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러한 모함들은 미친 사람들의 정신착란에 다를 바 없는데 섭리에 대한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하여(pia sanctaque providentiae meditatio) 쉽게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묵상은 경건의 규범을 지시해 줌으로써 가장 선하고 가장 달콤한 열매가 우리에게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일어난다는 사실과 어떤 것도 계획 없이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없이 확실한 감화를 받게 되므로, … 그 마음은 하나님의 고유한 섭리가(singularem Dei providentiam) 자기를 지켜 주고 선과 구원으로 향하게 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6.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주관하시고, 만물 가운데 자기의 섭리를 드러내십니다. 그 섭리가 우리의 삶의 ‘위로’요, 그 섭리가 우리의 ‘믿음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것이 가장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pia sanctaque providentiae meditatio)을 끊임없이 해야 할 것입니다. 만물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할 것이요, 우리의 삶을 통하여서도, 내가 받은 은혜와 예배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보았듯이, 만물에 ‘법’을 새겨주신 하나님의 섭리, 이것보다 더 큰 섭리는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주[신 것인데], 그 ‘규범’을 가지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그래서 가장 선하고 가장 달콤한 ‘열매’에 우리가 이르도록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일어난다는 사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계획 없이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성령의 깊은 감화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든 사물들의 그저 주요한 원인(praecipuam rerum causam), 그리고 어떤 하부(下部) 원인들이(causas … inferiores), 이차적 원인들이 개입해서 무슨 일을 이루는 그러한 상대적인 주권, 이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요, 만물을 운행하시고 만물의 끝을 주장하시는 ‘시작’과 ‘끝’이요, ‘처음’이요 ‘나중’이 되시는 분입니다(참조. 롬 11:36; 계 1:7; 2:8; 21:6; 22:13).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사랑을 우리가 고백할 때,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돌보심’, 그것이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에 미치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큰 은혜의 섭리’를 베푸신다는 것,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새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섭리가(singularem Dei providentiam) 신자들의 구원을 돌본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더없이 분명한 수많은 약속들이 있다(참조. 시 55:22; 벧전 5:7; 시 91:1; 슥 2:8; 창 15:1; 렘 1:18; 15:20; 사 49:25; 사 49:15). … 성경 역사서들의 핵심 목표는 여호와가 성도들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그 큰 열심으로 성도들의 길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참조. 시 91:12). … 그러므로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치가 있다. …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인류와, 하나님이 처소로 택하시고 다스리심에 있어서 자기의 부성적 사랑의 고유한 증거들을 의심할 바 없이 보여 주시는 교회에 모두 관계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6.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가 피조물을 향한 보존과 운행과 통치(우주적 차원), 사람들을 향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개인 구원적 차원), 교회를 향한 인도와 다스림(교회 구원적 차원)에 모두 미침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6. 각주 594.
