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2권 1장에서 5장까지는 전체적으로 ‘인간의 타락’을 다룹니다. 그중에서 1장과 2장은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사실, 그런데 아담이 언약의 조건인 ‘순종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 곧 불순종하였다는 것, 그리하여 죄를 지었다는 것, 그리하여 아담이 타락하였다는 것, 그 타락으로 모든 인류가 이제 사망에 이르고 ‘전적무능’, ‘전적부패’의 오염에 이르게 되었다는, 바로 ‘원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2권 1장, 그중에서도 서반부인 1절에서 3절까지를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칼빈은 우리 인류를 하나님이 얼마나 순전하게 지으셨고 대단하게 지으셨는가, 이 부분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가운데서 인간이 타락하여 얼마나 비참(miseria)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미 『기독교 강요』 1권 1장 1절에서 거의 모든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원(原) 하나님의 형상’, 곧 창조 때 우리의 모습, 그리고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 타락한 후 우리의 모습,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의 모습, 이 세 가지 지식. 그래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원 하나님의 형상’,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의 모습, 그것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한 바 있었습니다. 오늘 이 부분에서도 칼빈은 다시 이 점을 부각시킵니다.
인생에 대한 모든 이치를 각각 다 알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질진대,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는 그 무엇보다 더 한층 욕되다고 볼 것이니, 이는 우리가 필히 행하여야 할 일에 대해 어떤 방도를 꾀할 때에 비참하게도 언제나 그 무지가 우리 자신을 현혹시키고 심지어 눈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너무나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야말로 외계적인 어떤 사물, 어떤 사건에 대한 무지보다 더 심각한 병이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무지라는 것은 ‘죄의 열매’입니다. 철학자들이 여러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은 사실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여전히 사람 자신, 곧 철학자 자신에게서 유능함을 발견하려고 들고, 타락한 인류의 비참함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존귀하고 탁월하다는 그러한 전제하에 사상을 전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는 지식은, 다시 우리가 『기독교 강요』 1권 1장 1절에서 ‘우리 자신에 절망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갈망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에 실망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의 비참함을 헤아리지 않고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도 없고, 찬양할 수도 없고, 또 참 지식으로 나갈 수 없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 때 부여하신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후하게 우리에게 베푸시고, 이건 ‘일반적인 은총’이죠. 인간 모두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 그것이 창조 때만 아니라, 창조 이후로 지으시고, 보살피고, 또 생육하게 하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은총을 드러내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우리가 ‘순전’(純全, integritas)히 머물렀다면, 이런 ‘만약’은 역사적으로 전제할 수 없지만,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인류가 순전하게 머물렀다면, 우리 인류는 하나님이 주신 그 형상(창 1:26-27) 가운데 ‘탁월함’(excellentia)과 ‘고상함’(nobilitas)과 ‘[최초의] 존귀함’(prima dignitas)을 더없이 빛냈을 것입니다. 모든 만물보다 뛰어난 것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최고의 그러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어린아이조차도 웅변하는, 그러한 표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최초의 존귀함에 우리의 마음이 미칠 때마다 우리는 또 다른 편의 슬픈 광경인 우리의 치욕과 불명예를 대조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첫 사람의 인물 안에서 몰락해서 우리의 근본으로부터 떨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ex quo in primi hominis persona ab origine nostra excidimus). 그런데 이로부터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미움과 혐오와 함께 참된 겸손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새로운 열심이 불붙게 되는데, 그 열심 때문에 우리 각자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무익하고 헛되다고 여겨졌던 선한 것들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것입니다. ‘자기의 죄’로 타락했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을 택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는데도, 사람이 자기 뜻대로 악의 자리에 섰습니다. ‘불순종’의 자리에 섰습니다. 교만(superbia)과 배은망덕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베푸셔서 누리게 하셨는데, 동산의 실과를 다 먹게 하셨는데, 배고픔이 없었는데, 그리고 사물의 이름을 짓고, 짐승의 이름을 짓고, 새의 이름을 짓고, 생물의 이름을 지을 정도로 지식이 있게 하셨는데, 지식이 모자라지 않는데, 괜히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죠. ‘무조건적 불순종’을 한 것이죠. 그리하여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됨, 선함, 의로움, 거룩함, 이런 것들을 다 상실해 버렸죠. 