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질하지 말라”(Non furtum facies, 출 20:15)라는 이 제8계명도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고 규정돼 있지만 칼빈은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은 불의를 혐오하시므로 우리는 각자에게 속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야 한다는 데 있다(롬 13:7). 요컨대 우리는 타인에 속한 것들을 탐내는 것이 금지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자신의 소유물을 지킬 수 있도록 충실히 도와주는 일을 감당하게끔 명령을 받는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5.
‘하나님은 불의를 혐오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을 마땅히 돌려줘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각자 각자에게 주신 것을 내가 과도하게 취하거나 또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누군가가 가질 수 없게 된다면 그것도 도둑질이다’라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죠.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이죠. 이런 기독교 재물관을 가지고 이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열심히 일했고 내가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전부 내 것이다’라고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합당한 소유물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적극적인 계명, 이것이 바로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것에 근본적인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나 재화, 땅 그리고 여러 권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지상에서 소유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유가 무단히 남에게 침해를 당하고, 그리고 열심히 일한 것이 마치 미디안이 가을만 되면 쳐들어와서, 가나안 땅에 와서 이스라엘의 밀을 훔쳐 가고, 포도를 훔쳐 가듯이 그렇게 강탈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질서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겠습니까? 마땅히 일한 바의 것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그 질서가 깨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 가지인 것입니다. [첫째,]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보호돼야 되고, 두 번째,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주신 것이 공평하게 또 보호돼야 됩니다. 이런 것을 무시해 버린다면, 그리고 힘 있는 사람이, 권력이 있는 사람이, 무기를 가진 사람이 그런 것을 독식한다면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창조 질서[가] 다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자기의 소명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빚진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자기가 쥐고 있거나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있[다](Alienum…et retinet et praevertit, qui non exsequitur quod ex suae vocationis munere aliis deb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5.
하나님은 각자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 소명은 달란트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자기가 감당해야 됩니다. 그것을 남에게 맡기거나, 또 남이 한 것을 내가 자의적으로 빼앗거나 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46.]
“우리의 몫”(sors noster)에 만족하고, “정직하고 합법적인 이익”(honestum et legitimum lucrum)을 남기려고 열심을 다한다면, 그것이 바로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잘 지킨 것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심히 자기 자리에서 일하고, 거기에 주어지는 급부를 누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더불어 잘 살도록 조언하고, 충고하고, 함께 지켜 가야 된다[라고] 적극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빼앗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눠 주고, 또 서로 나누는 것을 권하는 사회, 이런 것은, 또 우리 특별히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초대교회에서 유무상통하고 서로 떡을 떼고 모이기에 힘쓰고 서로 구제하기에 힘쓰고 이러한 것이 바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의 적극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어느 정도 의무를 수행해야 자기가 진 빚을 갚을 수 있는지 깨닫게 하고 그 빚을 충실히 다 갚게 하자(respiciat unusquisque quatenus ex officio aliis sit obligatus, ac quod debet, bona fide persolvat).…이를 위하여 우리 각자가 자기의 지위와 자리에서 자기 이웃에 빚진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 빚진 것을 갚도록 하자(Ad hunc,…modum quisque reputet, quid in suo ordine ac loco proximis debeat, et quod debet solv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6.
각자 각자가 의무(officium)를 수행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땅히 자기 행할 것을 하는 것이 주어진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둑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책상을 들고 옮길 때 나만 손을 뺀다면 다른 사람이 더 애를 먹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도둑질이라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단순히 빼앗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을 안 해서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부담하게 된다면 그건 역시 도둑질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통치자들(praefecti)도 군림하거나 사취하거나 강취하는 그런 빼앗는 자리에 서면 안 되고, 각자 각자 자기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질서, 공공의 선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는 그러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신 17:19; 대하 19:6-7; 히 13:17).
