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곧 신구약 말씀의 실체입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 우리가 자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제1요소는 진리고, 지식이고, 말씀인데, 그 말씀이 곧 약속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자주 말씀과 약속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특별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히 11:1)[라고 합니다]. 바라는 것[은] 소망의 실상인데, 소망이 뭡니까? 곧 약속에 대한 실현 아닙니까? 약속에 대한 실현 혹은 그 실현에 대한 기대, 그것이 소망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근본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 약속이 믿음이 확고하게 서 있는 고유한 자리이기 때문이다(Fidei fundamentum facimus gratuitam promissionem, quod in ipsa proprie fides consist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29.
그래서 ‘믿음은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근본으로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이 믿음이 서는 고유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약속이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은 회고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그러니까 과거를 믿는 것이 아니라, 과거는 우리의 고백의 영역에 있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곧]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백성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고, 그 구약 백성들에게 약속은 바로 오실 그리스도고, 신약 시대[의] 우리에게 약속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재림의 약속. 그러니까 종말론적인 신학입니다. 자 이렇게 봤을 때, 믿음의 본질적인 자리, 고유한 자리가 바로 약속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게 되겠습니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율법 가운데서 이 약속이 계시되었습니다. 율법은 그저 명령하고 규범하고, 그저 지시하고 하는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언약의 법이다, 곧 은혜의 법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이 구약의 율법의 약속이 성취되고, 그 성취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 모든 말씀이 믿음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에, 약속이 성취된 시대에 말씀을 믿는 믿음, 이게 신약 시대의 믿음이거든요. 그래서 로마서 10장 8절에는 바로 “믿음의 말씀”(verbum fidei)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말씀,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장 17절로 연결되는 것을 볼 수가 있죠.
복음이 곧 뭐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약속을 다 성취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약속을 우리에게 이루셨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믿음과 복음이 함께 있다’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때 이 믿음과 복음이 함께 있는 것은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그 도를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직분은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 그건 뭐예요? 말씀에 대하여 ‘아멘’ 하는 것, 그것을 우리가 바로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순종은 어떤 육체적인 움직임, 그 가운데 무슨 계획을 이루고, 그것도 순종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서 1장 5절에 ‘믿음의 순종’(obedientia fidei)입니다. 믿는 게 순종입니다. 순종이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예요? 그 믿음의 첫 요소는 말씀이니까, 그래서 믿음의 순종, 순종의 믿음, 말씀의 믿음입니다. 말씀의 순종이고. 그러니까 말씀을 순종하는 것, 말씀을 믿는 것, 다 함께 있습니다. 다 함께 있어요. 그것을 칼빈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 성취되었고, 또 그 성취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또 다른 약속,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 지상에서의 성도의 삶, 그 약속을 이루는 그것이 믿음의 기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비에 대한 약속이 믿음의 고유한 목표”(misericordiae promissio fidei in proprium scopum)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약속은 뭐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이므로, 약속은 곧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다는 것에 대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미리 고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라고요, 경륜 방식이라고요. 하나님이 어떻게 섭리하시고 어떻게 경륜하시느냐, 하나님이 일하시는 질서, 그게 경륜이거든요. 그것이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자비에 대한 약속이 믿음의 고유한 목표’라고 칼빈이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죠. 인애와 긍휼과 자비를 그 자애로우신, 선하신 하나님이 베푸시죠. 그 약속을 믿죠, 우리가. 그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의 고유한 목표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강요』, 3.2.30.]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두 가지로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첫째, 단연 믿음은 값없는 약속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자체를 확고히 세운다(nunquam scilicet ipsam consistere, donec ad gratuitam promissionem pervener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0.
첫째, 믿음은 값없는 약속을 얻고 나서야 확고히 세운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거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어떤 얼굴을 믿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떤 품행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값 주고 사셨다는 구주이심을 믿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믿음은 값없는 약속, 우리에게 그저 베푸시는 은혜의 약속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게 하지 않는 한, 달리 우리는 믿음 그 자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없다(deinde non aliter nos per ipsam conciliari Deo, nisi quia nos Christo copul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0.
