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강 [3.14.17-21] 선행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징일 뿐 구원의 원인이 아님

관리자
조회수 18




127 | 3.14.17-21. (3권 442-450쪽)



선행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징일 뿐
구원의 원인이 아님


[『기독교 강요』, 3.14.17.]


     ‘구원의 은혜’, ‘전적인 은혜’,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것으로 여겨짐으로, 삼아짐으로 누리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조건을 찾을 수 없고, 공로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흔히 이 부분에 대해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뿐만 아니라 로마서 주석 등에서도 구원의 네 가지 원인이라는 개념으로 이 부분을 설명합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효과인(效果因)이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그가 우리를 향하여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한다(Efficientem enim vitae aeternae nobis comparandae causam ubique scriptura praedicat patris coelestis misericordiam et gratuitam erga nos dilectionem). 
분명히 질료인(質料因)은 자기의 순종으로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신 그리스도이시다(materialem vero, Christum cum sua obedientia, per quam nobis iustitiam acquisivit).
또한 형상인(形相因) 혹은 도구인(道具因)이 있는바, 이는 믿음 외에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Formalem quoque vel instrumentalem quam esse dicemus nisi fidem?) … 
목적인(目的因)에 관해서 사도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의 증거와 그의 선하심에 대한 찬양에 있음을 증언[한다](finalem testatur apostolus esse, et divinae iustitiae demonstrationem, et bonitatis laude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4.17.

     첫 번째, 구원의 효과인(效果因)이다. 효과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동기인(動機因)이라고도 합니다. 혹은 동력인(動力因). 그러니까 구원의 동기가 무엇인가? 구원의 동력이 무엇인가? 구원이라는 것이 어찌하여 그것이 작용하게 되느냐? 그것은 첫 번째, 이 구원의 효과인은 바로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동기가 무엇인가? 동력이 무엇인가? 혹은 효과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왜 그런 것이 그렇게 있게 되느냐?
     두 번째는 질료인(質料因)이라고 합니다. ‘질료’는 ‘무엇’을 뜻합니다. 무엇을 누리느냐 이거죠, 우리가, 무엇을.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지느냐? 배고픈 사람을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것은 동기입니다. 그러면 밥을 주잖아요. 그것을 질료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의’ 자체, ‘공로’ 자체, ‘값’ 자체, 그것이 바로 질료인입니다. 질료인은 그러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해도 되겠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주셨으니까. 그래서 질료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값,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죠. 
     그러면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을 보고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해서, 이것이 동기죠. 밥을 준다, 질료죠. 그러면 무엇으로 그가 밥을 받고 먹습니까? 그릇에 주죠. 혹은 숟가락으로 먹죠. 그것을 도구라고 합니다. ‘도구’다. 그래서 도구인(道具因). 혹은 그 밥을 어디에 담아서 주잖아요. 형상인(形相因). 그러니까 밥을 그저 막연하게 밥알을 주는 게 아니라 형상을 만들어서 주잖아요. 그래서 도구에 담아서 주잖아요. 그것이 도구인이란 말이에요. 이것이 무엇인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에 밥을 담아서 사랑으로 주시는데, 사랑이 구원의 효과인, 혹은 동기인, 동력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 그것이 구원의 질료인이고, 그리고 믿음이 구원의 도구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금방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밥그릇, 숟가락은 밥이 될 수 없죠. 곧 도구인은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숟가락, 밥그릇이 우리를 배불리 하지 못하잖아요. 그걸 아셔야 돼요. 그래서 숟가락, 밥그릇은 있어야 돼요, 밥을 먹기 위해서. 그래서 믿음은 있어야 돼요. 그렇지만 믿음이 공로는 아니에요. 믿음이 값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구원의 효과인, 질료인, 혹은 도구인, 도구인은 형상인이라고도 했어요. 
     이것이 어디에 잘 나와 있는가 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것이 바로 구원의 동기, 동력, 형상,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이 질료, 그리고 ‘그를 믿는 자마다’, 이것이 도구인입니다. 구원의 세 가지 원인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요절이죠. 
     그래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랴 함이라.’ 자, 이 세 가지와 함께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인(目的因)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증거와 선하심에 대한 찬양에 있다.’ 그래서 구원의 네 가지의 원인, 효과인, 질료인, 도구인, 목적인이 전부 다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죠, 죄를 범하였음으로.’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롬 3:23-24). 그리고 에베소서 1장 6절, 이 부분이 뭐예요? 바로 하나님의 사랑, 효과인. 그리고 구원의 기원이자 첫 번째 원천인 하나님의 자비가 여기 있다면, 바로 효과인이 하나님의 자비, 사랑에 있다면, 그 사랑 자비 가운데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그 자체, 의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이다’(롬 3:24), 이것이 구원의 질료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 그것을 로마서 3장 25절에 ‘믿음으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구인이다. 구원의 도구인이다. 성경에는 계속 이런 게 나옵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이것이 바로 목적인이죠. 
     그래서 칼빈은 여기서 다시 한번 바로 구원의 네 가지 원인이 무엇 하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그 동기도, 그 질료도, 그 도구도, 그 목적도 전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그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우리 자녀들의 하나님과의 화목,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도 이러한 부분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3분의 1, 뭔가 절반, 그것을 감당하고 하나님이 나머지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질료인은, 의는 그리스도밖에 없다. 형상인은 혹은 도구인은 믿음인데 그 도구인, 믿음은 공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믿어서 받아들이는 것도 공로라고 했잖아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지 않습니까? 믿어서 받아들이는 것을 공로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gratia acceptans’, 받아들이는 은혜의 받아들이는 공로가 나에게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칼빈은 아니라고 합니다. 믿음에 무슨 공로가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주었는데 숟가락으로 먹었다고 그 숟가락에 공로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저 베푸신 은혜를 누리는 것이죠. 그래서 질료인과 도구인, 이런 것을 혼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4.18.]

