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강 [2.2.18-25] 오성과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규범을 아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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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2.2.18-25. (2권 79-93페이지)



오성과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규범을 아는 지식




[『기독교 강요』. 2.2.18.]

하나님을 아는 것(Deum nosse), 우리의 구원이 자리하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 호의를(paternum ergo nos eius favorem) 아는 것, 하나님의 법의 규범(legis regulam)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서를 형성하는 방법을(formandae secundum legis regulam vitae rationem) 아는 것, … 처음 두 가지에 있어서 특히 두 번째에 관하여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난 천재도 두더지보다 더 눈이 멀어 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8.

이는[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존재, 속성, 법을 아는 지식에 상응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8, 각주 177.

     이제 칼빈은 이곳에서 ‘오성’(悟性, intellectus, understanding)의 역할, 그것을 다루면서 ‘천상의 사안들’(res coelestes『기독교 강요』, 2.2.13)에 대한, 곧 ‘하나님의 나라’(regnum Dei)와 영적인 것에 대한 그러한 오성의 기능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통찰’(perspicientia spiritualis)은, 신령한 것에 대한 오성의 기능은 칼빈은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을 아는 것. 두 번째는 우리의 구원이 자리하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부성적 호의’를 아는 것, 곧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아는 것. 세 번째는 ‘하나님의 법의 규범’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서를 형성하는 방법을 아는 것, 즉 하나님의 규범을 아는 것. 다시 정리해 보면 이제 천상의 일들, 천상의 사안들에 대한 오성의 기능을 논하면서 첫째로는 하나님을 아는 것. 둘째로는 하나님의 호의, 곧 부성적인 사랑 그것을 아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는 하나님의 규범을 아는 것. 이 세 가지 지식을 칼빈은 논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첫 번째 두 가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호의를 아는 것, 이것에 대하여 모든 인류는 가장 뛰어난 천재도 두더지보다 더 눈이 멀어 있다, 이렇게 아주 극한 표현을 씁니다.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지난 시간에 지상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문예나 공예나 정치나 사회나 이런 데 많은 것을 남겨 두셨고 그리고 그것을 누리게 하셨고, 물론 그렇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도 부패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그런 한계는 보았지만, 그나마 지상의 것들에는 여전히 많은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제 천상의 것들, 신령한 것들에 있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나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호의, 아버지로서의 그 부성적 호의를 아는 것에는 두더지보다 더 눈이 멀어 있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오성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호의를 아는 것에 있어서는 사실상 눈이 감겨 있다, 볼 수 없다. 

그들은 밤에 들판을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아서 잠시 번개가 치면 멀리 그리고 넓게 보게 되지만 일순간 그 장면이 사라져 버리고 나면, 그 빛의 도움으로 길을 찾는 것은 차치하고, 단 한 발걸음도 내딛기 전에 다시금 밤의 어두움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들의 책들에 우연히 진리의 물방울이 튀는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많고 얼마나 괴기한 거짓말들이 그것들을 오염시키고 있는가? 요컨대 심지어 그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divinae erga nos benevolentiae)이 확실함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8.

     그래서 하나의 비유를 드는데, 잠시 사람들은 이것을 번뜩번뜩 아는 듯이 말한다 이거예요, 마치 번개가 치듯이. 우리가 마른 땅에 번개가 칠 때 보면 특별히 번쩍하다가, 금방 대낮같이 밝아졌다가 또 시커먼 구름에 싸이고, 큰 비가 오기 전에 그러지 않습니까. 칼빈은 그런 비유를 드는 거예요. 마치 잠시 번개가 치고 그리고 잠시 우리에게 우연하게 무슨 물방울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잠시 지식이 있는 듯하지만 결국 아무런 지식도 없다. 

[『기독교 강요』. 2.2.19.]

     우리는 ‘자신의 통찰’에 너무 의지해서 하나님에 관한 것을 아는 듯이 말할 때가 있지만, 마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파악하고 있듯이 그렇게 교만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호의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히 눈이 멀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고 그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요 1:4-5), 이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빛의 광채’(fulgor divinae lucis)가 반사되어서 어떤 불꽃이나 불씨도 그저 소멸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비춥니다, 조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없다, 이것은 바로 타락으로 인하여 죄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 만한 것, 신성에 대한 의식, 종교의 씨앗, 양심,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적극적인 죄가, 적극적인 불의가 그 유혹에, 그 미혹에 마음이 흔들려서 우리가 그 지식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만 이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고난 그러한 오성으로는 하나님을 알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은 전혀 얻을 수 없다, 혈통으로나 육적으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이 지식에 이를 수 있다(요 1:13),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Spiritus Dei), 그의 영의 ‘조명’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2.20.]

