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시고 ‘자녀’ 삼고자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자녀 됨’,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러한 자리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언약의 대표의 원리’에 따라서 아담의 죄가 ‘전가’(imputatio)되어서, 이제 모든 사람이 ‘죄의 책임’(죄책, reatus), 곧 ‘사망의 형벌(poena)’ 가운데 태어나고, 또 죄로 인한 ‘오염’(corruptio), 그리하여 ‘전적(全的) 무능’, ‘전적 부패’한 상태로 잉태되고 태어나고 살게 되었습니다.
원죄는 우리 본성이 지닌 물려받은 사악함과 오염으로서(peccatum originale haereditaria naturae nostrae pravitas et corruptio) 영혼의 모든 부분 속에 펴져 있는데, 먼저는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우리로 그 책임 아래 놓이게 하고 그 다음으로는 성경이 “육체의 일”(갈 5:19)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또한 우리 안에서 산출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8.
‘원죄’는 ‘전가된 죄’, ‘타고난 죄’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원죄는 주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 본성이 지닌 물려받은 사악함과 오염이 바로 원죄다. 그리고 이 원죄는 모든 영혼에 퍼져 있고. 그런데 우리가 이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영혼과 육체가 한 몸을 이루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모두 원죄 가운데 오염되었다면, 육체 또한 그 원죄로부터 벗어나는 곳이 아무것도 없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 오염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자주 타락한 인류의 행위를 ‘육체의 일’이다, 갈라디아 5장 19절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음행하고, 우상숭배하고, 도둑질하고, 미움과 살인과 술 취함, 이런 것을 ‘죄의 열매’라고 하는데, 이것은 원죄를 지닌 타락한 인류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들이다라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분명하게 새겨야 됩니다. 우리 ‘본성’이, 모든 부분이 ‘무능’해지고 ‘연약’해지고 ‘부패’해져서, 그 큰 ‘오염’ 때문에 어떤 행위로도, 어떤 모습으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어떠함은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정죄’받은 상태, ‘저주’의 상태 그것이 바로 인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정죄’라는 것은 형벌을 받음이요, ‘저주’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는 그 모습이 인류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책임’이, 죄로 인한 아담에게 부과되는 ‘형벌’이 모든 인류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형벌로 ‘사망’에 속하게 되었고, 또한 아담이 타락하여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그 오염의 상태, 이것도 전염병(lues)과 같이 우리 모든 인류에게 번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낯선 것(alienum)’이로되. 이 말은 뭔가 하면, 하나님이 본래 인간에게 죄성을 주신 것은 아니죠. 죄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이죠. 하나님이 죄를 있게 하신 분이 아니라 이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낯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타락한 인류에게는 그 죄가 ‘고유한 것’(proprium)이 되었죠. 누구나 원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잉태하고 태어나기 때문에, 잉태 때부터 원죄에 속하기 때문에, 그 죄가 ‘모든 인류의 죄’가 되어 버린 것이죠. 로마서 5장 12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람이 모두 사망 가운데 속하게 되었다.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바로 뭐라고 했죠? ‘한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아들도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저주’ 상태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자기 고집, 아집, 자기애, 이런 것들이 유아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다 원죄, 그리고 원죄에 따른 그 부패와 무능 가운데서 저질러지는 자기의 죄, 이런 죄로 말미암마 모든 사람들이 다 멸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인류[에게]는 ‘불법의 씨’(peccati semen)가 있습니다. 원죄가 그것입니다. 불법의 씨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모태에서부터 이제 사람의 인생은 그 불법의 씨를 키워서 ‘불법의 열매’를 맺는, ‘육체의 일’을 하는, ‘현저한 범죄’를 저지르는, 그러한 것이 바로 인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고, 우리는 원죄로도 죽고, 또 날마다 죄를 짓고, 물 먹듯이 짓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 인류의 모습이고, 그 죄는 무엇 하나도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성’, 그리고 우리의 ‘비참한 상태’, 이것은 단지 그 한 번의 어떤 모습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용솟음치듯이, 마치 화로의 불씨가, 그 티가 튀듯이, 끊임없이 화염이 일듯이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에 속한 것들이 끝없이 산출이 되고, 적극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알고 짓고, 모르고 짓고, 모든 죄를 짓습니다. 선이 결핍되어 있어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악과 선이 섞여 있어서 균형을 이루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악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선은 모양도 없고, 모양이 있다고 하나 ‘능력은 없고’, 오직 죄만이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을, 그래서 영혼에서 육체, 모든 것이 죄의 욕심으로 가득한, 전부가 죄의 욕심 가운데 있는, 그것이 인류의 모습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9.]
