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은 회개를 형식화, 성례화하면서 회개의 세 가지 요소로서 마음의 통회, 입의 고백, 행위의 보속을 이야기합니다. 이미 우리는 앞에 두 가지의 것은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3.4.25.]
이제 세 번째로 행위의 보속을 그들이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보속’(補贖)이란 말은 뭔가 하면 만족할 만큼 갚으라는 것입니다. ‘satisfatio’란 단어를 씁니다. 그래서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분명히 벌이 있을 것이고, 그 벌은 형벌일 것이고, 그 형벌을 치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속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눈물, 금식, 봉헌, 자선 그리고 사랑의 의무, 이런 것을 다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무서운, 악한 교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으며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고 구원하시고, 그래서 회개의 영을 주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신다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이 부족하듯이, 아니면 그것이 필히 무엇을 요구하듯이, 우리에게 채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미 ‘전적인 은혜다, 오직 은혜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의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고백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덜 갚은 것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너희가 주고 받는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주고받기라면 어찌 거저 주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주시고 우리가 그것에 감사함으로 아멘 하고 영광을 올리고, 이것이 합당한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으니까 빚이고, 그것을 우리가 갚아야 되고,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것이 온전히 역사한다,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그 효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의의 훈련으로서 형벌을 남겨 두었다,’ 이렇게 피해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의를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고 형벌을 보속할 때 의가 온전히 작용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온전히 작용하려면 보속이 온전해야 된다, 우리가 형벌에 대한 갚음이 온전할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온전하게 작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행위의 공로가 중재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위의 공로가 중재해야 된다.’ 그러니까 성도들의 행위가, 그 행위의 공로가 <그것을> 아까 뭐예요? 눈물, 금식, 봉헌, 자선, 그리고 다른 사랑의 의무, (로마 가톨릭은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쓴단 말이에요.) 사랑의 의무를 다했을 때, 그것이 중재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온전하게 역사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전적인 의가 아니고, 완전한 의가 아니고,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의가 아니죠. 그것은 우리에게 값을 요구하는, 주고받기식에 하나님이 하나의 편의를 주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죠.
우리는 “값없이 주어지는 죄 사함”(gratuita peccatorum remissio)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후하심 가운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내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3장 25절에 말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 사도행전 10장 43절에 이야기하고요.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19), 그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후 5:21), 이런 말씀과 전면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보속 교리는 배치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26.]
그들은 세례 후에 이제 성도는 보속을 통하여서 다시 일어나야 되는데, 이 보속을 온전히 하려면 교회의 열쇠를 통하여서 사제들의 공로의 도움을 받아서 그 보속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제 여기서부터 면죄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로 갚으려면 내가 다 못하니까 사제들이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어떻게 도와주냐? 교회의 보물창고가 있는데,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공로도 남아 있고, 마리아의 공로도 있고, 죽은 성자들의 공로도 있는데, 순교자의 공로들도 있고, 그 공로들이 도와줘서, 합력해서, 그래야 온전히 보속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일하신 대언자가 예수 그리스도고, 오직 그가 우리의 화목제물이며,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 요한일서 2장 12절, 2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요 1:29; 참조. 요 1:36).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가, 공로가 우리로부터 나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밖에 없습니다.
그 자신이 홀로 하나님의 어린양, 홀로 죄인들을 위한 제물, 홀로 속죄, 홀로 무름이시[다](ipse solus est agnus Dei, solus quoque oblatio est pro peccatis, solus expiatio, solus satisfacti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26.
예수님이 홀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고, 죄인들을 위한 제물이시고, 홀로 속죄물이시고, 홀로 무름이 되십니다. 우리의 죄 값을 물러주시고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물고 룻을 샀듯이 우리를 사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27.]
모든 죄악을 성자에게 담당시켰습니다(사 53:6).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벧전 2:24). 예수님이 담당하셨어요. 그래서 우리의 저주를 그가 받으셨어요.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과는 보속하는 회개의 양과 비례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어찌 기독교의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갚는 만큼 받는 것입니까?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거죠. 보속하는 회개의 양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과가 나타납니까? 그러면 십자가의 강도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무엇을 그가 되돌렸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고 하는 그 말씀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바울은 보속과 결별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맡긴다(satisfactionibus valere iussis, ad Christi crucem eos ableg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27.
