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강 [1.17.12-14] 하나님은 후회하심 없이 불변하는 계획을 끝까지 이루심

관리자
조회수 428





41 | 1.17.12-14. (1권 487-491페이지)



하나님은 후회하심 없이
불변하는 계획을 끝까지 이루심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다’ 이렇게 말할 때 주로 우리 바깥의 일들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고의 섭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날마다 거룩하게, 성화 과정에서 빚어가시는, 그래서 여물게 하시는, 그래서 끝내 열매 맺게 하시는, 그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심, 물론 이 땅에서는 그 온전함에 다 가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지상에서부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지시고,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로 인치시고, 자녀 삼으시고, 이 땅에서 자녀의 삶을 살게 하시고, 그리고 끝내 영화롭게 하시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섭리를 아는 지식이 최고의 복이요, 섭리에 대한 무지가 최고의 비참함이다.’(『기독교 강요』, 1.17.11.) 이렇게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음을 지난 시간에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가운데 자신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시고, 그 가운데 섭리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 섭리에 대한 ‘원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들을 다 우리가 나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섭리하심을 ‘경건한 믿음’으로 우리가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심과 존재하심과 하나님의 일하심, 경륜(經綸), 곧 섭리를 우리가 ‘아멘’ 하며 하나님 앞에 위로를 얻고 인내하고 소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후회하신다’(Dei poenitentia, 하나님의 후회하심)라는 이러한 표현이 언급된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처음과 끝이 되시고, 시작과 나중이 되시고,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데(참조. 롬 11:36; 계 1:8; 2:8; 21:6; 22:13), 어떻게 후회하심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확고하고 안정적이고, 어떤 이차적 원인, 하부적인 원인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차적, 하부적 원인 조차도 하나님의 작정과 뜻 아래에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창세기에 보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셨다’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창 6:6)? 그리고 ‘사울을 나라 위에 왕으로 세우신 것을 또한 후회하셨다’라고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삼상 15:11).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돌이킴이 있으면 그들에게 내리기로 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라고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렘 18:8).
     이것은 사람들이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시고 재앙을 내리기도 하시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사람들의 어떤 행위의 결과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변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런 오해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들 중에 어떤 것이 폐지된 것이 있다’는 식으로 또 성경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본래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 멸망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욘 1:2; 3:1-4). 그래서 요나가 그 니느웨의 성에 가기 싫은데도, 니느웨가 어딥니까? 앗수르의 수도 아닙니까? 앗수르가 어떤 민족입니까?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민족이요, 그리고 가장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였고, 또 간음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땅으로 데려가고, 또 자기 백성을 이스라엘에 정착시키는, 그야말로 혼족(混族)정책을 쓰고, 사민(徙民)정책을 썼던,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훼손시킨 민족 아닙니까? 그러니까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구원을 전하라면 요나가 갔겠습니까? 멸망을 전하라고 보냈는데도 욥바로, 다시스로 도망치지 않습니까? 이것을 봤을 때, ‘하나님의 본래 계획은 니느웨의 멸망에 있었는데, 나중에 멸망시키지 않고 회개시키려고 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하나님이 뜻을 바꾸었다.’ 이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히스기야가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히스기야 왕의 눈물과 벽을 향한 기도, 이것에 공감하셔서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지 않았습니까(사 38:1, 5; 왕하 20:1, 5; 참조. 대하 32:24)? 이것도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본래는 히스기야 왕을 죽이려고 하셨는데,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고, 그리고 애통하고 눈물 흘리니까 하나님의 뜻을 바꾸었다. 하나님의 뜻은 변경되는 것이다.’ 이렇게 또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말씀들은 결코 그렇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후회하심’이라는 것은 ‘후회하심’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그 일을 간절하게 애통해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우리에게 ‘맞추어 주시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간혹 우리 부모님이나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내가 너 때문에 후회한다, 또 내가 너를 이곳에 둔 것을 후회한다.’ 그러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근데 하나님이 ‘후회한다’는 표현을 쓰신 것은 그 일을 얼마나 싫어하는가, 그것을 알 수가 있죠.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는데,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자기 뜻대로 행하니까 ‘인생을 지은 것을 후회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도대로 예배 드리는 것, 제사 드리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데, ‘사울이 자기 마음대로 사무엘이 오지 않는다고 제사 드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후회한다’ 하셨습니다. 그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모르시는 일이 없습니다. 피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결정은 창세 전, ‘영원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후회하실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어떻게 후회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하실 때(삼상 15:11), 그 변화는 비유적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얼마 뒤에 다음이 첨가된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as)이 공개적이고 아무 비유 없이 선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일들을 경영하시기 위하여 정하신 규정은 영원하며 모두 그의 후회하심을 넘어서 있음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일관성(constantia)에 대한 의심이 제해지도록, 그의 대적들도 이에 대해 증언하지 않을 수 없게끔 강요받았다. 발람은 압도되어서 다음과 같은 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2. 

