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강 [2.5.12-19] 성경은 언약이 자유에 앞서고 은총이 의지에 앞섬을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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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 2.5.12-19 (2권 169-182페이지)



성경은 언약이 자유에 앞서고
은총이 의지에 앞섬을 가르침


     칼빈은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특별히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언약의 법이고 우리가 할 수 있어서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명령하신다. 그리하여 할 수 없는 것이라도 명령하시면서 친히 은혜로 이루신다. 그래서 율법에는 명령과 함께 약속이 있다.’ 이런 부분을 강조합니다. 자유의지를 논함에 있어서 왜 이 부분이 부각되는 것일까요? 자유의지는 본질상 선행으로 나아가는 우리 영혼의 결단 아닙니까. [즉] 선택[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규범이 있어야 됩니다. 뭐가 옳고 그른 것인가, 그것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기 때문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뜻 그게 규범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대로, 그 규범대로 우리가 살아가야 되는 그것을 결단하는 영혼의 기능이 의지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결단하게 하는 그 의지가 과연 우리가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의지인가?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과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앞에 전제될 때 그것을 뜻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 아니겠습니까? 우리 앞에 도랑이 있고, 우리 앞에 강이 있다고 칩시다. 같이 그것을 뛰어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시다. 도랑이 앞에 선 사람은 나는 이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뛰어 넘어가겠죠. 그러나 강 앞에 선 사람은 ‘내가 저것을 어떻게 뛰어 넘어가냐?’ 강은 넓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사전적 인식을 가져야 행위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규범을 알려 줄 때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게 먼저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율법 앞에 선 우리는 뭐라고 할까요? ‘야 저 큰 강 앞에서 이제 죽었다. 뒤에 적들은 쫓아오는데, 화로다 나여 죽었도다, 망하였도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끝이 아니죠. 하나님은 그 강 앞에 세우되 독수리를 준비하셔서 독수리의 날개에 얹어서 건너가게 하신다는 거죠. 독수리가 눈에 안 띄면, 강을 갈라 버리신다는 거죠, 홍해를 가르듯이.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좇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행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 영혼의 결단, 자유 선택, 곧 자유의지,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데 저 넓은 강 앞에, 수십 미터 되는 강 앞에 겨우 뛰어 봤자 2m, 3m, 4m밖에 넓이 뛰기를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행한다고 의지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그 말씀이 여기에서 중요하게 전개되는 겁니다. ‘율법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그리고 하지 못하는 것이라도 명령할 때는 은혜로 하나님이 이루심을 우리에게 알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의지의 결단을 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나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은혜를 구하면서 나선다. 이게 자유의지다.’ 이렇게 보면 이건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 성도가 살아남도, 살아감도, 칭의도, 성화도, 은혜라고 한다면 이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전적인 은혜 가운데 사람이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여 준다 이거예요. 그리고 생명을 얻은, 구원을 얻은 거듭난 사람에게만, 새 영을 받고 새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그 존재하는 의지가 또 은혜 위에 은혜로다, 날마다 은혜가 쌓여야, (칼빈이 그렇게 표현을 썼듯이[『기독교 강요』, 2.3.11]) 은혜가 쌓여야 날마다 우리가 선행으로 나아가고, 거룩함으로 나아가고,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고, 선행도 은혜인데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서 상급 주신다 하고, 이러니까 자유의지 논쟁과 율법관은 아주 중요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5.12.]

     칼빈은 이후에 2권 7장, 8장에서 율법을 다룰 때 좀 더 이 부분을 상세하게 이야기합니다마는 우리가 여기서도 그것을 직시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내가 명령한 명령은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요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니 말씀이 매우 가까워서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 신명기 30장의 이 말씀은 로마서 10장에서도 인용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고,’ 이렇게 말씀이 연결되지 않습니까? 여기에 ‘말씀이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는 건 뭘까요? 언약의 백성에게 성령의 역사로 말씀을 심어 준다는 것이요, 그래서 언약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심어지면 명령만 있을 뿐만 아니라 약속도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접근하려면 반드시 죽음이 걸려 있는 절벽을 지나야 하는데, 그 율법을 지키는 적성(適性)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씀에서(신 30:11-12, 14) 모세가 선포한 것에는 율법의 요구와 함께(cum legis exactione) 자비의 언약(misericordiae foedus)이 함의되어 있음이 그 무엇보다 분명하다. … 우리는 여기에서 지칭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교훈(praeceptis)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promissionibus evangelicis)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 구원이 율법에 의해서 우리에게 부과된 어렵고, 거칠며, 불가능한 조건, 즉 모든 계명을 성취한 자들만이 최종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조건 아래에서가 아니라 유용하고, 용이하며, 누구나 가닿을 수 있는 조건 아래에서 복음 가운데 부여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12.

     분명히 율법에 접근하면 죽음의 절벽을 가로질러야 됩니다. 칼빈이 말하듯이 ‘죽음이 걸려 있는 절벽을 지나가야 되는데 이 율법의 요구와 함께 자비의 언약이 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자유의지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 결단의 의지지만 은혜의 전제가 있는 의지[의] 결단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여기서, ‘율법에는 요구와 함께(cum legis exactione) 자비의 언약(misericordiae foedus)이 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손으로 할례를 받아서, 거듭나서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그래서 율법은 단순한 “교훈”(praeceptis)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promissionibus evangelicis)이다.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렵고 거칠고 불가능하고, 그렇지만은 율법은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도망치게 하는 복음의 역사 가운데 율법이 기능한다,’ 이렇게 칼빈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5.13.]

