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강 [1.18.1-4]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들도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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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1.18.1-4. (1권 493-507페이지)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들도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심



여기에서 행하는 것과 허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distinctio inter agere et permittere) 발견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손과 주권 아래 있는 사탄과 불경건한 자들 모두의 악의를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의 목적에 부합한 방향으로 지도하시고 그들의 범죄들을 이용하셔서 자기의 심판들을 수행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없는 것처럼 여긴다. …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지시가 없이는 아무 일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그 자신 가운데서 작정하시고 그 자신의 은밀한 지휘 아래에서 결정하신 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고의로 행할 수 없다. 이는 무수하고 명백한 증언들로써 입증된다(Quod autem nihil efficiant homines nisi arcano Dei nutu, nec quidquam deliberando agitent nisi quod ipse iam apud se decreverit, et arcana sua directione constituat, innumeris et claris testimoniis proba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8.1.

     이제 이곳 1권 마지막 장 제18장에서는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사용하시는 놀라운 섭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불경건한 자들의 배후에는 사탄과 마귀들, 악한 영들이 있겠죠. 그들도 하나님이 궁극적으로는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뜻이 아니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15편 3절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욥기 1장에서 보듯이, 사탄은 어떤 방법과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고 또 악하게 유혹하고 시험에 빠뜨리게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것조차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온전케 하고, 이전보다 더 영화롭게 하는 자리로 이끄시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욥기 1장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자원해서 순종하는 천사들과 다를 바 없이 사탄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세워 그의 명령들을 받고자 한다(욥 1:6; 2:1). 사탄은 다른 방식으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시지 아니하시면 그 무슨 일도 착수할 수 없다. 비록 거룩한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단순한 허용이(nuda permissio) 그때 더하여진 것 같아 보여도, 우리는 하나님이 사탄과 흉악한 강도들을 일꾼으로 삼으신, 그 연단의 조성자시라는 사실을 추론하게 된다. 왜냐하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는 일이 그대로 이루어질지라”(적용. 욥 1:21)라는 말씀이 참되기 때문이다. … 사람들과 사탄이 어떤 선동을 일삼는다 해도 그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는 자기의 심판들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노력들을 자기가 원하시는 다른 방향으로 돌리신다. … 이 몇 가지만으로도, … 하나님의 섭리를 단순한 허용으로 대체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헛되고 성가신 말을 중얼거리고 어리석은 말을 즐겨하는지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을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8.1.

     하나님이 이런 경우 그 사탄과 마귀들을 사용하시는, 그래서 그들이 하는 일을 ‘허용’하시지만, 그 허용은 단순한 허용, 곧 방임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작정’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과 흉악한 강도들을 사용하셔서 욥을 ‘연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욥의 연단의 주체는 결코 사탄과 강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욥의 연단의 ‘조성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는 일이 그대로 이루어질지라”(적용. 욥 1:21)라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섭리의 열쇠’를 지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과 사탄이 어떤 선동을 일삼는다고 해도 끝내는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선에 빠진 아합이 속임당하기를 원하셔서 그 아합의 속에 마귀를 집어넣었다라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왕상 22:20, 22). 거짓에 머무는 그러한 영들을 속으로 넣으셨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와 그의 병사들에게도 하나님이 악한 마음을 집어넣어서 그들이 끝내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죽이는 그 자리로 몰아가신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손과 계획에 따라 작정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나님은 일어나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미리 아신 대로 죽임을 당하게 내준 바 되셨다라고 그렇게 설교했습니다(행 2:23).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셨다고, 주님의 죽으심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또한 선포했습니다(행 3:18). 
     압살롬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는 그러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 압살롬의 죄를 모르신 것이 아니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12)라고 하시므로 압살롬의 이 범죄조차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섭리 가운데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갈대아 사람들, 곧 바벨론인들이 유다에 와서 온갖 만행을 하는 것을 두고 그 잔혹함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선포했습니다(렘 1:15; 7:14; 50:25 등). 심지어 느부갓네살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렘 25:9; 참조. 렘 27:6). 온갖 나팔 소리(호 8:1), 전쟁에 내모는 그러한 불경건한 자들의 선동(습 2:1), 앗수르를 통한 ‘진노의 막대기’(사 10:5), 그들이 휘두르는 도끼(참조. 마 3:10),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된, 하나님이 그들을 ‘의로운 심판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고’, 그들은 악하나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도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저주도 다윗이 즉각 반응하지 않고 그 노인을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니 나를 저주하게 내버려두라’라고 말한 것(삼하 16:11), 이런 것은 모두 바로 하나님이 그러한 악한 자들의 일조차도 사용하신다는 그것을 다윗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비참한 죽음을 죽은 것이나(삼상 2:34), 성경의 여러 가지의 일들 열 지파가 배반한 것이나(왕상 11:31), 이런 모든 일들, 그래서 북왕국과 남왕국이 나누어진 것, 이런 것들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지 여호와로부터 나온다, quidquid accidat, proficisci a Domino). 무엇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일을 관여하시고 주장하시고 그들의 마음조차도 새롭게 하시고, 또 선한 일은 충동하시고. 