하나님의 중요한 섭리는 ‘신자들의 구원’을 돌보시는 데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하나님은)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견인(牽引, 堅忍)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가 우리를 돌보심이라”’(적용. 벧전 5: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시 91:1).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고 눈동자같이 우리를 보호하심으로(신 32:10; 시 17:8; 슥 2:8), 우리가 그 하나님의 법을 범하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요, 사람들이 우리를 범하게 되면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편과 선지자들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 ‘방패’요(창 15:1), ‘놋성벽’이요(렘 1:18; 15:20),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사 49:25). ‘산모가 젖먹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혹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사 49:15). 여호와 하나님은 그 백성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성도들의 걸음을 보호할 것이다(시 91:12). 이런 모든 성경의 말씀들이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라도 그저 떨어지지 아니하고, 머리카락이라도 세신 바 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더 귀하게, 세밀하게 보호하시겠습니까(마 10:29-31; 눅 12:6-7)? 이러한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은 우리 ‘개인’에게 미칠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미칩니다. 이것을 우리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이렇게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는 역경이 많은 듯하지만, 그 교회를 통하여 순교자가 많이 나는, 그러한 하나님 안에 큰 복을 누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있다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들을 어느 교회에 두심으로 하나님은 특별히 일을 이루시는 이러한 모습들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여호와는 우리 적들의 사악함을 쳐부수는 다양한 방식을 알고 계셨다(참조. 왕상 22:22; 12:10, 15; 삼하 17:7, 14). … 이렇듯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각각의 고유한 선과 안전에 이르도록 다스림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듯이, 그의 허용과 명령 없이는(sine permissu eius ac mandato) 마귀도 감히 스스로 욥을 괴롭히려 들 수 없게 된다(욥 1:12). 이와 같은 지식에 필히 뒤따라오는 것은, 일들이 번창하는 성공에 대한 마음의 감사, 역경에 맞서는 인내, 미래에 미치는 믿기지 않는 평온이다(Hanc notitiam necessario sequitur tum animi gratitudo in prospero rerum successu, tum in adversitate patientia, tum etiam in posterum incredibilis securitas).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 마음의 바람대로 번창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심중에, “저들의 마음을 나에게 기울이게 하시고 저들을 나에게 굳게 묶어 두심으로써 저들이 나를 향한 자기의 선하심의 도구들이 되게 하신 분은 분명 여호와이시다.”라고 깊이 헤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토록 많은 증거들을 통하여 권고를 받게 되므로, 그는 결코 배은망덕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7.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사용하시되, 그저 두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자들을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사용하시는지 그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아합을 속이도록 하기 위하여 선지자의 입을 거짓으로 채울 사탄을 보내는, 아합을 폐하시려고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사탄을 보내셨다(왕상 22:22).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이어서, 그 마음에 아주 강퍅한 것을 하나님이 넣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전갈을 자기가 주겠다 하면서,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왕상 12:10-15).
다윗에게 가장 뛰어난 지략가였던 아히도벨, 그의 계획은 분명히 옳았지만, 하나님은 아히도벨을 오히려 폐했습니다. 우리 인생으로 보면 후새의 계획이 훨씬 못한 계획이지만, 하나님은 후새의 계획에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삼하 17:7, 14). 이런 모든 것은 우리가 가닿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판단하지만, 바로 하나님은 대적조차도 사용하시는 그 최상의 섭리의 방식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욥을 괴롭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참조. 욥 1: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지식’은 우리가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그리고 역경에 맞서서 ‘인내’하는 것, 그리고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하여 ‘평온’을 느끼는 것, 이런 것은 다 섭리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이와 다를 바 없이 만약 어려운 일이 발발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종은 있는 곳에서 마음을 들어 올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앙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마음에 인내와 평온한 마음의 절제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각인시켜 주기 때문이다(Si adversi quid contigerit, extemplo mentem hic quoque extollet in Deum, cuius manus ad patientiam placidamque animi moderationem nobis imprimendam valet plurimum). 만약 요셉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의 형제들의 배신에만 침잠했더라면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들에 대한 형제애를 결코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돌려 여호와를 향하게 되자, 그들의 불의를 잊은 채, 온유와 관용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다음과 같이 위로하기에 이르렀다. “나를 애굽으로 판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기의 뜻 가운데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적용. 창 45:5, 7-8).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8.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대할 때, 우리의 마음을 들어올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앙망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상에 마음을 두지 말고, 세속적인데 마음을 두지 말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앙망하고, 신령한 것을 바라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마음에 인내와 평온한 마음의 절제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각인시켜줍니다. 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섭리’가 있을 때 우리 마음이 ‘평온’을 얻습니다.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가 참고 ‘절제’하게 됩니다.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가 ‘소망’하게 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나를 애굽으로 판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기의 뜻 가운데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적용. 창 45:5, 7-8). 아마 요셉이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요셉은 가장 즐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이렇게 또한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욥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여러 고난을 겪었지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는 이 욥의 신앙은 계속 유지되는 신앙입니다. 그 신앙 가운데 욥은 끝내 은밀한,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에 대해서 더 ‘찬미’하며 나아가는 그것이 욥기의 주제인 것입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을 때,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 저주에도, 그 시므이의 악한 저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9).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고난을 당하나 애매한, 가장 어려울 때 저주하는 자의 입에 대해서 다윗이 함께 저주할 수 있지만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섭리다’ 하고 다윗이 입을 잠잠히 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원하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걸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자들은 이러한 ‘인내’가 생기는 것입니다.