아담이 타락으로 하나님이 주신,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의 ‘고유함’, ‘고귀함’, 그러한 ‘탁월함’, 그러한 ‘순전함’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불경건’만 남았고 ‘저급한 욕구’만 남아 있습니다. ‘로마서 3장’은 전체적으로 이러한 원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 원죄로부터 이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헤엄치면 헤엄칠수록 더 심연에 빠져들고, 더 자기 심중의 것을 찾아보고자 하면 더 악취나는 더러운 것밖에 찾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에 보면, 그리하여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하고’, 로마서 12장 2절에 보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되고,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기려면, ‘불의’로부터 ‘의’로, ‘사악함’으로부터 ‘선함’으로 옮기려면 ‘새 본성’(natura nova)을 입어야 된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성한 곳이 없기 때문에, 새 본성을 입지 않고서야 중심이 썩어 있기 때문에, 중심이 무능하고, 중심이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곧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새 본성을 입어야 된다.
나는 아담이 의의 원천을 내버린 이후로 영혼의 모든 부분이 죄에 사로잡혔다고(cunctas animae partes a peccato fuisse possessas, ex quo a fonte iustitiae descivit Adam) 말하였다.
… 여기에서 내가 간단히 제시하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totum hominem quasi diluvio a capite ad pedes sic fuisse obrutum, ut nulla pars a peccato sit immunis; ac proinde quidquid ab eo procedit in peccatum imputari. 참조. 『기독교 강요』, 1.15.4.)이다. 바울이 말하듯이, 육체의 모든 정서 혹은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롬 8:7) 사망이다(롬 8:6).
참조. 『기독교 강요』, 2.1.9. 각주 68.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9.
칼빈은 이곳에서 전적 타락한 우리 인생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1.10.]
우리의 파멸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육체의 죄과로부터 나온다. 그런 만큼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가 우리의 처음의 조건에서부터 변질되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파멸한 것이다(A carnis ergo nostrae culpa, non a Deo nostra perditio est; quando non alia ratione periimus, nisi quia degeneravimus a prima nostra conditione).
… 따라서 우리의 멸망은 본성의 타락에 돌려진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하면 우리는 본성의 조성자이신 하나님 자신을 정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참으로 이 치명적인 상처가 본성에 부착되어 있다. … 진정 그 상처가 죄를 통하여 가해졌다는 것은 다툼의 여지가 없다. … 사람은 자기의 멸망을 오직 자기 자신에게 돌려야 함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지만 자기 자신의 광기로 공허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참조. 『기독교 강요』, 2.1.10. 각주 7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0.
우리의 파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순전’(純全)하게 지었습니다.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의롭고, 선하게, 거룩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꾀’를 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자구’(藉口)하고, ‘불충’하고, ‘배은망덕’하고, 그리하여 우리 인생으로부터 죄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망은 하나님이 지은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본성의 타락’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본성에는 어떤 부정적인 것도 없습니다. 순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타락을 자초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9절에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사망, 죽음, 그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로 오염되어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어떤 능력도 없고, 또 전적으로 부패하여서 생명에 속한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영생을 도무지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모든 인류가 속한 이 인간의 상황, ‘죄의 현상’, 그런 인간의 조건,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우리 인류를 지으셔서 ‘지정의’를 주시고 ‘지식’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더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는 자리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기독교 강요』. 2.1.11.]
