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강 [2.2.26-27] 성령의 은혜로 거듭난 자의 자유의지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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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2.2.26-27. (2권 93-97페이지)



성령의 은혜로 거듭난 자의
자유의지 회복




[『기독교 강요』. 2.2.26.]

     이제 여기 2장 마지막 두 절, 26-27절은 ‘의지’(voluntas)에 대한 논의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 15장에서 인간의 구조를 다루면서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구조고, 그 영혼의 두 기능이 ‘오성’과 ‘의지’다, 오성은 지식을 깨달음이고, 의지는 그 깨달은 바에 따라서 행위로 나아가는 그러한 영혼의 어떤 기능 혹은 작용을 우리가 ‘의지’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먼저 칼빈은 오성에 대해서 지금까지 여러 절을 할애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곳부터, [즉] 2권 2장 마지막 두 절 그리고 3, 4, 5장에 걸쳐서 아주 길게 의지에 대해서 논의를 이어갑니다. 이게 그 유명한 ‘자유의지’(arbitrium liberum) 논쟁의 핵심 부분이라고 우리가 보면 되겠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사람의 오성이 온전하지 않고서야 의지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의지는 아는 바대로 뜻을 정하여 행함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어떤 작용이라고 볼진대, 이 아는 바가 오성의 작용이기 때문에 타락한 인류가 오성이 온전치 않아서 도무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변하는 그러한 영혼의 온전한 상태에 있지 못하다면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식조차 악해지고 무엇 하나 보는 것, 이런 것이 전부 다 온전치 못하여서 이미 타락한 인류의 모습에는, 칼빈이 이전에 그 ‘눈의 비유’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눈은 타락해서 너무 어두운 것만 보고 너무 더러운 것만 보니까, 조금만 밝아도 조금만 깨끗해도 아주 환하다고 이야기하고, 아주 순수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의 눈은 온전히 볼 수 없다, 그리고 타락한 우리의 눈은 너무 미약해서 태양의 한 줄기 빛도 못 본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왜곡되고 또 연약한, 제한된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성이 온전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 우리에게 이러한 지식의 깨달음이 온전치 못하다면, 그 정사(正邪)와 시비(是非)와 정오(正誤)가 온전히 판단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다음 행위가 온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칼빈은 이 두 가지를 아주 긴밀하게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지는 결단의 자유를 특별히 좌우하는 그러한 영혼의 기능입니다. 의지가 있기 때문에 무엇을 택하게 되고 그 택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그러한 행위로 우리가 나아가게 됩니다. ‘자유 선택’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자유로운 가운데 무엇을 정하는 것, 이것은 분명히 깨달음의 영역이라기보다, 오성의 영역이라기보다 의지의 영역, 뜻함의 영역입니다. 

철학자들은 만물이 자연적 본능에 따라서(naturali instinctu) 선을 추구한다(appetere)고 가르치고 있으며 이는 공적인 동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자연적 본능은 사람의 의지의 올바름(rectitudinem)과는 전혀 무관하다. 자유의지의 힘을 자연적 본능에서 나오는 이런 욕구에서(appetitu) 찾아서는 안 된다. … 이런 종류의 욕구는 마음의 숙고(mentis deliberatione)보다 본질의 경향(essentiae inclinatione)으로부터 기원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6.

     사람의 자연적 본능은 의지적인 올바름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본능에 따라서 무엇을 정하였을 때 우리는 결코 그것을 의지에 부합하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릇된 것을 자연적으로 내 마음 가는 대로 정해 놓고 그것을 내가 실행한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올바른 의지의 활동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를 논하는 것이지 악을 행하는 그러한 의지를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악을 행하는 것은 이미 악의 노예입니다. 죄에 굴레에 있습니다. 그것은 노예의지입니다. 우리가 타락해서 죄 가운데 속하고, 죄의 소욕대로 살고, 불가항력적으로 죄에 이끌려 가고, 그리고 죄가 우리를 주장하고, 죽기를 두려워하여 죄의 종의 삶을 살고, 이러한 것들 가운데 있는 선택을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의지라는 자유 개념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의지’, 중심에 합하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지, 이것은 이미 타락한 인류에게는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저 태평양에 물감이 한 방울 떨어져도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물감이 섞인 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겉모습으로, 외양으로 선을 행한다고 한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구제한다고 한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요? 이미 나는 나 자신이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단의 자유(arbitrii libertatem)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요구되니, 즉 사람이 올바른 이성으로(recta ratione) 선을 판별하고, 알게 된 것을 선택하며, 선택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6.