     우리는 스스로 여호와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우리를 향하여 드십니다. 그의 낮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겸손하게 되고, 겸손한 가운데서 여호와를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됩니다. 온갖 역경과 좌절이 있지만 이겨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현존(praesentia) 앞에서 일시적으로 낙심하고 낙담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죄를 깨닫게 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은혜의 언약을 붙들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그의 임재와 그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οὐδενίαν)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의 전적 은혜, 하나님의 주권,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은혜에 첫 자리를 두어야 해요. 그리고 자유가 후속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이 앞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5.14.]

     우리의 의지는 결코 우리를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의지에 올라타는, (이미 이전에 보았듯이 기수의 비유[『기독교 강요』, 2.4.1.]) 성령이 우리의 의지에 올라타면, 우리의 의지가 온전하고, 부드럽고, 제 길을 가고, 끝내 초장으로, 물가로, 열매 맺는 자리로 나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하게 될 뿐 스스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동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동하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선하신 분에 의해서 행동하게 된다면 당신은 선하게 행할 것입니다(agis, et ageris; et tunc bene agis, si a bono agaris).  -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14.

     우리는 행동합니다마는 행동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행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행한다 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수동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원함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기 원하는 그 의지는 은혜로 부여되는 의지인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의지를 어찌 자유의지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행위를 할 의지, 그것은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5.15.]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역사해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과 그 말씀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해야 우리를 온전케 하고, 행하게 하고, 보존시키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게 됩니다. 은혜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자유가 있습니다. 은혜는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자유를 회복합니다. 은혜가 있어야 진정 우리가 자유롭게 됩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있을 때,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우리가 순종할 때, 그때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 성령의 순전한 역사, 그 자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십니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하게 이끄십니다. 

[『기독교 강요』. 2.5.16-17.]

     우리의 마음, 우리의 의지, 그리고 우리의 열심, 노력,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면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 긍휼히 여기시는 자의 행위조차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롬 9:16).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작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에 무슨 공로를, 자질을 더할 수 없습니다. 무조건적 선택입니다. 무조건적 선택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신, 원하는 자, 기뻐하는 자, 뜻하는 자, 하나님이 스스로 세우시고 스스로 마음에 합하다고 하신 자, 그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 자유의지를 가지고 누리게 됩니다. 디도서 3장 4-5절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나실 때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그의 무한한 긍휼하심을 따라,’ 무한히 우리에게 베푸시는 긍휼하심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전함을 회복하고, 온전함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5.18.]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주님이 최초에 옷 입히신 장식들을 훼손시키고 말았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후원자가 아니라 의사라는 사실을 한 목소리로 인정하도록 하자(atque ita pariter fateamur medico nunc opus esse, non patron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18.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부여하십니다. 선물을 부여하십니다. 우리에게 나간 것으로 찾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찾으십니다. 단순히 우리를 후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치료하십니다, 구원하십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영혼의 의지조차 하나님이 뜻하신 바대로 다시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영혼을 하나님이 주장하셔서 아는 것과 뜻하는 것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5.19.]

     하나님은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5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은 우리의 전적인 모든 부분을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삶을 지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 주시고, 그 계명과 규율과 법도와 무엇보다 하나님의 어떠하신 가운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알게 하셔서 우리가 그것을 추구하게 하고, 기뻐하게 하고,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능함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날 때 우리는 무능함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택함 받은 백성들의 은혜인 것입니다. 무능함을 발견하는 즉시 전적인 은혜를 간구합니다. 자유의지는 그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라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가운데서 의지하고, 의뢰하고, 소원하고, 간구하고, 그래서 은혜의 질서가 자유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가 자유를 세우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자만이 자유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있지 아니하고, 탕자가 집을 떠나고, 마음대로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걸 누가 자유라고 하겠습니까?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종을 들 때, 은혜의 수종자가 되는 자유, 그것이 진정한 자유고, 그 의지를 자유의지, 이 자유의지는 타락한 인류에게는 상실되었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회복된 것 여기에 무슨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정확하게 칼빈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한 이후 구원을 좌우하는 값없이 주어진 선한 것들은 박탈된 반면, 본성적인 것들은 부패하고 오염되었다(adempta esse homini post lapsum gratuita bona unde salus dependet: naturalia vero corrupta pollutaque ess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5.19.

     모든 것이 부패하고 오염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 너머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한 의지를 갖게 하여 의의 종이 되게 하시는 그 은혜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의 요구는 자비의 언약 가운데 주어진 것으로서 율법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명령에는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율법을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뜻을 세우는 것이나 뜻을 세우고 노력하는 것이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성령과 말씀의 규범으로 올바른 일을 분별하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새것, 거듭난 것, 그리스도의 것, 값 주고 사신 것[과 같이] 우리의 의지도 그것입니다. 새것입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네 번째, 죽음 아래에 놓인 인류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그 어떤 의지도, 달음박질도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애쓴다고, 열심히 달린다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합니다. 긍휼히 여기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그 가운데 뜻하고, 원하고, 그 가운데 노력하고, 행하는 그것만이 자유로운 것입니다.




59강 결론


  1. 율법의 요구는 자비의 언약 가운데 주어진 것으로서, 율법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2. 율법을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은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 후속합니다.  
  3. 우리가 성령과 말씀의 규범으로 올바른 일을 분별하고 행함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심으로 말미암습니다. 
  4. 죽음 아래에 놓인 인류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그 어떤 의지도 달음박질도 아닌 자기 백성을 택하여 무조건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