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강 [2.8.22-34] 제3-4계명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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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 2.8.22-34 (2권 262-281페이지)



제3-4계명 해석


[『기독교 강요』. 2.8.22.]

     제3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 20:7)[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실제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업신여기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내 뜻대로, 내 주관대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 자신에 대한 망령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명을 통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엄위(maiestas)를 거룩히 여기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입으로 말을 합니다. 그래서 누구를 부를 때 마음을 담아서 부릅니다. 이 계명도 단지 외적인 표현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율법의 해석 원리에 따라 영적 해석을 해야 되고, 그리고 적극적인 해석을 해야 될 터인데, 이 계명은 우리가 마음속으로도 하나님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높이고, 그리고 그 이름을 찬양하는 그런 경배와 예배의 자리까지 나아가도록 명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으로 품고 입으로 내뱉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탁월하심을 나타내야 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의 고상함과 어우러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의 장엄하심을 높이 고양시켜야 한다(ut quidquid mens de ipso concipit, quidquid lingua profatur, ipsius excellentiam resipiat, et sacrae nominis eius sublimitati respondeat; denique ad extollendam eius magnificentiam aptum sit).
둘째, 우리는 그의 거룩하신 말씀과 경배받아야 할 비밀들을 우리 자신의 야망이나 탐욕이나 유희를 위하여 헛되고 터무니없게 오용해서는 안 된다. 그 말씀과 비밀들에는 그의 이름의 고귀함이 새겨져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 영예와 가치를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Sancto eius verbo et adorandis mysteriis ne temere praepostereque abutamur, vel ad ambitionem, vel ad avaritiam, vel ad ludicra nostra; sed prout impressam gerunt nominis eius dignitatem, suum inter nos honorem ac pretium semper habea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22.

     첫째,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으로 품고 입으로 내뱉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나타내야 되고, 그의 이름의 고상함과 어우러져야 되고, 하나님의 장엄하심의 그 높이를 고양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거룩한 말씀과 경배받아야 될 비밀들을 우리의 야욕이나 우리의 어떤 유희를 위하여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됩니다. 내 기분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서 사용하거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비참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며 능욕을 일삼는 가운데 외치고는 하듯이 하나님의 사역들을 깎아내리거나 왜곡하는 일을 우리는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라고 인식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할 때에 지혜와 의와 선으로 가득한 찬미를 함께 드려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이다(Postremo, eius operibus ne obloquamur aut detrectemus, quemadmodum illi contumeliose solent obstrepere miseri homines; sed quidquid ab ipso memoramus factum cum sapientiae, iustitiae, bonitatis elogiis praedicemus. Id est nomen Dei sanctifica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22.

     세 번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할 때 그 하나님이 이루신 사역, 또 하나님의 말씀, 이런 것을 깎아내리거나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이루셨다’라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높여야 될 터인데,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깎아내리는 것은, [즉]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셔 놓고 이런 일도 이루시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 이런 것은 우리에게 온전치 않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의와 선으로 가득한 찬미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뜻하시면 이루시고 이루신즉 모든 것이 선한데,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을 찬미하는 데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3계명과 관련하여서 맹세(iuramentum)가 문제가 됩니다. 맹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독교 강요』. 2.8.23.]

그것(맹세)은 우리의 말이 진리임을 확정하기 위한 증인으로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Est [iuramentum] … Dei attestatio ad veritatem sermonis nostri confirmand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23.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다고 모든 맹세가 다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맹세하는 맹세자가 선하여야 됩니다. 맹세자가 진정으로 해야 됩니다. 그리고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것임을 꼭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고 맹세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을 맹세해야 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서 이루어질 것을 맹세해야 됩니다. 맹세는 내 능력으로 내가 할 것을 내 자랑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맹세를 해야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증언하고, 그리고 여호와 앞에서 고백하고, 여호와만이 합당한 증인(testis idoneus)이고,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진리의 수호자”(assertor [veritatis] unicus)시고, 여호와만이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cognitor cordium)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24-26.]

