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강 [3.2.14-15]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지식, 확실성,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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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 3.2.14-15. (3권 67-71페이지)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지식, 확실성, 확신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칼빈이 믿음을 다루면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제1요소가 ‘지식’(cognitio)이라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고, 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제1요소인 말씀, 곧 지식의 요소, 이것이 믿음과 함께 부여되는데,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안다는 것이죠. 이 말이 뭡니까? 믿음은 선택받은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여서 그 성령의 임재와 함께 부여되는 은혜의 선물인데, 이 믿음이 갖는 지식의 요소는 이미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식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식, 곧 감화된 지식, 그래서 믿음의 제1요소는 감화된 지식이다. 그 지식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지식이기 때문에 능력의 지식이고, 그 지식은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 아는 대로 우리가 은혜를 누리면서 행할 수 있는 자리로 인도하는,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는 사랑의 열매가 맺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독교 강요』, 3.2.14.]

     이 믿음의 제1요소인 지식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지각적인 지식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철학자 칸트는 지식을 지각할 수 있는 것, 오성의 영역 안에 가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오성의 범주 안에 있는 지식만 우리가 철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 지식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지계, 물자체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지각할 수 있는 현상계만 우리가 알 수 있고, 그러면 믿음은 뭐냐? 믿음은 지각할 수 없는 것을 그저 인정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칸트는 ‘부조리한 믿음’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이 뭐겠습니까? 모르니까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결코 철학자들이 말하는 그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이미 지식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칼빈은 믿음을 정의할 때 바로 성령의 감동으로 여호와를 아는 것, 그래서 감화된 지식이라고 이렇게 정의를 내리는 것을 볼 수가 있고, 그러므로 이 지식은 오직 구원받은 자들에게만 선택의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우리의 지각(sensus)을 훨씬 뛰어넘어서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아서, 파악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부여되면 우리 지식의 장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믿어서 알게 된다는 것이에요,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믿게 되면 우리 마음 안에 바로 ‘그 말씀이 확실하다, 객관적으로 진리다’[라는 고백이 있는데, 이는] 객관적인 ‘확실성’(certitudo)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확실한 말씀이 ‘나에게 주어지는 말씀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왜요? 지식이 나에게 역사해야 구원이 되니까. 그게 바로 주관적 ‘확신’(fiducia)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객관적인 진리 됨, 객관적 확실성 가운데 나에게 부여되는 말씀, 곧 주관적 확실성[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가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심으로 많은 사람을, 택한 받은 사람을 구원하셨다, 그렇다.’ 이것은 객관적 확실성이에요. 그런데 ‘그 구원의 지식이, 그것을 아는 믿음이 나에게 부여되었다.’ 이게 주관적 확신이에요.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성경이 확실하다, 진리라는 것을 ‘아멘’ 하기 위해서는 그 진리가 나에게 역사한다는 주관적 확신이 함께 있어야 돼요. 
     저 사람은 성경의 진리를 인정하는데,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이미 구원의 믿음이에요. 구원받은 자만이 아멘 할 수 있는 믿음의 선물이에요. 그래서 성경이 객관적인 진리임과 나에게 역사하는 주관적인 적용, 그래서 객관적 확실성과 주관적 확신, 그것이 내 안에서 함께 주어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비록 붙잡을 수 없는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감화를 받을 때에 그 감화의 확실성 자체로부터 마음은 그 자체의 능력으로 인지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것을 이해하게 된다(dum persuasum habet quod non capit, plus ipsa persuasionis certitudine intelligit quam si humanum aliquid sua capacitate perspicer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4.

