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강 [3.15.1-4] 행위의 가치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됨

관리자
조회수 22




128 | 3.15.1-4. (3권 451-459쪽)



행위의 가치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됨


[『기독교 강요』, 3.15.1.]


     우리가 구원의 네 가지 원인에서 보았듯이, 구원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로부터는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구원의 제일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형상인이라고도 하고 동기인, 동력인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다, 혹은 “자비”이다. 두 번째, 구원 자체가 무엇인가? 구원의 질료가 무엇인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이다. “공로”이다. “값”이다. “은혜”이다. 혹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고 세 번째, 구원의 도구는 무엇인가? 혹은 형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분명히 도구로서 있어야 되지만, 믿음이 질료는 아니다. 곧 믿음이 의는 아니다. 곧 믿음에 공로는 없다. 그리고 네 번째, 이러한 구원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렇게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 구원은 분명히 거저 우리에게 주는 거지만, 그저 있는 것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 그의 순종, 그 값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누리고,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대상이 무엇인가가 정확해야 됩니다. 대상이 정확하지 않으면 결국 내 공로입니다. 내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은 ‘대속의 은혜’이고, ‘대속의 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으로는 그것을 삼을 수가 없습니다. 내 것으로는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 그것만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이라는 것은 이미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내 공로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온전히 누리게 되는 그 유익함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것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이죠. 이 믿음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cardo’이다. 중요한 ‘문지도리’이다. 칼빈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이미 우리가 보았습니다. ‘칭의 교리가 구원에 있어서의 문지도리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 강요』, 3.15.2.]


     우리는 ‘공로’라는 말, ‘meritum’이라고도 하고 ‘promeritum’이라고도 합니다. 공로라는 말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공로라는 것은 분명히 선행으로부터 나옵니다. 행위로부터 나옵니다. 행위가 가치를 가질 때 공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행위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행위자가 누군가를 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은 자원하는 행위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중심이 벌써 타락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본질상 오염되고 본질상 무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공로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무엇이 있어도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요? 우리 자신이 공로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담을 통하여 파멸에 이른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침묵을 지키게 하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리게끔 하자(humana merita hic conticescant, quae perierunt per Adam, et regnet Dei gratia, per Iesum Christum).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5.2.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담을 통하여 파멸에 이른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침묵을 지키게 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리게끔 하자.’ 우리가 행위만 보면 ‘저 사람 착한 사람이야. 저런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야 돼.’ 이런 말이 나올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닙니다. 왜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본질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공로는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게 하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는 것이 있다면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이다. 우리가 칭찬 받는 것은 잘 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값없는 부르심에 뒤따르는 무엇이라면 그것은 갚음이며 빚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은 은혜이자 은총이며 후한 베푸심이다(nostra si qua sequuntur Dei gratuitam vocationem opera, retributio sunt et debitum; at Dei munera, gratia et beneficentia et largitionis magnitudo). -크리소스토무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5.2.

     크리소스토무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값없는 부르심에 뒤따르는 무엇이라면 그것은 갚음이며 빚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선물이라면 그것은 은혜이고 은총이고 후하게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어떤 행위에 따르는 빚, 어떤 갚음이 필요한 빚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공로에 대해서 과신하지 않는 것이 충분한 공로가 되듯이 공로가 없는 것이 심판을 위하여 충분하다(ut ad meritum satis est de meritis non praesumere, sic carere meritis, satis est ad iudicium). … 이러하므로 마음을 기울여 공로를 지니도록 하라. 그것을 지니게 되거든 그것이 주어진 것임을 알라. 열매를 곧 하나님의 자비를 소망하라(proinde merita habere cures; habita, data noveris; fructum speres Dei misericordiam, et omne periculum evasisti, paupertatis, ingratitudinis, praesumptionis). -베르나르두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5.2.

     그래서 베르나르두스는 또 여기서 이전에 보았던 말을 한 번 더 반복합니다. ‘공로에 대해서 과신하지 않는 것이 공로가 된다.’ 그래서 우리의 공로는 뭐예요? 공로 없음을 내놓는 것이 공로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기울여 공로를 지니도록 하라. 그런데 그 공로가 주어진 것으로 알라. 열매를 하나님의 자비에 두라.’ 공로를 헤아리세요. 그러나 내 공로를 헤아리지 말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공로를 헤아려라. 공로를 헤아리되 주어진 공로 곧 은혜를 헤아리라. 그래서 나로 말하면 공로가 없다고 말하라. 우리 교회로 말하면 공로가 없다고 말하라. 그것이 복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유익하다’라고 베르나르두스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곧 공로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나마 우리에게 공로라는 것입니다. 오직 누림, 전적 누림, 그 가운데서 오직 감사, 전적 감사 하는 그 감사가 우리에게 공로라는 것입니다. 즐겁게 누리고 기뻐하고 영광 올리고, 곧 공로가 아니죠, 그것은. 여러분, 기뻐서 웃는 게 공로가 될 수 있습니까? 즐거워서 찬송하는 게 공로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공로가 굳이 있다면 감사하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베르나르두스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강요』, 3.15.3.]