     그 하나님께 진실되게 맹세하는 것, 그것은 공적인 맹세거나 사적인 맹세거나 하나님이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맹세는 전부 거짓 맹세입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해야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친히 이루심을 두고 맹세해야 됩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심령을 관찰함을 확신하면서 맹세해야 됩니다. 맹세를 하면서 맹세하는 자가 중심에 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이 중심에 서야 되지 인간의 질서가 중심에 서서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질서와 하나님의 규범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그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공적으로 우리가 직분을 받을 때나 또 오늘날 세례를 거행할 때, 맹세하는 그런 공적인 맹세, 이 맹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고, 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해져야 되는 것,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맹세가 무엇을 안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이끄심을 전제하면서 ‘그때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직분을 수행하겠습니다,’ 이렇게 맹세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 일을 이루겠습니다’[라는] 그것은 맹세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맹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맹세가 돼야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맹세가 돼야 됩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합법적인 맹세를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8.27.]

     사적인 맹세도 가능합니다. 그렇지만은 사적인 맹세는 더욱 은밀하게 진리에 서야 되고,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해야 됩니다. 사적인 맹세라고 해서 자기의 의를 중심에 두고 그렇게 맹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맹세는 하나님께 영광이 돼야 됩니다. 그리고 가급적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을 맹세하는 자리에 서는 그것이 합당합니다. 내 능력을 믿고 하나님을 마치 내 수하에 두었듯이, ‘내가 이렇게 뜻하는데 하나님은 당연히 도와주실 것’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헛맹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사인(私人)에 대한 상호 맹세도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이루어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맹세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내 공로를 의지해서 내가 이러이러한 그러한 자질이 있으므로 어떤 수도원 규칙, 서약, 이런 것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맹세는 결코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시는 맹세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도 아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들어 내서 내 공로로 무엇을 이루겠다고 하는 그런 맹세는 합법적 맹세가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28.]

     이제 제4계명입니다.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고 했습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자신의 정서와 일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묵상하고 그가 제정하신 방식대로 그 묵상을 실천하도록 함에 있다(Finis praecepti est ut propriis affectibus et operibus emortui regnum Dei meditemur, atque ad eam meditationem institutis ab ipso rationibus exerceam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28.

     이 계명을 주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났으므로, 곧 태초에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시고 안식하셨는데, 이제 죄로 말미암아 그 품을 떠났는데, 다시금 여호와의 품에 안긴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그 안식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 안식의 규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가 제정하는 방식대로 묵상되고 실천돼야 됩니다. 
     이 안식일 규정은, 형식은 의식법에 속한 것은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의 계명 자체는 십계명입니다. [안식일 규정은] 십계명일 뿐만 아니라, 창세기의 1장에서 인류를 지으시고 안식하시고 2장에서 언약을 맺지 아니하십니까, 그러한 것을 통하여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 언약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안식일에 있어서 칼빈은 세 가지를 우리가 숙고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첫째, 일곱째 날의 안식 아래 천상의 입법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쉼을 묘사하고자 원하셨다. 이 쉼 가운데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일들을 그치고 하나님이 그들 자신 안에서 일하시게끔 맡긴다(Voluit enim coelestis legislator sub diei septimi quiete populo Israel spiritualem requiem figurare, qua a propriis, operibus feriari debent fideles, ut Deum in se operari sina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28.

     첫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쉼을 원하셨습니다. 이 쉼은 그저 육체를 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쉼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일하게끔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자신들의 일을 그치고 하나님이 그들 자신 안에서 일하게끔 맡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한 날을 정하여 두심으로 그들이 모여 율법을 듣고 의식들을 거행하거나 적어도 그날을 그의 사역을 묵상하는 데 특별히 드려서 그것을 회고함으로써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받게 되기를 원하셨다(Deinde statum diem esse voluit, quo ad legem audiendam et caeremonias peragendas convenirent, vel saltem quem operum suorum meditationi peculiariter darent, ut hac recordatione ad pietatem exerceren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28.