‘바울은 보속이라는 것과는 결별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맡긴다,’ 이렇게 칼빈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속이란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일한 공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화목하게 하셨고(골 1:20), 그리고 ‘속량, 죄 사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서 우리가 얻는다’(골 1:14).
로마 가톨릭은 또 이렇게 공로주의에 빠져 있으니까, 의식주의, 성례주의에 빠져 있으니까, 큰 죄를 위하여서는 중한 보속이 필요하고, 작은 죄를 위하여서는, 아주 작은 죄는 주기도문만 해도 되고, 그냥 성수를 뿌리기만 해도 되고, 미사에 참여만 해도 되고, 이러한 아주 궤변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강요』, 3.4.28.]
그러나 우리에게는 큰 죄, 작은 죄가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에스겔 18장 20절[에] 이야기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로마서 6장 23절에 이야기하고,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로마서 8장 1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입니다. ‘모든 죄는 사망의 형벌이다.’ 대죄, 소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심으로 다 가져가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강요』, 3.4.29.]
로마 가톨릭의 이 궤변은 끝이 없으니, 그들은 형벌(poena)과 죄과(culpa)를 구별해서, ‘죄과, 죄 그 자체는 없어지지만 형벌은 남는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이 여전히 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여전히 두르고 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나 물이 여전히 두르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물을 제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창일합니다. 세상을 덮고도 남습니다. 사해의 바다보다 우리의 죄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 누가 그 물을 퍼내서 그 물에서 자유롭게 될 것입니까? 로마 가톨릭은 지금 그 이야기예요. 물에 빠진 자가 여전히 물에 둘러져 있으니까 그 물을 퍼내라는 거, 그게 보속이라는 거예요. 물을 한 주걱 퍼내라는 것입니다. 어찌 여기에 화평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위로가 있겠습니까?
에스겔 18장 24절에 보면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행하면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또 에스겔서 18장 21-22절 그 앞부분에 보면, 악인이 행한 죄에서 돌이켜 떠나 행하면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기억함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편 32편 1절은 ‘죄가 가려진다,’ 시편 32편 2절은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말씀이 [있는데,] 어찌 여전히 구원받은 자에게 형벌이 남아 있고, 여전히 사방에 물이 두르고 있고, 그것이 어찌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어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평강 가운데, 화목 가운데 인도하겠습니까.
이사야 1장 18절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레미야 50장 20절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다 남은 자를 용서할 것이니 죄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죄가 여전히 우리를 두르고 있고, 우리가 무슨 표주박으로 얼마나 그 물을 퍼내겠습니까. 오히려 한 표주박을 퍼내면 열 표주박, 스물 표주박 더 물이 찰 텐데, 죄의 물이 찰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공의가 하수같이 흘러넘쳐서 싹 다 우리를 새롭게 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그거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강요』, 3.4.30.]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다 감당하시고, 우리를 위한 평강이 되시고, 화목제물이 되시고(벧전 2:24; 사 53:5), 화목제물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시고, 우리의 “대속물”(ἀντίλυτρον)이 되신다(딤전 2:6), 속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유일한 무름은, 룻에게 보아스가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전적인 대속물로서 모든 것을 가져가신 희생제물이고,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호 14:2), 그리고 우리의 모든 형벌을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31.]
이러한 아들에게는 ‘징계’(castigatio)가 남아 있지만, 그것은 ‘형벌’(vindicta)은 아닙니다, 징벌은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은 이것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징벌의 심판이 아니라 징계의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징계의 심판은 아들의 매와 같습니다.
아들은 매를 맞는다. 종도 매를 맞는다. 그러나 후자는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노예로서 형벌을 받는다. 전자는 자유인이자 아들로서 훈육의 필요를 채우고자 징계를 받는다. 아들을 향한 견책은 연단과 개선을 낳으며 종에게는 그것이 매질과 형벌이 된다(Verberatur, … filius, verberatur et famulus. Sed hic ut servus, quia peccavit, punitur; ille vero, ut liber et filius disciplina indigens, castigatur. Huic correptio in probationem et emendationem cedit, illi in flagella et poenas). -크리소스토무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31.
