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강 [2.6.1-4] 중보자 그리스도의 필연성

관리자
조회수 80





60 | 2.6.1-4 (2권 183-195페이지)



중보자 그리스도의 필연성


     칼빈은 『기독교 강요』 2권 1장에서 5장까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2권 6장부터 기독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주목되는 것은 2권 6장에서 중보자가 오실 필요성을 논하고,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곧 그의 ‘인격’과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셨는가, 곧 그의 ‘사역’에 대한 그러한 논의로 넘어가지 않고, 2권 7장에서 11장까지 율법과 복음 그리고 구약과 신약, 곧 성경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 칼빈이 전체 성경을 기독론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 가운데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칼빈 언약신학의 특징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은 ‘왜 중보자가 오셔야 하는가’, ‘이 중보자가 오심의 당위성 혹은 필연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강요』. 2.6.1.]

모든 인류는 아담이라는 인물 안에서 멸망하였다(in Adae persona perierit totum humanum genus). … 이러한 수치는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의 인격을 통하여 구속주로 오실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magis cedat in maiorem ignominiam, donec in filii sui unigeniti persona redemptor appareat De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6.1.

     모든 인류는 아담이라는 인물 안에서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아담이 타락하여 그 언약적 전가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에 속하고 그리고 사망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인류에게 하나님 자신의 형상 가운데 순전함을 부여하시고 그 탁월함과 고귀함을 갖게 하셨으나 이제 인류가 타락하여서 그런 모든 것들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더렵혀지고 썩은 사람을 하나님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제 그 인류가 어떠함을 아시고, 친히 ‘아들’을 주심으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통한 대속의 길, 이것은 이미 창세 전에 이미, 타락 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짓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바인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아들 독생자의 인격을 통하여서 그를 ‘구속주’ 삼아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이 대속의 역사, 구속사, 이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가 불순종한 이후에 사방 어느 곳을 보아도 저주만이 임하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의 행실이 죄의 현상 가운데 놓여 있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스스로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희망을 갖는 것은 자아도취요,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 자신의 모습을 보아 절망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아서 스스로 옳다 하는 바대로 살아가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수한 기적들로 채워진 하늘과 땅, 그 장엄한 극장(magnificum hoc theatrum) … 처음에는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하여 이 극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가 악하여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fidem Christi)에 이르도록 하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6.1.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사실상 구원이 없고, 그리고 구원을 아는 지식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칼빈이 자주 표현하듯이, 눈부신 영광의 극장으로 피조물들을 두셔서 그 하늘과 땅, 장엄한 터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 만하게 하셨습니다.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지혜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에게는 그러한 일반적인 지식, 곧 일반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알게 될 자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그를 부름 가운데서만 지식이 있고 소망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오직 유일의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자도 없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릴 자도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첫 사람의 타락 이후,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어떤 지식도 구원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Certe post lapsum primi hominis nulla ad salutem valuit Dei cognitio absque mediato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6.1.

     이 부분에서 칼빈은 ‘중보자가 없이는’, ‘중보자가 없이는’, (라틴어로는 ‘absque mediatore’라고 하는데요) 이러한 표현을 반복해서 쓰면서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셔야 되는가’, 특별히 ‘구원의 중보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야 되는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어떤 지식도 구원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칼빈은 강조합니다. ‘중보자가 없으면’ 우리가 말하는 생명의 구원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데, 이 요한복음 17장 3절의 말씀은 결국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자가 없다’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봤을 때, 영생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고 할 때, 결국 그 지식은 아들의 지식, 아들을 통한 지식, 아들을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문”(unicam … ianuam qua in salutem ingredimur)은 그리스도시고 ‘그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absque eius gratia) 아무도 우리는 그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요 10:9). 
     모든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엡 4:18). 하나님을 떠남이 곧 저주받은 상태인 것입니다(갈 3:10). 그리하여 진노의 자녀들이라고 선포되었습니다(엡 2:3). 이제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는 길’,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문을 여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예배한다고 하지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는 것을 예배하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지식 가운데 있지 않은 것입니다(요 4:22). 그러므로 구원을 말하지만 구원의 열매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수 없으니,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니 무슨 열매가 있겠습니까? 
     태초부터 ‘생명’(vita)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요 1:4). 이제 다시 그 생명을 얻으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됩니다. 그 그리스도가 생명의 ‘원천’(fons)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하시는 값이시고 그가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의 몸에 접붙임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filii Dei)의 자리(locus)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요 1:12). ‘중보자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앞에 어떤 유익한 열매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6.2.]

