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강 [3.2.8-13]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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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 3.2.8-13. (3권 54-67페이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믿음은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다시 살아나고 또 새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살아남과 살아감의 그 은혜를 믿음과 함께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어서 생명을 얻고 믿어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선물로 부여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되고, 그리고 그 지식 가운데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선행이고. 

[『기독교 강요』, 3.2.8.]

‘형성된 믿음’(fides formata)은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fides caritate formata)을 칭하며, 사랑을 인식하고 그 자극을 받아 선행(善行)에 이르게 되는 은혜의 상태에 있는 자들의 믿음을 뜻합니다. 이는 ‘형성되지 않은 믿음’(fides informis)에 상대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8, 각주 79.

     그러므로 믿음에 따른 선행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우리가 보았듯이, 로마 가톨릭과 같이 믿음에는 공로의 요소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 부여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잘 갖춰진 믿음이라고 해서 “형성된 믿음”(fides formata)이라는 말을 쓰고 공로가 없이 그저 믿기만 하는 것은 “형성되지 않은 믿음”(fides informis)이라고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결코 합당치 않습니다. 믿음의 은혜 가운데서, 믿음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행을 해서 공로를 얻게 되는, 곧 공로조차도 은혜로 부여되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믿음의 순종’(obedientia fidei)이라는 로마서 1장 5절의 이 말씀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동시성입니다. 믿음과 함께 순종이 주어지고, 또 순종을 한다는 것은 이미 믿음이 부여된다는 것이죠. 결코 순종을 조건으로 믿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이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화해의 길을, 화목의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할 때 ‘믿어 의에 이른다’는 것은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그 가운데 의롭다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10장 10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단지 어떤 마음의 정서적 동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있고 그 지식에 따른 선행에 대한 ‘감동’(affectio)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하나님의 속성도 알고, 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게 되죠.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감동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아멘 하고, 동의하고, 승인합니다. 그래서 단지 그것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다’ 그리고 ‘그러해야겠다’[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동의와 승인이라는 것들이 같이 믿음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특별히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그 제1요소로서 지식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지식이라는 것이 성령의 감화에 따른, 말씀에 대한 아멘[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멘이라는 것은 그저 정서적 동의만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적 결단까지 포함되는, 그래서 믿음이라는 개념이 이것을 다 함의하는 그것이 바로 칼빈의 역동적인, 믿음에 대한 관점이라고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2.9-10.]

     그래서 아무리 우리에게 하나님이 많은 것을 요구하더라도 믿음으로 감당한다는 그 뜻은 바로 하나님이 그 명령을 그 우리에게 요구를 말씀에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면서 동시에 감화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감화라는 게 뭐예요? 바로 알게 하고, 행하게 하고, 깨닫게 하고, 그리고 능력을 갖추게 하는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벗겨진 믿음”(fides caritate spoliata)이라는 이런 개념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겨자씨만큼이라도 있으면 산을 옮긴다는 것은 바로 믿음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지식이 있고, 그 지식 가운데 역사하는 힘이 또한 믿음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로를 논하면서 믿음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로를 조건으로 믿음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귀한 도인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말씀을 받고 말씀대로 살 때 그것이 바로 믿음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내 안에서 어떤 자리를 잡고, 준비가 되고, 내가 믿음에 대한 어떤 이제 형상이 내 안에 자리가 잡히고, 이제 그림자가 내 안에 깃들고, 그래서 내가 준비를 해서 믿게 되는 그것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선뜻선뜻 뭔가 경건한 모습,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그런 모습을 믿음의 준비라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비유하셨듯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그저 사라지듯이요(눅 8:6-7, 13).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비록 연약해 보여도 참믿음이고,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믿음은 비록 믿음이 있는 듯하고 능력이 있는 듯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11.]

     그러면 뭐겠습니까? 결국 믿음은 구원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인데, 그 믿음은 곧 “선택의 열매”(fructus electionis)라는 것이죠. 선택한 사람에게만 그 열매로 믿음을 주신다는 거죠.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데 바로 13절에 요한복음 1장 13절에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뭡니까? 믿어서 영접하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데 “혈통으로”도, [곧] 어떤 가계에서 태어난 것으로도, “육정으로”도, [곧] 어떤 정서적 결단으로도, 그다음에 “사람의 뜻으로”도, [곧] 의지적 결단으로도, 그것으로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믿음은 바로, 선택된 자들에게 부여되는 선택의 열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담대함과 확신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썩지 아니할” 영원한 씨로서 거듭나게 했다[는] 베드로전서 1장 23절 [말씀입니다.] 그 생명의 씨가 믿음과 함께 우리 안에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씨 영존하고 풀도 꽃도 시들고 마르지마는 영원히 있는 말씀의 씨,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거든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베드로전서 1장의 바로 ‘그리스도’거든요) 그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택된 자들에게 부여되는, 곧 구원의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 부여된 믿음이기 때문에, 이 믿음은 법정적으로 부여되기 때문에, 하늘 선포로 절대적으로, 인격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부여되기 때문에, 이 믿음의 열매는 썩지 아니하는 선택의 열매고, 그래서 한 번 주어진 믿음은 끝까지 보존되는, 그리고 그 믿음이 떨어지는 곳은 옥토로서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뿌리”(radix fidei)가 내리는데, 그 믿음의 뿌리가 내리는 참믿음, 구원의 믿음, 그것은 바로 선택의 열매[입니]다. 

