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새 영,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우리의 간구함도 성령의 소욕대로 간구함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옛것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새것에 속한 것, 새 마음, 새 의지 그 가운데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룹니다. 아는 것이 온전치 않았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진리가 역사하니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진리로 자유롭게 되고, 진리로 거룩함을 받게 됩니다. 그 진리 가운데 마음을 정하여 뜻을 세우고, 그리고 선행을 이룹니다. 이 모든 과정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무엇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은혜로 거룩함에 이르고, 은혜로 끝내 영화롭게 되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4.6.]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구원의 은혜 외에 일상적인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가 행하는 많은 일들, [즉] 뜻을 세우고, 또 그것을 이루어 가는 많은 일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 아닌가라고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은혜(특별은총)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구제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좋은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이런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 행위들도 그것을 행함에 있어서 뜻을 세우는 ‘의지’(voluntas)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선택”(electio libera)은 타락한 인류에게 결코 온전치 않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득이 되는 일 그것이 처음 보기에는 구원의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여도, 그래서 중립적인 일과 같이 보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가 기울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덕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gratia specialis)는,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권능”(vis providentiae)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미리 바라보신 것을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이죠. 이 영역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의지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부수(附隨)하는 그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외부적인 일들”(resexterna)에 대해서도 우리 사람의 ‘마음’(animus)을 주장하신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서 애굽 사람들이 마음을 녹이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나갈 때 그들에게 값진 것들, 그런 그릇 이런 것을 내어 주도록 한 것 [그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출 11:2-3). 애굽 백성은 거듭난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애굽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바로의 마음조차 움직여서 순간 그들의 일은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그들에게 가축도 내어 주고 그리고 귀한 것도 그리고 그릇도 내어 주게 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이제는 애굽의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이렇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창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 이때 “그 사람”은 아직 야곱이 요셉인 줄 몰랐던 그 사람, [즉] 애굽의 국무총리[입니다]. 근데 야곱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애굽의 국무총리, 애굽의 바로 밑에 최고의 지도자, (그게 결국 요셉 아닙니까? 그런데 야곱이 아직 모를 때 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이렇게 야곱이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도 하나님이 애굽의 제2인자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제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요셉이지 않습니까?
시편에서도 이런 구절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열방의 잔인함을 하나님이 날을 세우기도 하지만은 열방을 오히려 누그러뜨려서 그들이 관용을 베푸는 자리에 서기도 하고 또 그들이 남을 긍휼히 여기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자리에도 서게 하시는 이러한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시 106:46).
누가 봐도 아이도벨의 계획이 뛰어난 계획이었습니다, 후세의 계획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압살롬을 멸망시키려고 하나님이 작정한 것이죠. 그래서 압살롬의 마음을 움직여서 압살롬이 아이도벨이 아니라 후세의 계획에 손을 들어주게 하는 것이죠(삼하 17:14). 이런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에요. 르호보암의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노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소년들의 말을 듣게 해서 르호보암이 결국 악한 길에 서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그러다가 나라가 분열되지 않습니까?(왕하 20:10, 14) 기생 라합도 이미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여서 정탐꾼들을 숨겨 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수 2:9-11).
[『기독교 강요』. 2.4.7.]
