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때 로마 가톨릭이 종교개혁자들, 루터나 칼빈, 특별히 칼빈을 향해서 가장 비판했던 게 뭔가 하면, ‘종교개혁자들은 믿음만 이야기하고 사랑이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보면 사랑을 강조하지 않느냐?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편협된, 삶이 없는 신학을 이야기한다.’ 이런 것이 로마 가톨릭이 개신교에 대해서 비판하던 부분이에요. 과연 그렇습니까?
로마 가톨릭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선행’을 뜻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리에서 ‘선행’이란 말, ‘bona opera,’ 선행이란 말은 곧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 ‘amor’, ‘caritas’, ‘dilectio’,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우리 개신교는 사랑을 가볍게 여깁니까? 무시합니까? 그것은 이미 말할 나위도 없죠. 우리야말로 사랑을 강조하죠. 근데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다? 바로 ‘은혜를 누리는 자가 그 마땅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사랑함이 마땅함이라.’ 하는 그 사랑이죠. ‘열매로서의 사랑’이죠.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열매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몇 차례 나누었듯이, 성화를 먼저 중심에 두고 거룩해지는 그중의 첫 단계가 칭의이다. 그런데 칭의란 말을 안 쓰죠, 그들은 의화이다. 우리가 칭의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의화라고 해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되는 것인데, 그중의 첫 단계가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칭의의 법정성’이 부인되죠.
그러면서 이들이 강조하는 게 뭐예요? 바로 사랑 가운데 은혜가 있다. 은혜는 사랑의 자극제이고, 은혜는 사랑의 기회이고, 은혜는 사랑을 돕는다,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이것에 대해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은 괴변이다. 로마 가톨릭은 신학을 거꾸로 세운다.’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선행이 서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이신칭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라고 해서 행위를 배제하거나 행위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그 의롭다 함 가운데서 행위로 나아가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생명이 있는 자에게 생활의 은혜가 역사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게 되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께 구하여서 얻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그것이지 않습니까? 화목이라는 개념은 그저 신분만 유지하는 게 아닙니다. 왕래하고 교제하고 교통하고 하나가 되고 영광을 올리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이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의가 되심은 그리스도 자신을 주심이고, 그리스도 자신이 의고, 거룩이고, 선이고, 그분은 절대의 의고, 절대 거룩이고, 절대 선이지 않습니까? 그분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의와 그분의 거룩과 그분의 선함과 그분의 지혜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빛을 누린다는 것은 빛을 내는 것이고, 지혜를 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혜롭게 사는 것이죠. 거룩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룩하게 사는 것이죠. 의로움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됐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의롭게 산다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야.’ 그런데 마구잡이로 살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까? 이것이 바로 생명과 생활의 역동적인 이해란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셨으니까 우리가 살아 있는 삶을 산단 말이에요, 죽은 자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 되셨기 때문에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산단 말이에요. 향이 되셨기 때문에 향기를 내는 삶을 산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필히 의의 전가는 필히 그 의에 합당한 삶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삶도 은혜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생명과 의와 거룩과 지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그의 의가 내 것이 되면, 그와 함께 살게 되면, 그의 의와 거룩과 지혜와 선함을 드러내면서 사는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의 삶이고, 그 가운데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4:11),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로움’, ‘iustitia’, 그리고 ‘거룩함,’ ‘sanctificatio’가 둘 다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칭의는 의로움과 거룩함이 함께 부여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여러분, 의로운 이름만 주고 거룩함이 전혀 우리에게 부여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중생입니까? 칭의는 ‘중생의 의의 선포’거든요. 우리가 거듭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고후 5:17)? 그래서 의로움과 거룩함이 함께 우리에게 부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되지만 행위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님이 얼마나 참된지는 너무나 분명하다(Ita liquet quam verum sit nos non sine operibus, neque tamen per opera iustificari).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6.1.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되지만, 행위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행위가 없이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요. 행위에 공로가 없어요. 그러나 ‘행위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잘 뜻을 새겨야 됩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행위 없이 의롭다 함을 얻지만, 행위가 없는 의는 없다, 이 말은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만,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에는 행위가 필히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동참한다, 동참, 연합, 그리고 의의 전가, 그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을 사는 것은 의로움을 얻는 것 못지않게 거룩함을 얻는 것이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가 의로움을 칭의 쪽에 좀 더 엑센트를 둔다면, 거룩함은 성화 쪽에 엑센트를 둘 수는 있겠죠. 그러면 칭의와 성화가 전부 우리에게 은혜로써 부여되고, 특별히 성화의 영역에서 중요한 사랑, 선행, 그것도 우리에게 은혜로써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을 칼빈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16.2.]
