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강 [3.3.1-4] 믿음의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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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 3.3.1-4. (3권 121-129페이지)



믿음의 회개


     우리는 3권 1장에서 성령론에 대한 개괄적인 이야기를 살펴보았고, 그리고 3권 2장에서 믿음에 대해서 고찰했습니다. 이제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 3장에서 18장까지 소위 구원의 서정, 그러니까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는 복에 대해서,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여기에서 [구원의 서정의] 어떤 시간적 순서를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작용하는 그 관점에서 먼저 회개와 중생을 다루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룬 후에 칭의와 성화를 다루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오해해서 ‘칼빈의 구원의 순서가 이러하다. 그래서 일반적인 구원서정과 다르다,’ 이렇게도 말하지만 그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칼빈은 여기에서 전체적으로, 성령이 임하여서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은혜, 그 첫 번째 측면으로서 회개, 그리고 회개를 중생과 함께 다룹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를 먼저 말하고, 이러한 회개와 중생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은혜가 전체적으로 어떤 질서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지느냐, 그래서 3권 11장부터 18장까지는 칭의와 성화를 아주 역동적으로 다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3.1.]

     오늘 3권 3장에서는 회개에 대해서 다루면서 먼저 “복음의 요체”(summa evangelii)가 “회개와 죄 사함”(poenitentia et remissio peccatorum)에 있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회개와 죄 사함은 동일한 사건의 두 측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회심입니다, 변화입니다, 돌이킴입니다. 그것은 곧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죄 사함의 두 개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에서, 우리를 회개시키심과 함께 우리를 사하심이라는 이 측면에서 봤을 때는 바로 복음의 요체가 회개와 죄 사함이라고 칼빈이 말하는 것이 적절한 것입니다. 

과연 회개와 죄사함, 곧 삶의 새로움과 값없이 주시는 화목, 이 두 가지 모두를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두 가지 모두에 이른다(Iam quum utrumque nobis conferat Christus, et utrumque fide consequamur, vitae scilicet novitatem et reconciliationem gratuit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

     회개는 “삶의 새로움과 값없이 주시는 화목,” 이 두 가지를 다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얻고, 그 가운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일이 가능할까요? 

실제적인 삶의 거룩함은 값없는 의의 전가와 분리되지 않는다(a gratuita iustitiae imputatione separetur realis, ut ita loquar, vitae sanctita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1.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기 때문에, 그래서 ‘실제적인, 생명과 삶의 거룩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다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값없이 전가해 주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회개와 죄 사함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2.]

     회개는 신약 시대의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선포의 핵심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 특별히 우리 복음서에서는 이러한 회개를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다, 그래서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회개하라,’ 이렇게 우리는 읽어야 됩니다. 회개하며 천국이 온다, 그게 아닙니다. 회개가 어떤 원인이고 천국의 도래가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정확히 칼빈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위로와 기쁜 소식이 먼저 우리에게 있고 그 가운데서 회개가 임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편 130편 4절에 대저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사유(赦宥)하심, 사하심, 용서하심. 사하시고 용서하심, 이게 ‘사유’란 말이에요. 사유하심이 주께 있으니 그 가운데서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 [즉] 두려워하는 가운데 공경한다, 이게 우리가 돌이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만홀히 행하고 주를 없다 하고 방자하게 행하다가 이제 경외의 자리에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회개의 공로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복음이 임하여서 우리가 그 가운데서 은혜를 누리고, 그러므로 회개에는 어떤 준비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호세야 6장 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찢으셨고 우리를 치셨다는 것은 바로 우리를 해쳤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상하게 되고 멀어지게 되고 또 우리의 배역함으로 여호와를 떠나게 되는 [것인데,] 이게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치신 것과 또 우리를 찢으신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한 것이죠. 그런데 여호와께서 우리를 돌이킨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가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그가 싸매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 시대 때 재세례파들, 특별히 극단적인 신령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이 어떤 내적 깊은 고찰과 (결국 신비주의는 공로주의로 가거든요) 그런 공로로부터 우리에게 회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법정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회개가 있다고 칼빈은 강조하는 것이죠.

[『기독교 강요』, 3.3.3.]