교회의 일꾼(ministri ecclesiarum)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히 임하여 부유함을 누리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것이 나만이 누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베푸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한 양에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에게 베푸시는 은혜이지 않겠습니까? 서로 나누고, 서로 누리고, 서로 떡을 떼서 교제하는 그러한 것들을 함께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특별히 여기에서 주목할 만하게 이런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들은 통치의 일을, 교회의 일꾼들은 교회의 거룩한 일을(딤전 3장 등), 백성들(populus)은 또 백성들에게 주어진 국가의 의무를(롬 13:1-7 등), 부모들(parentes)은 맡겨진 자녀를(엡 6:4 등), 또 자녀들(liberi)은 우리 위에 두신 부모를, 종들(servi)은 상전을, 상전(herus)은 종들을(엡 6:5-9 등), 이 각자 각자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일을 감당하는 것이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의 지위와 자리에서 이웃에게 빚진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 빚진 것을 갚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입법자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manus)과 우리의 마음(animi), 우리의 외형적인 어떤 행태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씀씀이도 다른 사람들을 함께 살리고 높이고 함께 채워 가는 그것이 바로 제8계명의 목적이라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8.47.]
이제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Non eris adversus proximum tuum testis mendax, 출 20:16). 우리는 이미 [제]3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거짓이나, 또 하나님에 대한 참람함, 또 불경함, 이런 것을 금한 것이라면, 이 제9계명은 이웃에 대한 계명이죠. 이 계명은 무엇보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속임이 없이 진실되게 항상 말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법정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법정에서 거짓으로, 위증을 하면 얼마나 상대편이 큰 고초를 당하게 됩니까?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금지에는 우리가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능한 한 충실하게 도와서 그의 이름과 그에게 속한 것들의 순전함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령이 결합되어 있다(Cui interdicto cohaeret imperium, ut unicuique fidelem operam, quoad licet, in asserenda veritate commodemus, ad tuendam et nominis et rerum suarum integritate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7.
이 계명도 좁게 해석하면 안 되고, 넓게 해석해야 됩니다. 진실을 말하는 편을 돕고, 그 자리에 서 주고, 거짓이 악을 이기지 않도록 우리가 보호해 나가는 것도 이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위증하는 증인이 돼서는 안 되고, 거짓의 일을 멀리 해야 되고, 나아가서는 형제들을 두고 수군 수군거리는 것조차 거짓 증거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이렇게 말을 잘 만들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도 남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칼빈은 그런 것도 거짓 증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제9계명은 우리의 혀가 진리를 선포하면서 우리 이웃 사람들의 명성과 복리 두 가지 모두를 섬길 때 합법적으로 준수되는 것이다(legitima praecepti observatio est, ut lingua in asserenda veritate, proximorum tum bonae famae, tum utilitatibus servi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7.
제9계명은 우리의 혀가 진리를 선포하면서 우리 이웃 사람들의 명성도 지켜 주고, 복리(福利)도 지켜주라[고] 칼빈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명예도 지켜 주고, 막 험담하고, 막 없는 말 만들고,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웃의] 복리도 지켜 주라, 거짓말하여서 돈을 빼앗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예도 살려 주고, 재물도 살려 주고, 그런 것이 다 어디서 나오느냐, 거짓으로부터 나오니까, 그 거짓을 금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48.]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악을 속속들이 파고들 때나 발고(發告)할 때에 어떤 독성 있는 달콤함을 즐긴다(venenata quadam dulcedine oblectamur). 대체로 많은 경우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세워 적당한 변명거리를 삼으려고 생각하지 말자.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8.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것을 진리라고 하면서 ‘아!’ 누구누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진리라도 다른 사람들[을] 헐뜯는 것을 달콤하게 여기는 그런 말은 거짓말이다, 거짓 증거다라고 칼빈이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이웃을 높이기 위한 진리의 말이 돼야지, 이웃을 헐뜯고 이웃을 시기하면서 이웃을 나보다 더 아래에, 수하에 있는 사람같이 여기면서 하는 그런 말들, 무엇보다도 농담이라는 구실로 사람들을 입에 오르내리며 조롱하는 이런 것도 바로 거짓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의 권리로 우리의 혀 못지않게 우리의 귀와 마음도 다스리시는 입법자에게 눈을 돌려 보자(Nunc si ad legislatorem convertamus oculos, quem convenit non minus auribus atque animo, quam linguae, pro suo iure dominari). 그러면 타인에 대한 중상을 듣고자 애타는 것이나 오만불손하게 사악한 판단을 내리고자 나서는 성향조차 똑같이 금지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8.