하나님은 값없이 예배를 받기 원하시며, 값없이 사랑을 받기 원하신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모든 소망이 끊어진 때에도 여전히 거침없이 자기를 섬기는 예배자를 인정하신다(Gratis coli vult, gratis amari; hunc, inquam, cultorem probat, qui praecisa omni spe recipiendae mercedis, colere tamen eum non desin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6.2.
‘하나님은 값없이 예배를 받기 원하시며 값없이 사랑을 받기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것을 누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또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것은 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열매죠,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구속의 목적은 우리를 그냥 두기 위하심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고, 그리고 죽었던 행실에서 깨끗하게 되고 살아나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영원토록,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하고 의롭고 두려움 없이 섬기고. 두려움 없다는 것은 뭐예요? 진정한 경외를 가지는 거죠. 거룩한 경외를 가지는 거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는 그 경건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전 것이 죽은 것은, 곧 의롭게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바로 새로운 삶, 거룩한 삶을 살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살지만 보화가 있는 천국을 바라보고, 우리의 크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남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을 가지고 이 세상의 삶을 살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구원을 얻었고 또 그리스도께로 자라가고, 우리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심으로써 성령의 전이 되었으므로 그 성령의 전, 곧 우리의 심령 가운데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또 거룩에 힘쓰고, 빛이 임함으로써 빛의 자녀들로서 살아가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너, 내 것이야’라고 그저 지명하고 두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살전 4:7).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에 있고, 그래서 우리의 거룩함은 바로 하나님의 소명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부르신 자를 의롭게, 거룩하게, 영화롭게 하신다(롬 8:30). 그래서 의롭다 하심은 거룩하게 하심, 영화롭게 하심의 견인으로 연결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는 당연히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몸의 지체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부합하게, 뜻에 부합하게 사용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성도의 소망은 내 마음대로 행하거나,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닮아가는 것, 그것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기독교 강요』, 3.16.3.]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가 없다면 우리의 삶의 소망이 다 무익합니다.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것이 곧 나의 누림이니까, 내가 즐거워하면서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까, 그것이 증인의 삶이니까, 그 누림 가운데서, 빛을 받았으니까 비추는 거 아닙니까!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고후 9:7), 어떻게 해야 인색하지 않을까요? 충만하게 누리면 충만하게 비추겠죠, 우리가. 이것이 성도의 삶의 질서에요. 내가 누리고 감사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거죠. 달리 말하면, 우리의 무조건적 은혜, 의의 전가에는 필히 선행이 드러나고, 하나님 앞에서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거죠. 또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붙들고, 공로, 그리스도의 공로만 붙들고, 의로우심만 붙들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붙들고, 그때 우리가 온전하게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내 자신을 통하여 드러내고, 그리스도와 닮은 행실을 보이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3.16.4.]
그래서 그 의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이나 값없이 이룬 것은 아니죠. 그리스도께서 모든 순종을 다 하셔서 이루신 것이죠.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값없이 주셨으나 완전한 순종의 것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완전한 순종이 값없이 들어온 거예요, 우리에게. 그래서 우리도 그와 함께 순종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obedientia perfecta’, ‘완전한 순종’, 완전한 순종을 그리스도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값없이 주셨지만 가장 값진 것을, 다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가장 값비싸게 치루신 것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 무르심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복되냐 이 말입니다.
