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강 [3.6.1-5] 그리스도께 돌아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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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 3.6.1-5. (3권 265-274쪽)



그리스도께 돌아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삶


[『기독교 강요』, 3.6.1.]

     『기독교 강요』 3권 6장에서 10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에 할애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모범 삼고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그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삶이란 것은 결국 우리가 은혜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 것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옛 것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 자체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새로움을 담고 있다(novitatem illam qua imago Dei in nobis instauratur, lex ipsius in se contin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6.1.

     이제 거듭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써 사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써 사는 것이 성경 말씀의 규범대로, 그 규율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본받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규범으로서 좀 더 특정하게 표현된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거듭난 자에게 일종의 보편적인 규범을 주셔서 그 규범을 좇아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곳에서 여러 말을 장황하게 어떤 세상 윤리 다루듯이 그렇게 하지 않고, 간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장 우리 인생에 필요한 단순한 교리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의 규범이 무엇인가,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에서 말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6.2.]

우리가 말한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은 주로 다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이러한 가르침이 없다면 천성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떤 성향도 없을, 의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영혼에 스며들어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ut iustitiae amor, ad quem alioqui natura minime propensi sumus, animis nostris instilletur ac inferatur).
둘째, 우리가 의를 행한답시고 쓸데없는 열심에 빠져 괜히 방황하지 않도록 막아 주는 규범이 수립된다(ut nobis norma praescripta sit, quae nos in iustitiae studio aberrare non sin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6.2.

     성경의 가르침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칼빈은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의에 대한 사랑이 우리 영혼에 스며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서 의에 합당한 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이제 우리 영혼 안에 의의 개념이 생기고 그 의를 향한 소욕이 생깁니다. 성령의 소욕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에 의에 대한 개념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그 의에 대한 개념이 우리 안에 수립이 되면 이것이 곧 삶의 규범으로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라는 것이 단순히 추상적이지 않고, 그 의라는 것이 삶으로 표현되고 드러나는 [것,]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심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옴으로 그리스도의 맛을 내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심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그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라고 하셨는데], 이 명령은 그저 윤리적 명령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서 우리도 거룩함을 얻는 것은 의롭게 되어야 되고(칭의), 그 가운데서 거룩해지는 삶을 사는 것이죠. 곧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써 우리가 거듭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명령인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그 규범을, 규율을 우리가 좇아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finis vocationis)은 무엇이냐? 단지 생명을 주시는 그 은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 이 땅에 살지만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더럽고 아주 모나고 거칠고 또 여호와를 거역하는 그런 배역이 심한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그러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6.3.]

     결국은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 되고 그와 함께 상속된 자들로서 그 화목의 누림을 드러내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의 원천은 마땅히 성경입니다. 그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성경이 구약[과] 신약, 옛 언약[과] 새 언약, 그 말씀을 좇는 것입니다. 

성경은 참된 우물에서 권고를 길어낸다(scriptura … a vero fonte deducit exhortatione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6.3.

     그래서 칼빈은 “성경은 참된 우물에서 권고를 길어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권고’라는 것은 지식도 되고 의지도 되는 것입니다. 알게 하고 아는 대로 행하게끔 하는 그게 권고거든요. 그래서 성경의 참된 우물에서 권고를 길어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 안에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의 삶이 입양의 고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표상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의에 바치고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악한 불손으로 창조주를 배반할 뿐만 아니라 구속주 자신을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Hac enim conditione si adoptamur in filios a Domino, ut Christum, nostrae adoptionis vinculum, vita nostra repraesentet, nisi nos iustitiae addicimus ac devovemus, non modo a creatore nostro deficimus pessima perfidia, sed ipsum quoque servatorem eiura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6.3.

     그 권고가 뭘까요? 바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제시하고, 그리고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고,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 되고 함께 상속자가 되는, 그래서 우리의 삶이 자녀 됨의, 입양의 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자녀 된 자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죠,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자녀 됨의 고리, 입양의 고리는 그리스도시다,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이 창조주이시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창조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그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지으신 그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제시된 각각의 문장은 성경 말씀에 따른 고백과 그 고백에 부합하는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 “ex quo”(그러므로)라는 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수사학적 반복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향점과 준거점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광과 은총에 있음이 극적으로 강조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6.3, 각주 573번.