그들(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들의 자유를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는 없다. 당신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일상 경험은 당신의 마음이 당신 자신의 선택의 자유에 의해서보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의해서(motione Dei)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4.7.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arbitriumDei)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유롭게 하면 자유로운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그들을 막으면 그 무엇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자유’(libertas)를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한들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진정한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자유의지다, 하나님의 품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지가 자유의지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기억해야 됩니다. 자유라는 것은 나의 개념이고, 하나님은 저 너머 계시고, 내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족시킨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자유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이룰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가운데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무슨 일을 하는 것, 하지 않는 것,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그 조건, 그 결과, 그 과정이 다 인간에게 있다면 그것은 자유의지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 가운데에 있는 인간의 노예의지인 것입니다. 이곳에서 논하는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자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유, 그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다’(잠 20:12)[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뜻할 때, 그것이 자유의지이지, 죄를 짓는 의지는 자유의지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궁극적으로 타락한 인류는 구원받지 않는 이상, 은혜의 빛을 비추지 않는 이상, 다 노예의지요, 그런 의미에서는 자유의지가 상실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야 우리가 보게 됩니다, 듣게 됩니다. 여호와의 손이 역사에서 이끄셔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주장해 주셔야 됩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살펴보게 되면, 하나님은 악한 의지들로부터 선한 의지들을 만드시고 일단 자기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지면 선한 의지들을 지도하셔서 선한 행위들과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bonas hominum voluntates, quas ipse facit ex malis, et a se factas in actus bonos et vitam dirigit aeternam).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4.7.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악한 의지들로부터 선한 의지를 만드시고 일단 그렇게 만들어진 선한 의지들을 지도하시고 선한 행위들과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 분, 거듭나게 하시는 분, 재창조로 다시금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 분, 그분이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온전한 것을 뜻하게 하시고, 그 의지를 실행하게도 하시고, 그 의지에 따라 노력하게도 하시고, 그 의지의 노력과 의지의 행사가 끝내 열매 맺는 그것도 하나님이 하시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은밀하고 가장 의로운 판단”(occultissimo … iudicio, sed iustissimo)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수중에서 은총을 베푸시거나 형벌을 가하십니다.
[『기독교 강요』. 2.4.8.]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전적 섭리, 하나님의 불변하는 영원한 뜻을 전제할 경우에만, 우리는 진정한 자유의지를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보기에는 저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다, 착한 일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런 일을 하는 그 의지, 애국심, 이타심, 공공정신 이런 거 다 좋죠.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지의 영역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한 것을 도모하고 끝내 이룬다고 해도 그 사람은 타락한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중심이 거듭난 것만 받으십니다. 그리하여 먼저 우리 자신이 거듭나야 우리 안에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서 자유의지를 찾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입니다.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facultas arbitrii)은 하나님이 처음이자 끝이시기 때문에 결과만 놓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결과가 좋으니까 다 좋다, 그것도 아닙니다. 자유의지의 영역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합해야 되고, 그 과정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되고, 그 결과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돼야 됩니다.
사람은 노예 상태로 태어납니다. [즉,] 죄의 노예, 악한 영의, 마귀 사탄의 종이 되어 있는 노예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필연적으로 죄를 지으나 자원에서 짓게 되는 인간의 그 비참한 모습에서 이제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 자유케 하시는 자녀의 영이 임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유로운 판단의 선택”(electio libera iudicii)과 “의지의 성향”(affectus voluntatis), 이 두 가지 모두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택과, 그 선택한 대로 뜻하고 이루는 그러한 의지, 어떤 오성적 판단과 의지적 결단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람이 가치중립적인 일을 행함에 있어서도 (여기서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구원의 본질적인 역사를 이루는 행위는 아니지만 그러나 귀한 행위, 일반은총의 영역에 있는 행위라고도 볼 수도 있어요.) 그런 행위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마귀 사탄의 의지도, 바로의 의지도, 사울의 의지도, 바산 왕 옥, 아모리 왕 시혼, 적들의 의지도 그리고 일반인들의 의지도, 무엇보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의지 모두 하나님이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기가 유익하다고 예견하신 방식대로 일을 이루시고 그 일에 관계된 사람의 의지를 그 방식에 맞게 조정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손이 마음을 붙드시고,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며, 그리고 끝내 선행과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선을 택할 판단의 자유도 없고, 그것을 행할 의지의 성향도 없습니다. 오성적 분별력과 의지적 결단력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56강 결론
사람이 가치 중립적인 일을 행함에 있어서도 무엇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유익하다고 예견하신 방식대로 일을 이루시고자 그 일에 관계된 사람의 의지를 그 방식에 맞게 조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마음을 붙드시고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시며 선행과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선을 택할 판단의 자유도 없고 그것을 행할 의지의 성향도 없습니다.