오직 그가 다 이루시고,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덧붙여서, 로마 가톨릭의 보속 교리, 곧 내가 잘못한 것은 내가 값을 갚아야 된다는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서 내가 뭔가를 해야 되는 그것을 좀 더 도와주는 것이 은혜이다. 그래서 무슨 잉여 공로니, 잉여 은혜니 이런 개념들을 도입하는 것은 절대 성경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무름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특권이[다](hanc[satisfactio] solius sanguinis Christi praerogativam ess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6.4.
‘오직 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특권이다’라고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물러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값 주고 사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값은 그저 종이에 잉크로 한 줄 남긴 값이 아니라, 다 이루신 값입니다(요 19:30). 그가 순종함으로, 그가 통곡과 눈물로 기도함으로, 그가 자신을 거룩하게 하심으로 온전하게 이루신 것을 단번에, 영원히, 온전히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온전히 주심은 그저 이름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생명과 온전한 행실로 나아가는 것을 주신 것이죠. 이것이 바로 칭의도, 성화도 은혜이다. 칭의가 있는 곳에 성화가 필히 따른다. 바로 칭의는 성화의 시작이다. “결정적 성화” 혹은 “확정적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칼빈이 이렇게 강조한 게 바로 이 부분이라는 거예요.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에 이런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존 머레이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칼빈이 이야기한 거란 말이에요, 처음에. 이것이 바로 이 부분이란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무름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사함 받고, 그것은 단지 죄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도, 성화도, 살아남도, 살아감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서 은혜로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더 잘 누리는 것이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 누리는 것이 바로 성화란 말이에요.
가장 잘 누리는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에요.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고 은혜의 신학이에요. 윤리 아닙니다. 윤리 아니에요. 요새 너무 장안의 설교가 윤리 설교예요, 심리 설교이고. 아닙니다. 우리는 “의의 전가”입니다. 우리는 “법정적”입니다. 우리는 “무름”입니다. 그의 것을 내 것 삼아 주심으로, 우리가 더 많이 누림으로 더 많이 드러내는, 사랑을 누린 만큼 사랑하는 이것이 은혜의 질서란 말이에요. 이건 선순환입니다, 악순환이 아니라. 내 공로로 세속적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악순환이에요. 그것이 기독교가 힘이 없어지고 은혜가 약화되는 거예요.
그러나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칼빈은 여기서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로마 가톨릭은 벌써 은혜와 공로를, 두 가지를 세워 놓고 이분법적으로 본단 말이에요. 즉자(卽自), 대자(對自)같이 본단 말이에요. 그래서 뭔가 이게 합해져 가지고 결국은 무슨 공로를 이루고 이렇게 보는데, 우리는 뭐예요? 모든 것이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사랑이 나오고, 은혜 안에서 생명이 있고, 은혜 안에서 생활이 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이 우리의 도피처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특권이고, 하나님의 자비만이 우리의 도피처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지만, 행위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바, 칭의에는 필히 행위의 열매가 따릅니다.
두 번째,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새 생명 가운데 빛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행하게 하십니다.
셋째,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기초하고,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지향합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의는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값없이 이루신 것은 아닙니다. 대속의 무름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특권입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순종함으로, 죄 값을 치르시고 순종함으로 우리를 무르셨기 때문에,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심은 우리가 살아나고 살아감에, 구원의 전 과정의 은혜, 칭의와 성화의 은혜에 다 미치는 것입니다.
130강 결론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지만 행위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바. 칭의에는 행위의 열매가 따릅니다.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정결케 하시며, 새 생명 가운데 빛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행하게 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기초하고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지향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값없이 주어진 것이나, 그리스도가 값없이 이루신 것은 아닌바, 대속의 무름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특권입니다.