     성경은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무익한 종이라 하라.’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이야기했어요. ‘충분히 누린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거저 선물로서 주어지신 것이다. 무엇이든지 행위 중에 공적으로 삼을 만한 것이 있는 것은 모두 은혜이고 한 방울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궤변론자 로마 가톨릭은 은혜가 행위에 섞여 있다고 이야기하고 은혜가 행위를 행위답게 한다고 한단 말이에요. 그것은 결국 내 공로죠. 그래서 잉여 행위, 잉여 공로도 이야기하고,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궤변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더한 곳에 오히려 내 그릇이 더 비어 있는 것이죠. 더 우리에게 채워짐을 아는 거죠. 내가 잘나서 내 공로로 은혜가 역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없고 은혜가 역사하는 거죠. 내 빈 곳에 은혜가 채워지는 것이죠. 

은총을 실제로 즐기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방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상을 우리의 것으로 주장하거나 선의 조성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돌릴 찬송을 탈취하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취하되 여전히 그에게 속해 있는 것처럼 여기는 데 있[다](Hic enim legitimus demum est fruendi beneficii usus, si nec plus arrogamus nobis quam datum est, nec boni autorem sua laude fraudamus; quin potius sic nos gerimus ut residere quodammodo apud eum videatur quod in nos transtul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5.3.

     선행에 보상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에요. 곧 보상도 은총이다, 은혜이다. 그러므로 선행에 보상이 따른다는 것, 보상도 은혜라면 선행도 은혜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선한 사업을 힘쓰고 이루고 하는 것도 은혜이다. 하나님의 그 선하심 자체로부터 나온 것이 우리에게 돌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찬송이 끊이지 않게 하라. 찬송을 빼앗기지 않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강요』, 3.15.4.]


     “하나님을 향한 공로”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erga Deum) 이러니까 꽤 좋아 보이고 꽤 달콤하게 들릴지 몰라도 하나님을 향한 공로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은혜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비로서 우리에게 베푸실 만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게 할 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이지, 우리가 마땅히 받을 만한 공로가 있고, 어떤 믿음을 공로로 삼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감찰하시되, 하나님의 권리로 감찰한다면 우리의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대하심, 베풀어 주심, 후히 있게 하심으로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우리의 것을 살펴보십니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상기한다면, ‘나에게서 나의 것을 찾지 마시고 주님의 것을 찾으소서.’ 주님은 우리를 감찰하실 때 우리의 것을 감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자신의 것을 감찰하신다. 그것은 곧 은혜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죠. 값없이 베푸신 것이죠. 그것을 우리는 누리게 되고 그 누림에 있어서 순수함과 완전함, 그것도 하나님이 헤아리시는 것이죠. 그것조차도 관대하게 받아들이시는 거죠. 사실 우리가 영광을 올리고 감사하는 것도 완전할까요? 아니죠. 감사도 받아주시니까 감사한 거고, 영광도 받아주시니까 영광인 거죠. 우리의 행위는 공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삶과 또 이후의 삶 가운데 무한한 은총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삶은 은혜요, 천상의 삶은 상급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이 땅에서 은혜로 다 주어지고 누리고, 그 가운데 누리지만 우리는 여전히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아요. 누림조차도 완전하지 않다고요. ‘큰일을 하고 그런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나, 누리는 것은 그래도 누리는 건데 마음껏 확실하게 누리면 되지.’ 아닙니다. 잘 누리는 것, 그것이 이 지상의 은혜의 삶이고, 그것이 감사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그것이 또 상급이라는 거예요. 상급은 잘 누리는 겁니다. 상급은 내 공로가 아닙니다. 

나는 배운 자들이나 그렇지 않으면 경건한 자들이 선행은 이생에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은혜를 받을 만하지만 오직 믿음의 상급만이 영원한 구원을 받을 만하다고 구별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Non … a doctis alioqui ac piis viris positam distinctionem recipio, meritoria esse bona opera earum quae nobis in hac vita conferuntur gratiarum; solius fidei praemium esse aeternam salute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5.4.