     선행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무엇 하나 나오지 않습니다. 전부 은혜로부터 시작돼요. 살아 있는 것은 생명이고 생명이 은혜라면, 살아 있는 자의 거룩한 삶은 전부 은혜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죠. 은혜로 시작했다가 공로로 마칠 수 없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칠 수 없죠.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적으로 베푸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새롭게 하고, 정죄로부터 은혜로 우리를 옮기시기 때문에 그 가운데 우리의 양심의 평강을 주시고, 또 순수한 마음도 주시고, 위로와 확신도 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 바라보게 하시고, 그리고 그 푯대를 향하여서 완성의 때까지 나아가고, 모든 것을 누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충만히 우리가 누리고, 누리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닮아가고, 이러한 것들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은혜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증언’이 된다는 것입니다. ‘testimonium’,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 내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의 증언이고, 내 생활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우리에게 베푸시는 거룩하심에 대한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4.19.]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의 공로를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고, 우리의 생명과 생활 전체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모든 것은 값없는 언약 가운데서, 약속 가운데서 의의 전가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빛을 비추는 자리에서 빛을 증언하는, 그리고 빛을 비추는 존재로서 빛의 자녀인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자녀이다. 그리고 누리는 자녀이다, 언약의 자녀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누굴까요? 바로 여호와께 의뢰하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누림으로 증언하고 증인이 되고 일어나 비추는, 빛이 임함으로 비추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은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거듭남의 열매들이 우리에게 풍성히 맺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로, 그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역사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가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비추는 그런 열매들을 우리에게 맺습니다. 그러니까 이 열매들도 은혜라는 것이에요. 열매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무가 은혜인데 열매가 어떻게 공로가 되겠습니까? 열매는 나무로부터 나오는데. 칭의가 은혜인데 어떻게 성화가 공로가 되겠습니까? 생명이 은혜인데, 생명으로 살아가는 게 생활인데, 생명이 은혜인데, 어찌 생활이 공로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개혁신학의 칭의와 성화, 생명과 생활, 살아남과 살아감의 은혜, ‘이중적 은혜’의 교리인 것입니다. 바로 생명이 생활의 시작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약속의 확실성(certitudo)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객관적으로 ‘너는 내 것’이라고 불러 주시는 인 침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역사하는데, 생명의 역사가 있고 생활의 역사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값없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 ‘favor gratuitus’, 바로 값없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 그것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명은 물론 생활도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삶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호의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어나 빛을 비추어라’, 증인이 되고 증언이 되는 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를 우리가 비추기 때문에, ‘그의 충만한 데서 우리가 충만하게 누리기 때문에’(엡 3:19),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로마서 8장 37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14.20.]


     그래서 다시 우리가 되새기지만, 칭의의 생명과 성화의 생활이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이지 않습니다. 역동적입니다. 구별은 되지만은 분리되지 못합니다. 분리되지 않습니다. 왜? 의가 하나이기 때문에. 생명의 의와 생활의 의가 전부 그리스도의 의, 그 가운데 있기 때문에.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멸시치 마옵시고, 제 안에서 저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보시옵소서. 저의 것을 보신다면 주님은 그것을 정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의 것을 보신다면 주님은 그것에 월계관을 씌우실 것입니다. 무슨 선행이든 저의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opera manuum tuarum ne despicias; opus tuum in me vide, non meum; nam si meum videris, damnas; si tuum videris, coronas: quia et quaecunque mihi sunt opera bona, abs te sunt).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4.20.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멸시치 마옵시고 제 안에서 제 것을 보지 말고 주님의 것을 보시옵소서. 저의 것을 보신다면 주님은 그것을 정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나의 것을 찾지 말고 주님이 주신 것을 찾으라.’ 이것은 계속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안에서 아무리 선행에 있다고 해도 우리의 것으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죄의 소용돌이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4.21.]