130강 | 3.16.1-4. (3권 467-476쪽)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는 분이
거룩함에 이르게 하심
[『기독교 강요』, 3.16.1.]
종교개혁 때 로마 가톨릭이 종교개혁자들, 루터나 칼빈, 특별히 칼빈을 향해서 가장 비판했던 게 뭔가 하면, ‘종교개혁자들은 믿음만 이야기하고 사랑이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보면 사랑을 강조하지 않느냐?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편협된, 삶이 없는 신학을 이야기한다.’ 이런 것이 로마 가톨릭이 개신교에 대해서 비판하던 부분이에요. 과연 그렇습니까?
로마 가톨릭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선행’을 뜻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리에서 ‘선행’이란 말, ‘bona opera,’ 선행이란 말은 곧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 ‘amor’, ‘caritas’, ‘dilectio’,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우리 개신교는 사랑을 가볍게 여깁니까? 무시합니까? 그것은 이미 말할 나위도 없죠. 우리야말로 사랑을 강조하죠. 근데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다? 바로 ‘은혜를 누리는 자가 그 마땅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사랑함이 마땅함이라.’ 하는 그 사랑이죠. ‘열매로서의 사랑’이죠.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열매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몇 차례 나누었듯이, 성화를 먼저 중심에 두고 거룩해지는 그중의 첫 단계가 칭의이다. 그런데 칭의란 말을 안 쓰죠, 그들은 의화이다. 우리가 칭의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의화라고 해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되는 것인데, 그중의 첫 단계가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칭의의 법정성’이 부인되죠.
그러면서 이들이 강조하는 게 뭐예요? 바로 사랑 가운데 은혜가 있다. 은혜는 사랑의 자극제이고, 은혜는 사랑의 기회이고, 은혜는 사랑을 돕는다,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이것에 대해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은 괴변이다. 로마 가톨릭은 신학을 거꾸로 세운다.’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선행이 서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이신칭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라고 해서 행위를 배제하거나 행위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그 의롭다 함 가운데서 행위로 나아가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생명이 있는 자에게 생활의 은혜가 역사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게 되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께 구하여서 얻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그것이지 않습니까? 화목이라는 개념은 그저 신분만 유지하는 게 아닙니다. 왕래하고 교제하고 교통하고 하나가 되고 영광을 올리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이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의가 되심은 그리스도 자신을 주심이고, 그리스도 자신이 의고, 거룩이고, 선이고, 그분은 절대의 의고, 절대 거룩이고, 절대 선이지 않습니까? 그분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의와 그분의 거룩과 그분의 선함과 그분의 지혜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빛을 누린다는 것은 빛을 내는 것이고, 지혜를 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혜롭게 사는 것이죠. 거룩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룩하게 사는 것이죠. 의로움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됐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의롭게 산다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야.’ 그런데 마구잡이로 살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까? 이것이 바로 생명과 생활의 역동적인 이해란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셨으니까 우리가 살아 있는 삶을 산단 말이에요, 죽은 자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 되셨기 때문에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산단 말이에요. 향이 되셨기 때문에 향기를 내는 삶을 산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필히 의의 전가는 필히 그 의에 합당한 삶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삶도 은혜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생명과 의와 거룩과 지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그의 의가 내 것이 되면, 그와 함께 살게 되면, 그의 의와 거룩과 지혜와 선함을 드러내면서 사는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의 삶이고, 그 가운데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4:11),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로움’, ‘iustitia’, 그리고 ‘거룩함,’ ‘sanctificatio’가 둘 다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칭의는 의로움과 거룩함이 함께 부여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여러분, 의로운 이름만 주고 거룩함이 전혀 우리에게 부여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중생입니까? 칭의는 ‘중생의 의의 선포’거든요. 우리가 거듭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고후 5:17)? 그래서 의로움과 거룩함이 함께 우리에게 부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되지만 행위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님이 얼마나 참된지는 너무나 분명하다(Ita liquet quam verum sit nos non sine operibus, neque tamen per opera iustificari).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6.1.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되지만, 행위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행위가 없이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요. 행위에 공로가 없어요. 그러나 ‘행위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잘 뜻을 새겨야 됩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행위 없이 의롭다 함을 얻지만, 행위가 없는 의는 없다, 이 말은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만,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에는 행위가 필히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동참한다, 동참, 연합, 그리고 의의 전가, 그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을 사는 것은 의로움을 얻는 것 못지않게 거룩함을 얻는 것이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가 의로움을 칭의 쪽에 좀 더 엑센트를 둔다면, 거룩함은 성화 쪽에 엑센트를 둘 수는 있겠죠. 그러면 칭의와 성화가 전부 우리에게 은혜로써 부여되고, 특별히 성화의 영역에서 중요한 사랑, 선행, 그것도 우리에게 은혜로써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을 칼빈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16.2.]
