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강 [2.7.1-2] 율법: 언약의 법으로서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

관리자
조회수 255





61 | 2.7.1-2 (2권 197-203페이지)



율법: 언약의 법으로서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


     칼빈은 『기독교 강요』 2권 7장에서 ‘율법’[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를 하고, 그리고 2권 8장에서는 ‘율법의 해석 원리’, 그리고 ‘십계명’의 각 조목을 살펴보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7.1.]

나는 율법이라는 이름이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을 규정하는 십계명뿐만 아니라 모세의 손을 통하여 전하여 준 종교의 양식(樣式)을 뜻한다고 이해한다(Legis nomine non solum decem praecepta, quae pie iusteque vivendi regulam praescribunt, intelligo, sed formam religionis per manum Mosis a Deo tradit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

     칼빈은 율법을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으로 파악합니다. “경건하고”라는 말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 그리고 “올바른”이라는 것은 이웃 사랑의 계명, 그래서 율법을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이라고 정의할 때 그것은 십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계명의 모든 것을 함의하고 있다고 볼 것입니다. 칼빈은 율법을 광의(廣義)적으로 넓게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것,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그 모든 것,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삶의 모든 양상들이 다 율법에 규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십계명뿐만 아니라 모세의 손을 통하여 준 “종교의 양식”이다[라고 합니다]. 여기 종교는 당연히 기독교를 의미하겠죠. 그래서 넓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루터는 율법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본질적으로 정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본래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고 신령한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가 그 법 앞에 섰을 때 율법은 본래의 그러한 선한 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선하게 규범을 알리는 율법이 정죄의 도구가 된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칼빈의 입장이 올바른 것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내시고 출애굽 시키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지 않습니까. 그 율법이 어떻게 저주이겠습니까? 정죄를 위하여 주셨겠습니까? 그 애굽에서 건져 낸 백성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건한 삶을 살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그러한 규범으로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의 손을 통하여 주신 그 율법은 아브라함의 언약(foedus)을 폐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전하듯이 모세의 율법이 430년 전의 아브라함의 언약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갈 3:17). 율법은 ‘언약의 법’입니다. 언약 가운데, 언약하에 주어진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롭게 살아가는 규범이 율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만 하면,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하고, 정금과 같이, 꿀송이와 같이 나오는 시편 19편의 그 말씀대로 본래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은혜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타락하여서 그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보니까 그 하나님의 법이 정죄의 도구, 저주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서 다시금 율법 그 자체에 의해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자녀 됨을 회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이 있어야 하나님의 법이 온전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언약을 떠난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입법자로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된 복을(benedictionem generi Abrahae promissam) 지워 버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는 그가 여러 곳에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조상들과 체결되었으며 그들 자신이 상속자인 값없는 언약을 기억하도록 상기시키고 있음을(revocet in memoriam … gratuitum illud foedus) 보게 된다. 마치 자기가 그 언약을 갱신하기 위하여(ad illud renovandum) 보냄을 받기라도 한 듯이!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

     칼빈은 이 『기독교 강요』에서 율법을 다룰 때 그 율법은 언약의 법이다, “값없는 언약”을 기억하고 상기하도록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그 언약을 갱신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 은혜의 언약을 갱신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무능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어떠함을, 비참함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금 하나님의 약속에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갱신이지 아브라함의 언약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시대 때 하나님은 1-4계명, 하나님 사랑의 계명에 대한 특별 규례로서 의식법들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구약 백성들이 제사와 절기와 그리고 정결례와 같은 그러한 의식들을 행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좇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서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에 부합하는 예배, 그것은 구약시대 때는 아직 형상(figura)과 그림자(umbra)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한 실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양을 드리고, 소를 드리고, 또 [곡식을] 빻아서 소제를 드릴 때, 그것은 분명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들이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제사들은,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볼 수 있고(행 7:44) 히브리서에서도 계속 강조하고 있었듯이(히 8:5), 참 성소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진정한 제사장으로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는 그 실체, 완성, 그 목적을 바라보고 [드려졌고,] 구약시대 때도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러한 계명들, 의식법들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의 형상들이 그 목적으로부터 분리된다면(ad finem … si legales figurae separentur) 필히 우리는 그 헛됨을 정죄해야 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