무엇보다도 우리의 혀 못지 않게 귀와 마음도 다스리시는 입법자에게 눈을 돌려 보라라고 칼빈은 여기서 이야기하는데, [그런 말을] 듣기도 하지 말고, 말하지도 말고, [그런 말에] 마음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칼빈은 적극적으로 이 9계명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심중의 동의도 하지 말고, 거짓에 대해서는. 진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에 대한 동의죠. 그래서 아주 넓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리가 있는데 내 심중에 잠잠히 있다면, 그것은 거짓 증거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마음도 다스리라고 하는 겁니다. 귀도 다스리고, 입도 다스리고, 마음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필요한 경우에는 이야기해야 되죠. 마땅히 ‘예’를 해야 되죠,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되죠. ‘이와 같이 우리의 말과 행위가 공평한 해석자인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우리의 혀도 잘 관리해야 된다,’ 이것을 칼빈은 9계명의 본질로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8.49.]
이제 마지막 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Non concupisces domum proximi tui, 출 20:17)는 것입니다. 어떤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 소유, [즉] 소나 나귀나 이웃의 소유도 탐내지 말고, 이웃의 아내도 탐내지 말고. 이미 여러 구체적인 계명들이 앞에서 있었습니다. 이 10계명은 포괄적 계명이라고 합니다. 1-9계명, 무엇보다 이웃 사랑의 계명인 5-9계명이 구체적인 계명이라면, 이제 10계명은 좀 더 포괄적으로 전체적으로 ‘탐심(concupiscentia)을 갖지 말라’는 넓은 계명입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의 정서에 사로잡히길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사랑에 배치되는 정욕을 몰아내야 한다는 데 있다(Finis est: quoniam totam animam dilectionis affectu possideri vult Deus, omnem adversam caritati cupiditatem ex animis excutiend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9.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에 사로잡히길 원하기 때문에,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적극적인 해석을 합니다.) 탐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 그저 갖지 말라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해라, 사랑에 배치되는 것은 전부 다 금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배치되는 것,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배치되는 것, ‘사랑에 배치되는 것은 전부 정욕에서 나온 것이고 탐욕이다’라고 칼빈은 이렇게 해석하고, 단지 탐욕을 갖지 않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선(bonus)과 편의(commoditas)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그 자리로 나아가라고 이렇게 이 계명을 해석합니다.
이전에 계명들에서 주님은 사랑의 규범이 우리의 의지, 우리의 열의, 우리의 행위를 지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이 10계명에서는 우리 마음의 본질적인 성향, 그것조차도 금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내어놓고, 잘못한 것은 회개하고,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탐심인데 어떤가’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05.]
모든 사랑의 논리는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에 의지한다(a cuius[Dei] consideratione pendet tota charitatis ratio). 그러므로 당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경배를 그 근본으로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판(두 번째 판)에서 제시된 모든 의무를 헛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0.
‘사랑의 논리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라. 이 가운데 이웃 사랑을 또한 이야기하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것이 우리 둘째 판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목적입니다.