     이 하나님의 후회하심은 변개(變改)하심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5장 11절에 ‘하나님이 사울을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고 하신 바로 그 장, 29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혹시 후회하심에 대한 말씀을 오해할까 봐, ‘하나님은 거짓이나 변개하심이 없다’라고 하나님의 뜻의 ‘불변성’(immutabilitas)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불변성’, ‘섭리의 불변성’은 ‘하나님의 불변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과 그분의 ‘뜻’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관성’(constantia)은 ‘하나님의 섭리의 일관성’이요, ‘하나님의 뜻의 일관성’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라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회하심’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뜻은 … 하나님이 사람에 속한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자기를 표현하시는 여러 언술(言述) 방식들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연약함은 그의 높이에 가닿을 수 없으므로 그에 관한 기술(記述)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가 담을 수 있는 수준에 맞게끔 낮추어져야 한다. …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그는 자기 자신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지각되는 성상(性狀)으로 묘사된다. … 그러므로 우리는 ‘후회하심’이라는 용어 아래에 행위들의 변화 그 이상의 다른 무엇을 함의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사람들이 각자의 행위들을 변화시킴으로써 … 자기들의 반감을 증언하곤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화(mutatio)는 … 그들을 난감하게 하는 것에 대한 교정(correctio)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있어서도, 이러한 교정이 그의 후회하심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이 후회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자기의 행위들에 있어서 변화하심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 그의 뜻도 … 그의 정서도 변화되지 않는다. 그가 영원에서부터 선견하셨고 인정하셨으며 작정하셨던 … 그것을 항속적인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수행하신다(ideo per poenitentiae nomen significatur quod Deus in suis operibus mutat; interim nec consilium illi, nec voluntas invertitur, nec affectus commutatur; sed quod ab aeterno providerat, probaverat, decreverat, perpetuo tenore prosequi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3. 

     이 ‘후회하심’이라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맞추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그 일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시고 애통해 하시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전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의 한 과정의 ‘변화’(mutatio)를 의미합니다. 이 변화는 ‘변개’가 아닙니다. 변화조차도 하나님의 한 뜻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변경’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 안에서, 그때 그때 그때 과정에 맞추어서 영광 받기 원하시고, 또 하나님의 백성을 유익하게 하시려는 궁극적인 뜻을 가지고, 하나님은 과정 과정마다 우리가 보기에는 변개다, 변경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변화’인 것입니다. ‘변화’. 하나님이 필요할 때는 초록색으로, 필요할 때는 하늘색으로, 이것을 변경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그때 하나님이 필요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그것이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변경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미리 보셨고, 선견(先見)하셨고, 인정하셨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섭리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큰 일을 이루시는 가운데서의 객관적인 과정에서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변화가 아닌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그때 그때 그때 그때를 전부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필연성’에 따라 모든 것을 이루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불변하심, 그의 뜻의 불변하심, 그의 섭리의 영원하심을, 영원한 경륜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거룩한 역사는 한때 니느웨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던 멸망이 철회되었다는 사실과(욘 3:10) 히스기야의 생명이 죽음의 위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장되었다는 사실을(사 38:5)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들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 우리는 이 두 사건의 결말을 통하여 그 각각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말 없는 조건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왜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셔서 그 도시의 몰락을 선포하게 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통고하셨는가? … 하나님이 여기에서 염두에 두신 것에는 그들이 각자의 죽음에 대해서 미리 경고를 받아, 먼 곳으로부터 다가와 점점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그 죽음을 식별하게 하려는 뜻 외에 다른 무엇이 있었다. 참으로 그는 그들이 파멸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가 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게 바뀌어 파멸되지 않는 것이었다. … 이것이 사실일진대, 이런 사안들의 본질은 단순한 통고 안에 있는 무언의 조건에 대해서 함축적으로 들을 수 있도록(in simplici denuntiatione conditionem tacitam subaudiamus) 우리를 이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4.  

