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여기서 이제 율법의 기능(officium) 혹은 용법(usus)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율법의 세 가지 용법 그것은 칼빈의 이 부분의 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은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용법, 두 번째 용법은 죄의 엄한 형벌을 알게 하여 죄를 억제하는 기능, 그리고 세 번째 기능은 거듭난 사람들이 율법의 규범을 좇아 살아가게 하는 용법, 이렇게 정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율법의 이 세 가지 용법은 도덕법(lex moralis)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도덕법과 의식법과 재판법[입니다.]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법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 5-10계명은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도덕법은 십계명에 요약되는데, 1-4계명을 그 하나님 사랑의 계명, 이것을 우리가 경건의 계명이라고도 하고, 예배의 계명이라고도 합니다. 이 계명에 대한 부속법이 뭐냐, 의식법입니다. 1-4계명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부속법은 의식법이고, 그리고 5-10계명은 이웃사랑의 계명[인데,] 이 이웃 사랑의 계명에 대한 부속법은 재판법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서로 이웃 간에 화목하고, 또 잘못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 배상하고, 또 그것을 갚을 것인가, 보상할 것인가 이런 부분을 다루는 것이죠. 그래서 크게 도덕법과 의식법과 재판법이 있는데, 도덕법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법과 재판법은 그 자체는 폐지되었습니다. 구약시대의 것은 구약의 것으로[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세 가지 용법이라고 할 때는 도덕법의 세 가지 용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첫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의를 나타내는 동안 모든 사람을 각각 그들 자신의 불의에 따라 경고하고, 더욱 확실하게 들춰내며, 비난하며, 마지막으로 정죄한다(Prima est, ut dum iustitiam Dei ostendit, id est, quae sola Deo accepta est, suae unumquemque iniustitiae admoneat, certiorem faciat, convincat denique ac condemn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6.
칼빈이 말하는 율법의 제1용법은 루터와 멜란히톤이 ‘신학적 용법’(usus theologicus)이라고 부르며 가장 주요하게 여기는 제2용법에 해당합니다. 한편 칼빈이 말하는 제2용법을 그들은 제1용법이라고 부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6, 각주 396.
먼저 첫 번째 용법은 율법은 하나님의 의, 바로 하나님이 받아들이시는 유일한 의를 나타내면서, 그 의를 통하여서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고, 더욱 확실하게 들춰내며, 비난하며, 끝내는 정죄합니다. 그래서 정죄의 용법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깨달아 알게 하는 용법, 이것을 제1용법이라고 합니다.
율법 앞에 서면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불법이, 허물이 보입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동시에 발견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했을 때에 불법과 불의, 또 하라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에 불순종과 게으름, 그리고 하라는 것을 하지 못할 때에 무능, 이런 것도 전부 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불순종도 어기는 것이지만, 게으름도 불순종이고, 무능도 불순종입니다. 해야 할 것을 안 하는 것도 불순종이고, 해야 할 것을 못하는 것도 불순종입니다.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은 이러한 우리의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은 곧 우리를 정죄하게 되겠죠.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되고 허물 많고 이런 것을 들춰내겠죠. 그리고 비난하고 끝내는 정죄하는 것입니다. 곧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모든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롬 6:23) 우리가 불법하여, 불의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애’(自己愛, amor sui)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애에 빠져 있는 가장 중요한 표는 자기의 옳다는 바로 살아가는 것이요,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기준으로 옳다 하면 옳은 줄 알고, 또 그르다 하면 그른 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 앞에 서기 전에는 화평합니다, 복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 앞에 서게 되면 자기애의 오만(arrogantia)이 깨집니다. 율법은 ‘선생’(magisterium)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편견과 자기의 편협된 눈을 밝게 떠 주게 합니다. 그래서 오만을 깨뜨려 줍니다. 그때 우리는 좌절을 느낍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교만(superbia)이 우리에게 사라지게 될 때 우리는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어찌할 줄 몰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율법의 첫 번째 용법입니다. 율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이라고 우리가 보지 않았습니까?(『기독교 강요』, 2.7.1.)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의 죄와 허물이, 우리의 무능이, 타락한 인류의 비참함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을 율법은 들춰낼 뿐입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꾸짖을 때 선생이 잘못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학생들의 잘못이 잘못 아닙니까?