크리소스토무스는 ‘아들은 매를 맞는다. 종도 매를 맞는다. 그러나 아들은 자유인이자 아들로서 훈육의 필요를 위하여 징계를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징계의 매를 남겨두었다는 것과 형벌을 남겨두었다는 로마 가톨릭의 궤변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32.]
징계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요, 징계는 그 가운데서 긍휼을 잊지 않는, 진노 가운데서도 긍휼을 잊지 않는(합 3:2) 그것이 징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를 하지 마옵소서,” 예레미야 10장 24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죠. 그의 막대기와 그의 회초리와 그의 지팡이가 나를 다스리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3.4.33.]
너희가 고난을 겪는 것, 곧 너희가 불평을 하는 것은 너희의 약이지 너희에 대한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너희에 대한 징계이지 너희를 향한 저주가 아니다(quod pateris, unde plangis, medicina est tibi, non poena; castigatio, non damnatio).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33.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그 징계는 우리의 약이지 형벌이 아니다. 형사적 선고가 아니라 치료적 고통이 따를 뿐이다,’ 바로 징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적 회개를 해야 됩니다. 그 회개의 쓰라림 가운데는, (다시 우리가 베르나르두스의 말을 하면,) 꿀이 섞여 있습니다. 징계에는 눈물이 있고 슬픔도 있지만 달콤함이 있습니다. 우리를 잠시 멈칫거리게 하지만은, 실족하게도 하지만은 우리가 다시금 일어서서 나아가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게 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4.34-35.]
형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징계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징계가 남아 있는 것은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우리에게 본보기로 남겨 두셨어요. 다윗도 잘못했지만(삼하 24:15) 그가 돌이켰을 때 하나님은 그를 오히려 온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36.]
주님의 피 외에는 다른 속죄물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이 모든 허물을 가립니다(잠 10:12). 그리고 인자와 진리로 죄악이 속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우리의 보속이 아닙니다. 잠언 16장 6절의 말씀입니다.
[『기독교 강요』, 3.4.37-39.]
우리가 사랑하여서 죄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은 사랑이란 말이 보속이란 말입니다, 공로란 말입니다. 사랑이란 말이, 로마 가톨릭이 사랑한다는 말을 쓸 때는 행위의 공로, 선행, 보속, 이런 걸 뜻할 때가 많아요. 사랑해서 죄 사함 받는 게 아니라 죄 사함 받아서 사랑하는 것이죠.
‘이 여인이 제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이 많음이라’(눅 7:47)라고 주님께서 누가복음에 말씀하셨을 때는 이것은 ‘여자의 사랑이 죄 사함의 원인(causa)이 아니라 죄 사함의 증거(probatio)다’라고 칼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서, 보속해서, 공로로 갚아서 은혜가 많은 것이 아니라 은혜가 많고 사함이 많으니까 감사로 사랑한다는 것이죠. 은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우리는 사함을 얻고, 사랑으로 우리는 감사하고 주님의 은총을 증언한다(Fide igitur remissionem assequimur; caritate gratias agimus et Domini beneficentiam testam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37.
그래서 “믿음으로 우리는 사함을 얻고, 사랑으로 우리는 감사하고 주님의 은총을 증언한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처방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우리의 희생제물입니다.
109강 결론
로마 가톨릭은 행위의 보속을 내세워 죄값이 지불되려면 행위의 공로가 중재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빚진 것이 배상되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세례 후 보속 가운데 교회의 열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가 작용한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대언자, 화목제물, 대속의 값, 무름이 되셔서 속죄, 속량,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심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죄과는 사해지지만 형벌은 사함을 받은 후에도 요구된다고 주장하나, 하나님의 은혜로써 죄와 허물이 가려지면 그것들은 기억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징계의 심판은 징벌의 심판이 아니며 훈육을 위함이니,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 가운데 주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라 증거인바, 사함이 많은 사람이 사랑함이 많습니다.
