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강 [3.2.1-7] 믿음은 성령의 말씀 감화로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내포함

관리자
조회수 47




96 | 3.2.1-7. (3권 39-54페이지)



믿음은 성령의 말씀 감화로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내포함


     이제 3권 2장은 믿음에 할애됩니다. 43절[로 된] 아주 긴 장입니다. 믿음은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거듭나서 구원받았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 없습니다. 믿음은 다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2.1.]

     칼빈은 성도의 구원에 일종의 원칙과 같은 게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다 지켜 행하여야 한다.
     둘째, 그 누구도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수 없다.
     셋째,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건져 내심, [즉] 구원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세 가지가 구원의 큰 원칙입니다. 
     믿음은 무엇일까요? 이 세 가지를 믿는 것이라고 칼빈은 서론적으로 언급합니다. 모든 것을 행하여야 되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맞는 이야기거든요, 우리가 자유의지에서 보았듯이. 그러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실 예수님이 계셔야 됩니다. 믿음의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곧 그리스도를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믿음은 세상에서 말하는 어떤 인식론적, 철학적, 어떤 정서적 동의, 그러한 수준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역사하는, 보혜사 성령의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그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굽니까? [그는] 바로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요 8:12). 영원하신 말씀이 이 땅에 오셔서 참 빛으로 오셨지 않습니까? 그 참 빛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 가운데 오셨는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인데, 그가 누굽니까?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입니]다. 모든 믿음은 그 대상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의 믿음은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빛이고, 그리스도가 말씀이고, 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1절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그것이 바로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한 분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 “아는 것”이 바로, 아들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들을 아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믿음으로 아들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자 없고 아버지를 볼 수도 없고 아버지께 갈 자도 없고(요 14:6).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칼빈은 먼저 믿음에 대해서,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에 이끌려 그리스도를 찾도록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 그때 우리 안에 주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의 목적을(de fidei scopo) 논의하면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목적지가 어디이며 믿음에 이르는 방법이 무엇인지(quo sit eundum et qua)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 후, 곧 이어서 모든 오류에 맞서는 가장 잘 무장된 길은 동일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분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즉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그리로 방향을 정해야 할 목적지가 되시며,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 나아가야 하는지 그 방법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Deum enim esse quo tendimus, hominem qua imus). 이 둘 모두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

이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의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의 필연성과 그 가운데서의 신성과 인성의 속성 교통을 제시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1, 각주 37.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칼빈이 인용하면서, ‘믿음의 목적지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방법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말합니다]. 길이요 진리, 이것은 방법이잖아요. 생명은 목적지잖아요. 목적지도 예수고,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도 예수[라는 것입니]다. ‘동일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분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그리로 가야 할 방향을 정하여 주시는 목적지가 되고, 그리고 그곳에 나아가야 될 방법이 된다.’ 라틴으로 말하면 목적지, ‘quo’, 그리고 방법, ‘qua’,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목적지이자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갑니다. 그러니까 방식도 예수요, 그럼 목적지는 뭐예요? 예수의 품이 또 목적지입니다, 사실. 예수의 품에 안겨서 어디 다른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마지막에 예수를 마주 보는 게 우리의 목적지잖아요. 그래서 믿음의 방식도 길이요 진리, 믿음의 목적지도 생명, 다 예수입니다. 그것을 칼빈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2.2-3.]

     이렇듯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함께 부여됩니다, 믿음 가운데.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릅니다, 이렇게 될 수가 없잖아요. 로마 가톨릭은 이것을 가지고 사제들이나 또 수도사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더 고급스러운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 성도들은 좀 저급하고, 특별히 초신자들은 더 저급하고, 그래서 믿음 중에도 지식이 없는 믿음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즉] “불명확한 믿음”(fides implicita)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불명확한 믿음’(fides implicita)은 ‘맹목적 믿음’(fides arcana)이라고도 불리는데, 믿음의 대상이 되는 말씀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없이 교회가 믿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명확한 믿음’(fides explicita)에 상대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2, 각주 39.