사람이 부패한 것은 본성적 사악함에 기인하나 그 사악함은 본성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았다고(naturali hominem vitiositate corruptum, sed quae a natura non fluxerit. 참조. 『기독교 강요』, 1.14.3, 16.) 우리는 말한다. 그 사악함은 태초부터 심겨진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사람에게 일어난 우발적 성질이라는 것을(adventitiam magis esse qualitatem quae homini acciderit, quam substantialem proprietatem quae ab initio indita fuerit) 지적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이 본성으로부터 흘러나왔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본성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 그것은 선천적 법으로써(haereditario iure) 모든 사람을 단단히 붙들어 매기 때문이다.
… 진정 하나님이 적의를 가지신 것은 자기의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작품의 부패였다(operis sui corruptioni magis infensus est quam operi su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1.
사람이 부패한 것은 ‘사악함’에 기인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지은 우리 인간의 처음 본성으로부터 죄가 나온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사악함은 태초부터 심겨진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사람에게 일어난 우발적 성질이다.” 이렇게 칼빈이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발적’이라는 것은 곧 ‘타락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지은 본성으로부터 타락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꾀’를 내고, 우리 인간이 ‘교만’하고, 우리 인간이 ‘불충’해서, 우리 인간이 ‘타락의 사건’을 일으킨 이걸 ’우발적‘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ccidentally’, 라틴어로 말하면 ‘accidentaliter’, ‘사건’에 따라서, 곧 ‘타락 사건’에 따라서 죄가 들어왔다 그것입니다. 곧 죄의 본질은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라고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우리 인생의 그 하나님의 형상을 결코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의 ‘사악함’입니다. 그 사악함은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적의를 가지신 것은, 곧 싫어하시는 것은 자기의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작품의 부패’였다.” 이렇게 칼빈이 말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온전하게 ‘자기 자녀’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타락’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원죄’로 모든 사람은 자기 죄를 지어 ‘사망’에 속하고, ‘타락한 본성’의 ‘사악함’과 ‘오염’으로 인해 ‘저주’와 ‘정죄’를 받는 ‘진노’의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원죄로 말미암아 ‘죄의 책임’인 ‘사망의 형벌’과 ‘오염’의 상태, ‘전적 무능’, ‘전적 부패’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죠.
두 번째, 모든 인류는 ‘불법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이 끊임없이 새로운 ‘악한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인류는 불법의 씨가 있다. 그 씨가 발화하고 그 씨가 무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건 다 ‘죄의 열매’요.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방탕과 쭉, 시기와 미움과 쭉’ 있지 않습니까? 이제 모든 인류에게 그러한 ‘불법의 씨’로부터 나온 ‘불법의 열매들’이 무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거듭나면 끝내 거룩을 이루고 영화롭게 되듯이, 성령의 역사가 없이 인류가 타락한 상태로 그저 놓여지게 되면, 인류는 끊임없는 불법이 무성하게 된다는 것,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죠.
세 번째, 영혼과 육체의 사람 전체가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죄에 압도되어 죄를 면한 곳이 하나도 없으며,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모두 죄에 돌려야 된다. 바로 ‘전적 타락’의 그러한 교리인 것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마치 홍수에 물이 밀려오듯이 압도되어 죄로부터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가식을 해도 ‘중심’이 이미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은 그 무엇 하나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없다. 하나님은 ‘중심’을 헤아리시니까,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네 번째, 죄는 태초부터 심겨진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약하게 짓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성을 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의 인류를 지으실 때,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는 ‘순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본성의 타락’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 타락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그 타락은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이 처음 지어서 자녀 삼고자 언약을 맺으셨던, 영생을 주시고자 하셨던 그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은 자기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의 부패를 미워하신다. 그것에 대하여 적의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강한 표현을 쓴 것입니다.
46강 결론
원죄로 모든 사람은 자기 죄를 지어 사망에 속하고 타락한 본성의 사악함과 오염으로 인해 저주와 정죄를 받는 진노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불법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이 끊임없이 새로운 악한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과 육체의 사람 전체가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죄에 압도되어 죄를 면한 곳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모두 죄에 돌려야 합니다.