109강 | 3.4.25-39. (3권 212-240쪽)
스콜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행위의 보속 비판
로마 가톨릭은 회개를 형식화, 성례화하면서 회개의 세 가지 요소로서 마음의 통회, 입의 고백, 행위의 보속을 이야기합니다. 이미 우리는 앞에 두 가지의 것은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3.4.25.]
이제 세 번째로 행위의 보속을 그들이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보속’(補贖)이란 말은 뭔가 하면 만족할 만큼 갚으라는 것입니다. ‘satisfatio’란 단어를 씁니다. 그래서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분명히 벌이 있을 것이고, 그 벌은 형벌일 것이고, 그 형벌을 치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속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눈물, 금식, 봉헌, 자선 그리고 사랑의 의무, 이런 것을 다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무서운, 악한 교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으며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고 구원하시고, 그래서 회개의 영을 주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신다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이 부족하듯이, 아니면 그것이 필히 무엇을 요구하듯이, 우리에게 채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미 ‘전적인 은혜다, 오직 은혜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의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고백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덜 갚은 것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너희가 주고 받는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주고받기라면 어찌 거저 주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주시고 우리가 그것에 감사함으로 아멘 하고 영광을 올리고, 이것이 합당한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으니까 빚이고, 그것을 우리가 갚아야 되고,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것이 온전히 역사한다,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그 효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의의 훈련으로서 형벌을 남겨 두었다,’ 이렇게 피해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의를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고 형벌을 보속할 때 의가 온전히 작용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온전히 작용하려면 보속이 온전해야 된다, 우리가 형벌에 대한 갚음이 온전할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온전하게 작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행위의 공로가 중재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위의 공로가 중재해야 된다.’ 그러니까 성도들의 행위가, 그 행위의 공로가 <그것을> 아까 뭐예요? 눈물, 금식, 봉헌, 자선, 그리고 다른 사랑의 의무, (로마 가톨릭은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쓴단 말이에요.) 사랑의 의무를 다했을 때, 그것이 중재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온전하게 역사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전적인 의가 아니고, 완전한 의가 아니고,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의가 아니죠. 그것은 우리에게 값을 요구하는, 주고받기식에 하나님이 하나의 편의를 주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죠.
우리는 “값없이 주어지는 죄 사함”(gratuita peccatorum remissio)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후하심 가운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내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3장 25절에 말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 사도행전 10장 43절에 이야기하고요.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19), 그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후 5:21), 이런 말씀과 전면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보속 교리는 배치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26.]
그들은 세례 후에 이제 성도는 보속을 통하여서 다시 일어나야 되는데, 이 보속을 온전히 하려면 교회의 열쇠를 통하여서 사제들의 공로의 도움을 받아서 그 보속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제 여기서부터 면죄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로 갚으려면 내가 다 못하니까 사제들이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어떻게 도와주냐? 교회의 보물창고가 있는데,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공로도 남아 있고, 마리아의 공로도 있고, 죽은 성자들의 공로도 있는데, 순교자의 공로들도 있고, 그 공로들이 도와줘서, 합력해서, 그래야 온전히 보속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일하신 대언자가 예수 그리스도고, 오직 그가 우리의 화목제물이며,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 요한일서 2장 12절, 2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요 1:29; 참조. 요 1:36).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가, 공로가 우리로부터 나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밖에 없습니다.
그 자신이 홀로 하나님의 어린양, 홀로 죄인들을 위한 제물, 홀로 속죄, 홀로 무름이시[다](ipse solus est agnus Dei, solus quoque oblatio est pro peccatis, solus expiatio, solus satisfacti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26.
예수님이 홀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고, 죄인들을 위한 제물이시고, 홀로 속죄물이시고, 홀로 무름이 되십니다. 우리의 죄 값을 물러주시고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물고 룻을 샀듯이 우리를 사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27.]
모든 죄악을 성자에게 담당시켰습니다(사 53:6).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벧전 2:24). 예수님이 담당하셨어요. 그래서 우리의 저주를 그가 받으셨어요.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과는 보속하는 회개의 양과 비례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어찌 기독교의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갚는 만큼 받는 것입니까?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거죠. 보속하는 회개의 양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과가 나타납니까? 그러면 십자가의 강도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무엇을 그가 되돌렸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고 하는 그 말씀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바울은 보속과 결별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맡긴다(satisfactionibus valere iussis, ad Christi crucem eos ableg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27.