56강 | 2.4.6-8 (2권 139-143페이지)
사람의 자기 의지에 따른 자유 결정도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새 영,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우리의 간구함도 성령의 소욕대로 간구함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옛것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새것에 속한 것, 새 마음, 새 의지 그 가운데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룹니다. 아는 것이 온전치 않았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진리가 역사하니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진리로 자유롭게 되고, 진리로 거룩함을 받게 됩니다. 그 진리 가운데 마음을 정하여 뜻을 세우고, 그리고 선행을 이룹니다. 이 모든 과정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무엇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은혜로 거룩함에 이르고, 은혜로 끝내 영화롭게 되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4.6.]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구원의 은혜 외에 일상적인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가 행하는 많은 일들, [즉] 뜻을 세우고, 또 그것을 이루어 가는 많은 일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 아닌가라고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은혜(특별은총)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구제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좋은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이런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 행위들도 그것을 행함에 있어서 뜻을 세우는 ‘의지’(voluntas)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선택”(electio libera)은 타락한 인류에게 결코 온전치 않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득이 되는 일 그것이 처음 보기에는 구원의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여도, 그래서 중립적인 일과 같이 보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가 기울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덕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gratia specialis)는,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권능”(vis providentiae)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미리 바라보신 것을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이죠. 이 영역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의지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부수(附隨)하는 그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외부적인 일들”(res externa)에 대해서도 우리 사람의 ‘마음’(animus)을 주장하신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서 애굽 사람들이 마음을 녹이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나갈 때 그들에게 값진 것들, 그런 그릇 이런 것을 내어 주도록 한 것 [그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출 11:2-3). 애굽 백성은 거듭난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애굽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바로의 마음조차 움직여서 순간 그들의 일은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그들에게 가축도 내어 주고 그리고 귀한 것도 그리고 그릇도 내어 주게 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이제는 애굽의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이렇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창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 이때 “그 사람”은 아직 야곱이 요셉인 줄 몰랐던 그 사람, [즉] 애굽의 국무총리[입니다]. 근데 야곱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애굽의 국무총리, 애굽의 바로 밑에 최고의 지도자, (그게 결국 요셉 아닙니까? 그런데 야곱이 아직 모를 때 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이렇게 야곱이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도 하나님이 애굽의 제2인자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제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요셉이지 않습니까?
시편에서도 이런 구절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열방의 잔인함을 하나님이 날을 세우기도 하지만은 열방을 오히려 누그러뜨려서 그들이 관용을 베푸는 자리에 서기도 하고 또 그들이 남을 긍휼히 여기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자리에도 서게 하시는 이러한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시 106:46).
누가 봐도 아이도벨의 계획이 뛰어난 계획이었습니다, 후세의 계획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압살롬을 멸망시키려고 하나님이 작정한 것이죠. 그래서 압살롬의 마음을 움직여서 압살롬이 아이도벨이 아니라 후세의 계획에 손을 들어주게 하는 것이죠(삼하 17:14). 이런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에요. 르호보암의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노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소년들의 말을 듣게 해서 르호보암이 결국 악한 길에 서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그러다가 나라가 분열되지 않습니까?(왕하 20:10, 14) 기생 라합도 이미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여서 정탐꾼들을 숨겨 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수 2:9-11).
[『기독교 강요』. 2.4.7.]