     여기서 유명한 “그러므로”라는 칼빈의 반복되는 수사적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 이렇게 칼빈은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가운데 이야기된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구원을 매 부분 권고로 드러내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않는다면 그 배은망덕에 대한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다.’ 매번 성경이 우리를 권고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변명거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씻겨 깨끗하게 하시고 세례로써 정결케 하였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기의 몸에 접붙이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접붙임 받은 자들로서, 그러므로 어떤 흠이나 점도 없이 우리가 살아야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로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 함께 이 지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행하지 말고 위의 것을 바라보고 하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성소로 삼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셨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깨끗한 피로써 살아야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천상적인 순결과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받도록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날까지 순수하고 흠 없이 그 지위를 생각하며 지켜 가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된다.’ 이렇게 ‘그러므로, 그러므로, 그러므로,’ 거의 여섯 번을 이야기하면서 칼빈은 우리의 ‘그러므로’, 우리의 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인과관계가 어디에 있느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을 올바로 세우는 “가장 고상한 근본”(fundamenta auspicatissima)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그러므로’라는 인식을 가져야 됩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셨으므로 마땅한 우리가 삶을 살아야 된다는 이것이 결국 그 핵심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독교 강요』, 3.6.4.]

참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얻은 사람에게만 있다(Siquidem nihil est commercii cum Christo, nisi his qui rectam eius cognitionem ex verbo evangelii perceperu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6.4.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 삼아 주어서, 그 의는 자신을 주신 의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을 주신 의이기 때문에, 의를 전가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여기에서 바로 삶의 교리는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그 삶이 그리스도의 삶의 교리다, 복음의 말씀의 핵심이 그 가운데 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것은 단지 누림만 있을 뿐만 아니라. 누리는 것이 비추는 거 아닙니까? 빛을 누리면 빛을 비추게 되고, 맛을 누리면 맛을 내게 되고, 이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와의 교제거든요. 누리는 것이 드러내는 것이죠. 이게 증인의 삶이거든요. 

복음은 혀의 교리가 아니고, 생명의 교리이[다]. 그 생명의 교리는 지성과 기억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상의 훈육(訓育)들과는 다르다. 복음은, 오직 전체 영혼을 휘감아 내적인 마음의 정서 가운데 자리와 거처를 잡게 될 때에만 받아들여진다(Non … linguae est doctrina, sed vitae; nec intellectu memoriaque duntaxat apprehenditur, ut reliquae disciplinae, sed tum recipitur demum ubi animam totam possidet, sedemque et receptaculum invenit in intimo cordis affectu).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6.4.

     그래서 ‘복음은 내가 어떠하다는 혀의 교리가 아니라 생명의 교리다,’ 살아 있는 교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전체 영혼을 휘감아서 내적인 마음의 정서 가운데 그것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 복음의 진리가 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는 우리의 구원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죽은 교리, 사변의 교리가 아니라, 단지 머리에 머무는 교리가 아니라 우리 가슴속에 퍼지고, 품행 가운데 드러나고, 끝내 그 가르침을 우리가 사모하고, 그 가르침으로 따라가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 가운데 ‘그러므로’라는 이 삶. 나로부터가 아니라 ‘그러므로’. 예수가 날 위해 죽으셨네, 그러므로 내가 사네. 예수가 나와 함께 하시네, 그러므로 내가 그를 드러내네. 이 ‘그러므로’의 인생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이고, 이 ‘그러므로’의 질서가 교리이고, 규범이고, 율법이고, 끝내는 성경이라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6.5.]

     이 가운데 이 땅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우리는 그러면 완전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역사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빚어 가시는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복음적 완전함”(perfectio evangelica)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완전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를 너무 거창하게 보지 말고. 우리가 오늘 아침에 밥 먹었다고 점심을 안 먹는 것 아니잖아요. 또 점심까지 먹었다고 저녁을 굶어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적 완전함이라고 말하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질적 완전함이라기보다 복음적 완전함이라는 것은 복음 가운데 자라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다 된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은 이미 붙잡힌 바 된 겁니다. 붙잡힌 바 되었지만은 다 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푯대를 향하여 우리가 달려간다, 뛰어간다, 그 개념이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복음적 완전함에는 이르지 못했지만은 이것은 어떤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앞으로 두고 보겠다는 게 아닙니다. 이미 복음 가운데 인 침을 받고, 끝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을 누리는 그 완전함에 이르는 모든 자녀들에게 이 삶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날마다 간구함이 있어야 되고, 연약함 가운데 자라감이 있어야 되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복음적 완전함이거든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자기에게 드려지는 예배의 첫째 부분으로서 순전함을 모든 곳에서 명령하신다. 이 말은 이중적인 마음에 반대되는, 교활하고 거짓된 것이 없는 영혼의 순직한 단순성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함과 의를 추구하는 영혼의 내적 정서가 거짓 없이 투사되는 올바른 영적 삶의 원리를 일컫는다(Primo enim loco integritatem, tanquam praecipuam cultus sui partem, ubique commendat; quo nomine sinceram animi simplicitatem intelligit, quae fuco et fictione careat, cui cor duplex opponitur; ac si diceretur spirituale esse recte vivendi principium, ubi interior animi affectus sine fictione ad sanctitatem et iustitiam colendam Deo addici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6.5.