솔로몬은,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시각을 좇아 이리저리로 향하게 된다고 전하는데(잠 21:1), 이는 널리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주요한 사안임이 확실한바, 마치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모든 것이 자기의 은밀한 영감에 의해 지도를 받아 자기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8.2.

     솔로몬은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시각을 쫓아 이리저리로 향하게 된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잠 21:1). 바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왕이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에 의해서 지도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입에 슬기로운 말을 넣어주시고, 또 하나님의 지도자들에게, 장로들에게 그 슬기를 주시기도 하고, 또 그 슬기를 빼앗기도 하시고(겔 7:26), 에스겔 선지자는 그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왕들의 마음을 온전케도 하시고, 또 왕들의 마음이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도 하시고(욥 12:24; 참조. 시 107:40),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도망칠 때 사울의 진영으로부터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오는데, 그 때 ‘그 부하들에게 잠을 주셔서 그 다윗의 길을 여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잠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렇게 말씀하시고(삼상 26:12), 대적들을 하나님이 물리치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눈멀게 하시고(사 29:14), 쳐서 어지럽게 하시고(참조. 신 28:28; 슥 12:4), 깊이 잠들게 하는 영(사 29:10),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간혹 완악하게 하시는 그 영(출 14:17), 그 말씀들도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눈이 멀고 상실한 마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롬 1:20-24), 바로가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끝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이고(출 9:12)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출 10:1, 20, 27; 11:10; 14:8). 

