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강 [3.2.41-43] 믿음과 소망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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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 3.2.41-43. (3권 113-120페이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그 말씀이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그리하여 믿음의 말씀이라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고요. 믿음의 제1요소인 말씀, 지식, 진리,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 이제, 이때에, 때가 차매, 신약 시대에 성취되었습니다. 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시고, 그 이루신 것을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그래서 복음서로부터 시작되는 주님의 이 땅의 오심과 그리고 나심, 사심, 그런 모든 것을 이루심, 그 가운데서 이제 다 이루신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임재, [그리고]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것, 그것을 우리 것 삼아 주면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길, 진리 곧 크게 말하면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 곧 은혜, 그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요 1:14, 17),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진리의 성령,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성령, 그리고 예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푸셔서 우리가 누리게 하시는 은혜의 성령[이 계십니다]. 그래서 그 성령에 임하면 약속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고, 그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약속이고, 그래서 성취된 약속을 누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성취된 약속이로되, 아직 종말론적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인 쳐 주신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역사하지만, 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지금 성취된 약속으로서 우리 안에 역사하지만, 그 약속은 완성을 바라보는 약속이다, 그래서 구약 시대 때는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대망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다 이루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서 이제 계시다가, 그 계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는 거죠. 

[『기독교 강요』, 3.2.41.]

우리가 보기에 믿음의 본성을 약속의 실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낫고 더 명료한 선포는 없다. 믿음은 그 고유한 기초가 되는 약속에 의지한다. 따라서 약속이 제거되면 믿음은 끝내 쇠퇴하거나 사라지고 만다(Quoniam non aliunde melius aut magis perspicue fidei natura declarari posse videbatur, quam a promissionis substantia, qua velut proprio fundamento sic nititur, ut ea sublata protinus corruat, vel potius evanesc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41.

     그래서 ‘믿음의 본성을 약속의 실체’[라고 합니]다. 믿음은 말씀의 약속, 바로 오실 그리스도의 약속은 구약, 오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약속은 신약, 그래서 약속의 실체,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말씀을 믿음이요, 그리스도를 믿음이요, 곧 언약을 믿음이요, 그 언약, 약속에 기초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이 없으면 믿음이라는 것은 쇠퇴하거나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뭐예요? 하나님의 영역이에요. 그래서 믿음은 약속을 믿는 것인데, 그 약속 이게 구속사예요. 이게 구속사라고요. 그래서 구약의 약속이 신약에 성취되고, 신약의 약속이 끝내 완성되고, 이 모든 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이 없으면 믿음이 쇠퇴되거나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가 사용하는 ‘실상’(ὑπόστασις)이라는 단어는 경건한 정신이 의지하고 기대는 일종의 지주(支柱)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이는 마치 믿음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모종의 확실하고 안전한 소유(fidem ipsam certam quandam esse ac securam possessionem eorum quae nobis a Deo promissa sunt)라고 전하는 듯하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4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히브리서 1장에서 10장까지는 계속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어요. 그 그리스도가 혈과 육을 지니시고, 구원의 창시자시고,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시고, 단번에 영원한, 온전한 죽음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그 예수가 구약 시대 때 백성들이 믿었던 예수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히브리인들이. 그걸 히브리서에서 기록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히브리스 11장 1-2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 그 말은 곧 구약 시대 백성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ὑπόστασις)이 믿음이었다. 그게 히브리서 11장 1절이에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의 실상은 구약 시대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약속이고, 이제 신약 시대 백성들에게는 성취된 약속인데, 이것이 우리의 실상인데, 이 성취된 약속이 이제 완성되는 것을 바라보는, 그래서 여전히 우리가 소망 가운데 기도하고, 소망 가운데 믿음을 갖는 거죠. 그래서 약속이로되, 성취된 약속이로되, 완성된 약속이 아니라 완성된 약속을 대망하는 성취된 약속, 그게 신약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소망의 실상이다, 약속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미 이 약속을 가지고 있어요.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것이고, 약속을 믿는 것이에요. 언약을 믿는 것이고. ‘뭘 믿습니까?’ 이러면 ‘신구약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신구약 말씀이 뭡니까?’ [이러면] 옛 언약과 새 언약, 옛날 약속과 새로운 약속, 구약 시대의 약속과 신약 시대의 약속,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 약속을 소유하는 것이다, 언약을 소유하는 것이다,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지만 믿음은 실상입니다. 그게 뭐요?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그 약속의 성취자이시니까, 하나님은 변개치 아니하시고 신실하시니까, 그러니까 믿음이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 믿음 가운데 우리는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평정은 소망 가운데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 것들에 속한다(securitatem hanc possidendi, esse rerum quae in spe iacent, ideoque non viden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41.