     둘째, 한 날을 정하여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은 나머지 날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날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가되, 특별히 그 한 날을 더 기억하고 더 하나님 앞에 드리고 묵상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하고 회고함으로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받으라고 안식일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는 종들과 다른 사람들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쉼의 날을 베푸셔서 그들이 어느 정도 일의 면제를 받게 하시고자 마음을 기울이셨다(Tertio servis, et iis qui sub aliorum (legerent imperio, quietis diem indulgendum censuit, quo aliquam haberent a labore remissione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28.

     그리고 세 번째는 이 안식일의 쉼이 나와 내 가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해서,] 그래서 함께 있는 사람들의 일을 면제해 주고 그들을 쉬게 하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러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29.]

     안식일(sabbatum)은 “영적인 안식”(quies spiritualis)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육체가 쉬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계명,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얻고, 그리고 영광을 받기 위하신 것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격하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준수의 비밀을 하나님이 항상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깨닫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이것이 나와 너희의 대대의 표징이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다’라고 또한 말씀하셨습니다(출 31:13-14; 참조. 출 35:2). [안식일은] 영원한 언약이고 영원한 표징이고(출 31:16-17), 느헤미야[를 통해(느 9:14)], 또 모세를 통한 율법[을 통해], 에스겔[을 통해] 계속해서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sanctificator)으로 인식하게 되는 표징이다’라고까지 했습니다(겔 20:12). 안식일에 우리가 쉼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이 일하시게끔 하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음을 제시하는 그 표징의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성화(聖化)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에 있어서 죽는 것에 있다고 할진대, 본 계명과 관련하여 이에 가장 부합하는 유비가 외적 표징과 내적 실제 자체 사이에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전적으로 쉬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의지를 양보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며, 모든 육체의 정욕을 내버려야 한다(Si sanctificatio nostra propriae voluntatis mortificatione constat, iam se profert aptissima signi externi cum re ipsa interiori analogia. Quiescendum omnino est, ut Deus in nobis operetur; cedendum voluntate nostra, resignandum cor, abdicandae cunctae carnis cupiditate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29.
 
     그래서 진정한 성화 개념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쉬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마음껏 일하시는 것, 그것이 성화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표징이 안식일의 규례로 지켜진다면, 그 영적인 의미, 내적 실제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쉼으로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 날이 안식일의 날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고 모든 육체의 정욕도 우리가 내버려야 합니다. 이 우리 중심의 일을 그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하시게 하는, 이 영원한 쉼(cessatio perpetua)의 규례, 그것이 안식일의 규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8.30-31.]

     안식일은 이제 주일로 완성이 됩니다. 안식일은 본래 하나님이 그 자녀를 지으시고 인류를 지으시고 [그들을] 자녀 삼고자 하신 언약을 체결하시고, 인류가 언약에 순종하였더라면 영생을 주시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진정한 안식의 목적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타락하므로 여호와의 품에서 안식하지 못하고 여호와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이 안식이 성취되겠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인 것은 폐지되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실제이시므로 그의 현존으로 모든 형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 그 자신이 안식일의 참된 완성이시라고 나는 말한다(non dubium quin Domini Christi adventu, quod caeremoniale hic erat, abolitum fuerit. Ipse enim veritas est, cuius praesentia figurae omnes evanescunt. … Ipse, inquam, verum sabbathi complementum). … 그의 죽음에 접붙임을 받아 그와 하나가 된 우리는 또한 그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어 새 삶을 살게 된다(롬 6:4-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에서 안식일은(골 2:16)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골 2:17)이라고 기록한다. 즉 그리스도가 진리의 견실한 실체(solidam veritatis substantiam)이시라는 것이다. … 이는 단지 한 날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 전체 역정에 미친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섬기는 것을 완전히 멀리해야 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3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서 우리가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고 여호와의 자녀가 됨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안식일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인 것은 폐지하시고 그 안식일의 성취가 되셔서 진정한 안식을 이루심으로 모든 의를 이루셔서, 그의 현존이 형상을 다 폐하시고 실체, 몸으로서 우리에게 오셔서 이제 우리가 안식일에 참된 완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서 그의 부활의 은혜로 [그의] 부활과 연합하여서 새 삶을 누리는, 그래서 신약시대 안식일은 주일에, 부활의 날에 [지킵니다.] 그 부활의 날을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날[로 지킵니다]. 그가 죽음을 값으로 우리의 생명을 사신 그게 부활 아닙니까? 죽음으로 생명을 이긴 그 은혜를 인치는 부활의 날을 이제 우리가 주일로 그렇게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골 2:17)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기독교 강요』. 2.8.32-34.]