그리하여 ‘치욕’(foeditas)에 속하고, ‘불명예’(ignominia)에 속하고, ‘우매함’(socordia) 가운데 있는 그러한 ‘비참한 상태’(misera conditio)로 인간이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가 온전했다면,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고, 이제 그 ‘순종’을 보시고자 하는, 그래서 영광받고자 하시는.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도 아니라, 하지 말라는 그러한 소극적인 명령, ‘모든 것은 다 먹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그 실과는 먹지 마라. 그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라고 하셨는데, 그 나무가 어떤 선과 악을 알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죠. 나무가 무슨 죽음을 주는 열매가 있겠습니까? 나무에 무슨 생명을 주는 열매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사망’이 있는, 그것을 알려주는 표로서 나무를 두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선천적인 그러한 ‘교만’에 빠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피조물은 조물주에 의지하는, 그러한 ‘의존성’ 가운데 있을 때, 온전함을 나타낼 수 있는데,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니, 그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스스로, 자의적으로, 맹목적으로 알고자 하니, 그것은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붙들려 있고, 원천이고 기원이신 하나님께 모든 마음이, 또 모든 정성을 돌려야 되는데, ‘맹목적인 자기애(自己愛)’에 빠져 있습니다, 맹목적인 자기애. ‘blind love of self’, ‘amor caecus sui’ 라틴어로는, 맹목적인 자기애에 빠져서 선천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부터 거짓에 사로잡히고, 헛된 편견에, 극한 자기 지식에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은 그 자신의 골수에서 자발적으로 용솟음치는바(sponte prurientem in hominis medullis superbiam suis illecebris), 그것을 부추기는 유혹의 말보다 더 즐거운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 우리가 그 찬사에 동의하게 되면 그것은 끝내 우리를 속여 파멸로 이끌 것이다. … 오직 우리가 지닌 선한 것들만 생각하라고 우리를 만류시키는 그런 교사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진보할 수 없을 것이며 종국에는 최악의 무지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기독교 강요』, 1.1.1, 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2.
타락한 인류에게 본성상 깃들어 있는 이러한 ‘교만’(superbia)을 버리고 “참된 겸손”(vera humilitas, 『기독교 강요』, 2.1.1)을 지니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올바로 알게 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2, 각주 8.
그래서 인간의 교만이 이제 끝없이 솟아나는 용천수와 같이 우리 속에서 교만이 나타나고, 헛된 말과 유혹의 말이 우리 안에 무성하고, 또 사람은 그러한 말들을 즐거워하고, 진리가 아닌, 진실이 아닌 거짓을 더 기뻐하고, 거짓 찬사에 현혹되어서, 거짓 달콤함에 빠져서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는 덕성을 상실하고, 그저 자기가 옳다 하는 바대로, 자기 소행대로, 소견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이것은 사람들 보기에는 나아 보일지 모르나, 뛰어날지 모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비참’한 모습이죠. 최초에 부여하신 그 ‘존귀함’을 ‘상실’해 버린 것이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움’과 ‘선함’을 잃어버린 것이죠. 하나님이 주시는 ‘불멸’을 다 버린 것이죠. 더 이상 불멸의 존재가 되지 못하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영원한 존재이고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저 죄 가운데, 죽음 가운데, 형벌 가운데, 저 무저갱의 불못 가운데 거하는 것은 시간의 끝은 없을지라도, 그것은 결코 불멸이라고 할 수 없죠. 그것은 이미 멸망 상태로 계속 있는 거죠. 멸망 상태로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으로 그의 품 안에 영원히 있는 것이 불멸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실에 대한 재인식이 우리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침잠하게 하고 낙담시켜 겸손의 무릎을 꿇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원천이란 무엇인가? 진정 그 원천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우리 창조의 목적인가? 그 목적은 우리가 아주 멀리 떠나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 아파하고 신음하며 그 가운데 한숨을 내뱉으며 최초의 존귀함을 헤아리게 되는 바로 그것이다. 실로 사람은 그 무엇 하나라도 자기 자신 속에서 자랑할 만한 것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에, 이는 그가 자기 확신에 빠져 스스로 교만해지게 하는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3.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 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칼빈은 ‘겸손(humilitas)의 무릎을 꿇어야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낙담하고, 절망하고, 실망하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가 자기 자신에게서 찾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슨 지식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찾겠습니까? 무슨 의를 찾겠습니까? 무슨 뜻조차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겸손의 무릎을 꿇어라. 우리 안에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끼리 서로, 서로서로 자기들끼리 옳다 하는 그러한 자의적인 교만에 빠진 배은망덕한 그러한 자기 의, 자기 자랑은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도 우리는 가져갈 것도, 내어놓을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져야 할 지식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보도록 하자.