     그래서 여기서 다시 칼빈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평정 가운데 소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평정을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securitas,’ 평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우리가 저번에도 보았고, 또 그 전전주에도 보았듯이, 평정이라는 것이 바로 뭡니까? 믿음의 필히 따르는 파생적인 요소라[고] 그렇게 우리가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믿음에는 평정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평정에는 평화가 있고, 잠잠함이 있고, 오래 참음이 있고, 그리고 사랑의 열매가 맺는, 이런 것들이 평정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약속을 믿는 것이요. 보통 우리가 미래의 약속을 믿는다 하면 좀 불안하잖아요. 그리고 아직 모호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왜? 믿음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의 보내신 자 아들을 믿는 것이고,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조명과 감화가 있기 때문에 평정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평정 가운데 약속을 믿는 거예요. 평정 가운데 약속을 믿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확고하고 확실하고 불변한 그 믿음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이렇게 히브리서 11장 1절에 이 증거, [곧] ‘엘레코스’(ἔλεγχος)라는 말을 덧붙여서 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뭐를 이야기하겠습니까? 바로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믿음으로 그 말씀의 확실성과 확신을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 말씀이 객관적인 진리고 내 안에 역사하는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기초이자, 믿음의 확고한 토대이자, 믿음의 목표, 그것이 바로 약속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믿음이 우리 안에 약속으로 역사할 때 이 약속은 그저 지식일까요? 아닙니다. 이 믿음의 제1요소인 지식은 이미 성령의 조명과 감화 가운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말씀으로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에는 꼭 평정이 따르고, 그 평정 가운데 우리는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을 낳는 것이 오직 믿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어야만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믿음 가운데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바울이 경건한 자들의 자랑이라 부르는 양심의 증언은(고후 1:12)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첫째, 당신은 하나님의 관용이 없다면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하나님이 부여하지 아니하시면 결코 어떤 선행도 지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거저 주지 않으시면 당신은 어떤 일로도 영생의 값을 치를 수 없다(testimonium,…conscientiae, quod piorum gloriam vocat Paulus (2 Cor. 1, 12), in tribus consistere credo: necesse enim primo omnium est, credere quod remissionem peccatorum habere non possis nisi per indulgentiam Dei; deinde quod nihil prorsus habere queas operis boni nisi et hoc dedent ipse; postremo quod vitam aeternam nullis potes operibus promereri nisi gratis detur et illa). -베르나르두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41.

     여기에서 베르나르두스(Bernardus, 1090-1153)를 인용하는데요. 베르나르두스는 ‘첫째 하나님의 관용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 둘째 이 하나님의 죄 사함이 없으면 선행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용을 베푸셔서 죄 사함을 주시고 그 가운데 우리에게 선행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저 주시지 아니하면 어떤 영생의 값도 치를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이 뭔가 하면, 여기에서 ‘영생의 값’이라든지 ‘선행’이라든지 이게 바로 사랑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베푸시는 그 영생의 선물, 그 선물의 가치가 어디에 미치느냐, 바로 사랑에 미친다는 거예요, 사랑에. 그래서 믿어서 구원을 얻은 자가 사랑하게 되는 것, 그래서 믿음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고, 이원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있다, 이 말이에요. 고린도전서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42.]