둘째, 그 약속 가운데 믿음이 우리 안에 구원의 믿음으로 역사했을 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잖아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과 화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다는 것은 아주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들으시고. 화목하다는 게 뭐예요? 우리는 자녀요,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보냐’(마 6:30; 7:1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 우리는 자녀로서 ‘아빠, 아버지’(롬 8:15; 갈 4:6)라고 부르고. 그러니까 다 이루시고 우리 것 삼아 주셔서 값없이 구원받은 믿음, 그리고 그 가운데 살아가는 믿음, 이 두 가지가 바로 믿음의 두 본질적인 요소라고 또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지 않는 한 어떻게 구원의 믿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Quomodo autem fides salvifica, nisi quatenus nos in Christi corpus inser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0.
그러므로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접붙이지 않는다면 구원의 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다’ 하면서도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믿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갈 2:20). 그리스도가 산다는 게 뭐예요? 그가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시고 이루시고 당하시고 뭐든 하신 순종이 나의 의가 돼서 내 것으로 삼아 주시는 그것을 다 믿는 거죠, 우리가.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말씀이라는 거예요. 믿음의 말씀이다(롬 10:8). 그러니까 믿음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31.]
나무의 열매가 살아 있는 뿌리를 필요로 하듯이, 믿음은 말씀을 필요로 한다(non minus verbo opus habere fidem quam fructum viva radice arbori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1.
그래서 “믿음은 말씀을 필요로 한다”[라고 합니다]. 시편 9편 10절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뭐예요? 바로 말씀이고 지식이죠.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가 계심과 그의 속성과 그가 어떠한 분임과 또 그가 행하신 일[을 아는 것], 그게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41절은 “주의 말씀대로…주의 구원을.” 그리고 119편 42, 94절에는 “내가 주의 말씀을 의지함이니” “나를 구원하소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약속과 성취의 말씀입니다. 이 지상에 우리의 종말론적인 삶은 약속과 성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게 종말론적인 삶이에요. 그것이 믿음이 우리에게 부여된 바의 목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의 최고 목적이 아까 약속이다,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지키실 것을 확신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옛날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고,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구원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 가운데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회고적이냐? 아닙니다. 분명한 고백과 확신 가운데서 미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미래의 약속을. 그래서 요동치 않고 흔들리지 않고, 그래서 푯대를 향하여 가고, 붙잡힌 바 된 그것을 붙잡으러 가고, 그렇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을 때, 그것이 바로 이 지상의 믿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붙잡힌 바 된 것을 붙잡으러 가는 그것이 말씀이라는 거예요. 그것을 달리 말하면 약속이라는 거예요.
믿음은 그 가운데 종종 오류들이 혼합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참된 이상, 항상 수위(首位)를 차지한다(errores saepe fidei esse permixtos; sic tamen ut primatum semper teneat illa, ubi vera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1.
그러므로 우리의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머리 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 뭐냐,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수위권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합니다. 머리 ‘수’(首) 자, 위치 ‘위’(位) 자. 그래서 세상 철학자들은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봤기 때문에 세상 철학은 이성 수위권이라고 그러고, 우리는 믿음이 모든 것에 앞서고, 믿음이 알고, 믿음이 이기고, 믿음이 약속과 성취의 구조 안에서 온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 생명으로 생활로 역사하고, 그것이 바로 신앙 수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수위를 차지한다’라고 칼빈은 여기에서 딱 못 박고 있고, 그 믿음이 딱 버티고 있는 지주가 뭐냐,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입니다.
‘믿는다’ 하면서 ‘믿음으로’, ‘믿음이다’, 그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롬 1:17)[고 말씀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6-17절에, 곧 복음이잖아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은 복음을 믿어서 복음에 이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고 무슨 신령주의,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비주의적인 경향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의 지주(支柱)로 받쳐지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fidem nisi verbo suffultam efflue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1.