     그러므로 사람이 다시금 의지를 발동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려면 먼저 은혜가 선행해야 된다, 거듭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이성, 타고난 이성, 타락한 이성은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신 그 본성의 탁월함, 고귀함, 순전함 그것에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정 마땅히 알아야 될 걸 알지 못하고 진정 해야 될 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런 계획도 잡지 않고 그런 데 마음을 기울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결단의 자유를 이야기하려면 올바른 이성으로 선을 판단하고, 그 판단한 것을, 그 알게 된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한 것을 실행해야 됩니다, 추구해야 됩니다. 그래서 바로 판단하고, 바로 결단하고, 바로 이행해야 됩니다. 그런데 타락한 우리 인류에게는 이런 세 가지 단계가 모두 다 불가능합니다. 바로 알 수도 없고, 바로 택할 수도 없고, 행할 능력도 없습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그래서 선행,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선한 행위로 그리고 그 일로 상급 받는 그 선행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됩니다. 
     철학자들은 ‘욕구’(appetitus)라는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아주 뛰어나고 면류관과 같고 여왕과 같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철학자들은 이성을 그렇게 높게 본다 이 말이에요. 이성이 욕구에 작용하면 선한 의지가 된다[고] 철학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지각이 욕구에 작용하면, 우리가 그저 눈에 보는 대로, 그저 냄새 맡는 대로, 맛보는 대로, 그저 접촉되는 대로만 욕구를 택하면 그것은 정욕이 된다[고] 철학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이론과 같이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는 이미 이성이, 오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 타락한 이성, 오성으로 어떤 욕구에 결합시킨다는 자체가,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성이 욕구와 결합하면 선한 의지가 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불성설입니다. 우리는 이성과 오성이 온전치 않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가 가진 욕구라는 것이 전혀 가치 판단이 없는 그런 욕구가 어디 있습니까? 이미 인간이 가진 욕구는 정욕의 산물이고, 어떠한 타락한 인류의 그런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는, 죄의 현상을 드러내는 그러한 욕구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들의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따르려고 최선을 다하여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복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성령의 자극(spiritus impulsu)이 없으면 그 누구도 그것을 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6.

‘자연적 본능’(instinctus naturalis)과 ‘본성의 성향’(naturae inclinatio)을 좇아 ‘본성의 지각’(naturae sensus)에 따른 ‘욕구’(appetitus)대로 아무 ‘이성’(ratio)의 ‘숙고’(deliberatio) 없이 내리는 ‘결단의 자유’(arbitrii libertas)는 ‘성령의 자극’(spiritus impulsus)과 무관한 것으로서 ‘자유의지의 활동’(liberi arbitrii actio)이 아닙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6, 각주 206.

     영원한 복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되는, 겸손이 낮아져서 성령의 자극을 받고 우리에게 부여되는 성령의 은사를 쫓는 그것이 온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자 하면서도 성령을 멀리한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2.27.]

