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강 [3.15.5-8] 구원의 유일한 질료인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와 거룩함이 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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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 3.15.5-8. (3권 459-466쪽)



구원의 유일한 진료인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와 거룩함이 되심


     칭의에 있어서의 네 가지 원인, 이것은 단지 칭의의 네 가지 원인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네 가지 원인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이고, 이 생명은 그저 생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함의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은 필히 거룩하게 하심입니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가 모두 은혜이고, 그래서 칭의와 성화가 견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그 의, 법정적 의, 언약적 전가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의 의”, 그 의가 칭의와 성화에 동일하게 미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칭의를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의 의”를 떠올려야 됩니다. “의의 전가”, 언약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로서 다 이루신 의(요 19:30), 그 다 이루심은 자기 자신을 주심, 소유가 아니라 존재를 주심, 그 자기 자신을 주신 의, 자기 자신을 주신 것이 그저 이름만 주신 게 아니라, 신분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과 함께 생활을 주심.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통하여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되고, 의지해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돌려야 합니다. 


[『기독교 강요』, 3.15.5.]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를 베푸시고 의롭게 우리를 삼아 주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의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신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질료인이 그리스도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은 바로 그 의는 그리스도 자신을 주신 의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을 단지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의를 돕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의를 주시는 게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가”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재료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어떤 기반을 마련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내가 생명이요, 내가 부활이요(요 11:25; 14:6), 내가 갈하지 않는 생수요(요 4:14; 7:38-39), 내가 영원한 양식이요(요 6:35).”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의가 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자신을 주시기 위하여. 그렇기 때문에, 소유가 아니라 존재를 주시기 위함이시기 때문에, 친히 성자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영원 전에 작정하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의 도, 곧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엡 1:4), 그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심으로,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 것 삼아 주신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거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죠. 
     그래서 우리 자신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 하나도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 그 동기도, 동력도, 그 형상도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따라서, 그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상속자 삼아 주셨다. ‘자녀이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롬 8:17), 우리를 그의 상속자 삼아 주시고, 지체 삼아 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 되고, 아들과 아버지가 한 생명이고, 아버지의 것이 다 아들의 것이듯이, 우리도 자녀의 자리에 세우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떨어졌던 나무가 접을 붙이면, 물관, 채관에 모든 양분이 흐르고 물이 흐르듯이, 그래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 가지고 온전히 누리게 되는 이것이 화목이란 말이에요, 온전히 누리게 되는. 한 존재로서 누리게 되는, 한 생명으로서 누리게 되는, 이것은 소유가 아니란 말이에요. 접붙인다는 것은 “존재”란 말이에요. 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나를 자르고 또 주님도 자르시고, 서로 자른 곳을 맞붙여 가지고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연합하고 동참하는 은혜,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고, 이것이 의의 전가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할 때는, 이미 3권 1장, 2장에서 이 부분을 언급했습니다마는, 바로 ‘의의 전가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심,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고전 1:30), 그가 ‘~이다’, 그는 의이고, 거룩이고, 지혜인데, 그가 내 것이 되므로 그가 우리의 의가 되고, 그가 우리의 거룩이 되고, 그가 우리의 지혜가 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살고, 함께 죽고, 함께 의롭고, 함께 거룩하고, 함께 지혜롭고, 또 ‘그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히신지라’(엡 2:6; 계 3:21), 하늘 권세를 누리고, 그리고 그와 함께 날마다 자라가고, 이런 것들이 전부 다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오직 전적으로, 그러니까 내 것이 없고, 내 것은 전부 그의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하신 바 안에서.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은혜, 전적 은혜입니다. 

[『기독교 강요』, 3.15.6.]