그래서 ‘믿음은 말씀의 지주로 받쳐지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32.]
이 믿음의 약속, 전체 말씀,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고,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바로 고린도후서 1장 20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약속, 지금 테마가 약속이에요, 말씀이에요, 그 약속이 바로 뭐예요? 그리스도의 ‘예’에 있다, 이 말이에요. ‘예’가 순종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뭘 한다? ‘아멘’ 한다, 이 말이에요. 우리의 믿음은 아멘의 믿음이에요. 그러면 뭘 아멘 합니까? 그리스도의 순종을 아멘 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의 의, 순종, 공로, 값, 은혜, [곧] 그리스도가 다 행하신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영광을 돌리게” 된다, 참 귀한 말씀이에요.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서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입니다,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들을 주시기까지 아끼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약속이 아들이면,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거죠. [곧] 삼위일체죠.
논쟁의 여지없이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의해 사랑을 받을 수 없다(extra controversiam est, neminem a Deo extra Christum diligi).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2.
전적인 은혜로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는 구원의 믿음은 그 대상이 아들의 인격과 사역(공로, 순종, 의, 값)에 모두 미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2, 각주 168.
그래서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삼위일체론적 신앙이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말씀인 것이죠.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태복음 17장 5절, 바로 예수님이 변형된 모습을 보이시면서 하늘에서 그때 울려 퍼진 말씀입니다.
어떤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되고 성취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결코 그릇됨이 없기 때문이다(in illum coniiciendos esse oculos, quoties uila promissio nobis offertur; nec absurde a Paulo doceri, in ipso confirmari et adimpleri quaecunque sunt Dei promissione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2.
그러므로 약속이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됩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만을 향해야 됩니다. 이방인이든 또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완성이 되시고, 성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곧] 약속의 구원의 의를, 도를, 값을 다 치르시고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위에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죠. 이런 모든 일들이 보혜사 성령의 임재, 삼위일체 신앙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게 바로 뭡니까? 믿음이지 않습니까? 구약 백성들은 희미하게 희생제사를 드리고, 그 예식 가운데, 의식 가운데, 아직 예표 가운데 있었다면, 우리는 성취된 그 가운데서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화평을 이루시고,’ 에베소서 2장 14절. 지난 시간에는 평정이라고 보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약속을 기억합니다. 신구약, 언약 아닙니까? 언약이 약속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약속은 이미 그 안에서 약속하시는 분이 성취하시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약속, 은혜언약입니다. 이 은혜언약의 실체가 누굽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신구약 전부를 믿는 것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말씀을 믿는 믿음은 그 말씀의 약속이 성취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믿음의 근본이자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약속 없는 믿음은 헛됩니다. 과거에 대한 고백은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우리 안에 믿음 가운데 역사합니다.
두 번째, 믿음의 말씀, 그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이 구원의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약속이신 그 그리스도, 오실 메시야가 약속을 이루심,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 번째, 창조와 구원의 말씀을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따라 간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창조와 구원 전체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믿음은 말씀의 지주로 받쳐질 때만 참되고, 그렇게 참될 때에만 우리에게 머리의 자리에 섭니다. 이것을 ‘신앙 수위’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머리의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이성 수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성을 앞세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성을 꼭대기에 세우지 말라는 것이에요.
다섯 번째, 전체 복음은 율법의 약속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선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과 성취의 구조 가운데 복음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100강 결론
말씀을 믿는 믿음은 그 말씀의 약속이 성취됨을 믿는 것인바, 그 약속이 믿음의 근본이자 목적입니다.
믿음의 말씀 그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이 구원의 믿음의 본질입니다.
창조와 구원의 말씀을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따라 간구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믿음은 말씀의 지주(支柱)로 받쳐져 참될 때 머리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전체 복음은 율법의 약속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선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100강 | 3.2.29-32. (3권 93-101페이지)
말씀의 약속과 성취이신 그리스도를 믿음
[『기독교 강요』, 3.2.29.]