     그러나 칼빈은 여기에서 그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있고 없고의 문제다. 그러나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면 그 믿음에는 이미 지식이 들어 있다.’ 이것이 칼빈입니다. 

믿음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자리한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뿐만 아니라 신적 의지(意志)를 아는 지식을 아우른다(Non in ignoratione, sed in cognitione sita est fides; atque illa quidem non Dei modo, sed divinae voluntatis).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진정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화목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아버지이시라는 사실과(고후 5:18-19) 그리스도는 의, 거룩, 생명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데 있다.…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쏟아서가 아니라 이 지식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문을 확보하게 된다(Hac…cognitione, non sensus nostri submissione, ingressum in regnum coelorum obtine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2.

이와 같이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지식(cognitio)은 오성(intellectus)과 의지(voluntas)의 영역에 모두 미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2, 각주 41.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을 때, 그래서 우리의 감정이나 우리의 어떤 정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식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아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알고 믿는 것, 믿고 아는 것이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릅니다라고 하는 이러한 “겸손을 가장한 무지”(ignorantiam humilitate temperatam)는 합당하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백 신앙이지 않습니까? 고백 신앙은 뭐예요? 그렇다고 인정하는 거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거잖아요(롬 10:10). 그러면 우리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아멘. 자녀 되었습니다, 아멘. 아버지를 압니다, 아멘. 그러니까 믿음과 지식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어떤 교회를 아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사상이거든요. 교회에 대한 경외를 가지고 그리고 영세를 받는 거예요, 로마 가톨릭은. [그러나]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 “진리의 명료함”(perspicuitas veritatis)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질문해 볼 수가 있겠죠. ‘아니 저는 확실히 모르는데 어떻게 명료한 지식이 있습니까?’ 그것(진리의 명료함)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의 객관적 명료성이죠. 우리가 뭔가를 받았다는 것을 다 깨닫지는 못해도 받은 것은 사실이잖아요. 

[『기독교 강요』, 3.2.4-5.]

     그래서 “믿음의 분량”(mensura fidei, 롬 12:3)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믿음의 분량. 그러나 믿음의 분량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은 구원의 분량이고, 어떤 사람은 반쪽 구원이고, 어떤 사람은 이제 3분의 1의 구원이고, 그게 아닙니다. 구원의 지식은 동일한 지식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자녀 됨의 그 분량은 동일해요.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도가 자라가듯이, 믿음에도 그런 분량은 주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사람은 아직까지 믿음이 희미해,’ ‘저 사람의 믿음은 아직까지 구원의 믿음이 아니야,’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믿음이 희미해 보여도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고 명확한 믿음이다’라고 칼빈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장 여기에서 칼빈이 경계하는 것은 ‘내 정서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지 마라,’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어떤 다른 것을 바라보고, 중세 시대 같으면 사제를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고, “교회에 대한 경외”(reverentia ecclesiae)가 믿음이라는 그 중세의 잘못된 신앙, 그런 것은 다 금하라, 이 말이에요. 우리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고 뭐 보입니까? 뭐 압니까?’ 아니요. 우리 심령에 예수를 주라고 영접하면, 주가 날 위해 죽으셨잖아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이죠, 십자가가 보이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요. 그래서 우둔하게 괜한 겸손으로, 거짓 겸손으로 모른다 하지 말고, 안다라고 이야기하라는 것이요. 이것이 지금 칼빈이 믿음을 들어가는 서론적인 입장이에요. 그 믿음은 바로 뭐예요? 제1요소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에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Sola fide,’ ‘오직 믿음’인데, ‘sola Christo,’ ‘오직 그리스도로써,’ 오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어요.

[『기독교 강요』, 3.2.6.]

