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강 [2.3.1-5] 필연적이지만 자원해서 죄를 짓는 노예 상태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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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2.2.1-5. (2권 99-111페이지)



필연적이지만 자원해서 죄를 짓는
노예 상태의 의지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강요』 2권 1장과 2장을 통하여서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타고난 사망의 죄책에 속하고, 그리고 전적 무능, 전적 부패의 상태에 놓이게 되어서, 아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없고, [그런] 마음조차 가질 수 없는 그러한 비참한 상태에 있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영혼의 타락에 있어서 그 영혼의 주요한 두 기능인 오성과 의지가 다 이제 온전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성,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선과 악과 정(正)과 사(邪)와 시(是)와 비(非)를 가리는 그러한 판단력이 이제 없게 되었고, 또한 나아가서 의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지식에 기초한 뜻을 세워서 그 뜻대로 행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우리에게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3.1.]

     그래서 2장의 마지막 두 절을 할애해서 자유의지가 상실되었음을 칼빈은 정확하게 선포하고 있고, 이제 이곳 3장, 4장, 5장까지 칼빈은 자유의지의 상실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앞부분에서는> 3장 앞부분에서는 자유의지의 상실을 전반적인 인간의 타락상에서 찾아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라고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육으로 났다는 것이 뭘까요? 

영혼의 어느 부분이(portio) 교정된다(corrigatur) 해서 거듭난 것이 아니며 그 영혼 전체(tota)가 갱신될(renovatur) 때에만 거듭나는 것이다(renasci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

     단순히 육체로 났다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않은 것, 사람 안에 주어진 타락한 이후에 그 자연 상태, 그것은 다 육적인 것이다’라고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성상 지니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타락한 부패, 무능, 그것을 다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이제 심령이 새롭게 되어서 유혹의 욕심에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야 의지조차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엡 4:22-23).
     ‘모든 이방인이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여 있지 않고,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해지고, 또 마음이 완악하고 완고해져서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에베소서 4장 17-18절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혜의 올바름’(rectitudo sapientiae)과 ‘의의 올바름’(rectitudo iustitiae)을 다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성경 말씀은 우리 영혼의 두 주요한 기능, [즉] 오성과 의지가 다 타락했음을 보여 주고 특별히 자유의지가 상실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저 눈멂과 그 결과로 초래되는 악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유일한 처방(unicm…remedum)이라는 사실 ….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1.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의 이 눈멂과 이 맹목성, [즉] 이 눈먼 맹목성으로부터 초래되는 그러한 거짓에 기초한 거짓 욕구, 곧 거짓된 의지, 이러한 것에서 아무도 자유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자만이 노예의지에서, 죄의 노예가 된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처방이다, 우리가 그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워야 된다, 이렇게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교회를 위한 영원한 빛이 되십니다. 그리하여 그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지식에조차 새로움을 받게 되고, 그 뜻하는 것과 마음 쓰는 것과 의지하는 것이 온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서 자유자가 되기 때문에 의지가 자유롭게 되고, 그리하여 타락한 인류는 구원받아 생명을 얻기 전에는 누구도 자유의지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저 타락한 인류를 그냥 두면 자유의지가 상실된 그 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62편 9절에서 사람이 헛된데, 그 헛됨을 저울에 달아 보면 어떤 헛됨보다 더 헛되다, 헛됨 자체보다 더 헛되다,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천성에서 나온 것은 모두 어리석고 하찮고 비정상적이고 사악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2.]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로마서 3장 10-1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이 말은 모든 뜻하고 행하는 것이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피 흘리는 데 빠르다는 것은 바로 남을 죽이는 것인데, 성경에서 가장 금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한 생명을 해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끝없이 남을 죽이고, 남을 끌어내리고, 남을 비난하는 데 발이 빠르다, 무엇보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라고 그렇게 사도는 전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천둥 같은 말씀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어떤 악한 몇몇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류에게 다 해당한다, 타락한 인류의 모습이다, 인류의 타락상이다라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의 영구적인 오염’(perpetua naturae corruptio)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 무엇 하나 깨끗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사람에게 구원이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버림을 받았으며 팽개침 당했기 때문이다(롬 3:23-24).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2.

     주님의 구원의 자비가 베풀어져야 생명을 얻고, 또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의지를 얻게 되는 거죠. 그것이 진정한 자유자의 의지, 바로 의의 종[이지만], (로마서 6장으로 말하면,)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다 죄의 종이라는 것이죠. 그 죄의 속박 가운데 있는 노예의지는 남아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자유자의 의지, 곧 자유의지는 은혜를 받기 전에는 다 상실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의도, 순전함도, 순수함도 없습니다. 어떤 지성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지식은 있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없습니다. 한번 삐뚤어지고 썩어 버려서 선한 것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방탕에 나아가고, (아까 보았지만은,) 남을 높이고 남을 섬기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죽이는 데, 피를 흘리는 데 발이 빠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를 중심에 두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음에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배은망덕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세우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3.3.]

     몸에도 질병이 다 남아 있지만 그래도 조그만 생기(生氣)는 있겠죠. 그게 우리가 일반적인 은총이죠. 우리의 영혼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일반계시와 일반은총의 한계로서 『기독교 강요』 1권 3-5장, 또 『기독교 강요』 2권 1-2장 이 부분을 통하여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일반은총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그것도 너무나 큰 은혜지만,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자 없다,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저 본성의 오염(corruptionem)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가 우리에게 없지 않다 … 그 은혜는 본성을 깨끗하게 하지는 않으나 내적으로 그것을 억제시켜 준다(cohibeat). … 주님은 자기에게 속한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이런 질병들을 고쳐 주신다(curat). …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날뛰지 않게끔 억제하는 것이 모든 것을 지키는 데 유익하다고 예견하셔서, 단지 굴레만 씌우신다(coercet). … 하나님은 자기의 섭리로 본성의 사악함에 재갈을 먹이셔서(refrenat) 그 본성이 행위로 분출되지 않도록 막으신다. 그러나 그것을 내적으로 깨끗하게 하지는 않으신다(non purgat int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3.