     그래서 이러한 완전함이 우리 가운데 요구되는데, 그렇다고 다 이룰 수는 없는데, 그것의 첫 번째 덕목이 뭔가 하면, 바로 예배를 순전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순전한 예배를 드려서, 우리 영혼의 순직한 단순성이라[고]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순수하고 정직한 단순성이라는 말은 여러 곳에 마음을 쏟지 않고, 그저 하나님이 지시하면 지시하는 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가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뭐냐? 우리 영혼의 내적 정서가 아멘 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함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삶의 행실, 그 거룩함과 의를 추구하는 이것이 이 지상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체라는 지상의 감옥에 갇혀 있다, 이건 철학자들도 쓰는 말이지만, 칼빈도 이 말을 합니다. 육체라는 이 지상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은 절뚝거릴 수도 있고, 뒤뚱거릴 수도 있고, 간혹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삶이 아니라 은혜로부터 시작되는 중생의 삶입니다. 거듭난 삶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삶이기 때문에, 거듭난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내 우리가 우리의 자질로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와의 사귐이 완전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의의 전가 개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완전해진다는 게 뭘까요? 달리 표현하면, 완전하게 그를 비추는 삶[입니다]. 내가 완전한 게 아니라. 끝내 우리는 스스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끝내 우리는 스스로 향(香)이 될 수 없습니다. 빛은, 향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귐이 있다는 개념, 그리고 완전한 사귐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완전한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는 우리의 폭이 점점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내는 뭐요? ‘마주 볼 것이요.’ 지금은 멀리 태양도 못 보는 이 눈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 보는 이것이 완전한 사귐이거든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은혜를 점점, 점점 더 받아 누리는 그것을 확장해 나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지경을 넓히는 것이다, 지경이 넓어지는 것은 은혜가 넓어지는 것이지 내 자질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칠 만한, 타버리지 않고 빛을 비출 수 있는 그것이 우리 안에 자라간다는 것이죠. 우리가 너무 연약하면 작은 빛에도 타버리잖아요. 그러나 점점 우리가 자라가서 그 빛을 오히려 누리고, 그게 이제 성숙한 것이죠. ‘일어나라 빛을 비추라.’ 그것을 점점 점점, 그래서 끝내는 마주 보는 [것입니다.] 마주 본다는 게 뭐예요? 우리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가장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그와의 완전한 사귐, 이것이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정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목표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본다면, 첫째, 성경은 보편적 삶의 규범과 아름다운 경륜을 담고 있으며, 권고를 길어내는 참된 우물이고, 영혼 속에 스며드는 사랑을 가르칩니다. 영혼 속에 스며드는 사랑, 내적[인] 사랑은 표현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 자체에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새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언약의 법이라고 하고, 특별히 율법[은] 단지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그 은혜가, 복음이 함께 역사하는 그 율법이므로, 그 율법을 우리가 ‘권고하는 율법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세 번째,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인생에 가장 고상한 근본이시고,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고리이시고 모범이 그리스도입니다. 
     넷째, 생명의 교리인 복음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되며,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완전한 사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111강 결론


  1. 성경은 보편적 삶의 규범과 아름다운 경륜을 담고 있으며, 권고를 길어내는 참된 우물이며, 영혼 속에 스며드는 사랑을 가르칩니다. 
  2. 율법 자체에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새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3.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인생의 가장 고상한 근본이시고,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고리이시며 모범이십니다.
  4. 생명의 교리인 복음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되고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되며 완전한 사귐에 이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