분노와 조급함에 대해 이보다 더 효과적인 처방이 없을진대, 그것들을 유발하는 영역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이 적잖은 열매를 맺을 것이며, 그것은 항상 다음과 같은 점을 마음에 상기시킬 것이다. “여호와가 그것을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것을 참아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다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가 원하시는 것은 의롭고 유익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우리가 부당하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그들의 사악함을 간과하도록 하자. 그것에 대한 보복은 상처를 악화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날카롭게 할 뿐이므로, 잊지 말고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우리에게 중한 죄를 범하는 적(敵)은 하나님의 의로운 경륜에 의해 허용되었으며 보내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8.
우리가 부당하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바라보는 데 마음 쏟지 말고, 그렇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상처만 바라보면 악화되고 우리 마음만 날카로워집니다. ‘잊지 말고 하나님께로 올라가라. 우리의 마음을 들어올리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바라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씨름이 아니라, 영적인 마귀에 대한 씨름이다(엡 6:11-12).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헤아릴 때, 또 모든 것을 조정하는, 악하게 지배하는 악한 영을 또한 우리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기뻐하고, 당장 일어난 일로 슬퍼하고, 이렇게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비밀의 섭리’, 그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 섭리’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이사야 45장 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부 원인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 그는 자기가 받은 선한 것들로 인하여 여호와를 그 주요한 조성자로 경배하며 찬양할 것이며 사람들을 그의 일꾼들로 존경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손으로 사용하고자 원하신 사람들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Deum in acceptis bonis reverebitur et praedicabit, ut praecipuum autorem; sed homines ut eius ministros honorabit, atque, ut res est, intelliget se Dei voluntate iis esse devinctum per quorum manum beneficus esse voluerit). … 자기에게 무엇이든 유익을 끼치는 모든 피조물을 여호와가 자기의 손에 부여해 주신다고 여기고, 그것들을 신적 섭리를 이루는 합법적인 도구들로(legitima divinae providentiae instrumenta) 사용할 것이다. … 동일한 지식이 우리가 무모함과 그릇된 과신을 벗어 버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에 서도록 몰아갈 것이다. …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선한 소망으로 가득 채워서 우리가 평온하면서도 담대하게 우리를 둘러싼 위험들을 주저함 없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9.
이러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부 원인’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되 다른 것들을 사용하시고, 사물도 사용하시고, 사람도 사용하시고,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용하시고, 간혹은 대적들도 사용하시고, 악한 영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받은 선한 것들로 인하여 여호와를 경배하고 찬양하고 그러한 일들을 감당하는 일꾼들로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손으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그의 일을 행함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찬미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는 쉬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되 우리를 사용하시는 그 은혜를 베푸셔서, 포도원에서 함께 거하게 하시고(참조. 마 20:1), 함께 상에서 음식을 들게 하시고 우리에게 상을 베풀어 주시고(시 23:5, 참조. 마 9:9-13; 계 3:20; 마 26:26-28), 그리고 함께 일을 이룸으로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을 찬미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모든 것을 행하실 때 친히 자기 ‘손’으로 행하십니다. 그 여호와가 자기 손으로 행하시되,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해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면서 ‘보호’해 주시고, 그 가운데 우리가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상급’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저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자기에게 비치자마자 이전에 자기를 극단적으로 누르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로부터뿐만 아니라 모든 염려로부터 위로를 받고 해방된다. 왜냐하면 의당 그는 운명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만큼, 거리낌 없이 감히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위로가 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자기의 권세로 붙드시고, 자기의 주권과 지시로 다스리시며, 자기의 지혜로 조정하시므로,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Hoc, inquam, solatium est, ut intelligat patrem coelestem sic omnia sua potentia continere, sic imperio nutuque suo regere, sic sapientia moderari). 나아가 자기가 받아들여져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천사들의 돌봄에 위탁되었으며, 물도 불도 쇠도 그것들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좋아하셔서 기회를 주지 아니하시면 자기를 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도 그에게 위로가 된다(참조. 시 91:3-6). … 이로부터 또한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확신이 솟아 나온다(시 118:6; 56:4; 27:1; 23:4; 71:14).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1.