     그러므로 ‘율법의 형상들이 목적인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다면 그것은 헛될 뿐이다’라고 칼빈은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형(typus)이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에게 희생제물을 명령하신 것은 희생제물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의로 삼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을 들고 ‘그들의 마음을 들어 올려서’(altius erigere eorum mentes)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구약의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영적이고, ‘영적인 예배’(cultus spiritualis)만이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율법은 신령한 것입니다. 율법은 문자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신령함은 바로 그 율법이 언약의 법이요, 그 언약의 머리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율법은 헛되지 않았다(legem Christo non fuisse vacu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

     그리스도와 관련될 때 율법은 능력이 있고, 실제적인 목적을 이루고, 율법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관련되지 않은 율법은 다 헛된 것입니다, 아무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regnum sacerdotale, 출 19:6)가 된 것은 그들이 지상에서 제사장직에 완성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러한 소망 가운데서 모형으로 예배를 드리게끔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약의 법입니다. 짐승들의 피가 실체가 아닙니다. 그 언약의 머리이신, 언약의 주이신, 화목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 그분이 율법의 실체인 것입니다. “거룩한 머리 안에”(in sancto capite) 있을 때에만 구약의 제사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 거룩한 머리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택하신 족속(genus electum)이요, 왕 같은 제사장(sacerdotium regale)’이라고 불리는 것은(벧전 2:9)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빈은 율법의 규범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예배 규범이요, 이웃 사랑의 규범이요, 하나님 사랑의 규범, 이웃 사랑의 규범임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있다, 그래서 언약의 머리가 그리스도시다, 율법은 언약의 법이고 그리스도의 법에서 성취가 된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말씀에 있듯이,’ 바로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7.2.]

     그리스도의 은혜로 옷 입혀져야 율법이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그렇게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의 사악함으로 율법 앞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율법 앞에 선다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웠습니다. 율법은 이제 제사장 나라 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의 삶의 법입니다. 칼빈은 종교의 규범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규범이 또한 율법이라고 강조합니다. ‘레위 지파의 규범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유다 지파의 후손의 규범이다. 그리고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왕,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제사장이자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단번에 영원한 제물로 드리신, 우리의 유일하신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왕이시자, 다윗의 후손으로서 왕이시자 그리고 아론의 그 반차 이후로 제사를 드리던 그 모형의 제사를 다 이루신 대제사장, 실체이신 제사장, 왕-제사장, 제사장-왕으로서 멜기세덱 반차에, 멜기세덱 서열에 있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시 110:4). 구약 백성들도 그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율법을 순종했다.’ 이렇게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 약속이 몸으로 오지는 않았지만은, 그리하여 초등 교사인 율법 아래에 있었지만은(갈 3:24) 그들도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직 더 친밀하게 알지는 못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지상의 것을 좀 더 바라보면서, 좀 더 만지고 좀 더 지상의 것을 누리면서 그렇게 구약시대 백성들은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들도 그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있지 않았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합니다. 
     이사야는 모든 범죄가 한 가지 희생제물로 속함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그것이 이사야 53장에 바로 종의 노래 아닙니까.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단 9:26-27). ‘끝내는 메시아, 그가 레위 지파로부터 나오셔서, 레위 지파로부터 지목되어서, 물론 유다 지파에서 오시지만, 그는 제사장으로 오신다. 왕이시면서 제사장으로 오신다. 오직 한 제사장 멜기세덱의 서열 반차를 쫓는 영원한 제사장 그분이 오셔서 그분에게 특별한 종류의 기름부음이 있을 것이다’(시 110:4; 참조. 히 5:6; 7:21)[라고 합니다]. 다니엘서 9장 24절에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셔서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시고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가해 주심으로써 다스리시는, 레위 지파 아론의 반열에 속한 제사장이시자 유다 지파 다윗의 계보를 잇는 왕으로서 멜기세덱의 반열에 속한 왕-제사장 혹은 제사장-왕이시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율법의 의식 자체는 폐지되었으나 그 뜻은 완성되었음을 지적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1, 각주 381.