     ‘선행은 이생에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은혜를 받을 만하지만 오직 믿음의 상급만이 우리에게 부여할 만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덧붙여서 은혜가 주어진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은 신인의 합력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에 어떤 합력적 공로가 있고, 그리고 은혜가 역사해서, 결국은 뭐예요? 내 공로가 은혜로 완전해진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믿음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흔적이 알미니우스에게 나타난단 말이에요. 오늘날 웨슬리안이라든지 루터란에게도 이런 흔적이 나타난단 말이에요. 우리는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는, 받아들이는 그런 공로는 없습니다. 전적인 은혜로, 전적인 자비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주어집니다. 
     우리는 언제나 수고의 보상과 싸움에서의 면류관을 하늘의 자리에 두도록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면류관은 하나님이 씌워 주시고, 하나님이 상급 주신다. 그래서 누리는 자는 더 누릴 것이요, “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입니다(요 1:16). 우리가 인생의 논법으로 이야기하면, 누리는 사람은 이제는 좀 애를 쓰고 살아야 될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있는 자는 더 풍족하게 누리고(마 25:29; 눅 19:26), 적은 일에 충성하였음에 많은 것을 맡긴다(마 25:21, 23; 눅 19:17).’ 많은 것을 맡긴다 하니까 공로입니까? 달란트에 대해서 달란트를 주신 거잖아요. 앞에 달란트도, 달란트가 무엇입니까? 선물 아닙니까? 선물 위의 선물이로다. 작은 것을 선물로 주셨는데 더 큰 것을 선물로 주신다. 그것이 선행입니다. 선행조차도 선물이니까요, 은혜니까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주를 위해 사는 것이 복되고 은혜이고, 또 천상에서 그것이 상급이 되는 것이죠.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사야 55장 1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베푸심, 도우심, 복, 이런 것은 순전하게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라고 하니까 우리가 주가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여기도 벌써 이제 칭의와 성화가 연결되죠. 우리 생명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의 모든 것, 이런 것이 하나님의 어떠하심, 하나님의 영예(honor), 그것에 합당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될 영예이고, 그 가운데 우리가 누리게 되는 그러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이야기할 때, 단지 우리에게 법정적으로 주어진다고 해서 그저 기록, 잉크로 기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온전하게 하시는, 그래서 상급조차도 은혜로서 베풀어 주시는, 이것이 바로 칼빈이 이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가운데, 오직 믿음 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질료가 되고, 믿음이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모두 은혜로써 주어집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선행의 공로를 말하는 것은 헛됩니다. 은혜 플러스 선행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오직 은혜입니다. 그러면 선행은 뭘까요? 은혜의 열매입니다. 은혜로서 선행이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행도 은혜고, 그 선행에 따른 상급도 은혜입니다. 행위의 의를 말하는 공로는 값없는 부르심과 값없는 베푸심에 배치됩니다. 
     세 번째, 우리가 공로를 칭하는 것은 공로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행여라도 내가 공로를 말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공로 없음을 말하기 위한 공로입니다. ‘내가 이것을 했습니다. 이게 내 의입니다. 내 자질입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오직 전적인 내 뜻입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공로를 말할 때는 공로 없음을, 혹 공로를 자랑할 때는 공로 없음을 자랑하라, 무슨 말인가요?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자랑하라,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찬미하기 위해서 의를 이야기하고, 거룩을 이야기하고, 선을 이야기하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우리가 높이는 것입니다. 
     넷째, 선행에 대한 공적은 하나님과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반, 우리 절반, 이렇게 될 수 없습니다. 선행의 보상과 상급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써 값이 매겨집니다. 하나님은 값 주고 사신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베푸신 선물들을 친히 값이 있다고 그것을 받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급도 은혜입니다. 은혜도 은혜고, 은혜로 인한 상급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128강 결론


  1.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와 교통 가운데, 오직 믿음 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선행의 공로를 말함은 헛된바, 행위의 의를 말하는 공로는 값없는 부르심과 베푸심의 은혜와 배치됩니다.
  3. 공로를 칭함은 공로 없음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찬미하기 위함이니, 은혜가 앞서지 않는 공로는 그 말조차 그릇됩니다.  
  4. 선행에 대한 공적은 하나님과 나눌 수 없으며 선행의 보상과 상급조차 하나님의 선하심으로써 값이 매겨지니, 하나님은 값 주고 사신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값없이 베푸신 자신의 선물들에 친히 값을 매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