그리하여 하나님은 중보자가 없이는 결코 옛날 백성에게 용서를 베푸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소망도 주시지 않았다(Ac proinde veteri populo nunquam se Deus ostendit propitium, nec spem gratiae unquam fecit absque mediato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6.2.

     두 번째로 칼빈은 또 ‘중보자가 없이는’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중보자가 없이는’ 용서를 베풀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은혜의 소망도 주시지 않았다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중보자를 통하여서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신자들도,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도 “율법이 명령한 희생제물”(sacrificia legis)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제물은 모형이요, 그림자요, 그 실체와 몸은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교회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가운데(in Christi persona) 자리를 잡고 있었어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아직 그리스도가 몸으로 오시지는 않았지만 오실 그분을 바라보고 그들이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모두에게 하나님은 영생의 복을 약속하시는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궁극적으로, 실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오실 그리스도를 구약에도 믿었고 이제 신약에는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습니다.] 그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씨(semen)고, 그 한 분이 바로 창세기에서 예언된 그 자손이라는 것 이것을 특별히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caput)로 삼는 지체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것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한나도 사무엘을 가졌을 때 노래를 합니다. 그 노래가 ‘기름부음 받은 자(Messia)의 뿔을 높이시리라’(삼상 2:10), 그리고 “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앞에서 행하리라”(적용 삼상 2:35), 이러한 말씀들은, 결국 한나가 사무엘을 가진 그 노래의 궁극적인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실 그리스도[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또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예수님이 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시 2:12)[라고 명령합니다. 즉,]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3)[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는 이 다윗의 시편의 말씀은 ‘아들에게 공경함이 없이’ 아버지께 공경함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한 우리 주님의 말씀과 서로 상통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종 다윗을 세우셔서 예루살렘에 등불을 비춰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유다 지파와 그의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시편 78편 68절, 그리고 그의 종 다윗을 택하셔서 그 백성인 야곱, 그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다, 시편 78편 70-71절에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시편의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가 교회에 머리시고, 그가 구원의 요새시고, 그와 그의 백성에 산업에 복을 주시는 기업이 되시고,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교회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된 것은 그리스도가 ‘유일한 머리’이시고, 그리스도가 그 권위와 권세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시편 18편 25전 26절에서 노래할 때 그 ‘오실 여호와’는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주를 위하여 지켜 내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어소서,’ 시편 80편 17절에 노래도 이와 상통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 그 중보자가 없이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믿음의 실체가 없게 되는 것이고 생명이 없는 언약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유일하신 소망이다, ‘중보자가 없이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6.3.]

비참한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가 약속될 때, 무엇보다도 교회의 해방이 절실하게 기술(記述)될 때, 그 확신과 소망의 기치(旗幟)가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미리 표상되어 있다(ubi rebus afflictis solatium promittitur, maxime ubi describitur ecclesiae liberatio, fiduciae et spei vexillum in Christo ipso praefigi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6.3.