첫째, 사람은 자기가 창조된 목적과 자기에게 부여된 결코 범상치 않은 은사들에 대해서(『기독교 강요』, 1.5.2-3; 1.15.1-4)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는 이 지식으로써 경성(警醒)되어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기독교 강요』, 2.1.1-2)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에 이르게 된(『기독교 강요』, 3.9).
둘째, 사람은 자기의 재능들에 대해서, 아니 그 재능들의 결핍에 대해서(facultatum inopiam) 분명히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 결핍이 인식될 때에 그는 이른바 무(無)에 이르도록 오그라들어 극도의 혼란 가운데 무릎을 꿇을 것이다.
첫 번째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직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할 것이다. 두 번째 지식은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할 것이다. 이 두 지식에 대한 일련의 가르침이 요구되는바, 앞으로 이를 각각 논하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3.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칼빈은 두 가지를 묵상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명한 창조의 목적을 두셨다는 것, 모든 만물보다 인류를 마지막에 지으신 것은 만물을 준비해서 인류에게 사용하라고,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 창조’를 ‘창조의 목적’으로 여기신 것이죠. 근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또 무엇일까요? 그것은 ‘언약’을 체결하셔서 ‘자녀 삼고자 하심’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다스리고 지키는 ‘최고의 영장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자녀 됨’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영광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그 ‘조건’이 있어야 됐던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이었습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먹게 하시고, 모든 지식을 주신 가운데, 마지막, 가장 적은, 가장 끄트머리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불순종과 배은망덕한 마음’이 없이, 하나님의 품에 의지만 하면 되는, 그래서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에 맡기면 되는, 그것에 순종하면 되었었는데,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교만’이 들어온 것이죠. 베은망덕이 들어온 것이죠. 불충(不忠)이 들어온 것이죠.
