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강 [3.2.16-28] 믿음에 따르는 평강과 경건한 두려움

관리자
조회수 77




99 | 3.2.16-28. (3권 71-92페이지)



믿음에 따르는 평정과 경건한 두려움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서 첫 번째는 지식이 우리에게 부여되고, 두 번째는 그 지식에 대한 객관적 확실성 곧 ‘그 지식, 곧 말씀이 객관적으로 확실하다. 객관적으로 진리다,’ 이것이 우리에게 새겨지고, 세 번째는 그 말씀이 나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확신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지난 시간에는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3.2.16.]

진정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양심을 진정시키고 고요하게 만드는 것은 평정이다. 평정(平靜)이 없다면 양심은 분명 성가신 위협에 산란해지고 거의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Est autem securitas quae conscientiam coram Dei iudicio sedat et serenat, sine qua tumultuosa trepidatione ipsam vexari et paene dilaniari necesse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6.

‘평정’(securitas)은, 지식, 승인, 확신의 세 가지 요소를 지닌 참된 믿음에 맺히는 ‘특별한 열매’로서 “양심의 잠잠함”(conscientiae serenitas)을 뜻합니다. … ‘믿음의 평정’(securitas fidei)에는 ‘화평’(pax), ‘사랑’(amor), ‘소망’(spes), ‘담대함’(audacia), ‘인내’(견인, perseverantia)가 수반된다. 이 점에 비추어, 지식, 승인, 확신은 믿음의 “직접적 작용”(actus directus), 평정을 비롯한 나머지는 “반사적 작용”(actus reflexus)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6, 각주 123번.

     이것을 우리가 믿음의 세 가지 본질적 요소라고 부른다면 이러한 믿음에는 필히 무엇이 따르느냐, 바로 칼빈은 ‘평정’(securitas)이 따른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것이고 그 말씀이 객관적 진리이자 나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어찌해요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써 내 안에서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면 우리 안에 필히 오래 참음도 있고 화평(pax)도 있고 그리고 사랑(amor)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를 칼빈은 묶어서 평정을 우리에게 부여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양심의 평화를 누리고 그리고 그 화평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그 평정의 믿음에 주어진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평정이 믿음의 파생적 요소다, 이렇게 말하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때 말씀의 진리를 부여하시고 그 진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전달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인애로우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데],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애 그리고 우리에게 이루실 언약, 이런 것을 우리가 믿음 가운데 견고히 붙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요동치 아니하는 평정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외쳤듯이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롬 8:35)라고 이렇게 말했죠. 이게 평정입니다. 아무도 나를 해할 자 없고 끊을 자 없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우리가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에는 필히 따르는 요소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17.]

분명 우리는 믿음이 확실하고 평정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그 어떤 의심에도 물들지 않는 모종의 확실성이나 그 어떤 염려에도 개의치 않는 모종의 평정을 상상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신자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의구심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다고 말한다(Nos certe, dum fidem docemus esse debere certam ac securam, non certitudinem aliquam imaginamur, quae nulla tangatur dubitatione, nec securitatem quae nulla sollicitudine impetatur; quin potius dicimus perpetuum esse fidelibus certamen cum sua ipsorum diffidentia).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7.

     우리는 믿음이 확실하고 평정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어떠한 불확실성 그리고 요동침, 이런 것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봤을 때도 얼마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살고자 애썼고 또 하나님이 그거를 사용하셨습니까. 그럼에도 다윗의 시편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 불안해 하는[가].”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죠. “너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 평정이 우리에게 임했지만은 여전한 불안감이 또 요동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16편 7절에서는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가 너를 온전히 할지니 강하고 담대하게 하라.’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요동침이 있는데 그러면 믿음이 떠나간 것이냐? 그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부여될 때 함께 우리에게 필히 부여되는 평정심, 평정, 그것이 우리에게 계속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숲의 나무들이 바람에 요동치듯 [했던] 아하스 왕 때의 그러한 요동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물결이 살랑이더라도 그 속내는, 깊은 속은 잔잔히, 고요히 흐르듯이 우리의 심령도 어떤 어려움과 난간(難艱)이 [찾아와도,] 어떤 하중에 우리가 짓눌리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43절에서는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떠나지 말게 하라는 것은 곧 ‘믿음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곧 ‘평정 가운데 거하게 하시옵소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18.]