     이러므로 그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요일 5:12), 그 아들을 누림이 없이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아들을 누리는 방식은 그의 의를 내 것 삼는 의의 전가, 그것은 바로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것이 내 것이 되는, 그래서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죄악이다. 그에게 접붙임을 받지 않고, 그를 믿어서 그의 의를 내 것 삼음이 없이, 이것은 마치 죽은 나무에서 열매가 나길 바라는 것, 혹은 악한 나무, 돌감람나무, 이런 데서 좋은 감람 열매를 얻기를 원하는, 하품(下品) 들포도나무에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야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과 선함과 지혜와 그리스도의 신령한 것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섞여서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접붙임이라는 것은 존재가 거기에 가서 덧붙여 있는 것이지 존재를 나누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것은 소유 개념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로마 가톨릭의 궤변론자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공로는 공로를 베푸신 게 아니라 공로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자질이 있는데, 그 우리의 자질에 비추어서 우리의 자기 개발을 할 기회를 준 것이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칼빈이 자주 표현하듯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이고,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이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이고,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귀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2),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요 5:24; 골 1:13), 영생의 소망 가운데, 기업 가운데 상속자가 되고(딛 3:7),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돼서 하나님 안에 함께 거하는 그 역사가 우리에게 있고(요 17:21-23; 14:20),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 우편에, 하늘에 앉게 되고(엡 2:6; 계 3:21), 우리의 처소는 하늘에 있고(고후 5:2), 이런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심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의의 전가는 단순히 우리의 자질에 따라, 능력에 따라 행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의 자체를 주시는 것입니다. 의 자체를 주시는 거예요. 그 의는 곧 그리스도 자신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에요.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살아요(갈 2:20). 

당신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게 되는 순간 동시에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 하늘의 상속자, 의의 동참자, 생명의 소유자가 된다. 그리고 당신은 공로를 얻을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공로가 당신에게 교통되기 때문이다(simulatque per fidem insertus es Christo, iam filius Dei factus es, coelorum haeres, iustitiae particeps, vitae possessor; ac … non adeptus merendi opportunitatem, sed omnia Christi merita, siquidem tibi communican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5.6.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 상속자요, 의의 동참자요, 생명의 소유자가 되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 삼아 주심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공로를 얻을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공로 자체를 주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와 하나가 되신다. 이것이 ‘의의 전가’입니다. 그래서 ‘~이다.’ ‘빛이다’(요 8:12), 그러면 그 빛이 내게 오시는 거고, ‘생명이다’(요 11:25), 그 생명이 내게 오시는 거고, ‘부활이다’(요 11:25), 그 부활이 내게 오시는 거고, 생명의 떡이요(요 6:35, 48), 생명의 갈하지 않는 음료요(요 6:55), 그 떡과 음료가 내 것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는 “직접 전가설”이다, 신학적으로, “객관설”이다. 그리스도 자신의 것을 우리 것으로 주십니다. 중간에 뭔가 개입을 해 가지고 가공을 하고 변화시키고 사제가 기도를 해서 능력이 생기고 그런 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전가’예요. 그리스도 자신이, 그것이 그의 의이고, 그의 거룩이고, 그의 지혜이고, 그의 선하심이고, 그의 공로이고, 값이고, 그것이 우리의 것으로 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것이 내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삼아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5.7.]


     그러므로 우리 안에 믿음은 전부 공로 없는 믿음이죠. 내 공로 없는 믿음이죠. 왜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내 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여기에서 역시 ‘형성된 믿음’이다, ‘형성되지 않은 믿음’이다. 이런 두 가지로 구별해서 공로가 있는 믿음은 뭔가 모양을 갖춘 믿음이고, 뭔가 제 모습이 있는 믿음이고, 공로가 없는 믿음은 아직까지 덜 갖춰진 믿음이다. 이렇게 또 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합당치 않죠. 
     우리의 믿음은 곧 예수를 믿는 것이요, 예수를 믿음은 우리의 공로 없음을 믿는 것이죠. 제일 원인이 하나님의 사랑, 질료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공로가 없습니다. 
     피터 롬바르두스도 일전에 우리가 보았지만, ‘우리에게 은혜가 역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자질, 사랑, 그것이 발휘되는 어떤 도움의 요소로, 아니면 어떤 계기로서 은혜가 주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오직 은혜, 전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가 다 무마되는 거죠. 없어지는 거죠. 무화(無化)되는 거죠.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뭐라고 합니까? ‘우리 자신의 공로는 그것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에게 아무 공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니까 칼빈은 롬바르두스를 “성경의 빛을 보지 못한 소경이었다.” 이렇게 아주 강하게 비판합니다. 성경의 빛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한다. 그러니까 그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심으로 그 은혜 가운데 생명을 누리고 생활을 누리고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게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죠. 
     로마 가톨릭의 소르본 학파는 끊임없이 우리 양심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양심에는, 우리 공로가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여기는 것이 양심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이런 것은 거듭나지 않은 세속적인 양심이에요. 우리의 양심은 은혜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 가운데 평안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양심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서 무익한데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불안합니까? 내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이 도와줘서 내가 구원을 얻었다고 해야 양심이 평안합니까? 로마 가톨릭의 소르본 학파, 궤변론자, 사색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뭔가 인간이 한 게 있어야 우리 인간의 평안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5.8.]