그래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베푸셨는지’, 그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그리하여 ‘예배’로 나아가고, 하나님이 우리를 왜 지으셨는지, ‘영생의 자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래서 ‘미래를 묵상’하는, 미래의 묵상은 곧 ‘불멸의 묵상’이요, 불멸의 묵상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영생을 누리는 자로서 ‘영원히 하나님의 품에 거한다는 것’이죠. 이것을 먼저 우리가 묵상해야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이요, 고상한 것이요, 부유한 것인가를 묵상해야 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리고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봐야 된다. 타락한 인류의 모습을 다시 봐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를 살펴봐야 되는데, 결국 그것은 ‘우리가 뭘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은 자기의 재능들에 대해서, 아니 그 재능들의 결핍에 대해서 분명히 헤아려 보아야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헤아릴 때는 ‘없음’을 헤아리게 된다는 것이요, 우리의 재능을 헤아려 보아야 되는데, 결국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재능이 ‘결핍’되어 있는가를 헤아려보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최고의 것을 부유하게 베푸셨는데, 오그라들고 찌그러 들어서 볼품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흉하고 무능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이 두 가지 지식을 우리가 함께 묵상해야 된다라고 칼빈은 먼저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다루기 전에 이렇게 서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창조 때 부여받은 ‘원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아담의 죄의 전가로 비참해진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의 전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아는 지식, 곧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아는 지식, 이 세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순전’하게 지음 받아서 ‘탁월함’과 ‘고상함’과 ‘존귀함’을 지녔으나, 타락한 후에 ‘우매함’과 ‘치욕’과 ‘불명예’의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타락한 인류는 ‘맹목적 자기애’에 빠져서 ‘교만’하고 자기의 능력을 믿는 자부심에 취해 있고, 자기 안에 건전한 지성과 덕성이 있다고 착각하고, 그것의 ‘결핍’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여하신 ‘최초의 존귀함’과 ‘의로움’과 ‘선함’을 회복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며,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결핍을 분명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예배’드리고, ‘미래의 불멸한 삶’으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앞에 ‘겸손의 무릎’을 꿇는 그 자세를 우리가 가져야 한다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44강 결론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창조 때 부여받은 ‘원 하나님의 형상’, 아담의 죄의 전가로 비참해진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순전’純全하게 지음 받아서 ‘탁월함’, ‘고상함’, ‘존귀함’을 지녔으나, 타락 후 ‘우매함’, ‘치욕’, ‘불명예’의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맹목적 자기애’에 빠져 ‘교만’하고 자기의 능력을 믿는 자부심에 취하여 자기 안에 건전한 지성과 참 덕성이 ‘결핍’되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여하신 ‘최초의 존귀함’, ‘의로움’, ‘선함’을 ‘회복’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며, 무無에 이르는 우리의 ‘결핍’을 인식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미래의 불멸한 삶을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44강 | 2.1.1-3. (2권 23-29페이지)
타락 전 인류의 순전함과
타락 후 인류의 비참함
『기독교 강요』 2권 1장에서 5장까지는 전체적으로 ‘인간의 타락’을 다룹니다. 그중에서 1장과 2장은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사실, 그런데 아담이 언약의 조건인 ‘순종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 곧 불순종하였다는 것, 그리하여 죄를 지었다는 것, 그리하여 아담이 타락하였다는 것, 그 타락으로 모든 인류가 이제 사망에 이르고 ‘전적무능’, ‘전적부패’의 오염에 이르게 되었다는, 바로 ‘원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2권 1장, 그중에서도 서반부인 1절에서 3절까지를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칼빈은 우리 인류를 하나님이 얼마나 순전하게 지으셨고 대단하게 지으셨는가, 이 부분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가운데서 인간이 타락하여 얼마나 비참(miseria)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미 『기독교 강요』 1권 1장 1절에서 거의 모든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원(原) 하나님의 형상’, 곧 창조 때 우리의 모습, 그리고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 타락한 후 우리의 모습,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의 모습, 이 세 가지 지식. 그래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원 하나님의 형상’,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의 모습, 그것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한 바 있었습니다. 오늘 이 부분에서도 칼빈은 다시 이 점을 부각시킵니다.
