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강 [2.14.1-3] 두 본성 한 인격의 위격적 연합과 두 본성의 속성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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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 2.14.1-3 (2권 417-425페이지)



두 본성 한 인격의 위격적 연합과
두 본성의 속성 교통


[『기독교 강요』, 2.14.1.]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인성에 결합되고 연합될 때, 두 본성의 순수한 특성이 유지되면서 그 두 본성으로부터 한 그리스도가 세워진다(ita coniunctam unitamque humanitati divinitatem … ut sua utrique naturae solida proprietas maneat, et tamen ex duabus illis unus Christus constitua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1.

여기에서 천명되고 이하 본 장 끝까지 개진되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의 위격적 연합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칼케돈 신경(Symbolum Chalcedonense)의 조목들 거의 다 반영하고 있습니다. 451년 칼케돈 회의[를 통해] … 중보자 그리스도의 신격과 인성이 확정되고 신성과 인성이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ἀσυγχύτως, ἀτρέπτως, ἀδιαιρέτως, ἀχωρίστως[inconfuse, immutabiliter, indivise, inseparabiliter]) 한 위격 가운데 연합되어 있다는 소위 칼케돈 공식이 수립되었습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1, 각주 741.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제2위 성자 하나님, 그는 성부, 성령과 동일한 본질이십니다. 그 본질, 그 본성, 그것을 우리는 신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자는 영원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치고 사람의 아들이 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A가 B가 되었다’라고 하면 이제 B죠. 그러나 성육신, 위격적 연합의 비밀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므로, 영원불변하시므로 그 어떤 일로도 변화를 겪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고 해서 어떤 혼합이나 변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심, 이것이 성육신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입니다. 그분 자신의 인격, 위격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성경은 때로는 오직 인성에만 관련시켜야 할 것들을, 때로는 신성에만 고유하게 작용하는 것들을, 때로는 양성에 모두 포함되나 따로 각각의 본성에 충분히 적합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그리스도께 돌린다(Attribuunt illi interdum quae ad humanitatem singulariter referri oporteat, interdum quae divinitati peculiariter competant; nonnunquam quae utramque naturam complectantur, neutri seorsum satis convenia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1.

     그렇다면 이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니신 분이 사람의 아들로서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신성과 인성에 속한 모든 속성들이 성육신 이후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귀속(歸屬)이라고도 합니다. 신성에 따라서는 영원히 하나님께서 나시고,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죠. 인성에 따라서는 때가 차매 여자의 후손으로 나시고(갈 4:4), 이것은 바로 사람의 아들이심을 뜻하죠. 그래서 인성에 따른 속성, 신성에 따른 속성[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지는, 신인 양성의 속성이 함께 귀속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육신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격적 연합, 곧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한 위격,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연합되었다고 해서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거나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의 비밀은 그 어떤 것으로도 유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따라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요 10:30),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성에 따라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니이다’(요 14:28)라고 또한 말씀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에 따라서는 생명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시고, 죽음을 이기시는 분입니다, 죽음을 죽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인성에 따라서는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돌려집니다. 그래서 죽으신 분이 죽음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이 땅에 아버지보다 못한 <그러한>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입니다. 

칼빈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의 신인 양성의 위격적 연합에 따른 신성과 인성의 속성 교통이 위격 안에서(in), 위격을 통하여(through), 위격에로(unto), 간접적으로(indirecte, indirectly), 성경의 말씀에 따라 ‘축자적’(逐語的, verbal)으로, 인성과 신성의 고유한 속성이 모두 한 위격에 돌려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1, 각주 744.

     이렇듯 신성과 인성의 속성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지는 것 이것을 신인 양성의 “속성 교통”(ἰδιομάτων κοινωνία)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칼빈 이후 개혁 신학자들은 이 속성교통론을 전개하면서 이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값이 ‘실제’라는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고, 예수님의 모든 의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의’라는 언약 신학을 형성시켜 간 것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도르트 신경도 있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있고 정통 개혁신학이 수립되고 형성되는 것입니다. 
     루터란들은 신성과 인성이 자체적으로 섞인다고 보기 때문에 결코 언약 신학이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루터란은 성육신이 한 인간이 신적인 능력을 부여받는, 그래서 아주 대단한 인간이 되는 그런 정도의 이해에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 루터란의 잘못된 교리를 정확하게 반박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동일하신 분이다. 그분은 영원한 신성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면서 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신성과 인성이 함께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신성과 인성의 속성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지고, 그리고 신성과 인성의 속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서로 교통한다,’ 이런 것을 우리가 ‘간접적이다’라고 이렇게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으로서, 신인으로서 구원의 모든 중보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이후에 성경의 기록, 복음서의 기록, 또 서신서의 기록, 이러한 기록들은 언제든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으로서 [말씀합니다.] 성육신 이후로 말입니다. 성육신은 출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이 아니라 잉태입니다. 성육신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으로서 우리가 바라봐야 됩니다. 