하늘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자기 권세로 붙드시고, 그 주권과 지시로 다스리시고 조정하시되,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천사들의 돌봄, 물과 불과 쇠도, 하나님의 주장 아래 두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셔서 우리 성도를 살피시고 그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모든 영역의 사악한 무리들은 하나님의 손이라는 굴레에 제압되므로, 그가 허용하시지 않는 한, 실로 그가 명령하시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에 대한 어떤 음모를 품을 수도 없고, 품었다고 하더라도 준비할 수도 없고, 충분히 계획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마귀와 사악한 무리들은 하나님의 족쇄에 묶여 붙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굴레에 씌어 맡겨진 일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 기억하게 하자. … 이로부터 성도들이 많은 위로를 받게 하자. 왜냐하면 …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육욕에 취해서 방자하게 날뛰지 않도록 그 정도와 한계를(modum finemque) 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 사람들의 조건이 아무리 불안정하고 어떤 변화가 때에 따라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 섭리에 대한 무지가 모든 비참함의 극(極)이며 그것에 대한 지식이 최고의 복이 된다는 것을(extremum esse omnium miseriarum, providentiae ignorationem; summam beatitudinem in eiusdem cognitione esse sitam) 인식하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1.
마귀와 사탄의 악한 무리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데, 하나님은 ‘허용’하시되 정도와 한계를(modum finemque) 정하시고, 끝내 그 일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허용은 사탄의 무제한의 방종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어느 순간에도 권세를 잡지 못합니다. 잠시 권세를 잡은 듯하나 ‘하나님의 뜻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시편 31편 15절의 노래로 하나님께 나가야 됩니다. 이러한 논의 가운데 칼빈은 다음과 같이 결론적인 언급을 합니다. ‘섭리에 대한 무지가 모든 비참함의 극(極)이며, 섭리에 대한 지식이 최고의 복이 된다.’(extremum esse omnium miseriarum, providentiae ignorationem; summam beatitudinem in eiusdem cognitione esse sitam)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섭리에 대한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하여 가장 선하고 달콤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섭리에 대한 무지가 모든 비참함의 극이고, 그것에 대한 지식이 최고의 복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만물보다 사람에게 더한 관심을 가지고, 무엇보다 ‘신자들의 구원’과 ‘교회를 향한 특별한 은혜의 섭리’를 베푸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방식대로 우리의 적들을 물리치십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 아래 우리가 감사하고 인내하고 평온하게 하십니다. 환란과 핍박이 있고, 외부의 궤계가 있고, 사탄의 책략이 있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 한 의롭고 유익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욥을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우리는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요셉을 통하여 이런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이차적 원인으로 악한 영과 무리도 사용하시나, 하나님의 결정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이 ‘허용’하신 일도 그 정도와 한계를 정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40강 이번 강의 결론
섭리에 대한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하여 가장 선하고 달콤한 열매를 얻습니다: 섭리에 대한 무지가 모든 비참함의 극極이며, 그것에 대한 지식이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사람에게 더한 관심을 가지시며 무엇보다 신자들의 구원과 교회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의 적들을 물리치심으로 우리가 그 은혜 아래 감사하고 인내하며 평온에 거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 한, 의롭고 유익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차적 원인으로 악한 영과 무리도 사용하시나 하나님의 결정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허용하신 일도 그 정도와 한계가 정해집니다.