[『기독교 강요』, 3.2.12.]

     이런 전개하는 이 과정에서 칼빈은 바로 믿음에 대한 유명한 정의를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과 그 진리에 대한 확실한 감화이다(fides divinae erga nos benevolentiae notitia est, et certa de eius veritate persuasi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2.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과 그 지식에 대한 확실한 감화이다.’ 그래서 믿음은 아는 것인데, 그 아는 것에 대한 확실한 감화다, 이게 결국은 뭐예요, 바로 감화된 지식, 성령의 감동, (성령의 감동이 감화거든요)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변화되어서 받아들이는 그게 바로 믿음이죠. 그 지식은 바로 믿음의 씨앗이 되는 거고, 그 씨앗은 썩지 않는 씨앗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과 그 진리에 대한 확실한 감화’라는 아주 유명한 칼빈의 믿음에 대한 정의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이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하게 보일지라도 그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요, 참믿음이요, 생명과 온전함에 이르게 하는 그러한 전 구원 과정에 역사하는 그 믿음입니다. 왜요?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떠나가지 않듯이, 보혜사 영의 임재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지는 믿음도 한 번 우리에게 부여되면 다시 거둬지지 않고, 계속 우리 안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실한 보증과 인”(caerta arrha ac sigillum)으로서 우리에게 새겨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가 믿고 영접하는 것인데, 그 믿고 영접하는 자녀 됨에 권세, 그것이 우리에게 아주 불가변(不可變)하게, 불가분리(不可分離)하게, [곧] 변할 수 없고 분리할 수 없게 우리에게 새겨져 있다고 이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우리에게, 로마서 5장 5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은 바 됨이나 하나님의 사랑이 … 부은 바 됨이니”[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비와 인애로, 긍휼로 택함 받은 백성에게 이 믿음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우리 안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르짖음의 확신을 낳는 사랑”(caritas quae invocationis fiduciam generat)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의 그 하나님의 역사로 믿음을 부여받은 그 은혜 가운데 사는 자는 또 믿음으로 그 사랑을 부르짖는다는 것이에요. 
     결국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은혜로 사는 사람이에요. 믿음이 나에게 주어졌으니까 이제는 내가 믿음으로 사는 게 아니라, 믿음이 나에게 주어졌으니까 이제 내가 더 하나님께 의지해서 사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은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 은혜로운 삶을 살[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 가운데서 복됨을 누리고 은혜를 누리고 사랑을 누리고, 또 믿음 가운데서 소원하고 간구하고, 무엇보다 믿음이 우리 안에 있으면 이전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고, 요한복음 8장 31-32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을 칼빈은 어떻게 해석하느냐[면], 여기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바로 성령의 임재에 따른 믿음의 부여, 그리고 그 믿음이 지식을 갖고, (믿음의 제1요소로서 지식을 갖는데) 그 지식이 바로 진리란 말이에요.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사는 것이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가운데 나의 부족함이 있으면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긍휼로, 자비로, 인애로, 사랑으로 주어진 믿음이니까 믿음으로 긍휼과 자비와 인애와 사랑을 간구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결국은 “믿음의 진보”(profectus fidei)라고 이렇게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진보가 뭡니까? 더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렇죠.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로마서 1장 16절 17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바로 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래서 끝까지 은혜로 살아가게 하는 것, 우리 안에 주어진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참믿음이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디모데전서 1장 5절에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참 아름다운 표현을 여기서 씁니다. 

그(바울)는 착한 양심을, 믿음이 그 속에 보관된 궤(櫃)와 비교한다(Itaque bonam conscientiam arcae comparat, in qua custoditur fide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2.

     ‘착한 양심은 믿음이 그 속에 보관된 궤와 같다.’ 우리가 언약궤가 있지 않습니까, 지성소의 언약궤가 있듯이 우리 안에 믿음이 보관되어 있는 궤, 그 양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선한 양심,’ 이 양심도 우리가 ‘거듭난 양심’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이런 양심이 없는 사람은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서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2.13.]