그들(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들의 자유를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는 없다. 당신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일상 경험은 당신의 마음이 당신 자신의 선택의 자유에 의해서보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의해서(motione Dei)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4.7.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arbitrium Dei)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유롭게 하면 자유로운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그들을 막으면 그 무엇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자유’(libertas)를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한들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진정한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자유의지다, 하나님의 품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지가 자유의지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기억해야 됩니다. 자유라는 것은 나의 개념이고, 하나님은 저 너머 계시고, 내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족시킨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자유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이룰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가운데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무슨 일을 하는 것, 하지 않는 것,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그 조건, 그 결과, 그 과정이 다 인간에게 있다면 그것은 자유의지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 가운데에 있는 인간의 노예의지인 것입니다. 이곳에서 논하는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자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유, 그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다’(잠 20:12)[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뜻할 때, 그것이 자유의지이지, 죄를 짓는 의지는 자유의지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궁극적으로 타락한 인류는 구원받지 않는 이상, 은혜의 빛을 비추지 않는 이상, 다 노예의지요, 그런 의미에서는 자유의지가 상실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야 우리가 보게 됩니다, 듣게 됩니다. 여호와의 손이 역사에서 이끄셔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주장해 주셔야 됩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살펴보게 되면, 하나님은 악한 의지들로부터 선한 의지들을 만드시고 일단 자기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지면 선한 의지들을 지도하셔서 선한 행위들과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bonas hominum voluntates, quas ipse facit ex malis, et a se factas in actus bonos et vitam dirigit aeternam).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4.7.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악한 의지들로부터 선한 의지를 만드시고 일단 그렇게 만들어진 선한 의지들을 지도하시고 선한 행위들과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 분, 거듭나게 하시는 분, 재창조로 다시금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 분, 그분이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온전한 것을 뜻하게 하시고, 그 의지를 실행하게도 하시고, 그 의지에 따라 노력하게도 하시고, 그 의지의 노력과 의지의 행사가 끝내 열매 맺는 그것도 하나님이 하시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은밀하고 가장 의로운 판단”(occultissimo … iudicio, sed iustissimo)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수중에서 은총을 베푸시거나 형벌을 가하십니다.
[『기독교 강요』. 2.4.8.]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전적 섭리, 하나님의 불변하는 영원한 뜻을 전제할 경우에만, 우리는 진정한 자유의지를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보기에는 저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다, 착한 일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런 일을 하는 그 의지, 애국심, 이타심, 공공정신 이런 거 다 좋죠.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지의 영역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한 것을 도모하고 끝내 이룬다고 해도 그 사람은 타락한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중심이 거듭난 것만 받으십니다. 그리하여 먼저 우리 자신이 거듭나야 우리 안에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서 자유의지를 찾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입니다.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facultas arbitrii)은 하나님이 처음이자 끝이시기 때문에 결과만 놓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결과가 좋으니까 다 좋다, 그것도 아닙니다. 자유의지의 영역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합해야 되고, 그 과정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되고, 그 결과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돼야 됩니다.
사람은 노예 상태로 태어납니다. [즉,] 죄의 노예, 악한 영의, 마귀 사탄의 종이 되어 있는 노예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필연적으로 죄를 지으나 자원에서 짓게 되는 인간의 그 비참한 모습에서 이제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 자유케 하시는 자녀의 영이 임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유로운 판단의 선택”(electio libera iudicii)과 “의지의 성향”(affectus voluntatis), 이 두 가지 모두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택과, 그 선택한 대로 뜻하고 이루는 그러한 의지, 어떤 오성적 판단과 의지적 결단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람이 가치중립적인 일을 행함에 있어서도 (여기서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구원의 본질적인 역사를 이루는 행위는 아니지만 그러나 귀한 행위, 일반은총의 영역에 있는 행위라고도 볼 수도 있어요.) 그런 행위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마귀 사탄의 의지도, 바로의 의지도, 사울의 의지도, 바산 왕 옥, 아모리 왕 시혼, 적들의 의지도 그리고 일반인들의 의지도, 무엇보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의지 모두 하나님이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기가 유익하다고 예견하신 방식대로 일을 이루시고 그 일에 관계된 사람의 의지를 그 방식에 맞게 조정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손이 마음을 붙드시고,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며, 그리고 끝내 선행과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선을 택할 판단의 자유도 없고, 그것을 행할 의지의 성향도 없습니다. 오성적 분별력과 의지적 결단력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56강 결론
사람이 가치 중립적인 일을 행함에 있어서도 무엇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유익하다고 예견하신 방식대로 일을 이루시고자 그 일에 관계된 사람의 의지를 그 방식에 맞게 조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마음을 붙드시고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시며 선행과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선을 택할 판단의 자유도 없고 그것을 행할 의지의 성향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