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역동적으로 이해합니다.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의 실체, 질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 “값”, “공로”, “은혜”, 그 한 가지, 그 한 가지 안에 칭의와 성화가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구원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대로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과 자원적인 순종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리하여 모든 율법을 순종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 자질을 아무도 갖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저주가 되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정죄의 기능에 율법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시고(마 5:17-18; 요 19:30), 우리 대신에 “완전한 순종”을 하시고, 그리하여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의 의의 값을 다 이루신, 무르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그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면, 이제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칼빈이 말하는 제3용법, 우리가 『기독교 강요』 2권 7장에서 보았듯이, 율법의 제3용법, 이제 믿는 자에게는 그 율법이 본질적인, 규범적인 기능을 한다. 그래서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을 알려 주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을 지키고 행하면 너희에게 구원을 주실 것이다’라는 것은 이 자체로는 우리에게 걸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이 은혜 안에 있게 되면, 신명기 7장 12-13절에 보면,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인애를 베푸시고 곧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면’ 이 말씀들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시고, 그 은혜로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입니다(참조. 고후 1:20). 그래서 율법은 ‘언약의 법’입니다. 이제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저주가 되지 않고, 율법은 우리에게 그저 진노의 멍에와 굴레가 되지 않고, 율법의 속박에서, 예속에서 벗어난 우리는 율법을 즐거워하고, 꿀송이보다 달고, 눈을 밝게 하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그러한 영적인 자유의 누림 가운데서 율법이 기능합니다(시 19:7-10).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19장에 가서, 3권 19장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에서 우리가 좀 더 보게 될 것입니다.
율법이 이제 저주의 도구가 아닌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것으로 삼아져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역사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심으로, 율법의 약속이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그 의를 전가받은 우리가 이제는 율법을 즐거워하고 누리게 하시는 이것이 율법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의 의를 내 것 삼아 주시면 그 의를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율법에 있어서의 완전한 순종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전가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행위가 폐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뜻한다는 말입니다(마 5:17; 롬 10:4). 그래서 율법이 정죄적으로 기능을 하는 일시적인 부정적인 기능이 아니라, 율법이 완성된 기능을 하는, 곧 우리에게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고 그러한 길을 알려 주고 규범이 되고 가르침이 되고 권고가 되는 작용을 하는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은 단지 생명이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의 의로움, 곧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에 순종하는 그 의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이것이 율법의 폐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율법의 제3용법이 우리 안에 작용하는 것이죠.
시편 19편에서도 이러한 말씀, ‘자기의 허물을 깨달을 자 누구뇨’(시 19:12), 허물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의 모든 길은 인자요 진리’이다(시 25:10), 시편에서 말씀하지만. 그래서 율법이 우리에게 이제 알려 주는 것은 복음 안에서의 율법이에요. 그것이 신약 시대 때에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말씀해 주신 거예요. ‘내가 패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18). 율법은 본래 “약속”이 있단 말이에요.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이 그 약속을 성취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율법 가운데서 우리는 진리만 보는 게 아니라 은혜도 본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함께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길을 알려 주고, 길을 알려 준 대로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요 1:14),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가 자애로움을 얻을 수 있다면, 여전히 율법은 우리에게 정죄가 돼요, 굴레가 돼요, 멍에가 돼요, 예속이 돼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우리가 받게 되면, 그것은 감사가 되고 아멘이 되고 즐거움이 되죠. 그래서 ‘하나님, 알려 주십시오. 하나님, 더 법을 알려 주십시오.’ 왜요? 법이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율법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율법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에,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강요』, 3.17.3.]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약속을 우리에게 이루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특별히 ‘복음적 약속’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내가 규범을 주노니 이를 행하면 살리라’(겔 20:11; 레 18:5). 율법의 약속, 율법의 의는 그거예요. ‘모든 율법을 지키면, 행하면 살리라.’ 그러면 복음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새롭게 대체된 복음적 약속은 이러한 율법의 약속과는 달리 값없는 죄사함을 공포하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게끔 한다(dum promissiones evangelicae substituuntur, quae gratuitam peccatorum remissionem denuntiant, non efficiunt modo ut ipsi Deo accepti simus, sed ut operibus quoque nostris sit sua gratia).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7.3.
‘복음적 약속’(promissio evangelica)에 따른 ‘언약’(pactum)의 ‘은혜’는 ‘우리 자신’(nos ipsi)과 ‘우리의 행위’(opera nostra)에, 우리의 ‘의로움’(iustitia)과 ‘거룩함’(sanctitas)에, 칭의와 성화에 모두 미친다. 그러므로 행위에 대하여 주어지는 ‘보상’(retributio)은 은혜의 상급(praemium gratiae)이라고 할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공로(meritum, promeritum)가 아니라 ‘행위로써 은혜를 얻게 되는 이유’(causa, quae gratiam operibus conciliet)를 깊이 돌아보게 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7.3, 각주 984번.
