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강 [2.3.6-10] 자유의지는 은혜로 부여되고 은혜로 작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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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2.2.6-10. (2권 112-124페이지)



자유의지는 은혜로 부여되고
은혜로 작용함



[『기독교 강요』. 2.3.6.]

     자유의지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자들에게 회복된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류는 자유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우리가 전적인 은혜로 거듭남은 전인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거듭남, 그리고 영육 간의 삶에 있어서의 거듭남. 우리는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함께 지식과 의지, 모든 것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빌 1:6). 그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마지막 때까지 그것을 이루십니다. 착한 일의 시작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회심에서, 거듭남에서, 중생에서 우리가 그 기원을 찾아야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돌이킬 수 없듯이,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리에 설 수 없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시고, 새롭게 빚으시고, 지도하시고, 의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 가운데 우리가 선한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 그 구원의 전 역사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위를 하는, 곧 선행을 하는 그 의지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곳에서 그리하여 선한 의지, 자유의지, 그것을 갖게 됨도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6장 26-27절에 보면, ‘새 영을 우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우리 속에 두고,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이 자기 영을 우리 속에 두어 율례를 행하고 규례를 지키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영을 우리 속에 두어 새롭게 하심으로, 새 마음을 주심으로, 오성과 이성이 다 거듭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계명을, 그 법도를 지켜 행하게 된다는 그런 귀한 말씀인 것입니다. 
     돌이 얼마나 단단합니까. 깨어지죠. 그러나 그 돌을 부드럽게 신축성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유한 것 그런 것은 다 타락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전적으로 나온 것이야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부드럽게 합니다. 나의 의지는 내가 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우리가 재창조라고 부를진대 우리에게 새롭게 된 마음, 그 마음 가운데서의 의지, 곧 회복된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만들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의지 안에 있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오직 은혜의 작품이다(quidquid boni est in voluntate, esse unius gratiae op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6.

     칼빈은 그리하여 “의지 안에 있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오직 은혜의 작품이다”라고 이렇게 아주 적당한, 적절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6절에 보면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주적 통치에만 미치겠습니까?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온전케 하시고 다스리시고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주장하시는데, 어찌 겉모습만, 육체만 변화시키겠습니까. 영적 삶의 조성자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비로소 하나님 앞에 존재하게 됩니다(엡 1:1; 고전 8:6).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는 것이죠. 우리의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 영광 받기 위하심이고, 우리를 그렇게 지으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심입니다(엡 2:10). 그리하여 중심이 합한 바 되기를 원하시고,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생명과 이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섬기기를 원하시죠. 구원이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엡 2:5)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 그 영혼의 두 기능, 오성과 이성도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이 쓸 만한 것으로 삼으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의 시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이차적 창조로부터 비롯된다(initium omnis boni sit a secunda creatione quam in Christo consequim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6.

     “그리하여 모든 선의 시작은 …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이차적 창조로부터 비롯된다”[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칼빈이 말하는 이차적 창조는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는 것이죠. 우리는 “그의 것”입니다(시 100:3).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시 100:3). 우리가 그의 것일진대 우리의 속을 어찌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겠습니까. 우리 전부가, 우리 전체가, 우리 전인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7.]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치듯이, 은혜는 모든 선행을 앞서는바(omne bonum opus gratiam praecedere), 의지는 지도하듯이 은혜를 이끌지 못하고 수종자로서(pedissequa) 그 뒤를 따를 뿐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7.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은혜는 모든 선행을 앞서는바, 의지는 지도하듯이 은혜를 이끌지 못하고 수종자로서 그 뒤를 따를 뿐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의지가 앞서서 은혜가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지는 은혜의 ‘수종자’(pedissequa)라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말합니까? 자유는 하나님께 이끌려 가는 것이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방종이요, 그것이야말로 굴레요, 그것이야말로 노예인 것이지요. 그 가운데 의지는 죄의 종의 의지, 노예의지죠.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좇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종자로서 우리 마음의 의지를 가질 때, 그것이 자유의지라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이 우리의 악한(pravam) 의지를 교정하시거나(corrigat) 오히려 지워 버리신다(aboleat).
둘째, 주님 자신이 그 악한 의지를 선한(bonam) 의지로 대체시키신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7.

     악한 의지를 교정하거나 악한 의지를 지워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옛 것을 지워 버리십니다. 그리고 선한 의지로 대체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듭난 의지라고 부를 수 있겠죠. 그 거듭난 의지가 자유의지의 회복, 곧 회복된 의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의 다음 말은 적절치 않다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의지 없는 은혜는 은혜 없는 의지와 다름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했는데 이 말이 맞지 않다는 것이죠. 무슨 말이냐? 의지 없는 은혜와 은혜 없는 의지를 똑같이 이야기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의지가 합해지고 은혜가 있어야 효과적인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소스토무스는 ‘의지 없는 은혜는 은혜 없는 의지와 다름없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이 말은 우리 의지가 합력해야 은혜가 있다는 것인데,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뜻을 세우고 하나님이 돕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를 더하고 선행이 합하여져서 역사하는 게 아닙니다. 선행은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행을 요구하실 때는 의지조차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가 의지에 앞서고 선행이 뒤따르는 것이지, 어떤 우리의 의지가 선행과 합력해서, 그래서 뜻이 합한 행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까 보았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를 은혜의 ‘수종자’다[라고 말했습니다]. 
     곧 의지의 조성자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의지에 따른 행위, 자유자의 의지에 따른 행위, 그것이 우리가 선행이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본다면 의지의 조성자 하나님, 그분이 선행의 조성자죠. 