십계명은 포괄적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십계명은 너무나 어려운 계명이라[서] 탐심을 누가 가지지 않을 수 있는가, 탐심을 갖는 이 마음속의 탐심조차 어떻게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가[라고 불평하는 것],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우선시하고, 그리고 사람의 사랑, 사람을 향한 사랑을 함께 우리가 추구하면서, 그리고 내 안에 탐심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판에 요체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향하여 빚진 것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내가 마땅히 받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우리는 불만이 있을 것이고, 불평이 있을 것이고, 그 가운데 탐심이 생길 것입니다. 탐심이 뭡니까?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하는 거 아닙니까? 이 탐심을 적극적으로 없애는 길이 뭐겠습니까? 내가 남에게 빚진 자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것이 다 내 것이 아니요, 나의 것 중에 많은 것이 다른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 그 가운데 탐심을 우리가 멀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칼빈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우리가 하지 말라는 계명을 하지 말라는 데 머물러서는 오히려 지킬 수 없다. 하지 말라는 계명을 통하여 하라는 계명으로 나아갈 때 하지 말라는 계명을 순종할 수 있다. 우리가 탐심을 없애려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 그래야 내 안에 탐심이 없어진다. 내가 빚을 받는 것만 생각하면 탐심이 생긴다. 그러나 내가 빚진 자라고 생각하면 나에게 탐심이 없어지고 그 사랑의 마음이 나의 정욕을 다 물리친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말하는 십계명의 포괄적인 이해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제8계명은 ‘각자의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돌려야 한다’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둘째,] 그리하여 ‘각자가 서로에게 비친 것을 충실히 감당해라.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감당하는 것이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일에 태만하고 게으른 것도 도둑질이다.’ 이렇게 칼빈은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제9계명은 단지 거짓말을 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리를 보호하고 선포하고 키워 가야 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제10계명은 이웃 사랑에 배치되는 정욕을 몰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의 선과 편의를 돕도록 명령합니다. 결국 탐심과, 이 탐심을 낳는 정욕은 이웃 사랑의 적극적 계명으로 우리가 10계명을 바라볼 때, 그 탐심을 물리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71강 결론
제8계명은 각자의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돌려야 함을 명령합니다.
각자가 서로에게 빚진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함이 서로에게 도둑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9계명은 단지 거짓말을 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리를 보호하고 선포하며 키워 가야 함을 명령합니다.
제10계명은 이웃 사랑에 배치되는 정욕을 몰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의 선과 편의를 돕도록 명령합니다.
71강 | 2.8.45-50 (2권 293-303페이지)
제8-10계명 해석
[『기독교 강요』. 2.8.45.]
“도둑질하지 말라”(Non furtum facies, 출 20:15)라는 이 제8계명도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고 규정돼 있지만 칼빈은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은 불의를 혐오하시므로 우리는 각자에게 속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야 한다는 데 있다(롬 13:7). 요컨대 우리는 타인에 속한 것들을 탐내는 것이 금지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자신의 소유물을 지킬 수 있도록 충실히 도와주는 일을 감당하게끔 명령을 받는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5.
‘하나님은 불의를 혐오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을 마땅히 돌려줘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각자 각자에게 주신 것을 내가 과도하게 취하거나 또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누군가가 가질 수 없게 된다면 그것도 도둑질이다’라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죠.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이죠. 이런 기독교 재물관을 가지고 이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열심히 일했고 내가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전부 내 것이다’라고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합당한 소유물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적극적인 계명, 이것이 바로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것에 근본적인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나 재화, 땅 그리고 여러 권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지상에서 소유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유가 무단히 남에게 침해를 당하고, 그리고 열심히 일한 것이 마치 미디안이 가을만 되면 쳐들어와서, 가나안 땅에 와서 이스라엘의 밀을 훔쳐 가고, 포도를 훔쳐 가듯이 그렇게 강탈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질서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겠습니까? 마땅히 일한 바의 것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그 질서가 깨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 가지인 것입니다. [첫째,]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보호돼야 되고, 두 번째,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주신 것이 공평하게 또 보호돼야 됩니다. 이런 것을 무시해 버린다면, 그리고 힘 있는 사람이, 권력이 있는 사람이, 무기를 가진 사람이 그런 것을 독식한다면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창조 질서[가] 다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자기의 소명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빚진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자기가 쥐고 있거나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있[다](Alienum…et retinet et praevertit, qui non exsequitur quod ex suae vocationis munere aliis deb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5.