인생에 대한 모든 이치를 각각 다 알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질진대,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는 그 무엇보다 더 한층 욕되다고 볼 것이니, 이는 우리가 필히 행하여야 할 일에 대해 어떤 방도를 꾀할 때에 비참하게도 언제나 그 무지가 우리 자신을 현혹시키고 심지어 눈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너무나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야말로 외계적인 어떤 사물, 어떤 사건에 대한 무지보다 더 심각한 병이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무지라는 것은 ‘죄의 열매’입니다. 철학자들이 여러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은 사실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여전히 사람 자신, 곧 철학자 자신에게서 유능함을 발견하려고 들고, 타락한 인류의 비참함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존귀하고 탁월하다는 그러한 전제하에 사상을 전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는 지식은, 다시 우리가 『기독교 강요』 1권 1장 1절에서 ‘우리 자신에 절망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갈망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에 실망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의 비참함을 헤아리지 않고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도 없고, 찬양할 수도 없고, 또 참 지식으로 나갈 수 없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 때 부여하신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후하게 우리에게 베푸시고, 이건 ‘일반적인 은총’이죠. 인간 모두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 그것이 창조 때만 아니라, 창조 이후로 지으시고, 보살피고, 또 생육하게 하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은총을 드러내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우리가 ‘순전’(純全, integritas)히 머물렀다면, 이런 ‘만약’은 역사적으로 전제할 수 없지만,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인류가 순전하게 머물렀다면, 우리 인류는 하나님이 주신 그 형상(창 1:26-27) 가운데 ‘탁월함’(excellentia)과 ‘고상함’(nobilitas)과 ‘[최초의] 존귀함’(prima dignitas)을 더없이 빛냈을 것입니다. 모든 만물보다 뛰어난 것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최고의 그러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어린아이조차도 웅변하는, 그러한 표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최초의 존귀함에 우리의 마음이 미칠 때마다 우리는 또 다른 편의 슬픈 광경인 우리의 치욕과 불명예를 대조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첫 사람의 인물 안에서 몰락해서 우리의 근본으로부터 떨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ex quo in primi hominis persona ab origine nostra excidimus). 그런데 이로부터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미움과 혐오와 함께 참된 겸손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새로운 열심이 불붙게 되는데, 그 열심 때문에 우리 각자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무익하고 헛되다고 여겨졌던 선한 것들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1.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것입니다. ‘자기의 죄’로 타락했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을 택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는데도, 사람이 자기 뜻대로 악의 자리에 섰습니다. ‘불순종’의 자리에 섰습니다. 교만(superbia)과 배은망덕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베푸셔서 누리게 하셨는데, 동산의 실과를 다 먹게 하셨는데, 배고픔이 없었는데, 그리고 사물의 이름을 짓고, 짐승의 이름을 짓고, 새의 이름을 짓고, 생물의 이름을 지을 정도로 지식이 있게 하셨는데, 지식이 모자라지 않는데, 괜히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죠. ‘무조건적 불순종’을 한 것이죠. 그리하여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됨, 선함, 의로움, 거룩함, 이런 것들을 다 상실해 버렸죠. 그리하여 ‘치욕’(foeditas)에 속하고, ‘불명예’(ignominia)에 속하고, ‘우매함’(socordia) 가운데 있는 그러한 ‘비참한 상태’(misera conditio)로 인간이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가 온전했다면,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고, 이제 그 ‘순종’을 보시고자 하는, 그래서 영광받고자 하시는.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도 아니라, 하지 말라는 그러한 소극적인 명령, ‘모든 것은 다 먹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그 실과는 먹지 마라. 그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라고 하셨는데, 그 나무가 어떤 선과 악을 알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죠. 나무가 무슨 죽음을 주는 열매가 있겠습니까? 나무에 무슨 생명을 주는 열매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사망’이 있는, 그것을 알려주는 표로서 나무를 두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선천적인 그러한 ‘교만’에 빠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피조물은 조물주에 의지하는, 그러한 ‘의존성’ 가운데 있을 때, 온전함을 나타낼 수 있는데,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니, 그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스스로, 자의적으로, 맹목적으로 알고자 하니, 그것은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붙들려 있고, 원천이고 기원이신 하나님께 모든 마음이, 또 모든 정성을 돌려야 되는데, ‘맹목적인 자기애(自己愛)’에 빠져 있습니다, 맹목적인 자기애. ‘blind love of self’, ‘amor caecus sui’ 라틴어로는, 맹목적인 자기애에 빠져서 선천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부터 거짓에 사로잡히고, 헛된 편견에, 극한 자기 지식에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은 그 자신의 골수에서 자발적으로 용솟음치는바(sponte prurientem in hominis medullis superbiam suis illecebris), 그것을 부추기는 유혹의 말보다 더 즐거운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 우리가 그 찬사에 동의하게 되면 그것은 끝내 우리를 속여 파멸로 이끌 것이다. … 오직 우리가 지닌 선한 것들만 생각하라고 우리를 만류시키는 그런 교사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진보할 수 없을 것이며 종국에는 최악의 무지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기독교 강요』, 1.1.1, 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2.