오직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곧 신구약 말씀의 실체입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 우리가 자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제1요소는 진리고, 지식이고, 말씀인데, 그 말씀이 곧 약속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자주 말씀과 약속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특별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히 11:1)[라고 합니다]. 바라는 것[은] 소망의 실상인데, 소망이 뭡니까? 곧 약속에 대한 실현 아닙니까? 약속에 대한 실현 혹은 그 실현에 대한 기대, 그것이 소망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근본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 약속이 믿음이 확고하게 서 있는 고유한 자리이기 때문이다(Fidei fundamentum facimus gratuitam promissionem, quod in ipsa proprie fides consist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29.
그래서 ‘믿음은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근본으로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이 믿음이 서는 고유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약속이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은 회고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그러니까 과거를 믿는 것이 아니라, 과거는 우리의 고백의 영역에 있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곧]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백성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고, 그 구약 백성들에게 약속은 바로 오실 그리스도고, 신약 시대[의] 우리에게 약속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재림의 약속. 그러니까 종말론적인 신학입니다. 자 이렇게 봤을 때, 믿음의 본질적인 자리, 고유한 자리가 바로 약속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게 되겠습니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율법 가운데서 이 약속이 계시되었습니다. 율법은 그저 명령하고 규범하고, 그저 지시하고 하는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언약의 법이다, 곧 은혜의 법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이 구약의 율법의 약속이 성취되고, 그 성취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 모든 말씀이 믿음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에, 약속이 성취된 시대에 말씀을 믿는 믿음, 이게 신약 시대의 믿음이거든요. 그래서 로마서 10장 8절에는 바로 “믿음의 말씀”(verbum fidei)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말씀,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장 17절로 연결되는 것을 볼 수가 있죠.
복음이 곧 뭐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약속을 다 성취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약속을 우리에게 이루셨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믿음과 복음이 함께 있다’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때 이 믿음과 복음이 함께 있는 것은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그 도를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직분은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 그건 뭐예요? 말씀에 대하여 ‘아멘’ 하는 것, 그것을 우리가 바로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순종은 어떤 육체적인 움직임, 그 가운데 무슨 계획을 이루고, 그것도 순종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서 1장 5절에 ‘믿음의 순종’(obedientia fidei)입니다. 믿는 게 순종입니다. 순종이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예요? 그 믿음의 첫 요소는 말씀이니까, 그래서 믿음의 순종, 순종의 믿음, 말씀의 믿음입니다. 말씀의 순종이고. 그러니까 말씀을 순종하는 것, 말씀을 믿는 것, 다 함께 있습니다. 다 함께 있어요. 그것을 칼빈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 성취되었고, 또 그 성취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또 다른 약속,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 지상에서의 성도의 삶, 그 약속을 이루는 그것이 믿음의 기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비에 대한 약속이 믿음의 고유한 목표”(misericordiae promissio fidei in proprium scopum)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약속은 뭐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이므로, 약속은 곧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다는 것에 대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미리 고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라고요, 경륜 방식이라고요. 하나님이 어떻게 섭리하시고 어떻게 경륜하시느냐, 하나님이 일하시는 질서, 그게 경륜이거든요. 그것이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자비에 대한 약속이 믿음의 고유한 목표’라고 칼빈이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죠. 인애와 긍휼과 자비를 그 자애로우신, 선하신 하나님이 베푸시죠. 그 약속을 믿죠, 우리가. 그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의 고유한 목표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강요』, 3.2.30.]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두 가지로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첫째, 단연 믿음은 값없는 약속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자체를 확고히 세운다(nunquam scilicet ipsam consistere, donec ad gratuitam promissionem pervener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0.