     구원의 네 가지의 원인, 그 구원의 효과. 효과는 뭐예요? 우리가 추운데 따뜻하게 하려고 그러면 태양이 떠야 되잖아요. 그것이 동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왜 칭의가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그 동기, 왜 태양이 그렇게 열을 내서 우리를 따뜻하게 해야 되느냐는 그 효과적인 동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질료는 아들의 순종이고, 아까 공로라고 해도 되고, 값이라고 해도 되고, 순종이라고 해도 되고, 의라고 해도 되고, 그런데 그리스도는 자신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해야 되고, 그것이 질료인이고, 그리고 도구는 바로 믿음. 이 믿음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혜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믿음이 도구이고, 그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영광에 있다. 이 구원의 네 가지 원인이 전부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질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끄심 가운데, 우리를 택하시고, 또 정한 뜻에 따라서 부르시고, 그리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로마서 8장 30절에 그 계속되는 구원 과정에서의 은혜, 이것이 전체적으로 의의 전가로써, 그 의로써, 그리스도의 의로써 우리에게 역사한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 하나님의 선물, 그것은 영생’이라고 로마서 6장 23절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인과 관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은혜로서 주어집니다. 굳이 우리는 생명이 있고 생활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떤 인과 관계가 아닙니다. 나에게 생명이 있으니까 그 다음에 생활이 있다든지 이런 게 아닙니다. 다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된 것이요, 작정된 것이요, 생명도 생활도 다 은혜로서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삶에서는 그것을 순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지, 인과 관계를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인과 관계를 이야기해서는 안 돼요. 인과 관계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어요. 불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서 인과 관계를 찾지 말고,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인과 관계를 이야기하면 다시 공로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로 시작하고 은혜로 계속되는,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그것이 칭의와 성화를 연결시켜 주는, 그 원천이 무엇인가? 그 후하심의 기원이 무엇인가? 바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택하셔서 자녀 됨에 마땅하게 누리게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날마다 친히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선물들을 사랑하시는데, 그 원천은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다.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것을 우리가 값없이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베풀어 주시고 우리가 누리게 하시는, 달리 말하면, 그것을 기쁘게 받아주시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받아 누리는 거죠, 사실은. 우리가 몇 시간 전에 보았듯이, 바로 ‘acceptio gratuita’, ‘값없이 받음’. 이것이 우리 편에서는 받아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값없이 받아 주심이 되죠, 우리를. 우리는 값없이 받아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이 받아 주시는 거죠.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받아 주시는 것은 아들의 값을 치르는, 하나님이 헤아릴 수 없는 값을 치르고 받아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값없이 받아 누리는 것은 그야말로 값없이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값없는 것으로 받지만, 가장 값진 것을 값없이 받는 것이죠. 

[결론]


     자 이 부분을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구원의 효과인 효과인은 동기 혹은 동력이라고도 했습니다. 구원의 효과인은 하나님의 자비와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기원과 원천이 있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자비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구원의 질료인은 자기의 순종으로 의를 다해 이루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 그리스도의 값, 그리스도의 공로, 그리스도의 은혜, 이것이 다 동의합니다. 이게 구원의 질료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라고 해도 되고,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속량의 값으로 자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구원의 형상인 혹은 도구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질료는 아닙니다. 이러한 조건을 우리는 도구 혹은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도구인 혹은 형상인입니다. 
     네 번째, 구원의 목적인은, 말할 나위도 없이,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고 그의 선을 찬양하는, 그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다섯 번째, 이 네 가지 모두는 우리 자신의 선행과 무관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후하심이 그 원천이고 시작이며 그 후하심의 구원의 첫 출발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에 있는 것입니다. 



127강 결론


  1. 구원의 효과인은 하나님의 자비와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니, 여기에 구원의 기원과 원천이 있습니다. 
  2. 구원의 질료인은 자기의 순종으로 의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이시니, 그 자신이 속량을 치르신 값입니다.  
  3. 구원의 형상인 혹은 도구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니,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공로가 없으므로 구원의 질료인이 아닙니다. 
  4. 구원의 목적인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고 그의 선을 찬양함에 있습니다. 
  5. 이 네 가지 모두는 우리 자신 및 우리의 선행과 무관하니, 하나님의 후하심의 원천이자 시작은 그가 우리를 선택하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