     하나님은 인류를 이러한 오염 상태 가운데 두셨지만, 전가된 죄, 원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속하고 전적 무능, 전적 부패 한 그 오염 가운데 두셨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은혜의 자리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러면 자유의지가 온전히 회복이 되는데, 일반적인 은혜, 곧 일반은총만으로는 그저 [죄를] 억제할 뿐이어서, 그저 막 죽이고 막 사는 그 정도는 아니게끔 하나님이 사회질서를 유지해 주세요.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에 이를 자는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일반은총은 억제적 은총이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거든요.
     근본적인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구원을 얻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유가 온전히 회복됩니다. 그 회복된 자유자의 의지, 그것이 자유의지고, 그 자유의지는 은혜가 없이는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섭리로 우리 본성의 사악함에 재갈을 먹이셔야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본성이 분출되지 못하도록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외적으로는 그렇게 누구에게나 해 주십니다. 그래서 아직 이 땅에서 [그 사악한 본성을] 완전히 멸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은총의 그러한 도구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회도 그중에 하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로 더불어 살고, 서로 억제하고, 서로 참고, 서로 교통질서 지키고, 이렇게 삽니다마는 내적으로는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구원의 은혜가 없이는 그 어떤 변화도, 거듭남도, 깨끗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강요』. 2.3.4.]

     그러므로 자유의지의 회복은 은혜가 의지에 앞서야 됩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선물, 일반적인 누구에게나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특별한 구원의 선물, 영적인 거듭남, 회복, 자녀 됨, 이것이 있어야 이제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적 부류가 아니라 은혜의 부류입니다. 자연적 부류는 똑같습니다. 누구나 다 원죄에 속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부류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은혜를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이죠.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자연적 비참함 가운데 자유의지를 상실했지만, 이제 은혜를 받은 자는 <여호와를 경외>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시듯이 그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서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여호와를 알게 되고, 또 경외하게 되고, 여호와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게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그 자리로 우리가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3.5.]

의지는 죄의 노예 상태로(peccati servitute) 예속되어 있으므로 선을 향하여(ad bonum)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에 몰두하는 것은 더더욱 가당치 않다. 이런 종류의 움직임은 하나님을 향한 회심의 시작(conversionis ad Deum principium)이며 성경에서는 이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돌린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5.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어떤 의의 공로도 없습니다. ‘죄의 노예 상태’(servitus peccati)로 예속되어 있는 우리가 무조건적 은혜, 특별한 은혜,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자유의지의 회복도 전적인 은혜의 영역입니다. <회심을 해야> 은혜를 받고, 칭의를, 의롭다 여김을 받고, [이는]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예레미야 31장 18절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돌이키셔야 우리가 돌아옵니다.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끄셔야 우리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베르나르두스(Bernardus, 1090-1153)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단순히 원하는 것은(simpliciter velle)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고, 악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male velle) 부패한 본성에 속한 것이며,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bene velle) 은혜에 속한 것이다.” 단순히 행하고자 하는 것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아직 중간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타락 전 아담의 모습이고, 이제 타락한 인류는 누구나 죄에 속해서 악을 행할 수밖에 없고, 이제 거듭난 인류는 누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의지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할 진정한 의지는 구원받은 인류[인] 우리에게 주신, 택함 받은 백성에게 주신 그 은혜 가운데서의 의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초의 아담이 가졌던 의지 이상의 의지라고 우리가 할 수 있어요. 그것은 거듭난 상태에서 누리는 의지인 것입니다. 

베르나르두스는 … 다음과 같이 쓴다. … “… 영혼은 필연성 때문에 노예이고 의지 때문에 자유자이다(anima … tenetur … ancilla propter necessitatem, libera propter voluntate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3.5.

     죄는 필연적으로(necessario) 우리 가운데 주어져 있습니다. 원죄가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우리는 노예 상태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우리에게는 의지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만 우리가 자원해서 짓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자원적(voluntaria) 노예 상태의 멍에를 진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인류는 필연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자원해서 짓습니다. 필연성 안의 노예지만은 그것을 남을 탓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자원해서 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유가 있지만 노예인 것입니다. 그게 노예의지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종 된 자의 비참한 의지인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타락한 인류가 본성상 지닌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눈멂과 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둘째, 타락한 인간 본성은 영구적인 오염 상태에 있으며 일체의 선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셋째, 일반은총으로는 타락한 본성의 사악함을 억제할 뿐 그 무엇으로도 본질적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거나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은총이 필요합니다. 
     넷째, 타락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만 자원해서 짓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자유롭다고 하지만 죄에 있어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류는 의지가 남아 있지만 노예 의지가 남아 있을 뿐 진정한 자유자의 의지는 상실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의지를 회복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52강 결론


  1. 타락한 인류가 본성상 지닌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눈멂과 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2. 타락한 인간 본성은 영구적인 오염 상태에 있으며 일체의 선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3. 일반은총은 타락한 본성의 사악함을 억제할 뿐 깨끗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4. 타락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지으나 자원해서 짓는바, 그 영혼의 의지는 자유롭다고 하나 죄의 노예입니다. 즉,  그 의지는 노예 의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