그래서 칼빈은 여기서 율법을 ‘선생’이라고 하고, 또 율법을 ‘저울’(trutina)이라고도 합니다. 저울이 뭐겠습니까? 올바른 양을, 또 무게를 재는 것이 저울 아닙니까? 우리를 율법이라는 저울에 달아서 우리의 삶의 어떠함을 알게 해 주는 것이죠. 그래서 율법의 저울에 달아봤을 때 함량이 미달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만큼 채워지지 않은 것, 또 영 무게가 아예 없는 것, 이런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율법 앞에 서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법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저 다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누구나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 앞에 서면 내 탐심(concupiscentia)이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7.7.]
칼빈은 또한 율법을 ‘거울’(speculum)이라고도 합니다.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무능과 불의가 보이고, 우리의 악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선생’이라고도 하고 ‘저울’이라고도 하고 ‘거울’이라고도 하고 [있는데,] 율법이 그릇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규범입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신령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서], 규범으로[서]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중심부터 썩었으므로, 율법을 통하여서 우리가 끝내는 우리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제1용법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로마서 5장 20절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4장 15절에 율법을 통하여 진노가 발하여지고 끝내 우리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전부 율법이 문제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면 율법은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복된 것입니다, 꿀송이 같은 것입니다, 정금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시편 19편에 전에도 한 번 이야기했듯이 말이에요.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 앞에서 진노 가운데 죽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칼빈은 이것을 율법을 통한 “죽음의 경륜”(administratio mortis)이다라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경륜, 죽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 은혜의 영이 부존(不存)한다면 율법에는 오직 사람들을 죄인으로 삼아 죽이는 것만 현존(現存)한다(si desit spiritus gratiae, in hoc tantum adest ut reos faciat et occid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7.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했듯이 “은혜의 영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오직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여서 죽음만이 현존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적이고 오염된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사악하게 다투고 율법의 훈육에 의해서는 결코 교정되지 않기 때문에, 원래 적절하게 듣는 자들을 만나면 구원을 얻게 하려고 주어져 있었던 율법이 죄와 죽음의 계기가 되는 결과가 된다(quum natura nostra carnalis et corrupta cum spirituali Dei lege hostiliter pugnet, nec eius disciplina quidquam emendetur, superest ut lex quae in salutem [si auditores idoneos nacta fuisset] data erat, in peccati et mortis occasionem ced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7.
우리의 육체적이고 오염된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사악하게 다툽니다. 율법의 훈육 앞에 무릎 꿇기 전에 먼저 율법에 대적합니다. 적절하게 율법이 베풀어지고 그것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면 구원의 도구가 되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그것으로 영생에 이르겠지만, 아무도 율법을 지킬 자 없고 이제 율법은 죄와 죽음의 계기가 될 뿐입니다(참조. 롬 8:2).
생명과 구원의 상급(vitae salutisque praemium)이 의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이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스스로 거룩하게 될 자 있겠습니까? 율법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사악함(pravitas)과 불의(nequitia)를 발견하고 자기의 헛됨과 자기의 무능함을, 비참함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하여 멸망(interitus)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 강요』. 2.7.8.]
사람들은 자기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어리석은 편견을 버릴 때에 자기들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서고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벌거벗고 빈손인 채로 하나님의 자비로 도망가서 그것에 전적으로 자기를 의탁하고, 그것에 완전히 자기를 감추며, 의와 공로를 위하여 오직 그것 하나만을 붙잡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참 믿음으로 구하고 기대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omissa suae virtutis stolida opinione, sola Dei manu stare se et consistere intelligant, ut nudi et vacui ad eius misericordiam confugiant, in hanc se toti reclinent, in hanc penitus se abdant, hanc unam pro iustitia et meritis arripiant, quae omnibus in Christo exposita est, quicunque eam vera fide et expetunt et exspecta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8.