     우리의 “불완전한 믿음”(imperfectio fidei)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구원받았지만은 여전히 불완전하듯이 말이에요. 지정의가 다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죠. 믿음이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썩지 않는 씨로서 말씀이 남아 있고, 그것은 곧 믿음의 역사로 말씀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기독교 강요』, 3.2.19.]

     평화롭고 고요하고 관대한 여호와의 얼굴을 관조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가 나아가서.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는 그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확실한 지식을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그 지식이 여러 모양으로 간혹은 흔들리게, 간혹은 부족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우리의 뿌리 박힌, 뿌리를 내리는 지식으로, 썩지 않는 씨앗으로,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요동치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여기서 칼빈은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평정이 있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고, 그 믿음이 바로 제 첫 번째 요소 믿음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지식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진리가 나에게서 떠나가게 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거하게 하옵소서.’ 이게 결국은 뭐냐 하면 믿음 가운데, 평정 가운데 사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20.]

     우리는 아직까지 부분적으로 보고 희미하게 봅니다(고전 13:9, 12). 그것이 이 지상의 삶의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불완전한 믿음이라고도 볼 수가 있겠습니다. 어떤 경우에 합당한 만큼의 분량의 믿음이 없어서 부적절한 ‘척도’(modulus)로, 우리가 나름대로 그냥 이성적인 잣대로 요량하고 측량하고 그리고 ‘좁은 도량’(angustia)으로 살펴보고, 하나님의 큰 뜻을 보지 못하고, 그런 가운데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백성의 삶으로서 이제는 믿음을 버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그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수건을 쓰고 보듯이 보지만, 희미하게 보지만, 거울같이 보지만, 그때는 ‘마주 본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2.2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은 완전한 믿음은 아니지만 참믿음입니다. 무능한 믿음이 아닙니다. 견실한 믿음입니다. 우리 안에 평정을 앗아갈 자 없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바로 믿음은 “확신에 대한 확실성”(certitudo fiduciae)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칼빈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두 번째 요소가 확실성이라면 세 번째 요소가 확신인데, 바로 칼빈은 이 둘을 묶어서 확신에 대한 확실성이 있다, 이 말이에요.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여호와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인애에 대한, 자비에 대한 확신, 그 확신이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믿음이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여호와 자신에 대한 확신, 그 확신에 대한 확실성을 믿음이 우리에게 부여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그것은 여기에서니 우리의 믿음이라’(요일 5:4)[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탁하는 것입니다. 의뢰하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입니다.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게 뭘까요? 내 믿음이 완전해서 믿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니까 완전한 것이고, 그것을 내가 그 질그릇에 보배를 담듯이 믿음과 함께 말씀을 담아서 그 말씀을 붙들고 살기 때문에 내가 그 말씀의 확실성, 객관적 진리 됨을 인정하고 승인하고 동의하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나의 말씀으로 받아서, 다윗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고 베드로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고, 디도의, 디모데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고, 그 말씀으로 받아서, 그래서 확신에 대한 확실성, 얼마나 아까도 말씀이 나왔지만 확신에 대한 확실성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가 장작에 불 피우고 이러다 보면 불이 다 꺼진 것 같아도, 희나리라고 합니까, 장작이 이렇게 타서 허옇게 돼 있지만 그래도 그 밑에 보면 불씨가 남아 있다, 이렇게 여기서 비유를 듭니다. ‘믿음이 흔들리고 이리저리 나부낀다 하더라도 그 빛은 결코 꺼지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적어도 타 버린 제 아래에 숨어 있기라도 하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 있음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게 칼빈의 이야기입니다. 확신에 대한 확실성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확신한다는 것에 확실성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가 여호와를 확신한다는 것을 내가 확신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를 확신한다는 것에 대한 확실성을 믿음이 부여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순종으로, 지난주에 나왔지만은, 믿음의 순종으로, 로마서 1장 5절, 믿음을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는 썩지 않는 말씀의 씨가 있고, 그 씨는 열매를 맺고, 그 씨는 기름짐이 무엇보다 더하고, 그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결국은 믿음이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이제 믿음이 있으니까 내 능력으로 살자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이성으로 마치는 거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거죠. 믿음을 주셨으니 더 믿음으로 살아야죠. 믿음을 주셨으니, 믿음으로 부여되는 확신에 대한 확실성이 믿음으로부터 부여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죠. 그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귀가 아무리 우리를 거슬러 토해 내듯이 궤계를 부려도 믿음이 우리의 심장 가운데 거하는 이상 결코 우리는 안전하고 그 마귀들은 내쳐지고 만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일서 5장 4절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22.]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남아 있는 이 두려움과 떨림(빌 2:12)은 경건한 두려움이요, 경건한 떨림입니다. ‘선 줄 알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참조. 롬 11:20)라는 것은 믿음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가운데 살라는 것입니다. ‘선 줄 알고,’ 이거는 이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것은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요. 내가 주관하는 나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는 하나님의 삶으로. 