     그래서 ‘감화의 확실성으로부터 능력을 인지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것을 이야기한다.’ 참 귀한 말이잖아요. 바로 성령의 우리에게 임하여서 객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가 ‘아멘’ 할 때 그것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때문에, 확실하다는 것은 이미 그 너머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저 이론이 확실하다, 그래서 뭐 공리다, 아니면 뭐 객관적 진리다, 이런 말을 쓴다고 하지만은 우리 성경에서 확실하다는 것은, 그 확실성은 바로 구원의 진리의 확실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다라고 하는 그 영역을 이미 넘어가는, 그래서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는 우리 지각의 수준을 확실성, 객관적 진리에서도 이미 넘어서 있고, 그리고 주관적인 확신, 나에게 역사는 능력에서도 넘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깊이 감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었던 은밀한 뜻이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만 나타납니다(골 1:26; 참조. 골 2:2). 그래서 에베소서 3장 18절에서 19절에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했다”[고 말씀합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이것이 바로 믿음의 대상이 되는 그 지식입니다. 우리 지식에 넘치는 지식, 감화된 지식,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앎’(agnitio)으로부터 시작되고 믿음은 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자, [곧] 아들을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말씀했던 그 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고, 이 구원의 역사에 믿음이 우리에게 부여된다, 믿음이 부여됨과 함께 구원을 얻는다, 이런 것이 다 “믿음의 지식”(notitia fidei)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지식을 이야기할 때, 믿음으로 안다고 이야기할 때, 그 믿음은 이성적인 논증에 의해서 어떤 교훈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우리가 기성전결을 논하고 정반합을 논하고 서본결을 논하고 그렇게 해서 그 진리가 확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성적인 논증에 의해 교훈을 받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감화로써 더욱그 지식 가운데 확고하게 선다(sed divinae veritatis persuasione confirmati magis, quam rationali demonstratione edocti).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4.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의 앎 혹은 믿음의 지식은 바로 성령의 감화로써 우리에게 확신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안의 역사에서 감동시킵니다. 그 감동의 요소가 지식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감동시키느냐, 지식을 가지고 감동시킵니다. 그 지식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가 감동할 때 우리는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 진리를 믿는 겁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역사가 나에게 ‘아멘’이 됩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겁니다. 받아서 들이는 겁니다. 떨어지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확신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의 객관적 확실성, 이것은 말씀이 객관적으로 진리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공의이시다,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이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하나님은 구원주시다, 이 객관적인 지식을 우리가 ‘아멘’ 함과 함께 그 창조주, 구원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라는] 그 주관적 확신이 함께 우리 안에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가 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아까 인용했듯이,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된다고 이렇게 칼빈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지식은 우리가 보는 것이나 행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역사, 그것이 믿음의 지식의 열매로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지식은 확실성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 확실성은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습니다. 한마디로 거듭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은혜의 장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기독교 강요』, 3.2.15.]

     이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감화는 견고하고 열매를 맺는 견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실한 것이에요. 견고하고 실한 것, [곧] 견실한 감화의 불변성(constantia)이라고 칼빈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안에 감동이 불변하다[는 것입니다]. 견실한 감화의 불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믿음은 확실하고 확고하다[는 것입니다]. ‘확실하다’(certus), ‘확고하다’(firmus), ‘견실하다’(solidus), 이런 단어들은 다 성령의 감동에 관계되는 단어들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면 확고하고 확실하고 견실한 열매들, [곧] 지식의 열매, 선행의 열매, 이런 것들이 맺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완전하고 요동치 않는 그러한 확실성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그 유일한 방식이 성령의 감화에 따른 믿음의 역사라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12편 6절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언제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단련했고 진리를 단련했습니까. 성령이 임하여 믿게 되면 그 연단된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합니다. 언제 우리가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언제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웠습니까? 언제 우리가 남을 위해 살고자 했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령이 임하고 그 가운데 확실한, 확고한, 견실한 믿음에 우리가 서게 되고, 그렇게 되면 여호와의 말씀, 바로 순결하고 아주 또 굽고 또 굽고 해 가지고 온갖 잡티나 어떤 불순물을 다 제거해 낸, 그 흙 도가니에 일곱 번 연단한 은과 같이 순결한 은과 같은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8편 30절에도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말씀에 피하는 자’, ‘말씀에 피한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은 ‘로고스’고 예수 그리스도죠. 말씀에 피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방식이 뭡니까? 바로 그 유일한 길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다[라고] 잠언 30장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적 진리 됨의 이 확실성, 이것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지식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은 결코 객관적인 데 머물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만 지식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이에요. 믿음입니다. 믿음은 뭐냐 하면, 객관적 진리가 나의 진리로 아멘이 됩니다. 그게 바로 확신입니다. 그래서 주관적으로는 확실성, 객관적으로는 확신,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야, 객관적인 진리야,’ 그것만 가지고는 아직 믿음의 온전함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의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그래서 그 말씀이 내 구원의 역사를 이룬다는, 그래서 성경 말씀을 그 말씀으로 은혜 받고 구원받지 않는 자가 성경 말씀을 논할 수가 없는 거죠. 그겁니다. 그래서 확신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믿음으로부터 확신을, 확신으로부터 담대함을 이끌어낸다(apostolus ex fide deducit fiduciam, et ex hac rursum audaci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5.

     확신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믿음으로부터 확신을, 확신으로부터 담대함을 이끌어낸다[는 것입니다]. 제가 계속 아까부터 말씀했지만, 이거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요셉에 [대한] 그 말씀[을] 나 믿어요,’ 그거는 객관적 확실성이고, 그 말씀이 나의 말씀이라고 믿을 때, 홍해를 가르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을 때, 여리고를 무너뜨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을 때, 그게 바로 [주관적] 확신이죠. 그래서 칼빈은 여기에서 바로 ‘믿음으로 확신에 이르고 확신에서 담대함에 이른다’ [곧] 라틴어[로] ‘audacia’라고 하면 바로 ‘담대함’에 이른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 성경에서 말하는 담대함이 뭘까요? 성령의 감화에 따른 말씀에 대한 믿음이겠죠. 그러니까 성령의 감화, 감화가 바로 성령의 감동,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믿는 것, 그게 담대함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믿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을 것을 천사를 통하여 통보받았을 때, ‘말씀대로 된다[고] 믿습니다’라고 했잖아요. 말씀대로 된다, 그것입니다. 이러한 담대함은 바로 믿음에서부터 나옵니다. 