사탄이 자기 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충동으로 말미암으며, 부여된 만큼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진정 인정한다(Fateor quidem interposita satanae opera saepe Deum agere in reprobis; sed ut eius impulsu satan ipse suas paries agat et proficiat quatenus datum est). …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의로운 보복을 행하시는 주 저자(主著者)이시고 사탄은 단지 그 일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quia iustae suae vindictae praecipuus est autor, satan vero tantum minister). … 요컨대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물의 원인이라고 말해지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섭리를 사람의 모든 계획과 일 위에 통치자로 삼으신다. 이는 그가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선택된 자들 가운데서 자기의 힘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유기된 자들을 내몰아 복종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quum Dei voluntas dicitur rerum omnium esse causa, providentiam eius statui moderatricem in cunctis hominum consiliis et operibus, ut non tantum vim suam exserat in electis, qui spiritu sancto reguntur, sed etiam reprobos in obsequium cog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8.2.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 가운데, ‘섭리’ 가운데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일을 개입시키셔서 일차적으로는 버림받은 자들을 징벌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의 일을 사용하셔서 그 ‘자녀를 징계’하시기도 하십니다. 징벌은 단지 형벌을 가하는 것이지만, ‘징계’는 일시적인 고난이 있지만, 다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은 혼미하게 하고 그들에게 미혹의 역사가 있게 하지만,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 저주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상실한 마음대로 그냥 버려두심으로,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도록 버려두심으로 그들은 끝내 하나님의 은혜의 그늘 아래 거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가고, 죄에 빠지고,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악한 사람들, 불경건한 사람들, 사탄과 마귀들, 악한 영들도 사용하시고, 그 가운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존귀’와 ‘영광’과 그의 ‘긍휼’과 ‘자비’를 하나님이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편 4절에서, 회개의 그러한 애통함을 내어놓으면서도,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심판하실 때 멸망에 이르겠다라고 하지 않고, 심판의 그 쓴 형벌, 심판의 그 쓴 하나님의 징계가 있지만, 그것을 통하여 순전하시다라고 돌이킬 것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 그대로 되었노라”(참조. 욥 1:21)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악한 것은 끝내는 하나님께서 멸망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악한 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를 끝내는 바로 세우고 다시금 돌이키게 하는 그 ‘은혜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드러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러한 악한 것들도 사용하시는 섭리를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님의 뜻은 그 자체가 서로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변화되지도 않고, 그가 원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이 가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비록 그의 뜻은 그 자신 안에서 하나이며 단순할지라도 우리가 보기에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정신의 연약함 때문에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동일한 것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기도 하고 원하기도 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Neque tamen ideo vel secum pugnat, vel mutatur Dei voluntas, vel quod vult se nolle simulat; sed quum una et simplex in ipso sit, nobis multiplex apparet: quia pro mentis nostrae imbecillitate, quomodo idem diverso modo nolit fieri et velit, non capimus). … 하나님의 지혜가 다중적으로(multiplex), … ‘다양한 양식으로’(multiformis) 나타난다고 해서, 마치 그가 자기의 계획을 변경하거나 자기 자신과 서로 일치하지 않거나 하시듯이, 우리 의식의 아둔함을 빌미로 삼아 하나님 자신 안에 어떤 가변성이 있다고 꿈꾸어야 하겠는가?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일어나는 것을 금하시는 것을 어떻게 일어나도록 하시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때, 우리의 연약함을 다시 떠올리도록 하자. 동시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빛이 어둠으로 꺼풀져 있으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이라고 불리는 것이 무모하지 않음을 상기하도록 하자.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8.3.

     하나님은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고,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시는 분입니다(사 45:7).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다면 어떤 재앙이 성읍에 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암 3:6). 우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아니하셨다면 어찌 구원이 있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가장 포악한, 가장 음흉한, 가장 악의 덩어리라고 볼 수 있는 그 안나스, 가야바, 헤롯, 빌라도를 사용하신 것이지만(참조. 행 4:27-28),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의 뜻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이 없이 어떻게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겠습니까? 감추어진 비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각종의 지혜’가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양식으로 나타나셔서 각각의 일을 다양하게 이루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다양함이 변개와 같이, 변경과 같이, 변덕과 같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한 뜻’ 가운데 ‘불변하는 자신의 작정’하신 바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둔함이 있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불변한 비밀을 알지 못할 뿐, 하나님은 결코 변개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에 거하십니다. 그 빛은 우리에게 임함으로 우리가 ‘감화’를 받는 것이지, 우리가 그 빛에 스스로 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하여서 ‘사람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 합당한 것, 하나님과 사람 각자의 뜻이 지향하는 목적에 차이가 있어서, 혹자는 이것을 시인하고, 혹자는 부인하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의 악한 뜻을 통해서라도 선하게 원하시는 것을 이루신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패역한 천사들과 모든 사악한 사람이 자기들이 보기에는 다름 아닌 자기들의 반역으로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신 것을 행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비추어 볼 때 결코 그들은 그렇게 할 가능성조차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 행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뜻이 그들 위에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하므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시 111:2)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외친다. 그것은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방법이라서,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어떤 일도, 심지어 그의 뜻에 어긋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 가운데서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러나 원하시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뿐 아니라 선하신 그는 또한 전능한 분으로서 악으로부터 선을 만드시지 않는 한, 악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ut miro et ineffabili modo non fiat praeter eius voluntatem quod etiam contra eius fit voluntatem: quia non fieret si non sineret; nec utique nolens sinit, sed volens, nec sineret bonus fieri male, nisi omnipotens etiam de malo facere posset ben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8.3.