46강 | 2.1.8-11. (2권 39-45페이지)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사악함에서 비롯된
전적 타락
[『기독교 강요』. 2.1.8.]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시고 ‘자녀’ 삼고자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자녀 됨’,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러한 자리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언약의 대표의 원리’에 따라서 아담의 죄가 ‘전가’(imputatio)되어서, 이제 모든 사람이 ‘죄의 책임’(죄책, reatus), 곧 ‘사망의 형벌(poena)’ 가운데 태어나고, 또 죄로 인한 ‘오염’(corruptio), 그리하여 ‘전적(全的) 무능’, ‘전적 부패’한 상태로 잉태되고 태어나고 살게 되었습니다.
원죄는 우리 본성이 지닌 물려받은 사악함과 오염으로서(peccatum originale haereditaria naturae nostrae pravitas et corruptio) 영혼의 모든 부분 속에 펴져 있는데, 먼저는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우리로 그 책임 아래 놓이게 하고 그 다음으로는 성경이 “육체의 일”(갈 5:19)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또한 우리 안에서 산출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8.
‘원죄’는 ‘전가된 죄’, ‘타고난 죄’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원죄는 주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 본성이 지닌 물려받은 사악함과 오염이 바로 원죄다. 그리고 이 원죄는 모든 영혼에 퍼져 있고. 그런데 우리가 이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영혼과 육체가 한 몸을 이루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모두 원죄 가운데 오염되었다면, 육체 또한 그 원죄로부터 벗어나는 곳이 아무것도 없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 오염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자주 타락한 인류의 행위를 ‘육체의 일’이다, 갈라디아 5장 19절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음행하고, 우상숭배하고, 도둑질하고, 미움과 살인과 술 취함, 이런 것을 ‘죄의 열매’라고 하는데, 이것은 원죄를 지닌 타락한 인류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들이다라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분명하게 새겨야 됩니다. 우리 ‘본성’이, 모든 부분이 ‘무능’해지고 ‘연약’해지고 ‘부패’해져서, 그 큰 ‘오염’ 때문에 어떤 행위로도, 어떤 모습으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어떠함은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정죄’받은 상태, ‘저주’의 상태 그것이 바로 인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정죄’라는 것은 형벌을 받음이요, ‘저주’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는 그 모습이 인류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책임’이, 죄로 인한 아담에게 부과되는 ‘형벌’이 모든 인류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형벌로 ‘사망’에 속하게 되었고, 또한 아담이 타락하여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그 오염의 상태, 이것도 전염병(lues)과 같이 우리 모든 인류에게 번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낯선 것(alienum)’이로되. 이 말은 뭔가 하면, 하나님이 본래 인간에게 죄성을 주신 것은 아니죠. 죄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이죠. 하나님이 죄를 있게 하신 분이 아니라 이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낯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타락한 인류에게는 그 죄가 ‘고유한 것’(proprium)이 되었죠. 누구나 원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잉태하고 태어나기 때문에, 잉태 때부터 원죄에 속하기 때문에, 그 죄가 ‘모든 인류의 죄’가 되어 버린 것이죠. 로마서 5장 12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람이 모두 사망 가운데 속하게 되었다.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바로 뭐라고 했죠? ‘한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아들도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저주’ 상태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자기 고집, 아집, 자기애, 이런 것들이 유아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다 원죄, 그리고 원죄에 따른 그 부패와 무능 가운데서 저질러지는 자기의 죄, 이런 죄로 말미암마 모든 사람들이 다 멸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인류[에게]는 ‘불법의 씨’(peccati semen)가 있습니다. 원죄가 그것입니다. 불법의 씨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모태에서부터 이제 사람의 인생은 그 불법의 씨를 키워서 ‘불법의 열매’를 맺는, ‘육체의 일’을 하는, ‘현저한 범죄’를 저지르는, 그러한 것이 바로 인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고, 우리는 원죄로도 죽고, 또 날마다 죄를 짓고, 물 먹듯이 짓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 인류의 모습이고, 그 죄는 무엇 하나도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성’, 그리고 우리의 ‘비참한 상태’, 이것은 단지 그 한 번의 어떤 모습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용솟음치듯이, 마치 화로의 불씨가, 그 티가 튀듯이, 끊임없이 화염이 일듯이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에 속한 것들이 끝없이 산출이 되고, 적극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알고 짓고, 모르고 짓고, 모든 죄를 짓습니다. 선이 결핍되어 있어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악과 선이 섞여 있어서 균형을 이루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악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선은 모양도 없고, 모양이 있다고 하나 ‘능력은 없고’, 오직 죄만이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을, 그래서 영혼에서 육체, 모든 것이 죄의 욕심으로 가득한, 전부가 죄의 욕심 가운데 있는, 그것이 인류의 모습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9.]