‘값없는 의의 전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 삼아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행위도 은혜 가운데 있게 하신다.’ 이제 칼빈이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행위도 은혜 가운데 받아 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도 기쁨거리가 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언약에 따라 정해진 복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율법에 마땅하게 맺혀 있는, 율법은 언약의 법이란 말이에요, 율법의 언약의 복을 누리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어서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의,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 사신 바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사시고, 우리 자신, 존재, 신분, 그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그 중재, 중보, 그리스도가 하시기 때문에.
둘째, 우리의 행위를 이제 더 높은 데까지 순종의 그것을 끌어 올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예를 높여 주시는데, 그 본질은 행위에 있지 않고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성적인 선하심과 관용 가운데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선하심과 관용,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시는 가운데 우리의 것을 받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하나님은 행위 자체에 은총을 베푸셔서 받아 주신다. 행위 자체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생명도 은혜이고, 생활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살아남도 살아감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도 우리의 행위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행위로부터 존재가 나오는 게 아니죠. 안 그렇습니까? 존재로부터 행위가 나오죠. 로마 가톨릭의 궤변은 이것을 거꾸로 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7.4.]
그래서 칼빈은 여기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acceptio duplex”, “이중적 받아들이심”, 이중적 받아들이심. 이중적 받아들이심이 곧 뭐겠어요? “gratia duplex”, “이중적 은혜”입니다. 이중적 받아들이심, ‘acceptio duplex’,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시고 우리 행위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명의 은혜요, 칭의의 은혜요, 우리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생활의 은혜요, 성화의 은혜죠. 그래서 이중적 은혜는 이중적 받아들이심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각 나라 중…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 그 안에 무슨 하나 선도 없고 모든 것이 더럽고 죽었고 썩어 있는데 하나님이 불러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집안을 불러 주신다(행 10장). 고넬료가 기도하고 구제했다고 나오지만(행 10:2), 그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성령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치 사람이 변해서, 삭개오가 변해서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래서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이 유하시고, 삭개오가 변화가 되어서 2배, 4배 자기가 토색한 것 있으면 갚겠다 그러니까, 그 출발은 삭개오의 행위라고 말할 수 없죠. 삭개오가 먼저 그 자신의 받아 주심에 의해서, 하나님이 삭개오 자신을 먼저 받아 주셨단 말이에요. 삭개오 자신을 변화시키니까, 삭개오의 마음이 변해서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눅 19:4).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먼저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심.
[『기독교 강요』, 3.17.5.]
그리고 두 번째 받아 주심은 거듭난 사람의 행위를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파멸의 심연에서 건져 주신 그 주님께서 새 삶을 살도록 하시고, 그 새 삶을 ‘자기의 영’의, ‘그리스도의 영’의 선물들을 주시고, 그리고 각자의 부르심에 합한 바 된 행실조차도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이 좀 못나도 심부름 시키잖아요, 집에서. 그렇지 않아요? “자녀”니까 시키는 거예요. 이웃집의 모르는 자녀들에게, 이웃집의 모르는 아이들에게 안 시키잖아요. 마찬가지예요. 우리 자신을 ‘acceptio’ 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도 ‘acceptio’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double acceptance”, “이중적 받아 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시고, 우리 행위를 받아 주시고, 그래서 ‘모든 선행 역시 자기의 받아들이심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선행이 다 자기의 받아 주심에 부합한다. 그래서 우리를 그릇으로 삼았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고 회복하게 하고, 의와 거룩과 지혜와 이 성도들의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을 받아 주신다는 거예요. 받아 주신다. 그러니까 은혜죠.