그러나 율법은 그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1계명(용법)은 단지 정죄하는 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됩니다. 칼빈은 율법을 통하여서 정죄를 받은 자가 그리스도께로 도망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제1용법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은 즉시 우리를 정죄하지만, 즉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자비로 도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제1용법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율법의 제1용법은 우리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 생명을 얻는 칭의 단계에서, [즉]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여 거듭나는 그 단계에서 율법이 작용하는 용법이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와 함께하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면 너무나 좋겠지만, 아무도 사람은 그렇게 할 자 없습니다. 먼저 자기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약의 법으로 작용합니다. 율법의 첫 번째 용법도 결코 저주(damnatio)로 작용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저주는 결과적인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은혜의 법, 언약의 법입니다. 그런데 죄인 앞에서 그 율법은 저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저주에 그치지 않는 것은 율법은 언약의 법이기 때문에, 은혜의 법이기 때문에, 우리를 정죄하지만 그리스도를 찾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 핑계도 댈 수 없게 합니다. 내 죄로 말미암아 나는 망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불순종 가운데 있는 것은 우리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십니다(롬 11:32).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misericordia Dei)로 도망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지만은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의 제1용법은 이 단계에 율법의 작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7.9.]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행하고자 애쓸수록 그 아래에 매여 지쳐 간다. 그때 율법은 우리에게 지시하여 은혜의 도움을 간청하는 방법을 알게 한다(iubet lex ut facere iussa conati, et in nostra infirmitate sub lege fatigati, adiutorium gratiae poscere noverimus).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9.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행하고자 애쓸수록 그 아래[에 매여] 지쳐 간다. 그때 율법은 우리에게 지시하여 은혜의 도움을 간청하는 방법을 알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좌절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합니다, 낙담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도움을 간청하는 방법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유용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을 확신하게 하고 그를 움직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약을 탄원하도록 하는 데 있다(utilitas legis est ut hominem de sua infirmitate convincat et gratiae medicinam, quae in Christo est, implorare compellat).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9.
그래서 율법의 유용함은 우리가 연약함을 깨달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약을, 은혜의 그 약을 탄원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의사라는 것이죠, 약이라는 것이죠. 어떨 때 [그러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듯이, [즉] 우리의 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듯이, 병자라야 의원이 필요하듯이, 병자라야 약이 필요하듯이, 율법은 즉시 우리의 병을 알게 하고 약을 구하게 한다는 것이죠.
율법은 명령하고 은혜는 행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준다(iubet lex; gratia vires agendi subministrat). …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셔서 우리가 그에게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iubet Deus quae non possumus, ut noverimus quid ab illo petere debeamus). … 율법이 주어진 것은 다음을 목적으로 한다. 즉 위대한 체하는 당신을 하찮은 것으로 만드시려고, 당신들 스스로는 의에 이르는 힘을 지닐 수 없음을 설명하시려고, 그리고 이렇듯 무능하고 저급하고 빈곤한 당신들이 은혜로 도망치게 하시려고(ad gratiam confugeres)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9.
그래서 ‘율법은 명령하고 은혜는 행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한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조차 명령하셔서 그에게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게 한다’고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합니다. 이렇듯 무능하고 저급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도망치게 되는 것, 이것이 율법의 제1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명령하옵소서. 오직 당신의 은혜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을 명령하옵소서(impera quod non possit impleri; imo impera quod non nisi per gratiam tuam possit impleri).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9.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명령하시옵소서. 그리고 오직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써 그것을 이루시옵소서.’ 곧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제1용법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강요』. 2.7.10.]
율법의 제2용법은 이러한 구원의 과정과는 무관한 용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제2용법은 우리가 시민법적 용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율법에 있는 무서운 징계들을 깨달아 알아서 우리가 죄를 억제하는(coercere) 그 용법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도 형법이 있어서 사람들은 범죄를 자제하지 않습니까? 이 억제적인 기능, [즉] 외부적인 일로, 외부적인 위협으로, 외부적인 불이익으로 외부적인 그러한 것으로 우리의 죄를 억제하는 기능, 이것이 율법의 제2용법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속사람과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공동체, 사회생활에는 필요하지만 외적인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강요』. 2.7.11.]