     우리에게 뭔가가 있어서 평안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우리에게 뭔가 공로가 있어서 시작이 된다면 우리는 시작도 못합니다. 준비한다고 하지만 준비조차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공로라도 있어야 받아들인다면,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이는 그러한 공로조차도 없습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받아들일 그릇도 하나님이 마련하십니다. 하나님이 사실 닦아 주십니다. 그래서 죄를 없이 해 주시고 그 공간에 의를 채워 주십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긍휼의 그릇”이다(롬 9:23). ‘vas misericordiae’, 긍휼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을 채워 주는 그릇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 요한일서 3장 9절에 말한 것은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받아주시고 은혜로 눈감아 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그래서 깨끗하게 해 주심으로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깨끗해서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이 자기 부인, 십자가 지는 것, 이 모든 것이 의의 전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보이신 모든 이 모범이 경건과 거룩함에 속한 의무를 아우르는데, 그리스도가 모범인 것은 단지 모범이라서 모범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드러내게 하시는, 빛이 들어와서 빛을 내는 것이고, 향이 들어와서 향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동참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을 드리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호흡을 하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듯이 생명도 나타나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죽고 사는 부활의 도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것같이 생명 또한 짊어지고(고후 4:10), 그리고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롬 6:8; 갈 2:20),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사 모든 것에 뛰어나게 하신 것과 같이(빌 2:9-11; 엡 1:20-23), 우리도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 2:12; 계 5:10), 그가 맏아들이요 우리도 그와 함께 형제자매로 살게 할 것이요(롬 8:29; 히 2:11), 그가 아버지와 하나이고(요 10:30) 아버지와 항상 내 안에, 그 안에 함께 계시듯이(요 14:20; 17:21-23), 우리도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롬 8:38-39).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우리가 이전의 것이 지나가고 새것이 된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이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진 바 되었다. 사랑의 나라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바 되었다(골 1:13).

[결론]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터이자 시작이시고 완성이십니다. 그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며 그가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십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단지 공로를 세울 기회가 아니라 공로 자체이시고,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 하늘 상속자, 의에 동참하는 사람, 생명의 소유자가 됩니다. 
     셋째, 선행의 공로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니, 선행이 효과적으로 작용해서 사람이 믿음으로써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이 작용해서 믿음에 이르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누리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이 긍휼의 그릇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쓰시는 것조차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맏아들이 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그를 모범 삼고 그의 경건과 거룩함에 이르는 것,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 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29강 결론


  1.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터이자 시작이며 완성이시고, 그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며, 그가 우리의 지혜, 의로움, 거룩함이십니다.
  2. 그리스도는 공로를 세울 기회가 아니라 공로 자체이시며,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 하늘 상속자, 의의 동참자, 생명의 소유자가 됩니다. 
  3. 선행의 공로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니, 선행이 효과적으로 작용해서 사람이 믿음으로써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4. 하나님이 긍휼의 그릇으로서 깨끗하게 하셔서 쓰시는 것조차 은혜이니, 그리스도와 함께 맏아들이 되고 그와 함께 죽고 살며 그를 모범 삼아 모든 경건과 거룩함에 이름이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