     소망은 이미 보았잖아요, 우리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그래서 소망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약속으로 다루어졌잖아요. 그래서 믿음은 소망의 실상이고, 그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고(갈 5:6),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이 함께 있다, 이 말이에요. 함께 있다. 이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소망이 있고 사랑이 있고, 사랑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믿음과 소망이 있는 것이고, 소망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믿음과 사랑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소망과 분할되지 않습니다. 함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이 있다는 것이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에요. 왜요? 우리는 약속을 믿기 때문에. 어떤 회고적인 믿음, 그것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혹은 현재에 안주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미래를 대망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바로 믿음은 소망과 분할되지 않는 짝을 이루고, 믿음으로부터 소망을 자아내고, 그리고 소망을 드러내고.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면 ‘내 믿음에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내 믿음으로부터 소망이 나오고, 내 믿음에서 또 소망이 비치고, 드러나고,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유창한 웅변을 가지고 3단 논법을 이야기해도, 소망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소망 가운데 바라는 가운데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시 우리가 돌아가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의 토대가 되고 목표가 되기 때문에 약속을 믿는 믿음이니까, 소망의 믿음이라는 것이요,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실한 감화(certa…de veritate Dei persuasio)”라[는 것입니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정의죠.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실한 감화인데, 이 확실성 가운데 확신이 있다는 건 우리가 많이 다루었습니다. 객관적 확실성과 주관적 확신. 이 객관적 확실성은 약속이 있다는 것이고, 주관적 확신은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거고. 약속이 성취되었고 성취된 약속이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이게 바로 객관적 확실성과 주관적 확신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예표와 성취, 약속과 성취,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성취, 이 말씀을 믿잖아요. 그 말씀을 믿는 것, 이게 확실성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 성취된 시대에 살잖아요. 성취되었는데 완성을 향하여 나가는 시대, 이게 종말론적인 시대란 말이에요. 신약의 종말론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의 확실성 가운데 확신이 나에게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고 성취된 시대에 우리가 살되, 완성의 시대로 나아가는 이런 것이 다 소망 가운데, 믿음 가운데, 사랑 가운데 역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칼빈은 소망과 믿음의 관계를 아주 아름답게 수사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의 정의적인 말을 하는데요. 

소망은 믿음으로써 믿어지는, 진정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된 것들에 대한 기대에 다름 아니다(nihil aliud sit spes quam eorum exspectatio quae vere a Deo promissa fides credid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42.

     ‘소망은 믿음으로써 믿어지는 진정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된 것들에 대한 기대다.’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된 것들에 대한 기대가 소망인데, 그 소망은 믿음에 의해서 믿어진다 이 말이에요. 믿음에 의해서만 믿어지는 그 무엇, 그 대망, 그 기대, 그것이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믿음의 요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참되심을 믿는 것이고, 소망은 때에 따른 일이 일어나 그 자신의 진리가 제시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것이고, 소망은 언제나 그가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으로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믿음은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믿는 것이고, 소망은 그것이 언젠가 드러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 위에 소망이 자리하고 있는 기초이고, 소망은 믿음을 먹이고 지탱시킨다(Ita fides Deum veracem credit, spes exspectat ut in temporis occasione veritatem suam exhibeat. Fides credit nobis esse patrem; spes exspectat ut se talem erga nos semper gerat. Fides datam nobis vitam aeternam credit; spes exspectat ut aliquando reveletur. Fides fundamentum est cui spes incumbit; spes fidem alit ac sustin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42.

     그리고 믿음과 소망에 대한 관계를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참되심을 믿는 것이고, 소망은 때에 따른 일이 일어나 진리가 제시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 또 믿음은 그가 아버지심을 믿는 것이고, 소망은 우리가 그를 바라보고 그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고, 믿음은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믿는 것이고, 소망은 그것이 언젠가 드러나기를 기대하는 것이고, 믿음은 지식의 요소로서, 약속의 요소로서 믿는 것이고, 소망은 그것이 구현되고 이루어지고 역사하고 드러나기를 기대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믿음과 소망이 함께 있다는 거죠. ‘믿음은 그 위에 소망이 자리하고 있는 기초이고,’ 이 말은 뭔가 하면 믿음 위에 소망이 자리 잡고 있고, 그리고 소망은 믿음을 먹이고 지탱한다, 참 멋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소망은 믿음 위에 서 있고, 믿음은 소망에 의해서 지탱되고, 소망은 믿음을 먹인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소망이 믿음을 먹인다 이 말이에요. 소망이 있어야 우리 믿음이 자란다 이 말이에요. 소망이 먹여 줘야 믿음이 자란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소망은 주님을 잠잠함 가운데 기다리면서 믿음이 너무나 성급하게 무모한 돌진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시킨다. 소망은 믿음을 확정시켜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들 가운데 굳게 서서 요동치지 않도록 하고 그 약속들의 진리에 관해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을 새롭게 해서 그것이 지치지 않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을 그 목적지에 이르도록 연장시켜 그것이 도중이나 심지어 출발점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 끝으로, 소망은 끊임없는 갱신과 회복을 통하여 견인에 이르도록 나타나 그 자체로 믿음에 활기를 더한다(Nam ea dum in silentio Dominum exspectat, fidem continet, ne nimis festinando praecipitet; confirmat, ne vacillet in Dei promissionibus, ant de earum veritate dubitare incipiat; recreat, ne fatigetur; extendit ad ultimam illam metam, ne in medio cursu aut etiam in carceribus deficiat. Denique assidue renovando et instaurando, facit ut se ipsa subinde ad perseverantiam vegetior emerg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42.