그러니까 우리가 오히려 담대한 것은 우리가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 구하여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면 받으실 줄 앎이라(요일 5:14; 3:21-22).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시고 그 가운데 우리의 삶을 받아 주시는 이것이 칭의와 성화란 말이에요. 그냥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저 구석에 그냥 놔두시려고 자녀 삼으셨겠냐는 것입니다. 그냥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을 건지시고 다시 강가에 앉혀 놓고 떠나실 거냐는 것입니다. 그를 살리셨으면 마땅히 그를 집에 들이시고, 그 집의 질서와 규율과 그 집의 것을 누리고 그 집의 규례와 법도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빚어 가시고, 좀 부족하지만 그 자식으로서 인정하시고, 성도로 말하면, 부족하지만 찬송을 받으시고, 부족하지만 기도도 받으시고, 헌신도 받으시고, 이러한 것이 전부 다 “받으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받으심과 우리의 행실을 받으심’, 이것이 바로 언약 가운데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이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도 받아 주시고, 우리 행실도 받아 주시고, 설날 이럴 때 막 떡국도 나눠 먹고 하는데, 하나님이 드시는 거죠, 우리의 떡국을, 받아, 그것이 화목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화목입니다. 얼마나 받아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손이 깨끗함을 보시고 보상하셨다고 선포하면서도(삼하 22:21; 참조. 시 18:20) 자기를 기뻐하심으로(삼하 22:20) 모태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이 보상의 원천이다. 자기를 기뻐하심으로, 그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습 3:17),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우리 자신을 받으신 분이 우리의 행실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받아 주신다. 혹 그 행실이 부족하면 온전하게 빚어 가실 것이요, 혹 실족하면 세우실 것이요. 이러한 것이 전부 다 은혜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자에게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나 아무도 그런 자 없고 모두 율법의 저주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선하심은 복음을 통하여 율법 가운데 있는 자에게 언약의 약속을 이루심에 있는바, 의를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그렇게 됩니다.
셋째, 율법에 제시된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은 복음으로써 작용합니다. 복음적 약속이 우리 자신과 우리 행위 모두를 언약의 은혜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비참해진 사람 자신을 받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난 사람의 삶과 행위도 받아들이십니다. 곧 이중적 받아들이심,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과 생활, 구원의 전 과정이 언약의 은혜 가운데, 값없는 베푸신 가운데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131강 결론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자에게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나, 아무도 그런 자 없고 모두 율법의 저주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복음을 통하여 율법 가운데 있는 자에게 언약의 약속을 이루심에 있으니, 의를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입니다.
율법에 제시된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은 복음으로써 작용하니, 복음적 약속은 우리 자신과 우리 행위 모두를 언약의 은혜 아래에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비참해진 사람 자신을 받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난 사람의 삶과 행위도 받아들이시니, 이중적 받아들이심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의 은혜를 값없이 베푸십니다.
131강 | 3.17.1-5. (3권 477-487쪽)
복음이 없다면
율법의 약속과 의와 행위가 헛됨
[『기독교 강요』, 3.17.1-2.]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역동적으로 이해합니다.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의 실체, 질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 “값”, “공로”, “은혜”, 그 한 가지, 그 한 가지 안에 칭의와 성화가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구원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대로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과 자원적인 순종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리하여 모든 율법을 순종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 자질을 아무도 갖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저주가 되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정죄의 기능에 율법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시고(마 5:17-18; 요 19:30), 우리 대신에 “완전한 순종”을 하시고, 그리하여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의 의의 값을 다 이루신, 무르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그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면, 이제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칼빈이 말하는 제3용법, 우리가 『기독교 강요』 2권 7장에서 보았듯이, 율법의 제3용법, 이제 믿는 자에게는 그 율법이 본질적인, 규범적인 기능을 한다. 그래서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을 알려 주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을 지키고 행하면 너희에게 구원을 주실 것이다’라는 것은 이 자체로는 우리에게 걸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이 은혜 안에 있게 되면, 신명기 7장 12-13절에 보면,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인애를 베푸시고 곧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면’ 이 말씀들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시고, 그 은혜로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입니다(참조. 고후 1:20). 그래서 율법은 ‘언약의 법’입니다. 이제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저주가 되지 않고, 율법은 우리에게 그저 진노의 멍에와 굴레가 되지 않고, 율법의 속박에서, 예속에서 벗어난 우리는 율법을 즐거워하고, 꿀송이보다 달고, 눈을 밝게 하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그러한 영적인 자유의 누림 가운데서 율법이 기능합니다(시 19:7-10).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19장에 가서, 3권 19장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에서 우리가 좀 더 보게 될 것입니다.
율법이 이제 저주의 도구가 아닌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것으로 삼아져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역사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심으로, 율법의 약속이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그 의를 전가받은 우리가 이제는 율법을 즐거워하고 누리게 하시는 이것이 율법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의 의를 내 것 삼아 주시면 그 의를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율법에 있어서의 완전한 순종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전가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행위가 폐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뜻한다는 말입니다(마 5:17; 롬 10:4). 그래서 율법이 정죄적으로 기능을 하는 일시적인 부정적인 기능이 아니라, 율법이 완성된 기능을 하는, 곧 우리에게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고 그러한 길을 알려 주고 규범이 되고 가르침이 되고 권고가 되는 작용을 하는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은 단지 생명이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의 의로움, 곧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에 순종하는 그 의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이것이 율법의 폐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율법의 제3용법이 우리 안에 작용하는 것이죠.