아담이 타락으로 하나님이 주신,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의 ‘고유함’, ‘고귀함’, 그러한 ‘탁월함’, 그러한 ‘순전함’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불경건’만 남았고 ‘저급한 욕구’만 남아 있습니다. ‘로마서 3장’은 전체적으로 이러한 원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 원죄로부터 이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헤엄치면 헤엄칠수록 더 심연에 빠져들고, 더 자기 심중의 것을 찾아보고자 하면 더 악취나는 더러운 것밖에 찾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에 보면, 그리하여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하고’, 로마서 12장 2절에 보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되고,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기려면, ‘불의’로부터 ‘의’로, ‘사악함’으로부터 ‘선함’으로 옮기려면 ‘새 본성’(natura nova)을 입어야 된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성한 곳이 없기 때문에, 새 본성을 입지 않고서야 중심이 썩어 있기 때문에, 중심이 무능하고, 중심이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곧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새 본성을 입어야 된다.
나는 아담이 의의 원천을 내버린 이후로 영혼의 모든 부분이 죄에 사로잡혔다고(cunctas animae partes a peccato fuisse possessas, ex quo a fonte iustitiae descivit Adam) 말하였다.
… 여기에서 내가 간단히 제시하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totum hominem quasi diluvio a capite ad pedes sic fuisse obrutum, ut nulla pars a peccato sit immunis; ac proinde quidquid ab eo procedit in peccatum imputari. 참조. 『기독교 강요』, 1.15.4.)이다. 바울이 말하듯이, 육체의 모든 정서 혹은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롬 8:7) 사망이다(롬 8:6).
참조. 『기독교 강요』, 2.1.9. 각주 68.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9.
칼빈은 이곳에서 전적 타락한 우리 인생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2.1.10.]
우리의 파멸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육체의 죄과로부터 나온다. 그런 만큼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가 우리의 처음의 조건에서부터 변질되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파멸한 것이다(A carnis ergo nostrae culpa, non a Deo nostra perditio est; quando non alia ratione periimus, nisi quia degeneravimus a prima nostra conditione).
… 따라서 우리의 멸망은 본성의 타락에 돌려진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하면 우리는 본성의 조성자이신 하나님 자신을 정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참으로 이 치명적인 상처가 본성에 부착되어 있다. … 진정 그 상처가 죄를 통하여 가해졌다는 것은 다툼의 여지가 없다. … 사람은 자기의 멸망을 오직 자기 자신에게 돌려야 함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지만 자기 자신의 광기로 공허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참조. 『기독교 강요』, 2.1.10. 각주 7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0.
우리의 파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순전’(純全)하게 지었습니다.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의롭고, 선하게, 거룩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꾀’를 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자구’(藉口)하고, ‘불충’하고, ‘배은망덕’하고, 그리하여 우리 인생으로부터 죄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망은 하나님이 지은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본성의 타락’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본성에는 어떤 부정적인 것도 없습니다. 순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타락을 자초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9절에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사망, 죽음, 그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로 오염되어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어떤 능력도 없고, 또 전적으로 부패하여서 생명에 속한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영생을 도무지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모든 인류가 속한 이 인간의 상황, ‘죄의 현상’, 그런 인간의 조건,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우리 인류를 지으셔서 ‘지정의’를 주시고 ‘지식’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더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는 자리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기독교 강요』. 2.1.11.]