40강 | 1.17.6-11. (1권 475-486페이지)
사람은 섭리의 도구로서 사용되며
섭리의 위로를 받음
그러나 이러한 모함들은 미친 사람들의 정신착란에 다를 바 없는데 섭리에 대한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하여(pia sanctaque providentiae meditatio) 쉽게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묵상은 경건의 규범을 지시해 줌으로써 가장 선하고 가장 달콤한 열매가 우리에게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일어난다는 사실과 어떤 것도 계획 없이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없이 확실한 감화를 받게 되므로, … 그 마음은 하나님의 고유한 섭리가(singularem Dei providentiam) 자기를 지켜 주고 선과 구원으로 향하게 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6.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주관하시고, 만물 가운데 자기의 섭리를 드러내십니다. 그 섭리가 우리의 삶의 ‘위로’요, 그 섭리가 우리의 ‘믿음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것이 가장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pia sanctaque providentiae meditatio)을 끊임없이 해야 할 것입니다. 만물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할 것이요, 우리의 삶을 통하여서도, 내가 받은 은혜와 예배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보았듯이, 만물에 ‘법’을 새겨주신 하나님의 섭리, 이것보다 더 큰 섭리는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주[신 것인데], 그 ‘규범’을 가지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그래서 가장 선하고 가장 달콤한 ‘열매’에 우리가 이르도록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일어난다는 사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계획 없이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성령의 깊은 감화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든 사물들의 그저 주요한 원인(praecipuam rerum causam), 그리고 어떤 하부(下部) 원인들이(causas … inferiores), 이차적 원인들이 개입해서 무슨 일을 이루는 그러한 상대적인 주권, 이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요, 만물을 운행하시고 만물의 끝을 주장하시는 ‘시작’과 ‘끝’이요, ‘처음’이요 ‘나중’이 되시는 분입니다(참조. 롬 11:36; 계 1:7; 2:8; 21:6; 22:13).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사랑을 우리가 고백할 때,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돌보심’, 그것이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에 미치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큰 은혜의 섭리’를 베푸신다는 것,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새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섭리가(singularem Dei providentiam) 신자들의 구원을 돌본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더없이 분명한 수많은 약속들이 있다(참조. 시 55:22; 벧전 5:7; 시 91:1; 슥 2:8; 창 15:1; 렘 1:18; 15:20; 사 49:25; 사 49:15). … 성경 역사서들의 핵심 목표는 여호와가 성도들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그 큰 열심으로 성도들의 길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참조. 시 91:12). … 그러므로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치가 있다. …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인류와, 하나님이 처소로 택하시고 다스리심에 있어서 자기의 부성적 사랑의 고유한 증거들을 의심할 바 없이 보여 주시는 교회에 모두 관계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6.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가 피조물을 향한 보존과 운행과 통치(우주적 차원), 사람들을 향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개인 구원적 차원), 교회를 향한 인도와 다스림(교회 구원적 차원)에 모두 미침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6. 각주 594.