시편 19편에서도 이러한 말씀, ‘자기의 허물을 깨달을 자 누구뇨’(시 19:12), 허물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의 모든 길은 인자요 진리’이다(시 25:10), 시편에서 말씀하지만. 그래서 율법이 우리에게 이제 알려 주는 것은 복음 안에서의 율법이에요. 그것이 신약 시대 때에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말씀해 주신 거예요. ‘내가 패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18). 율법은 본래 “약속”이 있단 말이에요.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이 그 약속을 성취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율법 가운데서 우리는 진리만 보는 게 아니라 은혜도 본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함께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길을 알려 주고, 길을 알려 준 대로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요 1:14),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가 자애로움을 얻을 수 있다면, 여전히 율법은 우리에게 정죄가 돼요, 굴레가 돼요, 멍에가 돼요, 예속이 돼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우리가 받게 되면, 그것은 감사가 되고 아멘이 되고 즐거움이 되죠. 그래서 ‘하나님, 알려 주십시오. 하나님, 더 법을 알려 주십시오.’ 왜요? 법이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율법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율법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에,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강요』, 3.17.3.]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약속을 우리에게 이루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특별히 ‘복음적 약속’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내가 규범을 주노니 이를 행하면 살리라’(겔 20:11; 레 18:5). 율법의 약속, 율법의 의는 그거예요. ‘모든 율법을 지키면, 행하면 살리라.’ 그러면 복음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새롭게 대체된 복음적 약속은 이러한 율법의 약속과는 달리 값없는 죄사함을 공포하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게끔 한다(dum promissiones evangelicae substituuntur, quae gratuitam peccatorum remissionem denuntiant, non efficiunt modo ut ipsi Deo accepti simus, sed ut operibus quoque nostris sit sua gratia).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7.3.
‘복음적 약속’(promissio evangelica)에 따른 ‘언약’(pactum)의 ‘은혜’는 ‘우리 자신’(nos ipsi)과 ‘우리의 행위’(opera nostra)에, 우리의 ‘의로움’(iustitia)과 ‘거룩함’(sanctitas)에, 칭의와 성화에 모두 미친다. 그러므로 행위에 대하여 주어지는 ‘보상’(retributio)은 은혜의 상급(praemium gratiae)이라고 할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공로(meritum, promeritum)가 아니라 ‘행위로써 은혜를 얻게 되는 이유’(causa, quae gratiam operibus conciliet)를 깊이 돌아보게 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7.3, 각주 984번.
‘값없는 의의 전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 삼아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행위도 은혜 가운데 있게 하신다.’ 이제 칼빈이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행위도 은혜 가운데 받아 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도 기쁨거리가 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언약에 따라 정해진 복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율법에 마땅하게 맺혀 있는, 율법은 언약의 법이란 말이에요, 율법의 언약의 복을 누리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어서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의,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 사신 바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사시고, 우리 자신, 존재, 신분, 그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그 중재, 중보, 그리스도가 하시기 때문에.
둘째, 우리의 행위를 이제 더 높은 데까지 순종의 그것을 끌어 올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예를 높여 주시는데, 그 본질은 행위에 있지 않고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성적인 선하심과 관용 가운데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선하심과 관용,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시는 가운데 우리의 것을 받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하나님은 행위 자체에 은총을 베푸셔서 받아 주신다. 행위 자체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생명도 은혜이고, 생활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살아남도 살아감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도 우리의 행위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행위로부터 존재가 나오는 게 아니죠. 안 그렇습니까? 존재로부터 행위가 나오죠. 로마 가톨릭의 궤변은 이것을 거꾸로 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7.4.]
그래서 칼빈은 여기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acceptio duplex”, “이중적 받아들이심”, 이중적 받아들이심. 이중적 받아들이심이 곧 뭐겠어요? “gratia duplex”, “이중적 은혜”입니다. 이중적 받아들이심, ‘acceptio duplex’,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시고 우리 행위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명의 은혜요, 칭의의 은혜요, 우리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생활의 은혜요, 성화의 은혜죠. 그래서 이중적 은혜는 이중적 받아들이심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각 나라 중…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 그 안에 무슨 하나 선도 없고 모든 것이 더럽고 죽었고 썩어 있는데 하나님이 불러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집안을 불러 주신다(행 10장). 고넬료가 기도하고 구제했다고 나오지만(행 10:2), 그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성령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치 사람이 변해서, 삭개오가 변해서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래서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이 유하시고, 삭개오가 변화가 되어서 2배, 4배 자기가 토색한 것 있으면 갚겠다 그러니까, 그 출발은 삭개오의 행위라고 말할 수 없죠. 삭개오가 먼저 그 자신의 받아 주심에 의해서, 하나님이 삭개오 자신을 먼저 받아 주셨단 말이에요. 삭개오 자신을 변화시키니까, 삭개오의 마음이 변해서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눅 19:4).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먼저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심.