타락한 인류에게 본성상 깃들어 있는 이러한 ‘교만’(superbia)을 버리고 “참된 겸손”(vera humilitas, 『기독교 강요』, 2.1.1)을 지니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올바로 알게 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2, 각주 8.
그래서 인간의 교만이 이제 끝없이 솟아나는 용천수와 같이 우리 속에서 교만이 나타나고, 헛된 말과 유혹의 말이 우리 안에 무성하고, 또 사람은 그러한 말들을 즐거워하고, 진리가 아닌, 진실이 아닌 거짓을 더 기뻐하고, 거짓 찬사에 현혹되어서, 거짓 달콤함에 빠져서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는 덕성을 상실하고, 그저 자기가 옳다 하는 바대로, 자기 소행대로, 소견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이것은 사람들 보기에는 나아 보일지 모르나, 뛰어날지 모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비참’한 모습이죠. 최초에 부여하신 그 ‘존귀함’을 ‘상실’해 버린 것이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움’과 ‘선함’을 잃어버린 것이죠. 하나님이 주시는 ‘불멸’을 다 버린 것이죠. 더 이상 불멸의 존재가 되지 못하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영원한 존재이고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저 죄 가운데, 죽음 가운데, 형벌 가운데, 저 무저갱의 불못 가운데 거하는 것은 시간의 끝은 없을지라도, 그것은 결코 불멸이라고 할 수 없죠. 그것은 이미 멸망 상태로 계속 있는 거죠. 멸망 상태로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으로 그의 품 안에 영원히 있는 것이 불멸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실에 대한 재인식이 우리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침잠하게 하고 낙담시켜 겸손의 무릎을 꿇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원천이란 무엇인가? 진정 그 원천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우리 창조의 목적인가? 그 목적은 우리가 아주 멀리 떠나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 아파하고 신음하며 그 가운데 한숨을 내뱉으며 최초의 존귀함을 헤아리게 되는 바로 그것이다. 실로 사람은 그 무엇 하나라도 자기 자신 속에서 자랑할 만한 것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에, 이는 그가 자기 확신에 빠져 스스로 교만해지게 하는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3.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 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칼빈은 ‘겸손(humilitas)의 무릎을 꿇어야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낙담하고, 절망하고, 실망하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가 자기 자신에게서 찾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슨 지식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찾겠습니까? 무슨 의를 찾겠습니까? 무슨 뜻조차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겸손의 무릎을 꿇어라. 우리 안에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끼리 서로, 서로서로 자기들끼리 옳다 하는 그러한 자의적인 교만에 빠진 배은망덕한 그러한 자기 의, 자기 자랑은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도 우리는 가져갈 것도, 내어놓을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져야 할 지식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보도록 하자.
첫째, 사람은 자기가 창조된 목적과 자기에게 부여된 결코 범상치 않은 은사들에 대해서(『기독교 강요』, 1.5.2-3; 1.15.1-4)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는 이 지식으로써 경성(警醒)되어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기독교 강요』, 2.1.1-2)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에 이르게 된(『기독교 강요』, 3.9).
둘째, 사람은 자기의 재능들에 대해서, 아니 그 재능들의 결핍에 대해서(facultatum inopiam) 분명히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 결핍이 인식될 때에 그는 이른바 무(無)에 이르도록 오그라들어 극도의 혼란 가운데 무릎을 꿇을 것이다.