하나님의 중요한 섭리는 ‘신자들의 구원’을 돌보시는 데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하나님은)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견인(牽引, 堅忍)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가 우리를 돌보심이라”’(적용. 벧전 5: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시 91:1).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고 눈동자같이 우리를 보호하심으로(신 32:10; 시 17:8; 슥 2:8), 우리가 그 하나님의 법을 범하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요, 사람들이 우리를 범하게 되면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편과 선지자들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 ‘방패’요(창 15:1), ‘놋성벽’이요(렘 1:18; 15:20),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사 49:25). ‘산모가 젖먹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혹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사 49:15). 여호와 하나님은 그 백성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성도들의 걸음을 보호할 것이다(시 91:12). 이런 모든 성경의 말씀들이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라도 그저 떨어지지 아니하고, 머리카락이라도 세신 바 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더 귀하게, 세밀하게 보호하시겠습니까(마 10:29-31; 눅 12:6-7)? 이러한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은 우리 ‘개인’에게 미칠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미칩니다. 이것을 우리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이렇게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는 역경이 많은 듯하지만, 그 교회를 통하여 순교자가 많이 나는, 그러한 하나님 안에 큰 복을 누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있다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들을 어느 교회에 두심으로 하나님은 특별히 일을 이루시는 이러한 모습들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여호와는 우리 적들의 사악함을 쳐부수는 다양한 방식을 알고 계셨다(참조. 왕상 22:22; 12:10, 15; 삼하 17:7, 14). … 이렇듯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각각의 고유한 선과 안전에 이르도록 다스림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듯이, 그의 허용과 명령 없이는(sine permissu eius ac mandato) 마귀도 감히 스스로 욥을 괴롭히려 들 수 없게 된다(욥 1:12). 이와 같은 지식에 필히 뒤따라오는 것은, 일들이 번창하는 성공에 대한 마음의 감사, 역경에 맞서는 인내, 미래에 미치는 믿기지 않는 평온이다(Hanc notitiam necessario sequitur tum animi gratitudo in prospero rerum successu, tum in adversitate patientia, tum etiam in posterum incredibilis securitas).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 마음의 바람대로 번창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심중에, “저들의 마음을 나에게 기울이게 하시고 저들을 나에게 굳게 묶어 두심으로써 저들이 나를 향한 자기의 선하심의 도구들이 되게 하신 분은 분명 여호와이시다.”라고 깊이 헤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토록 많은 증거들을 통하여 권고를 받게 되므로, 그는 결코 배은망덕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7.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사용하시되, 그저 두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자들을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사용하시는지 그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아합을 속이도록 하기 위하여 선지자의 입을 거짓으로 채울 사탄을 보내는, 아합을 폐하시려고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사탄을 보내셨다(왕상 22:22).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이어서, 그 마음에 아주 강퍅한 것을 하나님이 넣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전갈을 자기가 주겠다 하면서,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왕상 12:10-15).
다윗에게 가장 뛰어난 지략가였던 아히도벨, 그의 계획은 분명히 옳았지만, 하나님은 아히도벨을 오히려 폐했습니다. 우리 인생으로 보면 후새의 계획이 훨씬 못한 계획이지만, 하나님은 후새의 계획에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삼하 17:7, 14). 이런 모든 것은 우리가 가닿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판단하지만, 바로 하나님은 대적조차도 사용하시는 그 최상의 섭리의 방식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욥을 괴롭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참조. 욥 1: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지식’은 우리가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그리고 역경에 맞서서 ‘인내’하는 것, 그리고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하여 ‘평온’을 느끼는 것, 이런 것은 다 섭리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이와 다를 바 없이 만약 어려운 일이 발발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종은 있는 곳에서 마음을 들어 올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앙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마음에 인내와 평온한 마음의 절제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각인시켜 주기 때문이다(Si adversi quid contigerit, extemplo mentem hic quoque extollet in Deum, cuius manus ad patientiam placidamque animi moderationem nobis imprimendam valet plurimum). 만약 요셉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의 형제들의 배신에만 침잠했더라면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들에 대한 형제애를 결코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돌려 여호와를 향하게 되자, 그들의 불의를 잊은 채, 온유와 관용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다음과 같이 위로하기에 이르렀다. “나를 애굽으로 판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기의 뜻 가운데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적용. 창 45:5, 7-8).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8.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대할 때, 우리의 마음을 들어올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앙망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상에 마음을 두지 말고, 세속적인데 마음을 두지 말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앙망하고, 신령한 것을 바라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마음에 인내와 평온한 마음의 절제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각인시켜줍니다. 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섭리’가 있을 때 우리 마음이 ‘평온’을 얻습니다.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가 참고 ‘절제’하게 됩니다.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가 ‘소망’하게 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나를 애굽으로 판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기의 뜻 가운데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적용. 창 45:5, 7-8). 아마 요셉이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요셉은 가장 즐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이렇게 또한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욥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여러 고난을 겪었지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는 이 욥의 신앙은 계속 유지되는 신앙입니다. 그 신앙 가운데 욥은 끝내 은밀한,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에 대해서 더 ‘찬미’하며 나아가는 그것이 욥기의 주제인 것입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을 때,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 저주에도, 그 시므이의 악한 저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9).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고난을 당하나 애매한, 가장 어려울 때 저주하는 자의 입에 대해서 다윗이 함께 저주할 수 있지만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섭리다’ 하고 다윗이 입을 잠잠히 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원하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걸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자들은 이러한 ‘인내’가 생기는 것입니다.