     그리하여 칼빈은 그 소망과 위로, 그 가운데 교회가 해방되는 그 은혜를 누리는데, 그 확신과 소망의 기치(旗幟, vexillum)가 그리스도 안에 이미 구약 때도 표상되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확신과 소망의 기치, 바로 전쟁에 나갈 때 앞세우는 깃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말합니다]. 그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부음 받은 자 되신다라고 그렇게 전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런 것을 “언약의 항존성”(foederis stabilitas)이다, 혹은 영원한 언약이다, 이렇게 부릅니다. 바로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 그가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고 임마누엘로 예언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사 7:14). 그러므로 언약의 일관성, 일체성, 그 항존성(恒存性),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의 머리’로 삼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아는 이를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고(렘 23:5-6) 에스겔은 이를 ‘내가 한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게 하리니 내 종 다윗이라 다윗의 후손에서 나오는 씨가 목자가 되리라’(적용. 겔 34:23-25)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화평의 언약”(foedus pacis, 겔 34:25; 37:26), 영원한 언약이 있습니다. 구약의 호세아(호 1:11)나 미가(미 2:13)나 아모스(암 9:11)나 스가랴(슥 9:9)나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머리가 되시고, 그가 다윗의 후손이 되시고, 그가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시는 구원의 기치, 구원의 깃발이 되시는 것을 반복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구원은 그 머리로부터 온몸으로 퍼져 간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6.4.]

     유대인들은 자유(liberatio)를 찾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직시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가 없이는’ 언약이 없습니다, 언약의 실체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오셨을 때 그들은 ‘호산나’라고 노래했습니다. 구속주가 오심이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유일한 보증”(unicum … misericordiae Dei pignus)이 된다는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예수를 배척하고 맙니다. 왜요? 언약에 대한 그 믿음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 믿음은 그리스도로부터 아버지께로 올라간다(a Christo fides ad patrem conscendit)는 말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여기서 믿음은, 비록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견고한 터 가운데 붙들고 계시는 중보자 자신이 중재하지 않으시면 곧 사라지고 만다(eam[fides], etiamsi Deo innititur, paulatim evanescere, nisi intercedat ipse medius, qui eam in solida firmitate retineat)는 의미로 이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중재가 없다면 하나님의 엄위는 너무나 높아서 사람들이 그곳까지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와 다름없기 때문이다(alioqui altior quoque est Dei maiestas quam ut ad eam penetrent mortales, qui tanquam vermiculi super terram repta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6.4.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라고] 그랬고, 그리고 [칼빈은]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라고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믿음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이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중보자 자신의 중재가 없으면,’ 하나님은 너무 높은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고 또한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골 1:15).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오히려 타락한 인류에게 장애가 됩니다, 장벽이 됩니다,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율법이 은혜로 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finis legis, 롬 10:4)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율법의 그 저주가 은혜의 길로, 시온의 대로로 이르는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구원의 지식이 없다(salvificam Dei cognitionem absque Christo non constare)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세상의 시초부터 다름 아닌 그리스도가 모든 택함 받은 사람이 자기를 바라보게끔, 그리고 자기에 대하여 확신하는 가운데 안식하게끔 그들 앞에 계셨던 것이다(ab exordio mundi ipsum fuisse propositum omnibus electis in quem respicerent, et in quo acquiesceret eorum fiducia).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6.4.

     “그리스도가 없이는”(absque Christo) 어떠한 구원의 지식도 없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정하시고, 택함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그 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23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중보자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어떤 지식도 구원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의 원천이시며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문이십니다. 
     둘째, 중보자가 없이는 용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소망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이시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유일한 씨이십니다. 
     셋째, 중보자가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엄위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율법의 마침이십니다.
     넷째, 그리스도가 영원한 언약의 주, 목자, 기름부음 받은 자, 약속된 의로운 가지이시며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유일한 보증이십니다. 그 머리로부터 구원이 온몸에 퍼져 가는 것입니다.



60강 결론


  1.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어떤 지식도 구원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의 원천이며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문입니다.
  2. 중보자가 없이는 용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소망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이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유일한 씨입니다.
  3. 중보자가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엄위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율법의 마침입니다.
  4. 그리스도가 영원한 언약의 주, 목자, 기름부음 받은 자, 약속된 의로운 가지이며,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유일한 보증이니, 그 머리로부터 구원이 온 몸에 퍼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