첫째, 믿음은 값없는 약속을 얻고 나서야 확고히 세운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거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어떤 얼굴을 믿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떤 품행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값 주고 사셨다는 구주이심을 믿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믿음은 값없는 약속, 우리에게 그저 베푸시는 은혜의 약속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게 하지 않는 한, 달리 우리는 믿음 그 자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없다(deinde non aliter nos per ipsam conciliari Deo, nisi quia nos Christo copul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0.
둘째, 그 약속 가운데 믿음이 우리 안에 구원의 믿음으로 역사했을 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잖아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과 화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다는 것은 아주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들으시고. 화목하다는 게 뭐예요? 우리는 자녀요,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보냐’(마 6:30; 7:1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 우리는 자녀로서 ‘아빠, 아버지’(롬 8:15; 갈 4:6)라고 부르고. 그러니까 다 이루시고 우리 것 삼아 주셔서 값없이 구원받은 믿음, 그리고 그 가운데 살아가는 믿음, 이 두 가지가 바로 믿음의 두 본질적인 요소라고 또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지 않는 한 어떻게 구원의 믿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Quomodo autem fides salvifica, nisi quatenus nos in Christi corpus inser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0.
그러므로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접붙이지 않는다면 구원의 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다’ 하면서도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믿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갈 2:20). 그리스도가 산다는 게 뭐예요? 그가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시고 이루시고 당하시고 뭐든 하신 순종이 나의 의가 돼서 내 것으로 삼아 주시는 그것을 다 믿는 거죠, 우리가.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말씀이라는 거예요. 믿음의 말씀이다(롬 10:8). 그러니까 믿음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31.]
나무의 열매가 살아 있는 뿌리를 필요로 하듯이, 믿음은 말씀을 필요로 한다(non minus verbo opus habere fidem quam fructum viva radice arbori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1.
그래서 “믿음은 말씀을 필요로 한다”[라고 합니다]. 시편 9편 10절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뭐예요? 바로 말씀이고 지식이죠.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가 계심과 그의 속성과 그가 어떠한 분임과 또 그가 행하신 일[을 아는 것], 그게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41절은 “주의 말씀대로…주의 구원을.” 그리고 119편 42, 94절에는 “내가 주의 말씀을 의지함이니” “나를 구원하소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약속과 성취의 말씀입니다. 이 지상에 우리의 종말론적인 삶은 약속과 성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게 종말론적인 삶이에요. 그것이 믿음이 우리에게 부여된 바의 목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의 최고 목적이 아까 약속이다,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지키실 것을 확신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옛날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고,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구원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 가운데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회고적이냐? 아닙니다. 분명한 고백과 확신 가운데서 미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미래의 약속을. 그래서 요동치 않고 흔들리지 않고, 그래서 푯대를 향하여 가고, 붙잡힌 바 된 그것을 붙잡으러 가고, 그렇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을 때, 그것이 바로 이 지상의 믿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붙잡힌 바 된 것을 붙잡으러 가는 그것이 말씀이라는 거예요. 그것을 달리 말하면 약속이라는 거예요.
믿음은 그 가운데 종종 오류들이 혼합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참된 이상, 항상 수위(首位)를 차지한다(errores saepe fidei esse permixtos; sic tamen ut primatum semper teneat illa, ubi vera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1.
그러므로 우리의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머리 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 뭐냐,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수위권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합니다. 머리 ‘수’(首) 자, 위치 ‘위’(位) 자. 그래서 세상 철학자들은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봤기 때문에 세상 철학은 이성 수위권이라고 그러고, 우리는 믿음이 모든 것에 앞서고, 믿음이 알고, 믿음이 이기고, 믿음이 약속과 성취의 구조 안에서 온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 생명으로 생활로 역사하고, 그것이 바로 신앙 수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수위를 차지한다’라고 칼빈은 여기에서 딱 못 박고 있고, 그 믿음이 딱 버티고 있는 지주가 뭐냐,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입니다.
‘믿는다’ 하면서 ‘믿음으로’, ‘믿음이다’, 그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롬 1:17)[고 말씀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6-17절에, 곧 복음이잖아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은 복음을 믿어서 복음에 이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고 무슨 신령주의,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비주의적인 경향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의 지주(支柱)로 받쳐지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fidem nisi verbo suffultam effluer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1.
