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강 [3.3.15-20] 회개의 성향과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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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 3.3.15-20. (3권 146-158쪽)



회개의 성향과 열매


[『기독교 강요』, 3.3.15.]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사도가 회개의 일곱 가지 원인 혹은 결과 혹은 역할을 열거하며 기술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한 명분을 지닌다. 그것들은 열의 혹은 간절함, 변증, 분함, 두려움, 사모, 열심, 징벌로 이루어진다(고후 7:11)(Sunt autem studium aut sollicitudo, excusatio, indignatio, timor, desiderium, zelus, vindicta[2 Cor. 7, 11]).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5.

     칼빈은 고린도후서 7장 11절을 인용하면서 회개의 일곱 가지 원인 혹은 결과 혹은 역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회개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간절함’(sollicitudo)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회개에는 ‘변증’(excusatio)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뭔가 하면, 회개에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거죠. 이게 회개에는 변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회개에는 ‘분함’(indignatio)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분(義憤)이라고나 할까요?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이렇게 살지 못했다든지. 또 여기 분함이라는 것은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마치 마귀 사탄에게 내가 조종을 당한 듯한 그런 삶을 살았다, [그래서] 분하다는 거죠. 
     그리고 네 번째는 회개에는 ‘두려움’(timor)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죄에 대한 값 또 하나님의 엄정한 진노, 이러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섯 번째, 이러한 두려움이 있는 반면에 ‘사모’(desiderium)가 있다는 것이에요. 이 사모라는 것은 그저 막연히 죄로부터 벗어나고 흙탕물에서 빼달라 하는 그러한 사모가 아니라, ‘내가 올바른 것을 순종한다. 이제는 내가 바로 살아야 된다’라는 것에 대한 사모[입니다].
     이 사모와 함께 여섯 번째는 ‘열심’(zelus)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바라고 그 가운데서 열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저 회개는 우리 안에 파고 들어오는 가시와 같은 찌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죄]으로부터 구출되고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이러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회개에는 ‘징벌’(vindicta)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징벌에 대한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뤘는데 우리에게 무슨 징벌이 있느냐, 그 징벌이 우리에게 있다면 무슨 그것이 회개의 은혜겠냐,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렇게 말하는 징벌이 아닙니다. 여기 징벌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우리가 그 가운데서 신음하고, 내 죄과 얼마나 큰가, 내 죄과 망할 죄구나, 죽을 죄구나, 그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일곱 가지를 전체적으로 한번 설명해 본다면, 올바른 것이 뭔가를 깨닫고, 또 내가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깨닫고, 그리고 간절히 올바른 것에 대하여 열심을 내고, 사모하고, 그러면서도 내가 죄의 값으로부터 그 사망의 형벌로부터 이제 벗어난다는, 새 것이 된다는 그 인식 이것이 회개에는 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 가운데서 우리는 절도를 유지하고 절제를 하고, 회개하는 가운데서 절망하지 않고 소망하고, 그리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내 죄과 크지만 은혜도 크다, 그래서 은혜가 크니 막 살자,’ 이런 것이 아니라, 얼마나 큰 형벌 가운데서 우리가 사함을 받고 그 가운데서 이제 내가 단지 그곳에서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모하는 열심, 이런 것이 우리 안에 회개 가운데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슬픔은, 그것이 계속되지만 않는다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때때로 발길을 돌려 괴롭고 쓰라린 여러분의 길에 대한 회상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고요한 기억을 안은 고원(高原)으로 나아가기를 청한다. 쑥에 꿀을 섞자. 잘 맞게 섞어 달게 해서 마시면 건강에 좋은 쓴맛으로 구원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겸손히 자신을 성찰하려거든 또한 여호와를 그의 선하심 가운데 성찰하라(Necessarius dolor pro peccatis, si non sit continuus. Suadeo reflectere pedem interdum a molesta et anxia recordatione viarum vestrarum, et evadere ad planitiem serenae memoriae beneficiorum Dei. Misceamus absynthio mel, ut salubris amaritudo salutem dari queat; cum immisto dulcore temperata bibetur, et si de vobis in humilitate sentitis, sentite et de Domino in bonitat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5.