     믿음은 “경건에 관한 건전한 교리”(sana pietatis doctrina)라는 [믿음에 대한] 또 다른 칼빈의 정의가 있습니다. 믿음은 그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믿어서 자녀 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전체적인 감화입니다. 그 감화는 사랑 안에 사는 것이고, 영광 가운데 사는 것이고,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고,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내려받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 강요』 1권 1장 2절 그리고 1권 2장에서 우리가 봤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경건의 지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칼빈은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리, 그것이 바로 믿음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딤전 3:9), 이런 것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양육을 받아야겠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으로 삽니다. 바로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됩니다. 믿음으로 아는 말씀, 믿음으로 자라는 말씀, 믿음으로써 구하는 말씀, 그래서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 디모데전서 4장 6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희 안에 믿음을 온전하게 하라’(딛 1:13; 참조. 딛 2:2), 믿음을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공로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학생들에게 많은 말을 합니다. ‘믿음을 가급적 명사형으로 사용해라. 동사형으로 믿는다, 믿는다 하면 내 공로가 되니까,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명사형으로 사용해라.’ 그것이 바로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은 믿음을 누리라, 믿음대로 살아라, 은혜대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은 복음을 순수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사는데, 복음을 떠나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나면서 저 사람 믿음이 많은 사람이란 말을 들어서는 되겠습니까? 그런 믿음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참믿음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는다 하면서 성경을 덮어놓고 있고, 믿는다 하면서 복음을 떠나 있으면, 그 믿음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그걸 종교개혁 시대 때는 ‘리베르땅,’ [곧] 자유주의자들이라고 한 거예요. 말씀을 떠나서 영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 그게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말씀을 믿는 것이고, 진리를 믿는 것이고, 선택의 지식을 가지고 여호와를 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순수성[이 중요합니다]. 

마땅히 믿음은 하늘 교리의  전체 요체(要諦)에 미친다([fides] merito extenditur ad totam coelestis doctrinae summ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3.

     그래서 믿음은 하늘 교리 전체 요체에 미친다[라고] 이렇게 칼빈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늘 교리’란 말은 하나님의 교리, 하나님의 지식 그 전체가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저 구원받고 ‘내가 생명을 얻었다’ 그것만 믿고, 나머지는 내 이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 모든 삶의 지식이 믿음으로 온전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과 교리를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고 믿음과 교리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 믿음은 좋은데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는 것이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이 아는 것이고, 그래서 교리와 믿음은 동일하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은혜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믿음은 공로에 의해서 그 가치가 좌우되지 않으므로 로마 가톨릭이 사랑이 있는 형성된 믿음, 사랑이 없는 형성되지 않은 믿음, 이렇게 나누어서 믿음의 고하를 논하고, 계급을 논하고, 자질을 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믿음은 구원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두 번째,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자리에 자리하며 지식을 좇은 경건한 정서와 순종과 사랑이 필히 따른다. 그러니까 사랑이 먼저 있고, 경건이 먼저 있고, 정서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부여받으면 그 믿음은 말씀에 대한 감화이기 때문에, 정서와 순종과 사랑이 열매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곧 경건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받았으니 경건에 이르는 것입니다. 
     세 번째, 믿음은 썩지 아니하는 생명의 씨가 떨어져 맺히는 선택의 열매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영생을 확신 가운데 누리게 합니다. 
     네 번째,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과 진리에 대한 확실한 감화로서, 성령이 보증과 인으로서 믿음을 우리 안에 새겨 줘서 우리 안에 믿음 있음을 우리가 알고 확신하고 살게 합니다. 
     다섯 번째, 믿음의 대상인 말씀은 순수한 복음이고 하늘 교리 전체에 미칩니다. 그러므로 그 교리의 요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97강 결론


  1. 은혜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믿음은 공로에 의해서 그 가치가 좌우되지 않으므로, 로마 가톨릭이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을 나누어 믿음에 자질을 부여하는 것은 그릇됩니다. 
  2.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리에 자리하며, 지식을 좇은 경건한 정서와 순종과 사랑이 필히 따릅니다. 
  3. 믿음은 썩지 아니하는 생명의 씨가 떨어져 맺히는 선택의 열매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영생을 확신 가운데 누리게 합니다.
  4.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선하심을 아는 지식과 진리에 대한 확실한 감화로서 성령이 보증과 인으로서 새겨져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5. 믿음의 대상인 말씀은 순수한 복음이고 하늘 교리의 전체 요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