[『기독교 강요』, 3.2.23.]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라고 해서 없던 구원이 생기는 게 아니겠죠. 이것은 이미 인 쳐 주신 견인하는 구원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라. 믿음에서 믿음으로 은혜에서 은혜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그 삶을 살아라.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이성으로 마치지 마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지 마라. 영광으로 시작했다가 내 자랑으로 마치지 마라.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아서 주의 전에 들어가 예배하는(시 5:7)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다, 그렇게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2.24-25.]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삽니다. 그리스도의 연합체[입니다]. ‘연합체’란 말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됨이 뭘 의미할까요? 바로 그리스도께 의지하고 그가 다 이루신 의로 내가 사는 것입니다. 생명도 생활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나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살아나기만 하고 살아가는 것은 바로 내 의로 살고 내 공로로 산다 하면 그건 로마 가톨릭주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을 얻음도 전적인 은혜요, 살아가는 것도 살아남도 살아감도 전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전적인 은혜임이 뭘까요? 바로 믿음으로 살아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모든 은총으로 당신과 교통하시므로 그 모두가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의 지체가 되고, 진정 그와 하나가 되며, 그의 의가 당신의 죄를 압도하며, 그의 구원이 당신이 받을 정죄를 지워 버리며, 그가 자기의 고상함으로 중재하셔서 당신의 수치가 하나님의 면전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신다(quoniam Christus tibi cum omnibus suis bonis sic communicatus est, ut omnia eius tua fiant, ut fias eius membrum, adeoque unum cum ipso, iustitia eius tua peccata obruit, salus eius tuam damnationem abolet, ipse sua dignitate intercedit ne in conspectum Dei veniat tua indignita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24.

     우리 안의 것을 헤아린다면 정죄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헤아린다면, 나의 것이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교통하는 그 나의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귀한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빛이 나에게 임하고, 그래서 그가 다 이루신 은혜의 의지에서 죄를 가져가시고, 그리고 나를 거룩하고 선하고 의롭게 빚어 가시는 그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이제 믿으니까 그리스도는 어디 가고 없고 그저 내 의에 취해서, 내 정서에 취해서, 간혹은 내 영혼에 취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칼빈이 그리스도를 분리하지 말아라고 이야기할 때는, 많은 경우에 로마서 주석이나 이런 데도 보면요, 칭의도 성화도 다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할 때 그리스도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칼빈이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칭의도 성화도, 살아남도 살아감도, 생명도 생활도 다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누구를 믿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 그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생명이 되고’(롬 8:10).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연합체[가 됩니다]. 연합체란 말이 바로 라틴어로 ‘societas’라고 합니다.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한 몸을 이루듯이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에. 그 한 몸이 바로 ‘societas,’ 연합체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밖에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 그리스도는 나눌 수 없는 연합체의 고리로 우리와 밀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의 놀라운 교제 가운데 날마다 점점 더 우리와 더욱 긴밀히 결합되어 가심으로 우리와 한 몸이 되고 끝내는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신다(Christus non extra nos est, sed in nobis habitat, nec solum individuo societatis nexu nobis adhaeret, sed mirabili quadam communione in unum corpus nobiscum coalescit in dies magis ac magis, donec unum penitus nobiscum fi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24.