한편 우리가 효과적으로 원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에(primae Dei gratiae) 돌리는 자들은, 사람의 영혼에는 선을 자발적으로 열망하는 재능이 있으나 사람이 너무나 약하여 견고한 정서를 발휘하지도 또 노력하도록 분발시키지도 못한다는 입장을 넌지시 밝히는 듯하다. 오리게네스와 다른 어떤 고대 저술가들로부터 취한 이 견해가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7.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스콜라주의자들은 자연적인 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라는] 이것은 자연인을 이야기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 모든 사람을 칭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절반은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나 절반은 부족한 것이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원하는 바[와] 행하는 바가 [서로] 조금 분리되지만 그러나 각각에 인간의 공로가 있다[라고] 이렇게 로마서 7장 19절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7장 18절, 그 바로 앞에 있는 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라는] 이것도 로마 가톨릭[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해석하기를,] ‘모든 사람에게 원함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곧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성은 있다, 오성은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들은]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라는] 이것은 ‘그것을 인간이 다 할 수는 없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스콜라 신학자들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의를 이야기하고, 시작은 인간에게 있으나 끝까지는 할 수가 없으니까, 우리가 지난번에 보았듯이, 피터 롬바르드와 같이 합력하는 은총, 역사하는 은총, 이런 개념을 만들어서, 우리가 시작하면 도와주시고 또 시작한 것에 열매를 또한 맺게 하시고 그래서 합력하고 역사하는 은총, 역사하고 합력하는 은총, 이런 개념들을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사실 이미 은혜 받은 우리의 구원받은 백성에 대한 구절이라는 것을 칼빈은 정확히 못 박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원하는 바가 있으나 행하는 바가 없다’[는] 이 말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곤고함이 남아 있다, 그리고 여기서 ‘원하는 바’는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이 있지만 아직까지 여전히 육체와 성령 사이에 다투는 부분이 있다, 신자들이 끝없이 씨름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씨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이 구절을 기초해서 칼빈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거듭난 오성, 거듭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 땅에서 여전히 부대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이 본문을 봐야 된다는 것이에요. 이 본문을 곡해해서 ‘모든 자연인에게 원함은 남아 있다. 그래서 오성은 남아 있다. 그러나 행함이 없다. 그중에 다는 못 행한다,’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그 무엇도 나로부터 나온 것이 없다’ 이 말이에요. ‘내 속에 거하는 것은 죄밖에 없다,’ 로마서 7장 20절. 이 구절이 당연히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로마서 7장 22-23절에 ‘내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이것은 분명히 거듭난 사람을 이야기하잖아요. 거듭난 사람에게 선한 마음이 부여되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오성, 선한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는, [즉 거듭난 사람은] 선함을 원하고 그리고 내 속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은혜 가운데 살고자 하지만,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가 죄의 종은 아니지만, 이제는 죄의 멍에 아래 놓여 있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은혜가 앞서지 않는다면, 성령의 역사가 앞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선한 의지도 스스로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 빌립보서 2장 13절을 칼빈은 인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준비’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praeparatio’, ‘준비’라는 말은 우리 신학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준비가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지, 내가 준비해서 주어지는 은혜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시편 51편 10절,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창조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일정한 마음을, 하나님 편으로 뜻을 정하는 마음, 의지, 이것을 하나님이 창조해 주시고.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말이 우리 가운데 더욱 힘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있어서 당신보다 앞서 행하신다(Praevenit). 이제 당신이 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의 진노보다 앞서 행하라(praeveni). 어떻게? 당신이 소유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왔다(a Deo)고, 당신이 지닌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왔다(ab ipso)고,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악한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 자신으로부터(a te)라고 고백함으로써. … 죄 외에 우리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Nostrum nihil nisi peccat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7.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이 지닌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왔다고,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악한 것은 무엇이든 당신 자신으로부터 왔다고 고백하라. 죄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없다’라고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결단의 자유, 선택의 자유는 오성의 영역보다 의지의 영역에 속합니다. 
     둘째,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욕구는 올바른 이성으로 선을 판별하고, 알게 된 것을 선택하고, 선택된 것을 추구하는 자유의지와 배치됩니다. 그래서 판단도, 선택도, 추구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본성으로는. 
     세 번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복을 즐거워하고 원하지만, 성령의 자극이 없으면, 그 누구도 그것을 실행하고자 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욕구는 의지를 죄의 멍에 아래에 얽매이게 합니다. 그래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의지, 노예의지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이 노예 상태를 해방시키려면 은혜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적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그때만 우리의 의지가 회복되고, 또 그 전 단계[인] 오성도 회복되는, 그래서 영혼의 기능이 회복되는 이것이 칼빈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준비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은혜만이 우리가 자유의지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51강 결론


  1. 결단의 자유, 즉 선택의 자유는 오성의 영역보다 의지의 영역에 속합니다.
  2.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욕구는 올바른 이성으로 선을 판별하고, 알게 된 것을 선택하며, 선택된 것을 추구하는 자유의지와 배치됩니다.
  3.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복을 즐거워하고 원하지만, 성령의 자극이 없으면 그 누구도 그것을 행하고자 갈망하지 않습니다.
  4.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욕구는 의지를 죄의 멍에 아래에 얽매이게 하므로, 은혜가 앞서지 않으면 노예의 의지만 있을 뿐 자유의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며, 우리에게는 무엇을 올바르게 뜻할 준비조차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