     니느웨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던 멸망이 철회된 것은 분명합니다(욘 3:4, 10). 그리하여 니느웨의 회개가 있었고, 그리고 회개 가운데 이제 멸망하지 않고 니느웨의 구원을 요나가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요나는 처음부터 니느웨에 구원을 선포하고 니느웨에 회개의 그 말씀을 전하라고 했다면 더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나를, 선지자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방식, 그것은 요나에게 맞추어서 그때 그때 요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방식, 그리고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방식, 이것은 그 과정 과정의 변화같이 보이지만, 아까 우리가 이야기했듯이, 처음에는 멸망을 선포하라 하고는 이제는 회개와 구원의 선포로 나아가는, 그래서 ‘저 백성을 구원할 바에야 내가 죽겠나이다’ 하고 박넝쿨 아래 요나가 좌절하여 앉아 있게 하시는, 거기에 변화가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의 변개가 아니요, 하나님의 뜻이 두 가지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그 사라를 빼앗겼다.’ 이렇게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누이라고 속였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아브라함을 책망도 하시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그곳에서 환란을 이기게 하시고, 또 궁핍을 이기게 하시고, 결국 사라와 함께 다시 그곳을 벗어나서, 그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뭇 후손의 조상으로 그렇게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빌미로 여호와는 자기가 선포하신 것을 무효화시킴으로써 자기의 처음 계획을 폐지하신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참조. 창 20장). 왜냐하면 여호와는 형벌로 경고하심으로써 자기가 아끼는 자들이 회개에 이르도록 충고하실 때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뜻이나 말씀을 변경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원한 규정이 수행되는 길을 닦으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이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을 음절 하나하나로 표현하지 않으셨을 뿐이다(Viam enim potius aeternae suae ordinationi sternit Dominus, quum poenam denuntiando, ad resipiscentiam monet eos quibus vult parcere, quam voluntate quidquam variet, ac ne sermone quidem; nisi quod syllabatim non exprimit quod intelligere tamen promptum est). 우리는 다음에서 이사야가 전하는 바를 참 말씀으로 견지해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4.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의 경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너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돌이켰을 때, 하나님이 다시 상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변개가 아닙니다. 그때 그때 하나님의 뜻에 따른 그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고유한 섭리’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뜻이나 말씀을 변경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원한 규정이 수행되는 길을 닦으려고 하나님은 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길을 닦기 위해서 자기의 뜻이나 말씀을 변경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까 그렇게 나누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불변하는 뜻 가운데 변화, 그것은 이미 한 뜻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경이 아니[고] 변개가 아닙니다. 요나에게 ‘멸망을 선포하라’ 했다가 ‘회개를 선포하라’ 한 것은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경’은 아닙니다. 두 뜻은 아닙니다. ‘한 뜻’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자기 뜻을 ‘변개’함 없이 항속적인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서 이루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후회하심은 자기의 행위를 이루심에 변화가 있음을, 우리의 지각에 맞추어 표현해 주신 것입니다. 이 ‘변화’는 ‘변경’이나 ‘변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이 새로운 것으로 바뀐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을 폐하심은 자기의 영원한 규정이 수행하는 길을 닦으려고 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이나 말씀을 ‘변경’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정하신 형벌을 철회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잠시 자기 백성 같이 두신 듯 하지만, 그 백성을 끝내 멸망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큰 자기의 뜻을 이루심, 말씀을 이루심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일어난 일을 미리 아시고, 행하실 것을 행하시며, 피하실 것은 피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일관성에는 우리가 아무 의심도 갖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불변하는 섭리, 그 뜻’, 이것이 요셉과 같이 우리 안에 큰 고백으로 메아리치기를 원합니다.




41강 이번 강의 결론

  1. 하나님은 자기 뜻을 변개함 없이 항속적인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십니다. 
  2. 하나님의 후회하심은 자기의 행위를 이루심에 변화가 있음을 우리의 지각에 맞추어 표현해 주신 것이며, 그것이 계획이나 뜻의 변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3.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을 폐하심은 자기의 영원한 규정이 수행되는 길을 닦으려고 하심이지, 자기의 뜻이나 말씀을 변경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4. 하나님은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시고 행하실 것은 행하시며 피하실 것은 피할 수 있으시니, 그의 일관성에는 그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