하나님은 각자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 소명은 달란트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자기가 감당해야 됩니다. 그것을 남에게 맡기거나, 또 남이 한 것을 내가 자의적으로 빼앗거나 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46.]
“우리의 몫”(sors noster)에 만족하고, “정직하고 합법적인 이익”(honestum et legitimum lucrum)을 남기려고 열심을 다한다면, 그것이 바로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잘 지킨 것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심히 자기 자리에서 일하고, 거기에 주어지는 급부를 누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더불어 잘 살도록 조언하고, 충고하고, 함께 지켜 가야 된다[라고] 적극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빼앗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눠 주고, 또 서로 나누는 것을 권하는 사회, 이런 것은, 또 우리 특별히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초대교회에서 유무상통하고 서로 떡을 떼고 모이기에 힘쓰고 서로 구제하기에 힘쓰고 이러한 것이 바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의 적극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어느 정도 의무를 수행해야 자기가 진 빚을 갚을 수 있는지 깨닫게 하고 그 빚을 충실히 다 갚게 하자(respiciat unusquisque quatenus ex officio aliis sit obligatus, ac quod debet, bona fide persolvat).…이를 위하여 우리 각자가 자기의 지위와 자리에서 자기 이웃에 빚진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 빚진 것을 갚도록 하자(Ad hunc,…modum quisque reputet, quid in suo ordine ac loco proximis debeat, et quod debet solv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6.
각자 각자가 의무(officium)를 수행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땅히 자기 행할 것을 하는 것이 주어진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둑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책상을 들고 옮길 때 나만 손을 뺀다면 다른 사람이 더 애를 먹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도둑질이라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단순히 빼앗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을 안 해서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부담하게 된다면 그건 역시 도둑질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통치자들(praefecti)도 군림하거나 사취하거나 강취하는 그런 빼앗는 자리에 서면 안 되고, 각자 각자 자기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질서, 공공의 선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는 그러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신 17:19; 대하 19:6-7; 히 13:17).
교회의 일꾼(ministri ecclesiarum)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히 임하여 부유함을 누리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것이 나만이 누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베푸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한 양에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에게 베푸시는 은혜이지 않겠습니까? 서로 나누고, 서로 누리고, 서로 떡을 떼서 교제하는 그러한 것들을 함께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특별히 여기에서 주목할 만하게 이런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들은 통치의 일을, 교회의 일꾼들은 교회의 거룩한 일을(딤전 3장 등), 백성들(populus)은 또 백성들에게 주어진 국가의 의무를(롬 13:1-7 등), 부모들(parentes)은 맡겨진 자녀를(엡 6:4 등), 또 자녀들(liberi)은 우리 위에 두신 부모를, 종들(servi)은 상전을, 상전(herus)은 종들을(엡 6:5-9 등), 이 각자 각자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일을 감당하는 것이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의 지위와 자리에서 이웃에게 빚진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 빚진 것을 갚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입법자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manus)과 우리의 마음(animi), 우리의 외형적인 어떤 행태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씀씀이도 다른 사람들을 함께 살리고 높이고 함께 채워 가는 그것이 바로 제8계명의 목적이라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8.47.]
이제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Non eris adversus proximum tuum testis mendax, 출 20:16). 우리는 이미 [제]3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거짓이나, 또 하나님에 대한 참람함, 또 불경함, 이런 것을 금한 것이라면, 이 제9계명은 이웃에 대한 계명이죠. 이 계명은 무엇보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속임이 없이 진실되게 항상 말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법정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법정에서 거짓으로, 위증을 하면 얼마나 상대편이 큰 고초를 당하게 됩니까?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금지에는 우리가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능한 한 충실하게 도와서 그의 이름과 그에게 속한 것들의 순전함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령이 결합되어 있다(Cui interdicto cohaeret imperium, ut unicuique fidelem operam, quoad licet, in asserenda veritate commodemus, ad tuendam et nominis et rerum suarum integritate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7.