율법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했습니다(갈 3:24). 율법의 제1용법, 제2용법은 모두 다 우리의 죄를 깨달아 알게 하고, 그러나 잘 아실 것은 제1용법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죄를 깨닫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하는 그 언약의 법으로서의 율법의 제1용법이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리고 제2용법은 이러한 언약의 은혜의 요소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제2용법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죄를 억제하게 하는 것이죠.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어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고 들춰내며 비난하며 정죄합니다.
둘째, 그러나 이러한 정죄는 적절하게 듣는 자에게 구원을 주려고 부여된 율법이 불법과 불의로 죄와 죽음의 계기가 된 것이기 때문에,
(셋째,) 율법은 저울과 같이 달고, 거울과 같이 비추어서 죄를 깨닫게 하고 가르치는 선생과 같지만, 그리하여 우리의 자기애와 교만과 오만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네 번째로 율법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명령해서 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가운데서, 그래도 해야 된다는 것을 또한 알게 하고, 그리하여 은혜를 구하게 하는 언약의 법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의 대충의 정리라고 할 것입니다.
(다섯째,) 두 번째 용법은 징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켜서 우리의 죄를 억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행위에만 관계되는 것입니다.
63강 결론
율법의 첫 번째 용법: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어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고, 들춰내며, 비난하며, 정죄합니다.
율법은 원래 적절하게 듣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려고 부여되었지만 그들의 불법과 불의로 죄와 죽음의 계기가 됩니다.
율법은 ‘저울’과 같이 달고 ‘거울’과 같이 비춤으로써 죄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선생’과 같이 가르침으로써 사람의 자기애와 교만과 오만을 깨뜨립니다.
율법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명령해서, 할 수 없는 무능함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은혜’로 도망치게 합니다.
율법의 두 번째 용법: 율법은 형벌과 징계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켜 죄를 억제하도록 합니다. 이는 외적인 행위에만 관계됩니다.
63강 | 2.7.6-11 (2권 207-217페이지)
율법의 정죄적 용법, 억제적 용법
[『기독교 강요』. 2.7.6.]
칼빈은 여기서 이제 율법의 기능(officium) 혹은 용법(usus)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율법의 세 가지 용법 그것은 칼빈의 이 부분의 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은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용법, 두 번째 용법은 죄의 엄한 형벌을 알게 하여 죄를 억제하는 기능, 그리고 세 번째 기능은 거듭난 사람들이 율법의 규범을 좇아 살아가게 하는 용법, 이렇게 정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율법의 이 세 가지 용법은 도덕법(lex moralis)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도덕법과 의식법과 재판법[입니다.]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법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 5-10계명은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도덕법은 십계명에 요약되는데, 1-4계명을 그 하나님 사랑의 계명, 이것을 우리가 경건의 계명이라고도 하고, 예배의 계명이라고도 합니다. 이 계명에 대한 부속법이 뭐냐, 의식법입니다. 1-4계명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부속법은 의식법이고, 그리고 5-10계명은 이웃사랑의 계명[인데,] 이 이웃 사랑의 계명에 대한 부속법은 재판법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서로 이웃 간에 화목하고, 또 잘못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 배상하고, 또 그것을 갚을 것인가, 보상할 것인가 이런 부분을 다루는 것이죠. 그래서 크게 도덕법과 의식법과 재판법이 있는데, 도덕법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법과 재판법은 그 자체는 폐지되었습니다. 구약시대의 것은 구약의 것으로[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세 가지 용법이라고 할 때는 도덕법의 세 가지 용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첫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의를 나타내는 동안 모든 사람을 각각 그들 자신의 불의에 따라 경고하고, 더욱 확실하게 들춰내며, 비난하며, 마지막으로 정죄한다(Prima est, ut dum iustitiam Dei ostendit, id est, quae sola Deo accepta est, suae unumquemque iniustitiae admoneat, certiorem faciat, convincat denique ac condemn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6.