     그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 곧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그 복음으로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참 지식이 우리에게 있다,’ 이 말이에요.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다,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대상이 바로 아까 이야기했듯이, 목적지가 되고 목적지에 이르는 그 과정이 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믿음의 목표로 정해지신바, 복음이 앞서 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에 이르는 올바른 길에 설 수가 없다. 분명 그 올바른 길에서 우리를 위한 은혜의 보고가 열린다(sicuti in scopum fidei nostrae ipse destinatus est, ita nonnisi praeeunte evangelio recta ad eum tendemus. Et certe illic nobis aperiuntur thesauri gratia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6.

     그리스도가 믿음의 목표고, 그래서 복음이 앞서간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된 소식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된 소식이 믿음과 함께 우리에게 심령의 차트가 열리듯이 열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죠. 왜요? 예수를 우리와 함께한 아들로서 영접하니까, 예수를 영접하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거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를 영접할 자 없고,’ [그래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은혜의 보고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라고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 복음[입니다]. 다만 이 복음은 신약의 사복음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신구약 전체가 바로 복음이라[는] 말이에요. 오실 그리스도, 오신 그리스도, 전체[가] 복음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선포, 그 완전함이 뭐예요? 보혜사 성령이 임하여 믿음이 주어지면,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왜요?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살고 내 안에 거하고. 그[분]이 바로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4장 6절에서는 “믿음의 교훈”(doctrina fidei)이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 사이에 영속적인 관계가 있[다](perpetuam esse fidei relationem cum verb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6.

     ‘믿음과 말씀에는 항상 영속적인 관계가 있다’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내게[로 나아와]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이사야 55장 3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듣고 사는 것이 그리고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믿게 하려 함이[요],” 요한복음 20장 31절.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듣거든”(시 95:7), 이게 신약시대의 “그의 음성”이 뭐예요? ‘너희는 내 말을 들어라’(마 17:5; 막 9:7; 눅 9:35). 변화산에서 울려 퍼졌지 않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의 말을 들으라. 바로 마태복음 17장 5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래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듣는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복음서 기자들이 도처에서 ‘신자들’이라는 말과 ‘제자들’이라는 말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passim evangelistae fideles et discipulos ponunt tanquam synonyma).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6.

     그래서 여기서 칼빈은 아주 우리에게 귀하게, 아주 치듯이 이야기합니다. ‘신자들이란 말과 제자들이라는 말이 동일한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라틴어로 ‘fideles,’ ‘믿는 사람들’과 ‘discipulos,’ 바로 ‘제자들’, ‘학생들’이 동일한 것[입니]다. 믿는 자가 제자라는 것이에요. 믿는 것이 아는 것이란 거예요. 

그 동일한 말씀이 믿음을 떠받쳐서 지탱하는 기초가 된다. 믿음은 말씀에서 빗나가면 쓰러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한다면 결단코 아무 믿음도 남지 않는다(Idem verbum basis est, qua fulcitur et sustinetur: unde si declinat, corruit. Tolle igitur verbum, et nulla iam restabit fide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6.

여기에 믿음의 대상이 말씀이라는 점, 그것이 신구약 성경 전체에 미친다는 점, 그 말씀의 실체가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이 함의됩니다. 이는 칼빈의 신학적 성경 해석의 지평을 보여 줍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6, 각주 65.

     그래서 ‘말씀을 제거한다면 결단코 아무 믿음도 남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Tolle igitur verbum, et nulla iam restabit fides.” 그대로 말하면,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요. ‘말씀을 제거해라. 그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믿음은 바로 말씀을 믿는 것이요, 그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믿음은 이 말씀을 아는 지식과 함께 우리에게 바로 믿음에 대한 순종이 있는 것이죠. ‘믿어 순종에 이르라니,’ 로마서 1장 5절에 이야기했지만. 이 성경의 원어는 동시성을 이야기하거든요. “믿음의 순종”(obsequium fidei)이에요, 그대로 번역하면. 믿음과 순종이 함께 있어요. 
     그래서 믿음으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곧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고, 그런데 그 역사가 영의 역사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그러면 지식으로 고백이 있으면 순종이 따르고. 그래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를 향한 뜻을 아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가 히브리서 11장 6절,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이게 뜻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fidem esse divinae erga nos voluntatis notitiam ex eius verbo praeceptam)이라고 여긴다. 진정 믿음의 토대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선취(先取)된 감화이다(Huius autem fundamentum est, praesumpta de veritate Dei persuasi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6.