[『기독교 강요』, 3.17.5.]
그리고 두 번째 받아 주심은 거듭난 사람의 행위를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파멸의 심연에서 건져 주신 그 주님께서 새 삶을 살도록 하시고, 그 새 삶을 ‘자기의 영’의, ‘그리스도의 영’의 선물들을 주시고, 그리고 각자의 부르심에 합한 바 된 행실조차도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이 좀 못나도 심부름 시키잖아요, 집에서. 그렇지 않아요? “자녀”니까 시키는 거예요. 이웃집의 모르는 자녀들에게, 이웃집의 모르는 아이들에게 안 시키잖아요. 마찬가지예요. 우리 자신을 ‘acceptio’ 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도 ‘acceptio’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double acceptance”, “이중적 받아 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시고, 우리 행위를 받아 주시고, 그래서 ‘모든 선행 역시 자기의 받아들이심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선행이 다 자기의 받아 주심에 부합한다. 그래서 우리를 그릇으로 삼았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고 회복하게 하고, 의와 거룩과 지혜와 이 성도들의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을 받아 주신다는 거예요. 받아 주신다. 그러니까 은혜죠.
그러니까 우리가 오히려 담대한 것은 우리가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 구하여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면 받으실 줄 앎이라(요일 5:14; 3:21-22).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시고 그 가운데 우리의 삶을 받아 주시는 이것이 칭의와 성화란 말이에요. 그냥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저 구석에 그냥 놔두시려고 자녀 삼으셨겠냐는 것입니다. 그냥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을 건지시고 다시 강가에 앉혀 놓고 떠나실 거냐는 것입니다. 그를 살리셨으면 마땅히 그를 집에 들이시고, 그 집의 질서와 규율과 그 집의 것을 누리고 그 집의 규례와 법도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빚어 가시고, 좀 부족하지만 그 자식으로서 인정하시고, 성도로 말하면, 부족하지만 찬송을 받으시고, 부족하지만 기도도 받으시고, 헌신도 받으시고, 이러한 것이 전부 다 “받으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받으심과 우리의 행실을 받으심’, 이것이 바로 언약 가운데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이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도 받아 주시고, 우리 행실도 받아 주시고, 설날 이럴 때 막 떡국도 나눠 먹고 하는데, 하나님이 드시는 거죠, 우리의 떡국을, 받아, 그것이 화목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화목입니다. 얼마나 받아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손이 깨끗함을 보시고 보상하셨다고 선포하면서도(삼하 22:21; 참조. 시 18:20) 자기를 기뻐하심으로(삼하 22:20) 모태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이 보상의 원천이다. 자기를 기뻐하심으로, 그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습 3:17),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우리 자신을 받으신 분이 우리의 행실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받아 주신다. 혹 그 행실이 부족하면 온전하게 빚어 가실 것이요, 혹 실족하면 세우실 것이요. 이러한 것이 전부 다 은혜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자에게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나 아무도 그런 자 없고 모두 율법의 저주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선하심은 복음을 통하여 율법 가운데 있는 자에게 언약의 약속을 이루심에 있는바, 의를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그렇게 됩니다.
셋째, 율법에 제시된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은 복음으로써 작용합니다. 복음적 약속이 우리 자신과 우리 행위 모두를 언약의 은혜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비참해진 사람 자신을 받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난 사람의 삶과 행위도 받아들이십니다. 곧 이중적 받아들이심,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과 생활, 구원의 전 과정이 언약의 은혜 가운데, 값없는 베푸신 가운데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131강 결론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자에게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나, 아무도 그런 자 없고 모두 율법의 저주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복음을 통하여 율법 가운데 있는 자에게 언약의 약속을 이루심에 있으니, 의를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입니다.
율법에 제시된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은 복음으로써 작용하니, 복음적 약속은 우리 자신과 우리 행위 모두를 언약의 은혜 아래에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비참해진 사람 자신을 받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난 사람의 삶과 행위도 받아들이시니, 이중적 받아들이심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의 은혜를 값없이 베푸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