하나님은 값없이 예배를 받기 원하시며, 값없이 사랑을 받기 원하신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모든 소망이 끊어진 때에도 여전히 거침없이 자기를 섬기는 예배자를 인정하신다(Gratis coli vult, gratis amari; hunc, inquam, cultorem probat, qui praecisa omni spe recipiendae mercedis, colere tamen eum non desin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6.2.
‘하나님은 값없이 예배를 받기 원하시며 값없이 사랑을 받기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것을 누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또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것은 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열매죠,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구속의 목적은 우리를 그냥 두기 위하심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고, 그리고 죽었던 행실에서 깨끗하게 되고 살아나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영원토록,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하고 의롭고 두려움 없이 섬기고. 두려움 없다는 것은 뭐예요? 진정한 경외를 가지는 거죠. 거룩한 경외를 가지는 거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는 그 경건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전 것이 죽은 것은, 곧 의롭게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바로 새로운 삶, 거룩한 삶을 살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살지만 보화가 있는 천국을 바라보고, 우리의 크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남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을 가지고 이 세상의 삶을 살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구원을 얻었고 또 그리스도께로 자라가고, 우리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심으로써 성령의 전이 되었으므로 그 성령의 전, 곧 우리의 심령 가운데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또 거룩에 힘쓰고, 빛이 임함으로써 빛의 자녀들로서 살아가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너, 내 것이야’라고 그저 지명하고 두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살전 4:7).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에 있고, 그래서 우리의 거룩함은 바로 하나님의 소명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부르신 자를 의롭게, 거룩하게, 영화롭게 하신다(롬 8:30). 그래서 의롭다 하심은 거룩하게 하심, 영화롭게 하심의 견인으로 연결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는 당연히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몸의 지체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부합하게, 뜻에 부합하게 사용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성도의 소망은 내 마음대로 행하거나,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닮아가는 것, 그것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기독교 강요』, 3.16.3.]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가 없다면 우리의 삶의 소망이 다 무익합니다.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것이 곧 나의 누림이니까, 내가 즐거워하면서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까, 그것이 증인의 삶이니까, 그 누림 가운데서, 빛을 받았으니까 비추는 거 아닙니까!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고후 9:7), 어떻게 해야 인색하지 않을까요? 충만하게 누리면 충만하게 비추겠죠, 우리가. 이것이 성도의 삶의 질서에요. 내가 누리고 감사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거죠. 달리 말하면, 우리의 무조건적 은혜, 의의 전가에는 필히 선행이 드러나고, 하나님 앞에서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거죠. 또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붙들고, 공로, 그리스도의 공로만 붙들고, 의로우심만 붙들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붙들고, 그때 우리가 온전하게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내 자신을 통하여 드러내고, 그리스도와 닮은 행실을 보이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3.16.4.]
그래서 그 의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이나 값없이 이룬 것은 아니죠. 그리스도께서 모든 순종을 다 하셔서 이루신 것이죠.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값없이 주셨으나 완전한 순종의 것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완전한 순종이 값없이 들어온 거예요, 우리에게. 그래서 우리도 그와 함께 순종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obedientia perfecta’, ‘완전한 순종’, 완전한 순종을 그리스도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값없이 주셨지만 가장 값진 것을, 다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가장 값비싸게 치루신 것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 무르심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복되냐 이 말입니다.