[『기독교 강요』, 2.14.2.]

     그래서 칼빈은 이곳에서 [성경에 증언된 속성 교통의 양상]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속성교통론의 아주 중요한 하나의 기원이 되는, 시점이 되는 칼빈의 이해입니다. 

첫 번째 속성의 교통 형태로서 성경에 성육신한 그리스도에 대해 ‘신성에 따라서’(κατὰ τὴν θεότητα, secundum deitatem)만 기록된 말씀도 신인 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2, 각주 746.

     칼빈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divinitas)에 따라서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성육신 이후로는 신인 양성을 함께 생각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히 계심을 뜻합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지금 제자들이 듣는 앞에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신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다(골 1:15)[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피조물은 창세 때 존재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창세 전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17장 5절에도 보면,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창세 전에 이미 성부, 성자, 성령은 함께 계시므로, 영원히 계시므로, 언제나 동일하시므로 동일한 영광이 돌려지죠. 그래서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적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 17절에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성부와 성자 나아가서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함께 일하심, 삼위일체의 동사(同事)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함께 ‘동’(同) 자, 일할 ‘사’(事) 자,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일하시는 경륜적 삼위일체, 존재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 영원히 함께 계시고 영원히 함께 일하시는, 그래서 첫째로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이후로 신성에 따라서만 표현된 말씀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심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받아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속성의 교통 형태로서 성경에 성육신하신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인성에 따라서’(κατὰ τὴν ἀνθρωπότητα, secundum humanitatem)만 기록된 말씀도 신인 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2, 각주 747.

     그리고 두 번째는 ‘인성(humanitas)에 따라서 기록된 말씀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함께 생각하면서, [즉] 사람의 아들이심에 대한 기록이지만, 인성에 따라서 한 기록이지만, 신성에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함께 생각하라’라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종”(사 42:1)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 가시고(눅 2:52), 그는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시고(요 8:50), 마지막 날을 모르시고(막 13:32; 마 24:36), 스스로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요 14:10), 예수님은 자기 뜻을 이루려고 오신 것이 아니[셨고](요 6:38), 예수님은 만져지셨고, 또한 사람들이 그를 보[았]고(눅 24:39),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것 가운데서 자라 가시고, 이러한 것이 전부 인성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님을 단지 인성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지금 어느 곳에 계신 분은 모든 곳에 계신 분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요 6:38)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바로 아버지와 한 분이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는 성부, 성자, 성령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 동일하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지만, [성자는] 인성에 따라서는 보내심을 받았지만, 그분은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입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종의 형체로 오셨고, 사람의 아들로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니이다’(요 14:28)라고 말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인성에 따라서는 마지막 날을 모르십니다(막 13:32; 마 24:36),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성에 따라서는 ‘죽은 나사로가 어디에 있느냐’(요 11:34)라고 질문도 하셨습니다. 인성에 따라서는 지혜와 키가 자라듯이 그의 지식도 자랍니다(눅 2:52). 그러나 신성에 따라서는 전지하신 분입니다, 완전하신 분입니다. 더 이상 자라실 수 없고 더 이상 채워질 수 없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고 완전하시고 불변하신,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성에 따라서만 표현하는 복음서와 서신서의 말씀들도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인 양성 가운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속성의 교통 형태로서 성경에 성육신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성에 따라서’와 ‘인성에 따라서’ 주어와 술어 등이 서로 다른 본성의 속성에 따라서 기록된 말씀도 신인 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2, 각주 751.