이 계명도 좁게 해석하면 안 되고, 넓게 해석해야 됩니다. 진실을 말하는 편을 돕고, 그 자리에 서 주고, 거짓이 악을 이기지 않도록 우리가 보호해 나가는 것도 이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위증하는 증인이 돼서는 안 되고, 거짓의 일을 멀리 해야 되고, 나아가서는 형제들을 두고 수군 수군거리는 것조차 거짓 증거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이렇게 말을 잘 만들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도 남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칼빈은 그런 것도 거짓 증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제9계명은 우리의 혀가 진리를 선포하면서 우리 이웃 사람들의 명성과 복리 두 가지 모두를 섬길 때 합법적으로 준수되는 것이다(legitima praecepti observatio est, ut lingua in asserenda veritate, proximorum tum bonae famae, tum utilitatibus servi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7.
제9계명은 우리의 혀가 진리를 선포하면서 우리 이웃 사람들의 명성도 지켜 주고, 복리(福利)도 지켜주라[고] 칼빈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명예도 지켜 주고, 막 험담하고, 막 없는 말 만들고,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웃의] 복리도 지켜 주라, 거짓말하여서 돈을 빼앗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예도 살려 주고, 재물도 살려 주고, 그런 것이 다 어디서 나오느냐, 거짓으로부터 나오니까, 그 거짓을 금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48.]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악을 속속들이 파고들 때나 발고(發告)할 때에 어떤 독성 있는 달콤함을 즐긴다(venenata quadam dulcedine oblectamur). 대체로 많은 경우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세워 적당한 변명거리를 삼으려고 생각하지 말자.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8.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것을 진리라고 하면서 ‘아!’ 누구누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진리라도 다른 사람들[을] 헐뜯는 것을 달콤하게 여기는 그런 말은 거짓말이다, 거짓 증거다라고 칼빈이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이웃을 높이기 위한 진리의 말이 돼야지, 이웃을 헐뜯고 이웃을 시기하면서 이웃을 나보다 더 아래에, 수하에 있는 사람같이 여기면서 하는 그런 말들, 무엇보다도 농담이라는 구실로 사람들을 입에 오르내리며 조롱하는 이런 것도 바로 거짓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의 권리로 우리의 혀 못지않게 우리의 귀와 마음도 다스리시는 입법자에게 눈을 돌려 보자(Nunc si ad legislatorem convertamus oculos, quem convenit non minus auribus atque animo, quam linguae, pro suo iure dominari). 그러면 타인에 대한 중상을 듣고자 애타는 것이나 오만불손하게 사악한 판단을 내리고자 나서는 성향조차 똑같이 금지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8.
무엇보다도 우리의 혀 못지 않게 귀와 마음도 다스리시는 입법자에게 눈을 돌려 보라라고 칼빈은 여기서 이야기하는데, [그런 말을] 듣기도 하지 말고, 말하지도 말고, [그런 말에] 마음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칼빈은 적극적으로 이 9계명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심중의 동의도 하지 말고, 거짓에 대해서는. 진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에 대한 동의죠. 그래서 아주 넓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리가 있는데 내 심중에 잠잠히 있다면, 그것은 거짓 증거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마음도 다스리라고 하는 겁니다. 귀도 다스리고, 입도 다스리고, 마음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필요한 경우에는 이야기해야 되죠. 마땅히 ‘예’를 해야 되죠,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되죠. ‘이와 같이 우리의 말과 행위가 공평한 해석자인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우리의 혀도 잘 관리해야 된다,’ 이것을 칼빈은 9계명의 본질로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8.49.]