     이 회개에는 특별히 두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 신학과 교리사(敎理史)에 있어서 특별히 개혁신학에 있어서 대원칙이죠. 이미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미 믿음에서도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산다는 개념이 나타났습니다. 왜요? 믿음이라는 것이 전적인 은혜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믿음이 그저 도구로 주어지고 우리의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변화와 함께 믿음이 주어지기 때문에,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다시 우리에게 오는 것은 바로 그것이 말씀을 믿는 역사거든요. 이제 오늘 여기에 다시 나옵니다. 바로 이 회개의 두 요소도 옛 것이 죽고 새 것이 사는, [곧]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두 요소를 성경의 규범에 따라서 ‘죽임’과 ‘살림’이다, [즉] 옛 것을 죽이는 것 새 것을 살리는 것, 그래서 ‘mortificatio’, ‘vivificatio,’ 이렇게 두 가지를 우리가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회개의 두 요소도 되고, 중생의 두 요소도 되고, 칭의의 두 요소도 됩니다. 또 나아가서 우리가 날마다 성화 과정에 있는 그것도 본질적으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와] ‘나는 날마다 사느라’[입니다]. 그래서 죽임과 살림이라는 이 두 요소가 회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임’을 죄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배태된 영혼의 고통 및 공포라고 해석한다(Mortificationem interpretantur animae dolorem et terrorem ex agnitione peccati et sensu iudicii Dei concept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3.

     죽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치 않음을 알게 되는 것, [즉] 죄로 말미암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여호와를 즐거워하지 않고 여호와를 멀리하고. 여호와를 멀리함이 곧 사망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죽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전에 내가, 죽은 나가 나를 죽이는 것, 그래서 여호와로 멀어진 내가 그 나를 죽이는 것, 이것은 또 다른 나를 살려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임과 살림이 이원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단계로, 두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동시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와야 어둠이 물러가듯이 말입니다. 어둠이 어둠을 물리치고 빛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빛이 들어와야 어둠을 물리치듯이, 그래서 죽임과 살림이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옛 것을 죽이는 것이고, 옛 것을 죽임이 새 것을 살림입니다. 새 것을 살림이 옛 것을 죽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사함과 새롭게 거듭남이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의 세례와 자녀 됨의 중생의 세례가, 두 가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있습니다. 죽임과 살림이 같이 있습니다, 동시적입니다. 그래서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전 것을 죽인다는 것은 특별히 우리가 회개와 관련해서는 ‘통회’(contritio)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통회라는 것은 전적인 자기 부인입니다. 나의 옛 것이 잘못됐다고 다 끄집어내서 내버리는 것입니다,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게 죽임입니다. 

‘살림’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의 열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열의는 다시 태어남으로부터 솟아 나온다. 이는 마치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살기 시작하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quum potius sancte pieque vivendi studium significet, quod oritur ex renascentia; quasi diceretur, hominem sibi mori ut Deo vivere incipi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3.

     그리고 살림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와 구원, 그것으로부터 생명이 들어오는 [것인데,] 근데 하나님은 죽음을 그냥 두고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죽이고 살림이 들어오는 그것이 바로 살림입니다. 그래서 살림이라는 것은 죽음의 죽음으로서의 살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것을 죽이고 새 것을 살리고, 이것이 바로 회개의 두 요소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회개의 힘”이라고 표현합니다. ‘vis poenitentiae,’ 바로 회개의 힘[입니다]. 회개의 힘이라는 것은 그저 소극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힘이라는 것은 밀어내는 것이고 또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회개의 힘이라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에로 나아가는 적극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비밀입니다. 회개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3.4.]

     그래서 회개에는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가 동시에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굳이 이 둘을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표지로 그 둘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를 “율법적 회개”라고 말했다. 죄라는 부식제(腐蝕劑)로 상처를 입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공포로 닳아 버린 죄인은 율법적 회개를 통하여서 불안에 옥죄인 채 묶여 있어 그것으로부터 자기를 구출해 낼 수가 없다(quas ut nota aliqua distinguerent, alteram legalem dixerunt, qua peccator peccati cauterio vulneratus et terrore irae Dei attritus in ea perturbatione constrictus haeret, nec se explicare pot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4.

     보통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를 나누고, 율법적 회개는 가인이나 사울이나 [가룟] 유다와 같이 온전치 못한 돌이킴, 이런 것은 그저 자기 죄를 깨달아서 ‘내가 잘못했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가인도 그렇게 이야기했지 않습니까(창 4:13). ‘내가 죽으리라.’ 또 사울도 아주 그냥 망령이 들 정도로 두려워했지 않습니까?(삼상 15:30) 유다도 나중에는 ‘예수의 피는 무지한 피다’ 하면서 돌이켰지 않습니까?(마 27:4)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에 대한 인식이죠. 그것은 새 것이 사는 것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죠. 