     그리고 그 밑에 계속 좀 더 레토릭을 하고 있어요, 수사학적인 표현을. ‘소망은 주님을 잠잠한 가운데 기다리고 믿음은 너무 무모한 돌진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시킨다.’ 이 말은 소망은 바라고 믿음은 말씀을 살핀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소망이라고 해서 막 무모한 소망이 아니라 소망의 돌진을 믿음이 제어시켜 준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씀 가운데 바라본다, 그게 믿음과 소망이라는 거예요. ‘소망은 믿음을 확정시켜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들 가운데 굳게 서서 요동하지 않도록 하고, 또 소망은 믿음을 새롭게 해서 지치지 않게 하고, 소망은 믿음을 목적지에 이르도록 연장시켜 주고, 소망은 끊임없는 갱신과 회복을 통하여 견인에 이르게 하는, 그래서 믿음에 활기를 주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믿음을 먹이는 그겁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의 인내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소문이 났잖아요. 소망의 인내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는 바로 뭐예요?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믿음의 견인, 그것이 소망의 인내다 이 말이에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을 붙들고 하루가 천 년같이 천 년을 하루같이(시 90:4; 벧후 3:8) 살아가는 것, 그게 소망 가운데,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43.]

     그래서 소망은 “믿음의 자양분이자 힘”(fidei alimentum et robur)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기독교 강요』에서 소망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 소망이 믿음을 기른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소망이 믿음의 자양분이고, 믿음의 힘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벧전 1:21), 그래서 우리에게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이 이루실 그때까지 하나님이 유예시키면서 지상의 삶 가운데 우리를 붙들어놓고 대망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 갈라디아 5장 5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믿음에 속한 것 외에는 다른 목표를 지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소망은 함께 있습니다. 소망은 믿음이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고, 믿음은 소망에 의해서 또 양육되는 것이고, 그래서 믿음과 소망이 함께 균형을 이루고 조화를 이룰 때, 그때 우리가 무모해지지 않고, 말씀 가운데 잠잠히 기다리는 그게 바로 믿음과 소망이란 말이에요.
     우리는 이미 믿음의 유일한 목표가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을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자비는 사랑의 영역이죠. 항상 칼빈이 말하는 사랑은요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 소망,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고(소망), 믿고(믿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이 함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마태복음 9장 29절에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여기에는 ‘바라는 대로 될지어,’ ‘소망대로 되라’는 말이 ‘믿음대로 되라’는 말이고, 그것은 사랑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행하라, 바로 사랑 가운데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의 논의는 이렇게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거죠. 바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바라는 것이 소망이죠.) 믿음은 소망의 실상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은 본성상 말씀의 약속의 실체가 있습니다. 그 약속에 의지하고, 믿음 자체가 약속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약속한 것들에 대한 확실하고 완전한 소유를 우리가 갖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두 번째, 믿음이 사랑에 앞섭니다. 오직 사랑은 말씀을 믿음으로써 열매로서 주어진다는 측면에서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믿음을 주시고, 이렇게 보면 하나님 사랑에 앞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은 믿음의 선물을 가진 자로서 열매로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실한 감화다, 이게 가장 짧은 믿음에 대한 칼빈의 정의예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실한 감화. 그래서 소망은 믿음으로써 믿어지는 진정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된 것들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믿음은 소망의 유일한 기초이자 목표이고, 소망은 믿음을 먹이고 지탱하는 자양분이자 힘으로서 믿음을 새롭게 해서 지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잠히 구하고 바라고 ‘네 믿음대로 되라’라는 것이 바로 소망 가운데 믿음대로. 이것이 곧 ‘사랑의 열매를 맺는 역사이다, 믿음의 역사이다’라고 우리가 바라보는 것입니다. 



102강 결론


  1. 믿음은 본성상 말씀의 약속에 실체가 있으며, 그 약속에 의지하며, 믿음 자체가 약속의 실상입니다, 즉 약속한 것들에 대한 확실하고 안전한 소유입니다. 
  2. 믿음이 사랑에 앞서니, 사랑은 오직 말씀을 믿음으로써 생겨 납니다.
  3.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실한 감화로서, 소망은 믿음으로써 믿어지는, 진정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된 것들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4. 믿음은 소망의 유일한 기초이자 목표이고, 소망은 믿음을 먹이고 지탱하는 자양분이자 힘으로서 믿음을 새롭게 해서 지치지 않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