     세 번째는 ‘성경에 신성과 인성에 따른 표현이 동시에 나오는 말씀, 이런 말씀을 모순되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지는 말씀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성입니다. 신성은 피가 없습니다. 신성은 육체가 없습니다. 신성은 고난당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이 자기 피는 인성에 따른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시니까, 신성에 따른 속성도 돌려지고 인성에 따른 속성도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이것은 정확하게 한 분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을 계시해 주는 말씀, 너무나 비밀스러운 경륜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려 주시는, 그분의 존재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전 2:8).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광의 주”는 신성에 따라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거는 인성에 따라서의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 양성이므로, 이 두 말씀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태초로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듣고 보고 “자세히 보고…만진 바” 된지라. 요한일서 1장 1절에 말씀하지 않습니까. 태초로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은 신성에 따른 말씀입니다. ‘그를 우리가 듣고 보고, 자세히 보고, 만진 바 된지라,’ 이것은 인성에 따른 말씀입니다. 이 신성과 인성에 따른 두 가지 속성, 두 본성의 속성이 다 돌려지기 때문에 위격적 연합의 비밀이지요. 우리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두 본성에 속한 속성을 다 그분에게 돌리는 것은 주저합니다. 앞뒤가 안 맞다고 생각하고 모순이고 역설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옮겨 다니시는 분이 모든 곳에 계시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영원하신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보고 자세히 보고 만지고 듣고,’ 이것은 마땅히 [한 분께] 돌려져야 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목숨을 우리를 위하여 버리셨다’라는 이 요한일서 3장 16절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분 하나님의 아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시므로 신성과 인성의 속성이 돌려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4.3.]

네 번째 속성의 교통 형태로서 성경에 성육신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이 그 개념상 신성과 인성의 양성적 중보를 전제하는 경우에도 신인 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4.3, 각주 752.

     이제 네 번째는 ‘성경 말씀의 어떤 용어나 개념 그 신인 양성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Dominus)가 되신다(고전 8:6).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mediator)가 되신다. 이러한 말씀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려면, 사람으로서 죽으시고 하나님으로서 그 죽음[을] 이기시는, 구주가 되시면 당연히 신인 양성이셔야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신다. 중보자는 중계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분만이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 개념들은 구원에 관한 말씀들, [즉] 예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시요(요 10:11, 14), 예수님이 빛이시요, “세상의 빛”이시요(요 8:12; 9:5), 예수님이 “양의 문”이시요(요 10:9), “참 포도나무”시요(요 15:1), 이러한 예수님의 대속을 나타내는 이름들은 전부 다 그 자체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 존귀와 영광 가운데 계신 분, 그가 이 땅에 오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는 히브리서의 많은 말씀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심과 참 사람이심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중보자의 직분은 단지 신성과 인성 어느 한 본성에 속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셔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 [즉] ‘주’라는 것, ‘중보자’라는 것, 또 우리를 위한 ‘대속주’,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의를 이루신 ‘목자’이심, 이러한 말씀들이 전부 신성과 인성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은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 육신과 혼합되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육신으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될 때, 두 본성의 순수한 특성이 유지됩니다. 이 가운데 신인 양성에 속성 교통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성육신하신 중보자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은 신성에 따라서 기록된 경우, 인성에 따라서 기록된 경우, 신성과 인성 모두에 따라서 기록된 경우, 그 어떤 경우도 불문하고 성육신 이후로는 신인 양성의 인격 곧 위격적 연합 가운데 우리가 읽고 새겨야 합니다. 
     세 번째, 그리스도가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시고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는 분이심을 칭하는, 중보자, 주, 목자, 빛, 양의 문, 포도나무 등의 이름은 그 의미상 그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심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83강 결론


  1.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은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 육신과 혼합되었음을 뜻하지 않는바, 성육신으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될 때 두 본성의 순수한 특성이 유지되는 가운데 한 그리스도가 세워집니다. 
  2. 성육신하신 중보자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은 신성에 따라서 기록된 경우, 인성에 따라서 기록된 경우, 신성과 인성 모두에 따라서 기록된 경우를 불문하고 그가 신인(神人)의 한 인격이심을 새기며 읽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가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시고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시는 분이심을 칭하는 “중보자”, “주”, “목자”, “빛”, “중보자”, “양의 문”, “포도나무” 등의 이름은 그 의미상 그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심을 전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