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강 [2.2.12-17] 오성과 일반은총

관리자
조회수 255





49 | 2.2.12-17. (2권 69-79페이지)



오성과 일반은총




[『기독교 강요』. 2.2.12.]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우리에게 있는 ‘자연적 은사는 부패하였고, 초자연적인 은사는 제거되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적인 은사는 일반은총의 영역을 뜻하는 것이고 초자연적인 은사는 특별은총의 영역을 뜻하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의 영역, 곧 사람들이 이 땅에서 서로 더불어 살아가고, 무한히 싸우고 무한히 죽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 억제하는 정도로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그 정도의 것은 남겨 두셨다. 그런 자연적인 은총을 남겨 두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은총, 남아 있는 은총조차도 온전한 것은 아니다. ‘부패’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고, 초자연적인 은사는 바로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인 그러한 복, 이런 것에 대해서는 다 ‘제거’되었다. 아무것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운을 떼면서 이제 오성과 의지를 좀 더 강론적으로 이곳에서 칼빈은 살피고 있습니다. ‘오성’과 ‘의지’가 다 타락했습니다. 아는 것도 뜻하는 것도, 오성은 깨닫는 지식, 의지는 그 지식대로 행하는 그러한 영혼의 기능이라고 볼 때,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고 오성이 온전치 못하면 의지가 온전할 수 없죠. 그래서 지식조차도 새롭게 되어야 하고 의지조차도 거듭나야 되는데, 이 오성과 의지를 그냥 타락한 상태 그대로 둔다면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것을 할 수 없다. 이것이 ‘자유의지 상실’의 문제인 거죠.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할 의지’인데,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중심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 무슨 일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먼저 ‘중생’의 은혜를 누려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도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라고 이렇게 칼빈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그러한 의지, 또 오성이 남아 있습니다. 교회에 안 다니고 믿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깨달음도 없고, 아무 의지도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일반은총적인 그러한 영역에서 오성도 의지도 남겨 두셨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기독교 강요』 1권 3장에서 5장 사이에 이런 부분들을 잘 읽어 보시면 되겠죠. 

사람이 선과 악을 식별하여 이해하고 판단하게 하는 이성은 자연적 은사에 속하기 때문에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지만,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부분적으로 부패하여 그 흉한 폐허만 드러낸다. 이런 뜻에서 요한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라고 전한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첫째, 사람의 타락하고 변질된 본성 가운데는 섬광들(scintillas)이 여전히 번쩍이고 있다. 그것들은 그가 지성을 부여받았기에 야수들과는 구별되는 이성적인 동물임을 보여 준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빛은 아주 짙은 밀도의 무지에 질식되어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지도 사람의 본성과 분리할 수 없으므로 파멸되지는 않았으나 사악한 욕심의 사슬에 묶여 어떤 올바른 것도 추구할 수 없게 되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2.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남겨 두신 것을 우리가 ‘자연적 은사’라고 해 볼까요? ‘타락한 본성 가운데 있는 은사’, 구원의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 누구에게나 남겨 두신 그 은사, 이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하죠.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그렇지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래도 당장 소멸하지 않고 이 지상에서 살아가게 하고, 더불어 서로 사회를 이루고 정치를 하면서 이렇게, 또 도덕, 윤리를 서로 세우고 이렇게 살아가게 하지 않습니까? 이 타락한 본성에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그러한 오성과 이성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섬광들은 빛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자체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미 이 지상에서 우리는 그 섬광조차도 꺼뜨리는 삶을 산다. 칼빈이 즐겨 쓰는 표현, ‘질식시키고 산다.’ 그래서 오성도 의지도 다 그 자체로는 하나님께 이를 수는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까지 나아갈 수는 없고, 그저 이 지상의 삶 가운데 우리 인류가 서로 억제하면서 살아가는 정도, 그 일반은총의 영역에 있을 뿐이다. 
   이제 여기에서 칼빈은 사람의 ‘오성’에 대해서 먼저 다룹니다. 오성에 대해서 다루고, 그리고 후반부에 가서 2장 마지막 두 절 정도에서 ‘의지’에 대해서 그렇게 논합니다. 그래서 오성과 의지에 대해서 이곳에서 논하고 있는데요. 
   먼저 사람의 ‘오성’에 대해서, 사람에게는 오성, 진리를 깨달음, 엄격하게 말하면 이성과 오성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좀 더 요소적인 그러한 표현이라면, 영혼의 지식 요소, 어떤, 우리가 뭐라 그럴까요? ‘메커니즘’(mechanism)이라고 할까요? 그런 우리 영혼의 기능 가운데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영혼의 어떤 그러한 ‘구조’라고나 할까요? ‘능력’이라고나 할까요? 그게 이성이라면, ‘오성’은 그러한 이성이 작용해서 우리에게 기능을 할 때, 영혼에, 그래서 영어로 오성은 주로 ‘understanding’, ‘이해’로 우리가 많이 번역됩니다. 라틴어로는 ‘intellectus’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이성은 라틴어로 ‘ratio’, 그리고 영어로는 ‘reason’, 이거는 좀 더 ‘법칙’, 이거는 ‘규칙’, 이게 이성이라면, 오성은 그것이 작용해서, 이성이 작용해서 우리가 깨닫는 거, 이해하는 거, 그게 오성이거든요. 그러니까 타락한 인류에게도 어느 부분 이러한 오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생활도 하고, 또 학문도 하고, 그 깨달음 대단하죠. 대단합니다. 그렇지만은 그 깨달음은 궁극적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가닿을 수 없죠. 그래서 칼빈은 여기에서 솔로몬을 인용합니다. 전도서를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아무리 지혜롭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어리석고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전 1:2, 14; 2:11 등)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강요』. 2.2.13.]

