 사람으로서 평생 회개의 경기장에서 [뜁니다.] 이 점에서 회개와 중생의 접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의 회개론이자 중생론이다, 이렇게 우리가 살펴보는 것입니다.
104강 결론
회개는 우리 자신을 떠나 하나님을 향하는 회심 자체와 그 합당한 열매를 맺음을 포괄합니다.
회개의 첫째 요소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영혼이 변화되고 새로운 마음을 가짐에 있습니다.
회개의 둘째 요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심중에 새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지한 경외에 있습니다.
회개의 셋째 요소는 육체를 죽임과 영을 살림에 있으니,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심령이 새롭게 되며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누리고 지식에조차 새롭게 되는 새사람이 됨에 있는바, 이 점에서, 중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