‘바울은 보속이라는 것과는 결별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맡긴다,’ 이렇게 칼빈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속이란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일한 공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화목하게 하셨고(골 1:20), 그리고 ‘속량, 죄 사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서 우리가 얻는다’(골 1:14).
로마 가톨릭은 또 이렇게 공로주의에 빠져 있으니까, 의식주의, 성례주의에 빠져 있으니까, 큰 죄를 위하여서는 중한 보속이 필요하고, 작은 죄를 위하여서는, 아주 작은 죄는 주기도문만 해도 되고, 그냥 성수를 뿌리기만 해도 되고, 미사에 참여만 해도 되고, 이러한 아주 궤변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강요』, 3.4.28.]
그러나 우리에게는 큰 죄, 작은 죄가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에스겔 18장 20절[에] 이야기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로마서 6장 23절에 이야기하고,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로마서 8장 1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입니다. ‘모든 죄는 사망의 형벌이다.’ 대죄, 소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심으로 다 가져가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강요』, 3.4.29.]
로마 가톨릭의 이 궤변은 끝이 없으니, 그들은 형벌(poena)과 죄과(culpa)를 구별해서, ‘죄과, 죄 그 자체는 없어지지만 형벌은 남는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이 여전히 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여전히 두르고 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나 물이 여전히 두르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물을 제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창일합니다. 세상을 덮고도 남습니다. 사해의 바다보다 우리의 죄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 누가 그 물을 퍼내서 그 물에서 자유롭게 될 것입니까? 로마 가톨릭은 지금 그 이야기예요. 물에 빠진 자가 여전히 물에 둘러져 있으니까 그 물을 퍼내라는 거, 그게 보속이라는 거예요. 물을 한 주걱 퍼내라는 것입니다. 어찌 여기에 화평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위로가 있겠습니까?
에스겔 18장 24절에 보면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행하면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또 에스겔서 18장 21-22절 그 앞부분에 보면, 악인이 행한 죄에서 돌이켜 떠나 행하면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기억함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편 32편 1절은 ‘죄가 가려진다,’ 시편 32편 2절은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말씀이 [있는데,] 어찌 여전히 구원받은 자에게 형벌이 남아 있고, 여전히 사방에 물이 두르고 있고, 그것이 어찌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어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평강 가운데, 화목 가운데 인도하겠습니까.
이사야 1장 18절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레미야 50장 20절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다 남은 자를 용서할 것이니 죄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죄가 여전히 우리를 두르고 있고, 우리가 무슨 표주박으로 얼마나 그 물을 퍼내겠습니까. 오히려 한 표주박을 퍼내면 열 표주박, 스물 표주박 더 물이 찰 텐데, 죄의 물이 찰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공의가 하수같이 흘러넘쳐서 싹 다 우리를 새롭게 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그거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강요』, 3.4.30.]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다 감당하시고, 우리를 위한 평강이 되시고, 화목제물이 되시고(벧전 2:24; 사 53:5), 화목제물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시고, 우리의 “대속물”(ἀντίλυτρον)이 되신다(딤전 2:6), 속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유일한 무름은, 룻에게 보아스가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전적인 대속물로서 모든 것을 가져가신 희생제물이고,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호 14:2), 그리고 우리의 모든 형벌을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31.]
이러한 아들에게는 ‘징계’(castigatio)가 남아 있지만, 그것은 ‘형벌’(vindicta)은 아닙니다, 징벌은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은 이것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징벌의 심판이 아니라 징계의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징계의 심판은 아들의 매와 같습니다.
아들은 매를 맞는다. 종도 매를 맞는다. 그러나 후자는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노예로서 형벌을 받는다. 전자는 자유인이자 아들로서 훈육의 필요를 채우고자 징계를 받는다. 아들을 향한 견책은 연단과 개선을 낳으며 종에게는 그것이 매질과 형벌이 된다(Verberatur, … filius, verberatur et famulus. Sed hic ut servus, quia peccavit, punitur; ille vero, ut liber et filius disciplina indigens, castigatur. Huic correptio in probationem et emendationem cedit, illi in flagella et poenas). -크리소스토무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31.