오직 그가 다 이루시고,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덧붙여서, 로마 가톨릭의 보속 교리, 곧 내가 잘못한 것은 내가 값을 갚아야 된다는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서 내가 뭔가를 해야 되는 그것을 좀 더 도와주는 것이 은혜이다. 그래서 무슨 잉여 공로니, 잉여 은혜니 이런 개념들을 도입하는 것은 절대 성경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무름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특권이[다](hanc[satisfactio] solius sanguinis Christi praerogativam ess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6.4.
‘오직 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특권이다’라고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물러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값 주고 사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값은 그저 종이에 잉크로 한 줄 남긴 값이 아니라, 다 이루신 값입니다(요 19:30). 그가 순종함으로, 그가 통곡과 눈물로 기도함으로, 그가 자신을 거룩하게 하심으로 온전하게 이루신 것을 단번에, 영원히, 온전히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온전히 주심은 그저 이름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생명과 온전한 행실로 나아가는 것을 주신 것이죠. 이것이 바로 칭의도, 성화도 은혜이다. 칭의가 있는 곳에 성화가 필히 따른다. 바로 칭의는 성화의 시작이다. “결정적 성화” 혹은 “확정적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칼빈이 이렇게 강조한 게 바로 이 부분이라는 거예요.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에 이런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존 머레이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칼빈이 이야기한 거란 말이에요, 처음에. 이것이 바로 이 부분이란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무름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사함 받고, 그것은 단지 죄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도, 성화도, 살아남도, 살아감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서 은혜로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더 잘 누리는 것이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 누리는 것이 바로 성화란 말이에요.
가장 잘 누리는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에요.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고 은혜의 신학이에요. 윤리 아닙니다. 윤리 아니에요. 요새 너무 장안의 설교가 윤리 설교예요, 심리 설교이고. 아닙니다. 우리는 “의의 전가”입니다. 우리는 “법정적”입니다. 우리는 “무름”입니다. 그의 것을 내 것 삼아 주심으로, 우리가 더 많이 누림으로 더 많이 드러내는, 사랑을 누린 만큼 사랑하는 이것이 은혜의 질서란 말이에요. 이건 선순환입니다, 악순환이 아니라. 내 공로로 세속적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악순환이에요. 그것이 기독교가 힘이 없어지고 은혜가 약화되는 거예요.
그러나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칼빈은 여기서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로마 가톨릭은 벌써 은혜와 공로를, 두 가지를 세워 놓고 이분법적으로 본단 말이에요. 즉자(卽自), 대자(對自)같이 본단 말이에요. 그래서 뭔가 이게 합해져 가지고 결국은 무슨 공로를 이루고 이렇게 보는데, 우리는 뭐예요? 모든 것이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사랑이 나오고, 은혜 안에서 생명이 있고, 은혜 안에서 생활이 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이 우리의 도피처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특권이고, 하나님의 자비만이 우리의 도피처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지만, 행위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바, 칭의에는 필히 행위의 열매가 따릅니다.
두 번째,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새 생명 가운데 빛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행하게 하십니다.
셋째,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기초하고,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지향합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의는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값없이 이루신 것은 아닙니다. 대속의 무름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특권입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순종함으로, 죄 값을 치르시고 순종함으로 우리를 무르셨기 때문에,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심은 우리가 살아나고 살아감에, 구원의 전 과정의 은혜, 칭의와 성화의 은혜에 다 미치는 것입니다.
130강 결론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지만 행위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바. 칭의에는 행위의 열매가 따릅니다.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정결케 하시며, 새 생명 가운데 빛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행하게 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기초하고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지향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값없이 주어진 것이나, 그리스도가 값없이 이루신 것은 아닌바, 대속의 무름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특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