칼빈이 말하는 율법의 제1용법은 루터와 멜란히톤이 ‘신학적 용법’(usus theologicus)이라고 부르며 가장 주요하게 여기는 제2용법에 해당합니다. 한편 칼빈이 말하는 제2용법을 그들은 제1용법이라고 부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6, 각주 396.
먼저 첫 번째 용법은 율법은 하나님의 의, 바로 하나님이 받아들이시는 유일한 의를 나타내면서, 그 의를 통하여서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고, 더욱 확실하게 들춰내며, 비난하며, 끝내는 정죄합니다. 그래서 정죄의 용법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깨달아 알게 하는 용법, 이것을 제1용법이라고 합니다.
율법 앞에 서면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불법이, 허물이 보입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동시에 발견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했을 때에 불법과 불의, 또 하라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에 불순종과 게으름, 그리고 하라는 것을 하지 못할 때에 무능, 이런 것도 전부 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불순종도 어기는 것이지만, 게으름도 불순종이고, 무능도 불순종입니다. 해야 할 것을 안 하는 것도 불순종이고, 해야 할 것을 못하는 것도 불순종입니다.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은 이러한 우리의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은 곧 우리를 정죄하게 되겠죠.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되고 허물 많고 이런 것을 들춰내겠죠. 그리고 비난하고 끝내는 정죄하는 것입니다. 곧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모든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롬 6:23) 우리가 불법하여, 불의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애’(自己愛, amor sui)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애에 빠져 있는 가장 중요한 표는 자기의 옳다는 바로 살아가는 것이요,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기준으로 옳다 하면 옳은 줄 알고, 또 그르다 하면 그른 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 앞에 서기 전에는 화평합니다, 복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 앞에 서게 되면 자기애의 오만(arrogantia)이 깨집니다. 율법은 ‘선생’(magisterium)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편견과 자기의 편협된 눈을 밝게 떠 주게 합니다. 그래서 오만을 깨뜨려 줍니다. 그때 우리는 좌절을 느낍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교만(superbia)이 우리에게 사라지게 될 때 우리는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어찌할 줄 몰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율법의 첫 번째 용법입니다. 율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이라고 우리가 보지 않았습니까?(『기독교 강요』, 2.7.1.)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의 죄와 허물이, 우리의 무능이, 타락한 인류의 비참함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을 율법은 들춰낼 뿐입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꾸짖을 때 선생이 잘못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학생들의 잘못이 잘못 아닙니까?
그래서 칼빈은 여기서 율법을 ‘선생’이라고 하고, 또 율법을 ‘저울’(trutina)이라고도 합니다. 저울이 뭐겠습니까? 올바른 양을, 또 무게를 재는 것이 저울 아닙니까? 우리를 율법이라는 저울에 달아서 우리의 삶의 어떠함을 알게 해 주는 것이죠. 그래서 율법의 저울에 달아봤을 때 함량이 미달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만큼 채워지지 않은 것, 또 영 무게가 아예 없는 것, 이런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율법 앞에 서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법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저 다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누구나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 앞에 서면 내 탐심(concupiscentia)이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7.7.]
칼빈은 또한 율법을 ‘거울’(speculum)이라고도 합니다.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무능과 불의가 보이고, 우리의 악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선생’이라고도 하고 ‘저울’이라고도 하고 ‘거울’이라고도 하고 [있는데,] 율법이 그릇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규범입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신령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서], 규범으로[서]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중심부터 썩었으므로, 율법을 통하여서 우리가 끝내는 우리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제1용법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로마서 5장 20절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4장 15절에 율법을 통하여 진노가 발하여지고 끝내 우리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전부 율법이 문제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면 율법은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복된 것입니다, 꿀송이 같은 것입니다, 정금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시편 19편에 전에도 한 번 이야기했듯이 말이에요.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 앞에서 진노 가운데 죽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칼빈은 이것을 율법을 통한 “죽음의 경륜”(administratio mortis)이다라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경륜, 죽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 은혜의 영이 부존(不存)한다면 율법에는 오직 사람들을 죄인으로 삼아 죽이는 것만 현존(現存)한다(si desit spiritus gratiae, in hoc tantum adest ut reos faciat et occid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7.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했듯이 “은혜의 영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오직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여서 죽음만이 현존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적이고 오염된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사악하게 다투고 율법의 훈육에 의해서는 결코 교정되지 않기 때문에, 원래 적절하게 듣는 자들을 만나면 구원을 얻게 하려고 주어져 있었던 율법이 죄와 죽음의 계기가 되는 결과가 된다(quum natura nostra carnalis et corrupta cum spirituali Dei lege hostiliter pugnet, nec eius disciplina quidquam emendetur, superest ut lex quae in salutem [si auditores idoneos nacta fuisset] data erat, in peccati et mortis occasionem ced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7.