크리소스토무스는 ‘아들은 매를 맞는다. 종도 매를 맞는다. 그러나 아들은 자유인이자 아들로서 훈육의 필요를 위하여 징계를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징계의 매를 남겨두었다는 것과 형벌을 남겨두었다는 로마 가톨릭의 궤변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32.]
징계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요, 징계는 그 가운데서 긍휼을 잊지 않는, 진노 가운데서도 긍휼을 잊지 않는(합 3:2) 그것이 징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를 하지 마옵소서,” 예레미야 10장 24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죠. 그의 막대기와 그의 회초리와 그의 지팡이가 나를 다스리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3.4.33.]
너희가 고난을 겪는 것, 곧 너희가 불평을 하는 것은 너희의 약이지 너희에 대한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너희에 대한 징계이지 너희를 향한 저주가 아니다(quod pateris, unde plangis, medicina est tibi, non poena; castigatio, non damnatio).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33.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그 징계는 우리의 약이지 형벌이 아니다. 형사적 선고가 아니라 치료적 고통이 따를 뿐이다,’ 바로 징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적 회개를 해야 됩니다. 그 회개의 쓰라림 가운데는, (다시 우리가 베르나르두스의 말을 하면,) 꿀이 섞여 있습니다. 징계에는 눈물이 있고 슬픔도 있지만 달콤함이 있습니다. 우리를 잠시 멈칫거리게 하지만은, 실족하게도 하지만은 우리가 다시금 일어서서 나아가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게 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4.34-35.]
형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징계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징계가 남아 있는 것은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우리에게 본보기로 남겨 두셨어요. 다윗도 잘못했지만(삼하 24:15) 그가 돌이켰을 때 하나님은 그를 오히려 온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4.36.]
주님의 피 외에는 다른 속죄물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이 모든 허물을 가립니다(잠 10:12). 그리고 인자와 진리로 죄악이 속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우리의 보속이 아닙니다. 잠언 16장 6절의 말씀입니다.
[『기독교 강요』, 3.4.37-39.]
우리가 사랑하여서 죄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은 사랑이란 말이 보속이란 말입니다, 공로란 말입니다. 사랑이란 말이, 로마 가톨릭이 사랑한다는 말을 쓸 때는 행위의 공로, 선행, 보속, 이런 걸 뜻할 때가 많아요. 사랑해서 죄 사함 받는 게 아니라 죄 사함 받아서 사랑하는 것이죠.
‘이 여인이 제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이 많음이라’(눅 7:47)라고 주님께서 누가복음에 말씀하셨을 때는 이것은 ‘여자의 사랑이 죄 사함의 원인(causa)이 아니라 죄 사함의 증거(probatio)다’라고 칼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서, 보속해서, 공로로 갚아서 은혜가 많은 것이 아니라 은혜가 많고 사함이 많으니까 감사로 사랑한다는 것이죠. 은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우리는 사함을 얻고, 사랑으로 우리는 감사하고 주님의 은총을 증언한다(Fide igitur remissionem assequimur; caritate gratias agimus et Domini beneficentiam testam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4.37.
그래서 “믿음으로 우리는 사함을 얻고, 사랑으로 우리는 감사하고 주님의 은총을 증언한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처방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우리의 희생제물입니다.
109강 결론
로마 가톨릭은 행위의 보속을 내세워 죄값이 지불되려면 행위의 공로가 중재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빚진 것이 배상되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세례 후 보속 가운데 교회의 열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가 작용한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대언자, 화목제물, 대속의 값, 무름이 되셔서 속죄, 속량,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심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죄과는 사해지지만 형벌은 사함을 받은 후에도 요구된다고 주장하나, 하나님의 은혜로써 죄와 허물이 가려지면 그것들은 기억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징계의 심판은 징벌의 심판이 아니며 훈육을 위함이니,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 가운데 주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라 증거인바, 사함이 많은 사람이 사랑함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