     하나님의 뜻은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어떤 일도, 심지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거역하는 일을 허용하지 아니하셨더라면 그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 가운데 허용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원하시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악으로 선을 만드시지 않는 한 결코 악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간혹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변화되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개치 않습니다. ‘한 가지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또한 두 번째 반박이 해소되며, 아예 자체적으로 사라진다. 그 논법은 이러하다. 만약 하나님이 불경건한 사람들의 일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계획들과 정서들을 다스리신다고 한다면, 그는 모든 불법의 조성자이시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작정하신 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의 뜻에 순종한다는 이유로 저주를 받는다면 이는 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그의 교훈과 무모하게 혼돈되어 있다(Perperam enim miscetur cum praecepto voluntas). 이 둘이 얼마나 현격하게 다른지를 적절하게 보여 주는 수많은 예들이 있다(참조. 『기독교 강요』, 1.18.4.). … 우리는 이 점을 확고하게 견지해야 한다. 곧 하나님이 자기의 은밀한 판단에 따라 작정하신 것을 사악한 자들을 통하여 이루실 때,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고 해서 그들의 악행이 용서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육욕을 채우고자 작심하여 그 명령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8.4.

     어떤 사악한 궤계가 있고, 어떤 이차적, 또 사람들이 보기에 우연한 그러한 일들이 개입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끝내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왕이 선출되어(왕상 12:20) 북 이스라엘, 남 유다가 나누어진 것이나, 호세아서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그 왕국이 세워진 것을 하나님이 바라보게도 하시고(호 13:11), 그것을 선지자를 통하여 불평하게도 하신 것은(호 8:4) 다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분명 나라가 쪼개진 것은 한탄할 일이나 선지자는 그곳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것을 또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유다의 배신에 있어서, 자기의 아들이 죽음에 넘겨지기를 원하셨으며 넘겨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다. 그렇다고 해서 구속의 찬양을 유다에게 돌릴 수도 없고, 범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도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보다 더 그릇된 일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저술가(Augustinus)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이 심판에서 묻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혹은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원했는지에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과 뜻을 헤아려 보시고자 한것이었다는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8.4.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왕상 12:15)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내주셨고,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내주셨고, 유다는 주님을 내주었다. 이러한 내어주심에 있어서의 모든 섭리는 하나님께 있다. 유다의 배신도 하나님께 있다.’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는 가르침받을 만한 유순한 마음을 지니고 성경이 전하는 것은 무엇이든 예외 없이 포용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Nam sapere nostrum nihil aliud esse debet quam mansueta docilitate amplecti, et quidem sine exceptione, quidquid in scripturis traditum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8.4.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가르칠 만한 심령과 유순한 심령을 가져야 됩니다.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들의 행위를 허용하실 때, 단지 방임하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뜻에 따라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탄의 어떤 선동을 일삼는다고 해도 그 열쇠는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 것이며, 그런 일로 인한 연단의 조성자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어떤 일도, 심지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불법의 조성자가 아니시며, 그가 악으로부터 선을 만드시지 않는 한 악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모든 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으나 악행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섭리의 놀라운 비밀,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복되다. 이것에 대한 무지가 가장 비참하다.’ 이렇게 칼빈은 설파하는 것입니다.




42강 이번 강의 결론

  1.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들의 행위를 허용하실 때 단지 방임하지 않으시고 자기의 뜻에 따라 허용하십니다. 
  2. 사탄이 어떤 선동을 일삼는다 해도 그 열쇠는 하나님이 쥐고 계시며, 그런 일로 인한 연단의 조성자는 그 자신이십니다.
  3.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어떤 일도, 심지어 그의 뜻에 어긋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은 불법의 조성자가 아니시며, 그가 악으로부터 선을 만드시지 않는 한, 악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5. 모든 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으나, 악행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