     우리는 거듭나야 됩니다. 누가 거듭납니까? 택함 받은 백성들만 거듭납니다. 그들에게만 거듭난 본성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도 주어집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지식인 거죠. 시편 36편 9절에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주의 빛 안에서 … 빛을 보리이다.” 내 빛으로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이 비추어야 주님의 빛을 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3절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 되지 아니하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 3:27). 사람은 그저 눈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래서 우리 눈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조차도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 그 빛이 들어온다. 빛이 들어오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요, 빛을 받아들이는 그 도구도 하나님이 마련해 주시는 것이요, 그래서 성령의 ‘특별한 조명’(illuminatio specialis)이 있어야 된다. 신명기 29장 3-4절에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셔야 된다, 우리에게.’ 요한복음 6장 44절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자가 없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gloriae eius splendor), 모든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야 된다는 것이죠. 

우리의 내적 선생(interior magister)이신 성령이 그 길을 우리 영혼에 여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선포는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다. … 확실히 그 방식은 성령이 놀랍고 독특한 능력으로(Spiritus mira et singulari virtute) 듣는 귀와 이해하는 마음을 형성하시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Spiritus sanctus sua illuminatione)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열리지 않는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0.

     성령이 우리에게 영혼의 길을 열어 주셔야 우리 영혼이 온전히 작용해서 하나님을 알기도 하고 아는 대로 행하기도 하는, 그런 오성과 의지의 온전한 기능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놀랍고 독특한 능력으로 듣는 귀와 이해하는 마음을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는 ‘성령의 조명’이 없고야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분별하기’ 때문에(고전 2:14)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어떠하심,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칼빈이 여기서 사용하는 하나님의 부성적 호의,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내 영혼을 ‘조명해야’ 우리의 오성이 깨달음이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미련합니다(고전 1:20). 하나님께 가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지혜 그것을, 하나님이 그 미련한 것을 신령한 것으로 바꾸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2.21.]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라라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 17-18절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성령이 임하여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셔야 된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를 구하노라.’ 시편 119편 18절에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율법의 비밀들을 보게 해 달라.’ 그리고 ‘빛들의 아버지’다, 야고보서 1장 17절. 이런 말씀들을 칼빈은 쭉 인용합니다. 왜 지금 오성을 다루면서 이것을 이야기할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부성적 호의를 아는 지식은 결코 진리의 영의 역사가 없이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 역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무엇이 진리의 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 성령, 그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여야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서 영으로 영을 분별하는 그 자리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2.22.]

이제 세 번째 부분으로,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규율하는 규범을(vitae probe instituendae regula) 아는 것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것을 “행위의 의에 대한 지식”(operum iustitiae notitiam)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다. … 자연법의 목적은(Finis … legis naturalis) 사람들이 핑계하지 못하도록(inexcusabilis) 하는 데 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2.

여기에서 보듯이, 칼빈은 자연법(lex naturalis)의 신학적 작용을 ‘무지를 핑계치 못함’(inexcusabilitas)에 한정시킵니다. 이는 일반계시를 부정하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만 자연 신학을 거부하는 칼빈의 입장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2, 각주 189.

     처음에 두 가지, (바로 천상의 것들에 관한 지식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부성적 호의를 아는 지식, 이 두 가지에 있어서는 두더지보다 더 눈이 멀어 있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했고, 세 번째 지식, 하나님의 질서 규범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조금 여지를 남겨 놓습니다. 하나님의 규범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어느 부분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양심’(conscientia)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율법이 없어도 우리의 마음에 양심을 주셔서 그 양심이 우리에게 율법이 된다, 각자에게 법이 된다, 로마서 2장 14-15절. 그리고 하나님은 ‘자연법’(lex naturalis)이라는 것을 주셔서 삶의 규범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맞닿는 그러한 질서, 그런 것을 우리가 알게 하신다, 양심을 주시고 자연법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무지를 핑계할 수 없다. 자연법이라는 것이 뭡니까? 근본법,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새겨 주신 그러한 하나님의 고유한 법, 하나님이 알려 주신 하나님의 법,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그 일반법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에 있어서 서로 본질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본질에 있어서. 
     그래서 우리는 십계명에서 ‘부모에게 공경하라’, 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다 세상에서도 똑같은 형법 규정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을 칼빈이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성은 그러나 역시 하나님의 질서를 안다고 하나, 하나님의 법을 안다고 하나,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나마 5-10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과 이 세상의 자연법적 계명이 통하기 때문에 알지만, 예배를 규정하는 제1-4계명은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눈멀어 있다, 그렇게 칼빈은 바라봅니다. 

[『기독교 강요』. 2.2.23.]

테미스티우스(Themistius, 317-390경)는 비기독교인으로서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사상을 섭렵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정통했던 철학자이자 수사학자였으며 또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23, 각주 191.