     그래서 베르나르두스(Bernardus)의 유명한 말을 칼빈이 인용합니다. “쑥에 꿀을 섞자. 잘 맞게 섞어 달게 해서 마시면 건강에 좋은 쓴맛으로 구원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게 절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쓴 눈물도 있고 단 눈물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또 나에 대한 어떠한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변증이 있다고 아까 나왔지 않습니까? 올바른 것을 세웁니다. 올바른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사모합니다. 열심을 냅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회개 가운데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함 가운데서도 두려움에 놓인 가운데서도 오히려 우리가 담대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러한 것들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16.]

이제 우리는 회개의 열매들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의무들, 그리고 이 세상 삶 전체 가운데서의 거룩함과 순수함이 그것들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법을 규범으로 삼아 자기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 더 많은 열의를 쏟는 사람일수록 자기의 회개에 대한 더욱 확실한 표징들을 보여 줄 것이다(Iam et poenitentiae fructus quales sint, intelligi potest: nempe officia pietatis erga Deum, caritatis erga homines, ad haec in tota vita sanctimonia ac puritas. Denique quo maiore quisque studio vitam suam exigit ad normam legis Dei, eo certiora poenitentiae suae signa ed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6.

     이러한 “회개의 열매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의무, 이게 율법이요 선지자[이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 전체가 회개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했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해코지했던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이러한 것이 회개의 열매죠. 하나님의 사랑은 좀 더 거룩함의 열매라면, 이웃을 향한 열매는 순수함의 열매[입니다]. 칼빈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거룩함과 순수함이 우리 가운데 회개의 열매로 맺힌다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뚜렷한 표징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라는 것이죠, 변화됐다는 것이죠. 
     이러한 변화가 그렇다면, 이 확실한 표징이 어디로부터 본질적으로 주어지느냐? 바로 마음의 내적 정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욜 2:13).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이 말은 손을 씻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마음을 찢고 회개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 자신을 낮추고, 또 우리의 더러운 육체, [곧] 이전의 것으로부터 새롭게 처방을 받는 그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보았지만 칼빈이 사용하는 ‘vis poenitentiae,’ [곧] ‘회개의 힘,’ 그리고 ‘fructus poenitentiae,’ [곧] ‘회개의 열매,’ 이런 것을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회개가 단지 형식에 있다면 이러한 열매가 있을까요? 그래서 아까 회개의 일곱 가지 측면, 칼빈이 말한 그것이 상당히 우리에게 와닿습니다.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회개 일곱 가지 요소, 아까 그런 걸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기독교 강요』, 3.3.17.]

     회개의 본질은 금식과 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회개를 다룰 때 주로 금식 이야기가 나오는데, 칼빈은 금식하고 우는 것, 곡하는 것, 이런 것이 회개의 본질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찢어야 되고. 우리 주님께서도 ‘신랑을 빼앗길 때야 가서야 금식할 것이다’(마 9:15 등), 이렇게 말씀한 것은 어떤 형식의 끄트머리에서 울고 굶고 하는 그게 본질이 아니라, 그게 물론 우리에게 회개의 기도에 중요한 도움은 되겠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죠. 본질은 바로 돌이킴이죠. 육이 죽고 영이 사는 그런 돌이킴이죠. 그래서 이러한 회개 가운데서 우리는 내 속을 먼저 찢고,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18.]

회개는 죄과에 대한 고백이라기보다 하나님을 향한 회심이며, 형벌과 죄책을 거두어 달라는 간구와 함께[한다](Neque enim tam est conversio ad Deum quam culpae confessio, cum poenae et reatus deprecation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8.