     하나님이 한 날을 정하여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주일을 이제 신약시대에 제정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명령을 의식적으로, 의례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장래 일의 그림자인 구약의 의식은 폐하고, 이제 진정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한 몸이 되는, 연합체가 되는 평화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옛날의 안식일로 예표된 참된 안식의 목적과 완성이 주님의 부활에 있다(verae illius quietis, quam vetus sabbathum adumbrabat, in resurrectione Domini finis sit ac complement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34.

     안식일의 진정한 목적과 완성이 주님의 부활에 있고, 이 주님의 부활을 우리가 기념하고, 또 그 주님의 부활의 날에 지키는 것,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이제 신약시대 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쉬게 함으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마음껏 일하시게 해야 됩니다. 

우리 가운데서 종교가 몰락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우리는 거룩한 모임들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더 잘 드릴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돕는 외적인 도움들을 누려야 할 필요가 있다(ne religio inter nos vel concidat vel languescat, diligenter colendos esse sacros coetus, et externis subsidiis, quae ad fovendum Dei cultum valeant, operam dandam ess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8.34.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경건의 훈련을 받고, 그리고 우리와 함께 있는 자들과 함께 주일을 지킴으로 이방인이 없고 유대인이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안식일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의 엄위를 거룩히 여기고 지혜와 의와 선으로 가득한 찬미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함에 목적이 있습니다. 
     둘째, 맹세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하나님을 유일하신 진리의 수호자이자 증인으로 삼고 그의 영원한 뜻과 경륜에 의지하여 그의 이름으로 행하여야 합법적입니다. 
     셋째, 제4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인 쉼 가운데 자신들의 일을 그치고 하나님이 그들 자신 안에서 일하게끔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경건에 이르는 훈련이 되고 자기들에게 속한 자들도 함께 쉼을 누리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선포하는 날이, [그렇게] 지키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네 번째, 그리스도 자신이 안식일에 참 완성이고 주인이시고 그리스도께 접붙임 받은 신자가 그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하여 진정한 쉼인 안식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우리는 부활의 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69강 결론


  1.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의 엄위를 거룩히 여기고 지혜와 의와 선으로 가득한 찬미를 드리려 함에 있습니다.
  2. 맹세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하나님을 유일하신 진리의 수호자이자 증인으로 삼고 그의 영원한 뜻과 경륜에 의지하여 그의 이름으로 해야 합법적입니다. 
  3. 제4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인 쉼 가운데 자신들의 일을 그치고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일하시게끔 하는 날로서 경건에 이르는 훈련이 되는바, 또한 자기들에게 속한 자들에게 일의 면제를 통하여 쉼을 베푸는 날입니다.
  4. 그리스도 자신이 안식일의 참 된 완성이시며 그리스도께 접붙임 받은 신자는 그와 죽음과 부활과 연합하여 진정한 쉼인 영생을 누림으로 그 부활의 날을 주일로 지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