사람이 부패한 것은 본성적 사악함에 기인하나 그 사악함은 본성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았다고(naturali hominem vitiositate corruptum, sed quae a natura non fluxerit. 참조. 『기독교 강요』, 1.14.3, 16.) 우리는 말한다. 그 사악함은 태초부터 심겨진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사람에게 일어난 우발적 성질이라는 것을(adventitiam magis esse qualitatem quae homini acciderit, quam substantialem proprietatem quae ab initio indita fuerit) 지적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이 본성으로부터 흘러나왔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본성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 그것은 선천적 법으로써(haereditario iure) 모든 사람을 단단히 붙들어 매기 때문이다.
… 진정 하나님이 적의를 가지신 것은 자기의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작품의 부패였다(operis sui corruptioni magis infensus est quam operi su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1.
사람이 부패한 것은 ‘사악함’에 기인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지은 우리 인간의 처음 본성으로부터 죄가 나온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사악함은 태초부터 심겨진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사람에게 일어난 우발적 성질이다.” 이렇게 칼빈이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발적’이라는 것은 곧 ‘타락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지은 본성으로부터 타락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꾀’를 내고, 우리 인간이 ‘교만’하고, 우리 인간이 ‘불충’해서, 우리 인간이 ‘타락의 사건’을 일으킨 이걸 ’우발적‘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ccidentally’, 라틴어로 말하면 ‘accidentaliter’, ‘사건’에 따라서, 곧 ‘타락 사건’에 따라서 죄가 들어왔다 그것입니다. 곧 죄의 본질은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라고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우리 인생의 그 하나님의 형상을 결코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의 ‘사악함’입니다. 그 사악함은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적의를 가지신 것은, 곧 싫어하시는 것은 자기의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작품의 부패’였다.” 이렇게 칼빈이 말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온전하게 ‘자기 자녀’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타락’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원죄’로 모든 사람은 자기 죄를 지어 ‘사망’에 속하고, ‘타락한 본성’의 ‘사악함’과 ‘오염’으로 인해 ‘저주’와 ‘정죄’를 받는 ‘진노’의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원죄로 말미암아 ‘죄의 책임’인 ‘사망의 형벌’과 ‘오염’의 상태, ‘전적 무능’, ‘전적 부패’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죠.
두 번째, 모든 인류는 ‘불법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이 끊임없이 새로운 ‘악한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인류는 불법의 씨가 있다. 그 씨가 발화하고 그 씨가 무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건 다 ‘죄의 열매’요.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방탕과 쭉, 시기와 미움과 쭉’ 있지 않습니까? 이제 모든 인류에게 그러한 ‘불법의 씨’로부터 나온 ‘불법의 열매들’이 무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거듭나면 끝내 거룩을 이루고 영화롭게 되듯이, 성령의 역사가 없이 인류가 타락한 상태로 그저 놓여지게 되면, 인류는 끊임없는 불법이 무성하게 된다는 것,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죠.
세 번째, 영혼과 육체의 사람 전체가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죄에 압도되어 죄를 면한 곳이 하나도 없으며,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모두 죄에 돌려야 된다. 바로 ‘전적 타락’의 그러한 교리인 것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마치 홍수에 물이 밀려오듯이 압도되어 죄로부터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가식을 해도 ‘중심’이 이미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은 그 무엇 하나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없다. 하나님은 ‘중심’을 헤아리시니까,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네 번째, 죄는 태초부터 심겨진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약하게 짓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성을 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의 인류를 지으실 때,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는 ‘순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본성의 타락’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 타락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그 타락은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이 처음 지어서 자녀 삼고자 언약을 맺으셨던, 영생을 주시고자 하셨던 그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은 자기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의 부패를 미워하신다. 그것에 대하여 적의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강한 표현을 쓴 것입니다.
46강 결론
원죄로 모든 사람은 자기 죄를 지어 사망에 속하고 타락한 본성의 사악함과 오염으로 인해 저주와 정죄를 받는 진노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불법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이 끊임없이 새로운 악한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과 육체의 사람 전체가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죄에 압도되어 죄를 면한 곳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모두 죄에 돌려야 합니다.
죄는 태초부터 심겨진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습니다.
: 하나님은 자기의 작품이 아니라 자기 작품의 부패를 미워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