하나님이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가르치실 때에, 그는 누구든지 배운 것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보게(cognoscendo videat) 하실 뿐만 아니라 원함으로써 간구하게(volendo appetat) 하시고 행함으로써 성취하게(agendoque perficiat) 하신다.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7.

     하나님이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무엇이든지 우리가 배우게 되면 그 배운 대로 행하게 되는 그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율법은 그저 문자로 남아 있지 아니하고 언약의 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다 약속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역사하는데, 그 은혜가 우리의 의지조차 새롭게 해서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선행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8.]

     하나님께만 “선의 기원”(exordium boni)이 있습니다. “선을 향한 의지”(voluntas ad bonum)는 오직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특별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곧 선택(electio)이 없이는 은혜가 없고, 은혜가 없이는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올바른 의지를 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이 그 택하신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에게 기뻐하시는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엡 1:4). 그래서 우리를 택하신 분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 자유 가운데, 은혜 가운데 의지를 부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의지를 갖는다,’ ‘뜻을 세운다,’ 이렇게 말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의지를 선물로 받았다,’ 이렇게 말하면 좋겠죠. 그게 자유의지라고 우리가 규정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 가운데 무엇을 뜻하고 무엇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선행일진대, 믿음도 선물이고, 의지도 선물이고, 행위도 선물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급도 선물, 곧 은혜인 것입니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그 하나님(겔 36:26), 그 하나님이 “한 마음과 한 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렘 32:39).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갖게 하십니다(렘 32:40). 예레미야 선지자, 에스겔의 선지자[는 말하기를], 부드러운 마음, 살 같은 마음, 그리고 한 마음, 경외하는 마음, 모두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새 영”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겔 11:19).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족하면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시는, 죄를 지어도 더 가까이 가게 하시는 새 영, 새 마음, 그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9.]

     [솔로몬은 말하기를,]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께로 향”하게 하시고(왕상 8:58)[라고 했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시 119:36), 시편 51편 10절에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다윗이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영도, 의지도, 오성도 다 “하나님의 창조물”(creatura Dei)이고, 그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거죠. 기도도 자유의지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뜻을 세워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하는 것도 우리의 새롭게 된 의지로만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의지로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포도나무 가지에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요 15:4). 구하는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의 소욕도 하나님이 심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심어 주셔야 됩니다. 아니면 다 뽑힐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마 15:13).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자유의지로 선행으로 나아갈진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기도하게도 하시고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선행의 첫째 부분은 의지이다. 그리고 둘째 부분은 강인하게 추진하는 노력(validus in exequendo conatus)이다. 이 둘의 조성자(author)는 하나님이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9.

     선행의 첫째 부분은 의지라면 둘째 부분은 노력이겠죠. 뜻을 세우고 열심히 애쓰는 것이죠. 이 두 가지가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의지도, 노력도 그 조성자가 하나님이라고 칼빈은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2:6). 그러므로 “일심으로 우리는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시 86:11). 우리의 모든 선행의 시작도 하나님이시요, 마지막까지 끌고 가시는, 노력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열매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그래서 견인(堅忍)의 은혜가 우리의 선행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만 하시고 우리가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강요』. 2.3.10.]

     하나님은 시작하시고 능력 주시고 효과적으로 작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끄시는 것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원함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가 원하면 하나님이 이끄는 정도가 아니라, 원함도 하나님이 주시고 이끄심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시고, 다스리시고, 새로운 영을 주십니다(겔 11:19-20; 36:27).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행하는 것에 상급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거는 중세 신학자 윌리암 오컴(William of Ockham)이 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한 대로, 자질대로, 공로대로 하나님은 그저 계산만 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에 은혜의 숨을 불어넣어(aspirare)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게(laudare)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십니다(ducere). 하나님이 우리의 처음과 끝이 되십니다, 견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중간상태’(medium)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작과 끝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끝까지 우리를 견인하시는 영적 삶의 조성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지 안에 선한 것은 오직 은혜로 부여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선행의 조성자는 하나님이시고, 선행의 의지는 은혜에 뒤따르는, 그리하여 은혜를 수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은혜의 수종자입니다. 
     셋째, 올바른 의지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으며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선행을 향한 의지를 갖게 하시고, 그 일을 이루도록 노력하게 하시는데, 믿음도 의지도 노력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53강 결론


  1.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끝까지 견인하시는 영적 삶의 조성자이신바, 의지 안에 있는 선한 것은 오직 은혜의 작품입니다.
  2. 선행의 조성자는 하나님이시며 선행의 의지는 은혜의 수종자입니다.
  3. 올바른 의지는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으며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은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선행을 향한 의지를 갖게 하시고 그 일을 이루도록 노력하게 하십니다. 의지를 주시는 분도 작용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