그래서 ‘믿음은 말씀의 지주로 받쳐지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32.]
이 믿음의 약속, 전체 말씀,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고,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바로 고린도후서 1장 20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약속, 지금 테마가 약속이에요, 말씀이에요, 그 약속이 바로 뭐예요? 그리스도의 ‘예’에 있다, 이 말이에요. ‘예’가 순종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뭘 한다? ‘아멘’ 한다, 이 말이에요. 우리의 믿음은 아멘의 믿음이에요. 그러면 뭘 아멘 합니까? 그리스도의 순종을 아멘 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의 의, 순종, 공로, 값, 은혜, [곧] 그리스도가 다 행하신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영광을 돌리게” 된다, 참 귀한 말씀이에요.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서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입니다,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들을 주시기까지 아끼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약속이 아들이면,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거죠. [곧] 삼위일체죠.
논쟁의 여지없이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의해 사랑을 받을 수 없다(extra controversiam est, neminem a Deo extra Christum diligi).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2.
전적인 은혜로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는 구원의 믿음은 그 대상이 아들의 인격과 사역(공로, 순종, 의, 값)에 모두 미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2, 각주 168.
그래서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삼위일체론적 신앙이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말씀인 것이죠.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태복음 17장 5절, 바로 예수님이 변형된 모습을 보이시면서 하늘에서 그때 울려 퍼진 말씀입니다.
어떤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되고 성취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결코 그릇됨이 없기 때문이다(in illum coniiciendos esse oculos, quoties uila promissio nobis offertur; nec absurde a Paulo doceri, in ipso confirmari et adimpleri quaecunque sunt Dei promissione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32.
그러므로 약속이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됩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만을 향해야 됩니다. 이방인이든 또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완성이 되시고, 성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곧] 약속의 구원의 의를, 도를, 값을 다 치르시고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위에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죠. 이런 모든 일들이 보혜사 성령의 임재, 삼위일체 신앙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게 바로 뭡니까? 믿음이지 않습니까? 구약 백성들은 희미하게 희생제사를 드리고, 그 예식 가운데, 의식 가운데, 아직 예표 가운데 있었다면, 우리는 성취된 그 가운데서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화평을 이루시고,’ 에베소서 2장 14절. 지난 시간에는 평정이라고 보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약속을 기억합니다. 신구약, 언약 아닙니까? 언약이 약속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약속은 이미 그 안에서 약속하시는 분이 성취하시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약속, 은혜언약입니다. 이 은혜언약의 실체가 누굽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신구약 전부를 믿는 것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말씀을 믿는 믿음은 그 말씀의 약속이 성취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믿음의 근본이자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약속 없는 믿음은 헛됩니다. 과거에 대한 고백은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우리 안에 믿음 가운데 역사합니다.
두 번째, 믿음의 말씀, 그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이 구원의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약속이신 그 그리스도, 오실 메시야가 약속을 이루심,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 번째, 창조와 구원의 말씀을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따라 간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창조와 구원 전체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믿음은 말씀의 지주로 받쳐질 때만 참되고, 그렇게 참될 때에만 우리에게 머리의 자리에 섭니다. 이것을 ‘신앙 수위’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머리의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이성 수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성을 앞세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성을 꼭대기에 세우지 말라는 것이에요.
다섯 번째, 전체 복음은 율법의 약속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선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과 성취의 구조 가운데 복음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100강 결론
말씀을 믿는 믿음은 그 말씀의 약속이 성취됨을 믿는 것인바, 그 약속이 믿음의 근본이자 목적입니다.
믿음의 말씀 그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이 구원의 믿음의 본질입니다.
창조와 구원의 말씀을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따라 간구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믿음은 말씀의 지주(支柱)로 받쳐져 참될 때 머리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전체 복음은 율법의 약속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선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