이런 담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으로부터만 태어난다(Quae audacia nonnisi ex divinae benevolentiae salutisque certa fiducia nasci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5.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우리가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이러한 담력은 바로 여호와가 인자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그러한 분명한 확신으로부터만 태어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칼빈 이후의 개혁신학자들의 입장에 상응합니다.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fides vera)은 세 가지를 본질적 요소로 삼습니다. 첫째, 말씀의 계시에 따른 지식(notitia)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것이 그 요체입니다. 둘째, 그 지식의 객관적 진리로서의 확실성(certitudo)을 받아들이는 승인(assensus)입니다. 이는 단순한 동의(consessio)와는 다릅니다. 셋째, 그 지식을 주관적 진리로서, 즉 자기에게 적실하게 주어진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확신(fiducia)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세 가지 본질적 요소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서 선택과 구원의 복음을 그 영역으로 삼는 특별한 믿음(fides specialis)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성과 계시성과 영감성과 자증성을 믿는 일반적 믿음(fides generalis)에 모두 요구됩니다. 일반적 믿음 역시 특별한 믿음과 다름없이 일반은총이 아니라 특별은총에 속한 구원의 믿음(fides salvifica)이기 때문입니다. … 이러한 개혁신학자들의 이해는 구원의 믿음은 공로를 통하여 사효적(事效的)으로(ex opere operato) 작용한다고 보는 로마 가톨릭과 특별한 믿음의 지식과 승인은 단지 구원의 믿음의 준비에 불과할 뿐 확신만이 구원의 준비라고 보는 루터파와는 궤를 달리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5, 각주 120번.

     여기서 잠깐 정리를 해 보면,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의 본질적인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지식의 요소[인데], 지식의 요소는 말씀, [곧] 그리스도[입니다]. 
     두 번째는 바로 객관적 확실성의 요소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지식을 바라볼 때, 객관적으로 진리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 확실성의 요소입니다. 여기에는 바로 동의와 승인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그렇다,’ 그리고 ‘맞다’라고 말하는 동의와 승인, 한 단어로 말하면 승인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확신이 있습니다. 확신은 바로 성령의 감화로 내 안에 감동이 일어나서 ‘그 말씀이 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 번째 요소는 지식의 요소, 두 번째 요소는 객관적 승인의 요소, 세 번째 요소는 주관적 확신의 요소[입니다]. 
     두 번째, 객관적 승인은 뭔가 하면 말씀이 나에게 떨어지는 겁니다, 객관적 진리로서. 그래서 내가 그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주관적 확신의 요소는 그 말씀이 떨어졌을 때 내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이란 내 속으로 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게 받는 거라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은 들이는 것, 그래서 받아들임[입니다]. 객관적 확실성은 받는다는 것이고 주관적 확신은 들인다는 것입니다. 받을 수(受) 자 들일 납(納) 자, 바로 말씀을 믿음으로 수납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첫 번째 요소인 지식의 요소, ‘수’ 받을 수(受) 자가 객관적 확실성, 납, 들일 납(納) 자가 주관적 확신, 그래서 말씀을 믿음으로 수납한다, 이게 우리 개혁신학이고, 제가 신학교 갔을 때 1학년 때 제일 먼저 들은 이야기가 말씀을 믿음으로 수납한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믿음의 지식은 지각적 인식에 제한되지 않고 성령의 감화의 확실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인지 수준 이상의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을 지식 혹은 앎이라고 칭할 때, 그 지식은 이성적 논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감화로부터 나오는 확실성을 머금고 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써 그 말씀이 객관적 진리임에 대한 확실성과, 성령의 감화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주신 주관적 말씀임에 대한 확신을 함의합니다. 
     넷째, 말씀을 믿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에 대한 확신에 이르고 그 확신으로부터 우리가 담대함으로 나아갑니다. 
     다섯 번째, 성령의 역사로써 말씀을 믿음은 그 영감에 따른 말씀을 조명에 따라 받음과, 감화에 따른 들임을 칭합니다. 곧 금방 이야기했듯이 받아들이는 것, 수납하는 것입니다.



98강 결론


  1. 믿음의 지식은 지각적 인식에 제한되지 않고 성령의 감화의 확실성으로 말미암아 인지 수준 이상의 것을 이해합니다. 
  2. 믿음을 지식 혹은 앎이라고 칭할 때, 그 지식은 이성적 논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감화로부터 나오므로 확실성을 머금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써 그 말씀이 객관적 진리임에 대한 확실성과, 성령의 감화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주신 주관적 말씀임에 대한 확신을 함의합니다. 
  4. 말씀으로 믿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에 대한 확신에 이르고, 그 확신으로부터 담대함에 이릅니다. 
  5. 성령의 역사로써 말씀을 믿음은 그 영감에 따른 말씀을, 그 조명에 따른 받음과, 그 감화에 따른 들임을 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