     그래서 회개는 단지 고백이라기보다, 외적인 고백이라기보다 회심이다, 칼빈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강조하는 게 칼빈이 회개, 중생에서 역시 회심이에요. 회심, ‘conversio,’ 돌이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따로 회개, 회심, 중생, 이렇게는 말하지 않아요. 보통 회개와 회심을 같이 보는데, 칼빈은 특별히 회심이라는 요소, ‘conversio,’ 변화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회개는 죄과에 대한 고백, [곧]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하나님 앞에서 은밀한 토설이 있겠죠. 그러나) 본질은 뭐냐? 하나님을 향한 회심이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회심. 이 하나님을 향한 회심. 내가 나를 바라보던 ‘나’가, 모든 것이 맹목적인 자기애(自己愛)에 속해 있던 이전의 나가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형벌도, 내 죄책도 하나님께 맡기는 간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회개는 죄과에 대한 고백이라기보다 하나님을 향한 회심이고, 형벌과 죄책을 거두어 달라는 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고린도전서 11장 31절의 말씀의 인용이 적절하게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나를 살피는 것, 나를 생각하고, 나 때문에 내가 절망하고, 나 때문에 내가 교만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돌이키면 내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그러므로 어떠한 사적인 고백이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지만, 본질은 하나님께 돌이키는, 그 총체적으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거듭남이 있고, 회개와 거듭남이 함께 있고, 그 거듭남 가운데 날마다 거듭난 자로서 날마다 계속적 회개에 힘써야 된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회개에 힘써야 한다. 이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명령이다. 이러한 회개는 마치 죽은 자들이 깨어나듯이 하는 회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죽은 자들이 깨어나듯이 하는 회개는 치욕스럽게 나락에 떨어졌거나, 고삐가 풀려 방자히 죄를 짓는 데 각자 자신을 던졌거나, 하나님의 멍에를 내팽개치고 모종의 반역을 꾀했던 사람들이 돌이킬 때 하는 회개이다. 성경은 이 회개를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나아가는 통로나 부활과 같다고 제시한다(poenitentiam, cui assidue incumbere iubemur, ab ea differre quae velut a morte excitat qui vel turpius ceciderant, vel effraeni licentia se proiecerant ad peccandum, vel quadam defectionis specie excusserant iugum Dei. Nam scriptura saepe dum hortatur ad poenitentiam, quasi transitum et resurrectionem a morte in vitam signific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8.

     마치 죽은 자들이 깨어나듯이 하는 생명의 회개와 함께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곧] 그 생명 가운데서 날마다 다시 살아나는 생활의 회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나아가는 통로, 부활의 통로, 그러한 특별한 생명의 회개도 있지만, 매번, 매번 ‘내가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소서’[도 있습니다]. 이게 뭐예요? 칼빈은 이것을 “통상적 회개”(poenitentia ordinaria)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회개”, “통상적 회개”라고 할 때, “특별한 회개”(poenitentia specialis)는 생명의 회개, [곧] 내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바로 그 한 번, 그 단번의 회개[이고], 그 특별한 회개와 함께 ‘통상적 회개,’ 매번 하나님 앞에 내놓는 그런 회개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19.]

진정 복음의 요체 전부는 회개와 죄사함 두 항목에 포함된다(totam evangelii summam duobus istis capitibus contineri, poenitentia, et peccatorum remission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9.

     다시금 여기서 칼빈은 우리에게 ‘복음의 요체는 회개와 죄 사함에 있다,’ 회개와 죄 사함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와 죄 사함이 두 가지는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회개는 돌이킴이라면, 죄 사함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이전 것을 가지고 돌이킬 수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당연히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려면 죄를 버려야 되지 않습니까? 죄를 어떻게 버립니까? 사해 주셔야 버리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회개와 죄 사함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바로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 세례’다,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바로 복음서에 세례 요한의 세례,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말씀하는데], 우리가 받는 세례가 바로 그 세례죠. 