   ‘오성’, ‘깨달음’, 이것에 대해서 칼빈은 다시 두 방면으로 생각을 해 봅니다. 첫째로는 ‘지상의 것들’에 대한 깨달음, 두 번째는 ‘천상의 것들’에 대한 깨달음. 그래서 먼저 지상의 사안들, 지상의 사안들에 대해서 우리 오성은 어떤 기능을 할까? 지상의 것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그러한 오성은 좀 더 많은 기능을 하겠죠. 무엇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animal sociale)이고, 그래서 그 오성에 따라서 사회생활도 하고, 그리고 ‘정치 질서’(ordo politici)에 따라서 서로 간에 더불어 살고, 또 어떤 공동체, 사회의 선을 추구하기도 하고, 그러한 오성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2.14.]

   그리고 문예 활동과 공예 활동도 한다.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성이 남아 있어서 어떤 보편적인 이해력이 있기 때문에, ‘야, 저 그림 잘 그렸다.’ ‘저 조각 아름답다.’ ‘저 음악 우리에게 감미롭다.’ 이러한 문예 활동, 또 공예 활동, 곧 예술 활동, 이러한 것들도 다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의 영역이죠. 분명히 일반은총도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문예 활동, 공예 활동, 예술 활동, 또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정치, 사회, 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일반계시물’이라고 해서 함께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강요』 1권 1장 3절에서 5절,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 부분을 다시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이러한 선함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지상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일반은총의 영역이죠. 이 지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나마 이렇게 하나님이 남겨 두신 것으로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보편적인 통찰력’(perspicacia communis)도 있고 그것이 오성이거든요. 

[『기독교 강요』. 2.2.15.]

   그리고 빛나는, ‘경탄할 만한 진리의 빛’(admirabilis veritatis lux)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에는 가닿지 못합니다. 그것이 사실 빛이 굴절되고 파탄된 것입니다. 생명의 빛은 되지 못하죠.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하고 그 진리를 누려야 하는데, 분명히 ‘성령의 일반은총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누리는 것, 성령은 ‘우주적 역사’가 있죠. 꽃이 피고, 해가, 달이 운행하고, 이것도 성령의 역사이고, 저는 이것을 ‘성령의 우주적 역사’다. 그러면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는 것, 이것은 ‘성령의 일반은총적 역사’라고 저는 부릅니다. 우리가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성령의 일반은총의 역사, 일반은총적 역사는 많은 곳에 보편적으로 미칩니다. 그래서 철학이 있고 법학이 있고 문예 활동이 있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심지어 이것을 ‘신들의 발명품’(inventa deorum)이라고도 부르고, 

[『기독교 강요』. 2.2.16.]

사람의 삶에 있어서 일어나는 모든 사안들에 대한 가장 뛰어난 지식이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per spiritum Dei communicari nobis)고 일컫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6.