그들은 다른 하나를 “복음적 회개”라고 말했다. 죄인은 실로 극심한 곤궁을 자기 마음속에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적 회개로 말미암아 그 곤궁 너머로 더 높이 솟아올라 그리스도를 자기 상처를 고칠 약이요, 공포를 이길 위로요, 비참함을 피할 도피처로 붙든다(evangelicam alteram, qua peccator graviter quidem apud se afflictus, altius tamen emergit, et Christum, vulneris sui medicinam, terroris consolationem, miseriae portum apprehendit).…우리는 마음속이 죄의 가시로 헐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으로 일으켜지고 소생되어 주님께로 돌아선 모든 사람 가운데서 ‘복음적 회개’를 본다(Evangelicam poenitentiam videmus in omnibus, qui peccati aculeo apud se exulcerati, fiducia autem misericordiae Dei erecti et recreati, ad Dominum conversi su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3.4.

     이런 것을 율법적 회개라고 하고, 그리고 복음적 회개는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의, 공로로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복음적 회개다, 이렇게 나누면서 율법적 회개가 따로 있고 복음적 회개가 따로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학자들 간에. 
     그러나 칼빈은 사실상 이 두 가지를 구별할 것이 아니라, 회개라면 당연히 복음적 회개고 그 복음적 회개 안에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법을 깨달아 내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리고 은혜를 알고 내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를 굳이 나눌 필요는 없지만, [즉] 굳이 율법적 회개를 따로 마치 존재하는 회개 같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그것이 회개의 두 요소라는 것을 드러내는 측면에서,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를 이야기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칼빈이 이야기합니다. 
     복음적 회개라는 게 뭘까요? 히스기야(왕하 20:2; 사 38:2)와 니느웨 사람들(욘 3:5, 9), 또 다윗이 죄를 지은 이후 회개의 시편을 쓰고 금식하고 하는 그런 모습(삼하 12:13, 16), 그리고 베드로의 회개(마 26:75; 눅 22:62), 이런 것은 이제 복음적 회개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통 회개다 이러면 율법적 회개 정도로 회개라고 말하는 개념이 있다는 거죠. 이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회개는 이미 복음적 회개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회개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회개의 힘이 나타나는 그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칼빈이 이 부분에서 회개의 두 요소를 ‘mortificatio,’ 그리고 ‘vivificatio,’ 이렇게 보고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것, 이것을 율법과 복음[이라고] 이렇게 연결시키는 이런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기억해야 될 것은 율법과 복음의 실체가 그리스도로 동일하다는 것,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2권에서 신구약의 일치에 대해서 배웠지만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래서 회개에서는 율법의 실체도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율법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그리고 또 복음의 측면에서는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는 가운데서 회개의 은혜가 우리가 역사한다, 이것이 칼빈이 회개의 장을 여는 아주 귀한 교리적 식견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론]

     이 부분을 요약해 보자면, 첫째로 복음의 요체는 회개와 죄 사함이 있으며 이 둘은 모두 값없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습니다. 
     둘째로 회개의 공로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사유하시고 죄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의 기쁜 소식이 먼저 임하고 회개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회개가 있고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가 있고 ‘천국이 가까웠다. 그러니 회개하라,’ 이렇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이죠.
     세 번째, 회개에는 옛 것을 죽임과 새 것을 살림의 두 요소가 있으니, 옛 것을 죽임은 죄를 인식하고 심판을 두려워하고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는 그 통회이며, 새 것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자비, 은혜, 구원으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넷째로 회개의 힘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따른 은혜로써 주어지며,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는 단지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율법적 회개에 그치지 않고, 돌이켜서 어디로 이르느냐, 바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 복음의 은혜에, 그래서 복음적 회개에 미친다고 칼빈은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103강 결론


  1. 복음의 요체는 회개와 죄사함에 있으며, 이 둘은 모두 값없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습니다.
  2. 회개의 공로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사유하시고 죄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의 기쁜 소식이 먼저 임하고 회개가 따르는 것입니다.
  3. 회개에는 옛 것을 죽음과 새 것을 살림의 두 요소가 있으니, 죽임은 죄를 인식하고 심판을 두려워하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는 통회이며, 살림은 하나님의 선하심, 자비, 은혜, 구원으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4. 회개의 힘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따른 은혜로써 주어지며,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는 단지 죄를 깨닫는 율법적 회개에 그치지 않고 돌이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복음적 회개에 미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