첫째, 그는 하나님의 자비의 보화들이 자기 안에 드러났다고 선포하신다. 둘째, 그는 회개를 요구하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확신을 요구하신다(Primum declarat, thesauros misericordiae Dei in se apertos, deinde poenitentiam exigit, tum postremo fiduciam erga Dei promissione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9.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곳에서도 회개가 원인이고 복음이 결과다,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화가 먼저 드러나고, 둘째로 회개를 요구하신다는 거예요. 칼빈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어요. 먼저 하나님의 자비의 보화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긍휼의 나라가 임했다, 은혜의 나라가 임했다, 그러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보화들이 먼저 드러나고, 그리고 회개를 요구하시고, 그리고 세 번째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신하라, 믿고 따르라, 이 말입니다. 이렇게 세 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상 동시적인 것이겠죠. 복음의 보화, 자비, 은혜, 그것이 선포됨과 함께 우리에게 회개가 요구되고, 그것과 함께 믿음으로 그것을 확신 가운데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함과 죄 사함을 우리에게 준다[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구원, 생명을 우리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20.]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바로 그와 함께 살고 그와 함께 죽는 그 지식이 우리의 회개의 은혜와 상응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의를 이루시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 그것이 회개의 두 요소로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고 우리도 그와 함께 삽니다. 그래서 죄 사함과 회개의 은혜의 약속이 동시에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은총을 받는 공로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긍휼을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회개인 것입니다. 회개야말로 천적인 은혜입니다. 중생도 칭의도 전적인 은혜이듯이 회개도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육체가 확실하게 죽을 때까지, 곧 성령이 우리 안에서 다스리실 때까지, 그 육체를 죽이는 항구적인 열심과 훈련이다(vitam christiani hominis perpetuum esse studium et exercitationem mortificandae carnis, donec ea plane interempta spiritus Dei regnum in nobis obtine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20.

     그리스도의 삶은 육체가 확실하게 죽을 때,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납니다. 그것이 바로 항구적인 회개의 훈련이고, 하나님 앞에 날마다 회개하는 ‘계속적 회개’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죽이는 항구적인 열심과 훈련”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회개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간절함, 의에 대한 변증, 잘못에 대한 분함, 대가에 대한 두려움, 순종에 대한 사모, 진심 어린 열심, 엄정한 징벌, 이 일곱 가지의 요소가 있습니다.
     두 번째, 회개의 슬픔은 소망과 함께 있습니다. 쑥에 꿀이 섞인다[는] 베르나르두스의 말을 다시 기억합니다. 
     셋째, 회개의 열매로서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함의하는 거룩함과 순수함이 있으며, 그러한 표징이 내적으로부터 나타납니다. 내적 정서로부터, 마음을 찢는 것부터 나타납니다. 
     넷째, 회개의 본질은 우는 것이나 금식이나 죄과에 대한 공적 고백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 에로의 회심 곧 돌이킴에 있습니다. 
     다섯째, 복음의 요체는 회개와 죄 사함에 있는바,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는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구원의 의와 생명과 능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써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106강 결론


  1. 회개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간절함, 의에 대한 변증, 잘못에 대한 분함, 대가에 대한 두려움, 순종에 대한 사모, 진심어린 열심, 엄정한 징벌, 이 일곱 가지의 요소가 있습니다. 
  2. 회개의 슬픔은 소망과 함께 있으니, 쑥에 꿀이 섞임과 같습니다. 
  3. 회개의 열매로서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함의하는 거룩함과 순수함이 있으며 그러한 표징이 마음의 내적 정서로부터 나타납니다.
  4. 회개의 본질은 우는 것이나 금식이나 죄과에 대한 공적 고백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로의 회심에 있습니다. 
  5. 복음의 요체는 회개와 죄사함에 있는바,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는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구원의 의와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긍휼로써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