이제 마지막 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Non concupisces domum proximi tui, 출 20:17)는 것입니다. 어떤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 소유, [즉] 소나 나귀나 이웃의 소유도 탐내지 말고, 이웃의 아내도 탐내지 말고. 이미 여러 구체적인 계명들이 앞에서 있었습니다. 이 10계명은 포괄적 계명이라고 합니다. 1-9계명, 무엇보다 이웃 사랑의 계명인 5-9계명이 구체적인 계명이라면, 이제 10계명은 좀 더 포괄적으로 전체적으로 ‘탐심(concupiscentia)을 갖지 말라’는 넓은 계명입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의 정서에 사로잡히길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사랑에 배치되는 정욕을 몰아내야 한다는 데 있다(Finis est: quoniam totam animam dilectionis affectu possideri vult Deus, omnem adversam caritati cupiditatem ex animis excutiend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49.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에 사로잡히길 원하기 때문에,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적극적인 해석을 합니다.) 탐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 그저 갖지 말라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해라, 사랑에 배치되는 것은 전부 다 금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배치되는 것,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배치되는 것, ‘사랑에 배치되는 것은 전부 정욕에서 나온 것이고 탐욕이다’라고 칼빈은 이렇게 해석하고, 단지 탐욕을 갖지 않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선(bonus)과 편의(commoditas)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그 자리로 나아가라고 이렇게 이 계명을 해석합니다.
이전에 계명들에서 주님은 사랑의 규범이 우리의 의지, 우리의 열의, 우리의 행위를 지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이 10계명에서는 우리 마음의 본질적인 성향, 그것조차도 금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내어놓고, 잘못한 것은 회개하고,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탐심인데 어떤가’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05.]
모든 사랑의 논리는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에 의지한다(a cuius[Dei] consideratione pendet tota charitatis ratio). 그러므로 당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경배를 그 근본으로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판(두 번째 판)에서 제시된 모든 의무를 헛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50.
‘사랑의 논리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라. 이 가운데 이웃 사랑을 또한 이야기하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것이 우리 둘째 판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목적입니다.
십계명은 포괄적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십계명은 너무나 어려운 계명이라[서] 탐심을 누가 가지지 않을 수 있는가, 탐심을 갖는 이 마음속의 탐심조차 어떻게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가[라고 불평하는 것],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우선시하고, 그리고 사람의 사랑, 사람을 향한 사랑을 함께 우리가 추구하면서, 그리고 내 안에 탐심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판에 요체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향하여 빚진 것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내가 마땅히 받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우리는 불만이 있을 것이고, 불평이 있을 것이고, 그 가운데 탐심이 생길 것입니다. 탐심이 뭡니까?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하는 거 아닙니까? 이 탐심을 적극적으로 없애는 길이 뭐겠습니까? 내가 남에게 빚진 자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것이 다 내 것이 아니요, 나의 것 중에 많은 것이 다른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 그 가운데 탐심을 우리가 멀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칼빈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우리가 하지 말라는 계명을 하지 말라는 데 머물러서는 오히려 지킬 수 없다. 하지 말라는 계명을 통하여 하라는 계명으로 나아갈 때 하지 말라는 계명을 순종할 수 있다. 우리가 탐심을 없애려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 그래야 내 안에 탐심이 없어진다. 내가 빚을 받는 것만 생각하면 탐심이 생긴다. 그러나 내가 빚진 자라고 생각하면 나에게 탐심이 없어지고 그 사랑의 마음이 나의 정욕을 다 물리친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말하는 십계명의 포괄적인 이해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제8계명은 ‘각자의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돌려야 한다’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둘째,] 그리하여 ‘각자가 서로에게 비친 것을 충실히 감당해라.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감당하는 것이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일에 태만하고 게으른 것도 도둑질이다.’ 이렇게 칼빈은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제9계명은 단지 거짓말을 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리를 보호하고 선포하고 키워 가야 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제10계명은 이웃 사랑에 배치되는 정욕을 몰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의 선과 편의를 돕도록 명령합니다. 결국 탐심과, 이 탐심을 낳는 정욕은 이웃 사랑의 적극적 계명으로 우리가 10계명을 바라볼 때, 그 탐심을 물리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71강 결론
제8계명은 각자의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돌려야 함을 명령합니다.
각자가 서로에게 빚진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함이 서로에게 도둑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9계명은 단지 거짓말을 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리를 보호하고 선포하며 키워 가야 함을 명령합니다.
제10계명은 이웃 사랑에 배치되는 정욕을 몰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의 선과 편의를 돕도록 명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