우리의 육체적이고 오염된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사악하게 다툽니다. 율법의 훈육 앞에 무릎 꿇기 전에 먼저 율법에 대적합니다. 적절하게 율법이 베풀어지고 그것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면 구원의 도구가 되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그것으로 영생에 이르겠지만, 아무도 율법을 지킬 자 없고 이제 율법은 죄와 죽음의 계기가 될 뿐입니다(참조. 롬 8:2).
생명과 구원의 상급(vitae salutisque praemium)이 의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이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스스로 거룩하게 될 자 있겠습니까? 율법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사악함(pravitas)과 불의(nequitia)를 발견하고 자기의 헛됨과 자기의 무능함을, 비참함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하여 멸망(interitus)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 강요』. 2.7.8.]
사람들은 자기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어리석은 편견을 버릴 때에 자기들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서고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벌거벗고 빈손인 채로 하나님의 자비로 도망가서 그것에 전적으로 자기를 의탁하고, 그것에 완전히 자기를 감추며, 의와 공로를 위하여 오직 그것 하나만을 붙잡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참 믿음으로 구하고 기대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omissa suae virtutis stolida opinione, sola Dei manu stare se et consistere intelligant, ut nudi et vacui ad eius misericordiam confugiant, in hanc se toti reclinent, in hanc penitus se abdant, hanc unam pro iustitia et meritis arripiant, quae omnibus in Christo exposita est, quicunque eam vera fide et expetunt et exspecta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8.
그러나 율법은 그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1계명(용법)은 단지 정죄하는 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됩니다. 칼빈은 율법을 통하여서 정죄를 받은 자가 그리스도께로 도망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제1용법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은 즉시 우리를 정죄하지만, 즉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자비로 도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제1용법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율법의 제1용법은 우리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 생명을 얻는 칭의 단계에서, [즉]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여 거듭나는 그 단계에서 율법이 작용하는 용법이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와 함께하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면 너무나 좋겠지만, 아무도 사람은 그렇게 할 자 없습니다. 먼저 자기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약의 법으로 작용합니다. 율법의 첫 번째 용법도 결코 저주(damnatio)로 작용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저주는 결과적인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은혜의 법, 언약의 법입니다. 그런데 죄인 앞에서 그 율법은 저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저주에 그치지 않는 것은 율법은 언약의 법이기 때문에, 은혜의 법이기 때문에, 우리를 정죄하지만 그리스도를 찾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 핑계도 댈 수 없게 합니다. 내 죄로 말미암아 나는 망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불순종 가운데 있는 것은 우리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십니다(롬 11:32).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misericordia Dei)로 도망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지만은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의 제1용법은 이 단계에 율법의 작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7.9.]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행하고자 애쓸수록 그 아래에 매여 지쳐 간다. 그때 율법은 우리에게 지시하여 은혜의 도움을 간청하는 방법을 알게 한다(iubet lex ut facere iussa conati, et in nostra infirmitate sub lege fatigati, adiutorium gratiae poscere noverimus).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9.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행하고자 애쓸수록 그 아래[에 매여] 지쳐 간다. 그때 율법은 우리에게 지시하여 은혜의 도움을 간청하는 방법을 알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좌절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합니다, 낙담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도움을 간청하는 방법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유용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을 확신하게 하고 그를 움직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약을 탄원하도록 하는 데 있다(utilitas legis est ut hominem de sua infirmitate convincat et gratiae medicinam, quae in Christo est, implorare compellat).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9.