첫 번째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직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할 것이다. 두 번째 지식은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할 것이다. 이 두 지식에 대한 일련의 가르침이 요구되는바, 앞으로 이를 각각 논하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3.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칼빈은 두 가지를 묵상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명한 창조의 목적을 두셨다는 것, 모든 만물보다 인류를 마지막에 지으신 것은 만물을 준비해서 인류에게 사용하라고,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 창조’를 ‘창조의 목적’으로 여기신 것이죠. 근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또 무엇일까요? 그것은 ‘언약’을 체결하셔서 ‘자녀 삼고자 하심’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다스리고 지키는 ‘최고의 영장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자녀 됨’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영광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그 ‘조건’이 있어야 됐던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이었습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먹게 하시고, 모든 지식을 주신 가운데, 마지막, 가장 적은, 가장 끄트머리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불순종과 배은망덕한 마음’이 없이, 하나님의 품에 의지만 하면 되는, 그래서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에 맡기면 되는, 그것에 순종하면 되었었는데,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교만’이 들어온 것이죠. 베은망덕이 들어온 것이죠. 불충(不忠)이 들어온 것이죠.
그래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베푸셨는지’, 그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그리하여 ‘예배’로 나아가고, 하나님이 우리를 왜 지으셨는지, ‘영생의 자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래서 ‘미래를 묵상’하는, 미래의 묵상은 곧 ‘불멸의 묵상’이요, 불멸의 묵상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영생을 누리는 자로서 ‘영원히 하나님의 품에 거한다는 것’이죠. 이것을 먼저 우리가 묵상해야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이요, 고상한 것이요, 부유한 것인가를 묵상해야 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리고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봐야 된다. 타락한 인류의 모습을 다시 봐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를 살펴봐야 되는데, 결국 그것은 ‘우리가 뭘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은 자기의 재능들에 대해서, 아니 그 재능들의 결핍에 대해서 분명히 헤아려 보아야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헤아릴 때는 ‘없음’을 헤아리게 된다는 것이요, 우리의 재능을 헤아려 보아야 되는데, 결국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재능이 ‘결핍’되어 있는가를 헤아려보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최고의 것을 부유하게 베푸셨는데, 오그라들고 찌그러 들어서 볼품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흉하고 무능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이 두 가지 지식을 우리가 함께 묵상해야 된다라고 칼빈은 먼저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다루기 전에 이렇게 서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창조 때 부여받은 ‘원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아담의 죄의 전가로 비참해진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의 전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아는 지식, 곧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아는 지식, 이 세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순전’하게 지음 받아서 ‘탁월함’과 ‘고상함’과 ‘존귀함’을 지녔으나, 타락한 후에 ‘우매함’과 ‘치욕’과 ‘불명예’의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타락한 인류는 ‘맹목적 자기애’에 빠져서 ‘교만’하고 자기의 능력을 믿는 자부심에 취해 있고, 자기 안에 건전한 지성과 덕성이 있다고 착각하고, 그것의 ‘결핍’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여하신 ‘최초의 존귀함’과 ‘의로움’과 ‘선함’을 회복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며,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결핍을 분명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예배’드리고, ‘미래의 불멸한 삶’으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앞에 ‘겸손의 무릎’을 꿇는 그 자세를 우리가 가져야 한다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44강 결론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창조 때 부여받은 ‘원 하나님의 형상’, 아담의 죄의 전가로 비참해진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순전’純全하게 지음 받아서 ‘탁월함’, ‘고상함’, ‘존귀함’을 지녔으나, 타락 후 ‘우매함’, ‘치욕’, ‘불명예’의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맹목적 자기애’에 빠져 ‘교만’하고 자기의 능력을 믿는 자부심에 취하여 자기 안에 건전한 지성과 참 덕성이 ‘결핍’되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여하신 ‘최초의 존귀함’, ‘의로움’, ‘선함’을 ‘회복’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며, 무無에 이르는 우리의 ‘결핍’을 인식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미래의 불멸한 삶을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