     그래서 ‘믿음은 말씀에 규정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다.’ 칼빈신학에서 [이것이] 아주 중요하거든요. 율법도 바로 뭐예요, 하나님이 어떠하심과 뜻의 계시잖아요. 이게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신 것과 하나님의 뜻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하나님의 속성, 이런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믿음의 토대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선취된 감화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게] 뭔가 하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먼저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미리 안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미리 압니다. 

[『기독교 강요』, 3.2.7.]

     미리 아니까, 거듭나면 예배 드리고 찬송하고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순종하[도록] 들어오고,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진리를 드러낸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칼빈은 아주 또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구약에 보면 우리가 긍휼, 인자, 자비가 진리와 입 맞추고 진리와 함께 있고. 특별히 우리가 시편, 이런 데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주의 인자와 진리”가(시 40:11), “주의 인자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구름에 “사무쳤으며”(시 36:5). “인자와 진리”가. 바로 인자, 인자가 바로 헷세드, 사랑, 인애, 자비, 이게 있고, 함께 뭐가 있다 진리, 진실, 계시, 이게 또 함께 있고. 이게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4, 17절. 바로 뭐예요? 진리와 사랑[이] 함께 있다는 거죠. 진리와 사랑. 그러니까 여기서 그 이야기예요 바로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음은 뭐예요? 바로 은혜의 역사와 진리의 역사가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칼빈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칼빈이 펼친 우리 개혁신학의 바로 ‘doctrine of faith,’ ‘doctrina fidei,’ [즉] ‘믿음의 교리’예요, 이게. 믿음의 교리가 여기에서 아주 이런 그러니까 하는 것이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이 아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게 다, 둘 다 선물로 주어진다는 거예요, 은혜로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은혜와 함께 우리가 죽어 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거예요. 지식이 오면 순종이 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과 진리가 함께 역사하는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진다(esse divinae erga nos benevolentiae firmam certamque cognitionem, quae gratuitae in Christo promissionis veritate fundata, per spiritum sanctum et revelatur mentibus nostris et cordibus obsigna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2.7.

     그래서 이 부분에서 칼빈은 믿음을 정의하는데,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다.” 이렇게 칼빈은 정의해요. 칼빈에게서 믿음은 지식이다, 믿음은 아는 것입니다. 뭐에 의해서?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이것은 아주 전형적인 칼빈의 믿음의 정의가 되겠습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구원의 믿음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목적지(quo)이자 방법(qua)입니다.
     둘째, 믿음은 교회에 대한 정서적 경외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명료한 지식과 함께 주어집니다. 내가 심령으로 교회의 사제를, 아니면 교회의 어떤 구조를 동의한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이며 들음은 복음에 의해서 부여되는 순종이므로, 말씀을 제거하면 아무 믿음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넷째, 믿음은 자비, 곧 인애, 긍휼, 사랑과 진리, 곧 진실, 지식, 지혜를 함의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견고하고 확실한’이란 말은 성령의 역사란 뜻이에요. <이 단어는> 항상 성령의 역사로 견고하고 확실한 감동에 따른 지식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믿음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니, 신자들은 곧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칼빈의 정의적인 <그러한> 서술이 되겠습니다.



96강 결론


  1. 구원의 믿음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이니, 그가 믿음의 목적지(quo)이자 방법(qua)이십니다. 
  2. 믿음은 교회에 대한 정서적 경외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명료한 지식과 함께 주어집니다.
  3.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이며, 들음은 복음에 의해서 부여되는 순종이므로, 말씀을 제거하면 아무 믿음도 남지 않습니다. 
  4. 믿음은 자비(인애, 긍휼, 사랑)와 진리(진실, 지식, 지혜)를 함의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입니다.
  5. 믿음은 말씀을 듣고 순종함이니, 신자들이 곧 제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