     히브리서는 전체 히브리서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시자 제사장이심을 드러내고, 그것이 구약 백성의 신앙이었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구약 백성의 신앙이었고, 그리고 이 시대에 우리의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을 히브리서가 강조하는데, 특별히 4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메시아요, 그가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셔서 모든 예언된 말씀을 이루심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Christum esse finem legis) … 그리스도는 죽이는 조문 자체를 살리는 영이시라(Christum esse spiritum qui literam per se mortiferam vivificat) … 그리스도가 값없이 의를 전가(轉嫁)해 주시고 중생(重生)의 영으로 그것을 부여하실 때까지는 계명으로 의를 가르치는 것은 헛되다(frustra doceri iustitiam praeceptis, donec eam Christus et gratuita imputatione et spiritu regenerationis conferat) …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 혹은 마침(complementum legis, vel finem)이라고 합당하게 칭해진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2.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십니다(롬 10:4). 그리스도는 죽이는 조문을 살리는 영이라고(고후 3:6, 17) 칼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값없이 의를 전가해 주시고 중생의 영으로 그것을 부여하실 때까지, 계명으로 의의를 가르치는 것은 헛되다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이고 마침입니다. 마침이라는 것은 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 율법의 끝이라고 한 것은, 마침이라고 한 것은 마태복음 5장 17절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에 일점일획이라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셨으므로, 그것은 곧 율법[을] 다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는 백성을 조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새 시대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님이 모든 의를 이루시고 율법을 불순종한 죄 값을 치르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순종의 의의를 다 이루셔서, 이제 그의 백성이 율법을 누리게끔, 율법을 즐거워하게끔 하셨다는 것, 그것이 율법의 끝이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값없이 자녀 삼으심의 언약으로 옷 입혀진 것이었[다.](gratuitae adoptionis foedere … vestita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2.

칼빈은 율법의 본질을, 그리스도가 다 이루어 그 의를 전가해 주시는 ‘언약의 법’(lex foederis) 혹은 ‘은혜의 법’(lex gratiae)이라는 관점에서 성도의 삶의 규범이 된다고 파악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7.2, 각주 385.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아야 됩니다. 율법을 그대로 문자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언약의 법으로 받아야 됩니다. 벌거벗은 율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서는 우리는 저주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덧입혀서 [보아야 합니다.] 칼빈이 말하듯이, ‘율법은 값없이 자녀 삼으심의 언약으로 옷 입혀진 것이다. 율법은 언약으로 옷 입혀진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다.’ 그때 그 율법이 우리에게 달콤하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본래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으로서 십계명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준 종교의 양식을 총칭합니다. 
     둘째, 율법은 그 목적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화목이 중재함으로 그 머리 안에서 자녀 된 모든 사람에게 제사장과 왕의 영예가 부여됩니다. 
     셋째,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 마침이십니다. 그가 중생의 영으로 값없이 자기의 의를 전가해 주실 때까지 율법의 의의 가르침은 헛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의 가르침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 율법은 멜기세덱 반차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왕, 왕-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자녀 삼으심의 언약으로 옷 입혀진, 그래서 율법은 언약의 법, 은혜의 법, 이 율법은 은혜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언약을 갱신하고 강화한다는 것입니다.



61강 결론


  1. 율법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으로서 십계명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준 종교의 양식을 총칭합니다. 
  2. 율법은 그 목적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화목이 중재하므로 그 머리 안에서 자녀 된 모든 사람에게 제사장과 왕의 영예가 부여됩니다.
  3.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 혹은 마침이며, 그가 중생의 영으로 값없이 자기의 의를 전가해 주실 때까지는 율법으로 의를 가르침이 헛됩니다. 
  4. 율법은 멜기세덱 반차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자녀 삼으심의 언약으로 옷 입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폐하지 않고 갱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