     그래서 칼빈은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나눌 수 없는 연합체의 고리로 우리와 밀착하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놀라운 교제 가운데 더욱 긴밀하게 결합해 가시고 마침내는 완전히 하나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종말론적인 성도의 삶입니다. 지금은 희미하나 그때는 마주 보고, 지금은 아직 연약하나 그때는 온전해지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온전히 하나 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26.]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 의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믿음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자랑하십시오. 믿음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말씀을 내세우십시오. 나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여호와를 경외하십시오. 
     그래서 믿음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인데, 칼빈은 이 ‘예배’라는 말과 ‘경외’라는 말을 여기서 같이 쓰고요. ‘복종’이라는 말과 ‘영예’라는 말을 같이 써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될 순종, 첫째 돌판의 순종, 예배의 순종, 그것을 바로 칼빈은 ‘영예’라고 했고, 그리고 하나님을 좇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경외’라고 했어요. 경외와 영예가 함께 있다는 거예요. 경외는 뭔가 하면 우리가 말하는 좁은 의미로 예배고, 영예는 삶입니다, 순종의 삶. 그러니까 뭐요? 삶이 예배다, 이거예요. 삶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외와 영예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높이는 경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순종하는 영예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경외는 라틴어로 ‘timor’라고 합니다. ‘두려움’이라고도 하는데, 이 두려움은 경건한 두려움,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까이 나아가는 복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영예는 ‘honor’라고 합니다. ‘honor’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이 두 가지, 경외와 영예가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27.]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그래서 그 경외는 노예의 두려움이 아니라 자녀의 두려움, 기쁜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 경건한 두려움, 자발적인, 자유로운 두려움, 그래서 경외에는 바로 영예와 같이 있다, 예배는 순종과 같이 있다고 칼빈은 여기에서 아주 잘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28.]

     우리가 믿음으로써 누리는 그 복은 구원의 전체 은혜에 미칩니다. 그래서 전 구원의 요체가 바로 믿음의 그 은혜 가운데 역사하는[데], 구원의 확실성, 그것이 믿음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 믿음을 우리가 평정 가운데 전 구원 과정에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된 삶을 누리는 그 요체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그래서 믿음이 주는 제일 첫째 복이 바로 영생의 복이고, 영원토록 변치 않는 내생에 대한, 영생에 대한 믿음의 복이 바로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종말론적인, 우리의 이 지상의 신자로서의 복인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에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자애로움을 의지하고 확신과 소망 가운데 화평을 누리는 평정이 필히 따릅니다. 
     두 번째, 믿음을 가지나 여전히 불완전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확실한 지식 가운데서 날마다 진보하여 나아가서 끝내 그와 하나가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세 번째, 믿음은 불완전하고 연약할지라도 소멸하지 않습니다. 썩지 아니하는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비가 변함없이 확실한 가운데 확신에 이르게 하는, 혹은 확신 가운데 확실함을 주는 그 믿음의 역사가 있습니다. 
     네 번째, 성도들의 믿음은 그들이 성령의 역사로써 그리스도의 연합체의 고리에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을 좇는 거룩한 두려움은 경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그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영예[인데], 이것은 믿음 가운데 하나로서 연결되어 있고 열매를 맺습니다. 경외와 영예가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99강 결론


  1. 믿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그의 자애로우심을 의지하고 확신과 소망 가운데 화평을 누리는, 평정이 필히 따릅니다.
  2. 믿음을 가지나 여전히 불완전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확실한 지식 가운데 진보하여 날마다 그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3. 믿음은 불완전하고 연약할지라도 소멸되지 않고, 썩지 않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가 변함 없이 확실함에 대한 확신을 이끌어 냅니다.
  4. 성도들의 믿음은 그들이 성령의 역사로써 그리스도의 연합체의 고리에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신합니다.
  5. 하나님을 좇는 거룩한 두려움인 경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그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영예는 믿음 가운데 하나로 열매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