     오성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지식을 주지만, 칼빈은, 우리가 큰 것은 아는 듯하지만 구체적인 실행의 지식으로 가면 다시 죄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이걸 테미스티우스(Themistius)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전체로 보면 맞는 것 같으나 부분적으로 들어가 보면 인간은 여전히 그 지식이 온전치 못하고, 어떤 오성으로 규범을 이야기한다고 하나 오히려 더 가까이 볼수록 더 나쁜 것을 생각하는, 이러한 것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들을 보고 인정하지만 막상 행위할 때는 더 나쁜 것을 따르는, 이러한 것이 우리 인류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2.2.24.]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의 완전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면 상급이 임한다는 것도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무슨 인과응보니 그러한 말들을 씁니다. 그렇지만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인 첫째 돌판, 제1-4계명(출 20:3-11)의 그 가르침에는 결코 모든 사람이 가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눈멀어 있습니다, 두더지와 같습니다. 신성에 대한 의식, 종교의 씨앗, 양심을 주셨지만 그것으로 예배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여기에서 조금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은 십계명, 그중에서도 5-10계명(출 20:12-17), 이웃 사랑의 계명, 우리가 이것을 자연법적 계명이라고도 하거든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남겨 준 오성이 조금 기능할 그러한 곳이 남아 있다라고 이렇게 칼빈은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어떠함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규범을 아는 지식은 전부 우리에게 온전치 않습니다. 그나마 5-10계명에 속한 이웃 사랑의 계명에 서로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서로 무한 탐심으로 살지 않는 이런 것 정도는 공통된 영역을 남겨 두셨다, 이 정도로만 칼빈은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우리에게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우리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선함과 의로움과 거룩함과 본래의 ‘지정의’(知情意) 이런 것을 다 상실해 버렸습니다, 온전함을 상실했습니다. 겨우 남은 것이 질서에 대한 공통적인 것, 그런 자연법의 인식 이 정도는 남아 있지만 그것으로는 온전히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 강요』. 2.2.25.]

     그래서 시편에서는 ‘새로운 깨달음’(intellectum novum)을 달라(시 119:34), 정직한 영을 달라, 하나님을 알려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합니다(시 119:12, 18, 19, 26, 33, 64, 68, 73, 124, 125, 135, 169). 사도 바울도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워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합니다(골 1:9-10; 참조. 빌 1:9). 아우구스티누스도 태양의 빛이 눈에 필요한 것 못지않게 조명의 은혜가 마음에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태양의 빛이 눈에 필요한 것 못지않게 빛이 있어야 되지만 조명해 주셔야 된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해달라고 우리 시편 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119:10).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천상의 사안들은 하나님 나라와 영적 통찰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부성적 호의를 아는 것, 하나님의 규범에 따른 삶의 질서를 아는 것, 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둘째, 타락한 인류는 지혜와 계시와 진리의 성령으로 새로운 마음 가운데 거듭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조명받지 않으면 처음 두 부분에 있어서, 곧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부성적 호의를 아는 것에 있어서 완전히 눈이 멀고 무지한 상태에 있습니다. 
     셋째, 세 번째 부분에 있어서는 곧 하나님의 질서를 아는 부분에 있어서는 양심과 자연법을 통하여 삶의 규범을 우리 안에 새겨 주신 영역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무지를 핑계하지 못합니다.
     넷째, 그나마 우리에게 새겨 주신 그 질서도 첫째 돌판에, 1-4계명에 해당하는 하나님 사랑의 계명, 경건의 계명에는 미치지 못하고 5-10계명, 이웃 사랑의 계명에는 우리가 자연법적으로 서로 본질에 있어서 서로 통하는 그 정도 영역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타락한 인류는 본성상 악하고 무지하며 연약하므로 성령의 조명으로 정직한 영이 새롭게 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그들의 오성이 결코 천상적인 사안들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비참함의 상황, 한계상황 그러나 남아 있는 일반은총, 여기에 함수 이것이 바로 칼빈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50강 결론


  1. 천상의 사안들 즉 하나님 나라와 영적 통찰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부성적 호의를 아는 것, 하나님의 규범에 따른 삶의 질서를 아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2. 타락한 인류는 지혜와 계시와 진리의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조명받지 않으면 처음 두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이 멀고 무지합니다.
  3. 그러나 세 번째 부분에 있어서는 양심과 자연법을 통한 올바른 삶의 규범이 모든 사람에게 새겨지므로 그 누구도 무지를 핑계치 못합니다.
  4. 타락한 인류는 첫 번째 돌판의 계명들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으나, 두 번째 돌판의 계명들에 대해서는 다소 이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5. 타락한 인류는 본성상 악하고 무지하며 연약하여 성령의 조명으로 정직한 영이 새롭게 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그들의 오성이 천상의 사안들을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