그래서 율법의 유용함은 우리가 연약함을 깨달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약을, 은혜의 그 약을 탄원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의사라는 것이죠, 약이라는 것이죠. 어떨 때 [그러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듯이, [즉] 우리의 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듯이, 병자라야 의원이 필요하듯이, 병자라야 약이 필요하듯이, 율법은 즉시 우리의 병을 알게 하고 약을 구하게 한다는 것이죠.
율법은 명령하고 은혜는 행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준다(iubet lex; gratia vires agendi subministrat). …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셔서 우리가 그에게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iubet Deus quae non possumus, ut noverimus quid ab illo petere debeamus). … 율법이 주어진 것은 다음을 목적으로 한다. 즉 위대한 체하는 당신을 하찮은 것으로 만드시려고, 당신들 스스로는 의에 이르는 힘을 지닐 수 없음을 설명하시려고, 그리고 이렇듯 무능하고 저급하고 빈곤한 당신들이 은혜로 도망치게 하시려고(ad gratiam confugeres)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9.
그래서 ‘율법은 명령하고 은혜는 행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한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조차 명령하셔서 그에게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게 한다’고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야기합니다. 이렇듯 무능하고 저급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도망치게 되는 것, 이것이 율법의 제1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명령하옵소서. 오직 당신의 은혜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을 명령하옵소서(impera quod non possit impleri; imo impera quod non nisi per gratiam tuam possit impleri).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9.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명령하시옵소서. 그리고 오직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써 그것을 이루시옵소서.’ 곧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제1용법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강요』. 2.7.10.]
율법의 제2용법은 이러한 구원의 과정과는 무관한 용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제2용법은 우리가 시민법적 용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율법에 있는 무서운 징계들을 깨달아 알아서 우리가 죄를 억제하는(coercere) 그 용법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도 형법이 있어서 사람들은 범죄를 자제하지 않습니까? 이 억제적인 기능, [즉] 외부적인 일로, 외부적인 위협으로, 외부적인 불이익으로 외부적인 그러한 것으로 우리의 죄를 억제하는 기능, 이것이 율법의 제2용법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속사람과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공동체, 사회생활에는 필요하지만 외적인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강요』. 2.7.11.]
율법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했습니다(갈 3:24). 율법의 제1용법, 제2용법은 모두 다 우리의 죄를 깨달아 알게 하고, 그러나 잘 아실 것은 제1용법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죄를 깨닫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하는 그 언약의 법으로서의 율법의 제1용법이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리고 제2용법은 이러한 언약의 은혜의 요소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제2용법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죄를 억제하게 하는 것이죠.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어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고 들춰내며 비난하며 정죄합니다.
둘째, 그러나 이러한 정죄는 적절하게 듣는 자에게 구원을 주려고 부여된 율법이 불법과 불의로 죄와 죽음의 계기가 된 것이기 때문에,
(셋째,) 율법은 저울과 같이 달고, 거울과 같이 비추어서 죄를 깨닫게 하고 가르치는 선생과 같지만, 그리하여 우리의 자기애와 교만과 오만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네 번째로 율법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명령해서 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가운데서, 그래도 해야 된다는 것을 또한 알게 하고, 그리하여 은혜를 구하게 하는 언약의 법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의 대충의 정리라고 할 것입니다.
(다섯째,) 두 번째 용법은 징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켜서 우리의 죄를 억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행위에만 관계되는 것입니다.
63강 결론
율법의 첫 번째 용법: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어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고, 들춰내며, 비난하며, 정죄합니다.
율법은 원래 적절하게 듣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려고 부여되었지만 그들의 불법과 불의로 죄와 죽음의 계기가 됩니다.
율법은 ‘저울’과 같이 달고 ‘거울’과 같이 비춤으로써 죄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선생’과 같이 가르침으로써 사람의 자기애와 교만과 오만을 깨뜨립니다.
율법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명령해서, 할 수 없는 무능함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은혜’로 도망치게 합니다.
율법의 두 번째 용법: 율법은 형벌과 징계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켜 죄를 억제하도록 합니다. 이는 외적인 행위에만 관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