   그래서 하나님의 일반은총적 역사, 성령의 일반은총적 역사, 이것이 ‘인류의 공동선’(publicum generis humani bonum)을 누리게 하고, 브살렐과 오홀리압같이 그러한 재주도 지니게 하고(출 31:2-11; 35:30-35), 사람 안에 있는 모든 뛰어난 것들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실 뿐만 아니라,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성령의 우주적 역사, 그것만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모든 사람을 성령이 채워 주셔서, 이것은 거듭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일반은총적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모든 사람이 누리는 것이 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것도 ‘은총’입니다. 지상의 것들에 있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 이것은 우리가 사실상 목도하고 있습니다.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값없는 선물들(gratuitadona)이 타락 이후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이 자연적 선물들이 부패했다고 가장 참된 가르침을 준다. …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이러한 선물들은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이상 스스로 더러워질 수 없었으나, 오염된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더 이상 순수하지 않아 그것들로부터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2.16.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값없는 선물들이 타락 이후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자연적 선물들도 부패했다.’ 분명히 누림에도 불구하고, 가장 멋있는 예술 활동, 문예 활동, 창작 활동, 이런 것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가진 일반은총적 지식은, 곧 일반계시는 남아는 있으나 부패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칼빈이 인용했듯이, ‘자연적 은사는 부패했다. 초자연적 은사는 제거되었다.’ 그래서 자연적 은사, 지금 이곳에서 말하는 지상의 일들에 있어서 오성, 깨달음이, 통찰력이 이렇게 넓게 미침에도 불구하고, 혹은 깊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예배치도 않는다.

[『기독교 강요』. 2.2.17.]

   ‘인류 전체’(universum genus humanum)의 본성에는 이성이 고유하게 남아 있습니다.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이성이 작용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오성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일반은총’(generalis Dei gratia)이 영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게 하는 그 특별은총의 역사까지는 결코 나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리하고 판단이 뛰어나고 배움에 있어서 명민(明敏)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라는 것, 그것에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들은 더 똑똑해질수록 자기가 그저 똑똑한 줄을 안다는 것이죠. 

   이제 이곳에 대한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특별히 이곳에서는 칼빈이 ‘오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오성, 특별히 지상적 산물에 대한 오성의 기능에 대해서 말하는데요. 
   첫째, 타락한 인류에게 자연적 은사의 섬광은 남아 있으나, 부패하여 무지(無知)에 질식되었고, 초자연적인 은사는 제거되어, 그리스도의 중생의 은혜가 없으면 회복이 불능합니다. 자연적 은사, 일반은총적 은사, ‘은사’는 ‘선물’이라고 우리가 여기면 됩니다. 일반은총적 선물은 남아 있으나 부패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예배에 이를 수 없다. 
   두 번째, 사람의 오성은 진리에 대한 통찰로서 지상의 사안들인 사회, 정치, 문예, 공예 이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력을 보입니다. 이것이 다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데 대한 감사는 없다는 것이죠. 
   세 번째, 인류의 공동선과 사람에게 부여된 가장 뛰어난 지식은 ‘성령의 역사’로 부여되고 작용합니다. ‘성령의 일반은총적 역사’라고 칭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네 번째, 그러나 지상의 사안들에 대해서도 사람에게 빛나는 경탄할 만한 진리의 빛이 남아는 있지만 파탄되어 있습니다. 온전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적 산물들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신 그러한 ‘신성에 대한 의식’, ‘종교의 씨앗’, ‘양심’,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새겨 주셨어도, 사람은 그것에 대한 오성의 깨달음으로는 하나님께 궁극적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지상의 것들에는 현저하게 남아서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칼빈이 바라보는 입장인 것입니다. 




49강 결론


  1. 타락한 인류에게 자연적 은사의 섬광은 남아 있으나 부패하여 무지에 질식되었고, 초자연적인 은사는 제거되어 그리스도의 중생의 은혜가 없으면 회복이 불능합니다.
  2. 사람의 오성은 진리에 대한 통찰로서 지상의 사안들인 사회, 정치, 문예, 공예 등에 보편적인 이해력을 보입니다.
  3. 인류의 공동선과 사람에게 부여된 가장 뛰어난 지식은 성령의 역사로 부여되고 작용합니다.
  4. 그러나 지상의 사안들에 대해서도 사람에게 빛나는 경탄할 만한 진리의 빛이 파탄되어 그 자연적 선물들이 부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