분노와 조급함에 대해 이보다 더 효과적인 처방이 없을진대, 그것들을 유발하는 영역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이 적잖은 열매를 맺을 것이며, 그것은 항상 다음과 같은 점을 마음에 상기시킬 것이다. “여호와가 그것을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것을 참아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다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가 원하시는 것은 의롭고 유익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우리가 부당하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그들의 사악함을 간과하도록 하자. 그것에 대한 보복은 상처를 악화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날카롭게 할 뿐이므로, 잊지 말고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우리에게 중한 죄를 범하는 적(敵)은 하나님의 의로운 경륜에 의해 허용되었으며 보내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8.
우리가 부당하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바라보는 데 마음 쏟지 말고, 그렇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상처만 바라보면 악화되고 우리 마음만 날카로워집니다. ‘잊지 말고 하나님께로 올라가라. 우리의 마음을 들어올리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바라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씨름이 아니라, 영적인 마귀에 대한 씨름이다(엡 6:11-12).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헤아릴 때, 또 모든 것을 조정하는, 악하게 지배하는 악한 영을 또한 우리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기뻐하고, 당장 일어난 일로 슬퍼하고, 이렇게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비밀의 섭리’, 그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 섭리’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이사야 45장 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부 원인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 그는 자기가 받은 선한 것들로 인하여 여호와를 그 주요한 조성자로 경배하며 찬양할 것이며 사람들을 그의 일꾼들로 존경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손으로 사용하고자 원하신 사람들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Deum in acceptis bonis reverebitur et praedicabit, ut praecipuum autorem; sed homines ut eius ministros honorabit, atque, ut res est, intelliget se Dei voluntate iis esse devinctum per quorum manum beneficus esse voluerit). … 자기에게 무엇이든 유익을 끼치는 모든 피조물을 여호와가 자기의 손에 부여해 주신다고 여기고, 그것들을 신적 섭리를 이루는 합법적인 도구들로(legitima divinae providentiae instrumenta) 사용할 것이다. … 동일한 지식이 우리가 무모함과 그릇된 과신을 벗어 버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에 서도록 몰아갈 것이다. …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선한 소망으로 가득 채워서 우리가 평온하면서도 담대하게 우리를 둘러싼 위험들을 주저함 없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9.
이러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부 원인’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되 다른 것들을 사용하시고, 사물도 사용하시고, 사람도 사용하시고,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용하시고, 간혹은 대적들도 사용하시고, 악한 영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받은 선한 것들로 인하여 여호와를 경배하고 찬양하고 그러한 일들을 감당하는 일꾼들로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손으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그의 일을 행함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찬미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는 쉬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되 우리를 사용하시는 그 은혜를 베푸셔서, 포도원에서 함께 거하게 하시고(참조. 마 20:1), 함께 상에서 음식을 들게 하시고 우리에게 상을 베풀어 주시고(시 23:5, 참조. 마 9:9-13; 계 3:20; 마 26:26-28), 그리고 함께 일을 이룸으로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을 찬미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모든 것을 행하실 때 친히 자기 ‘손’으로 행하십니다. 그 여호와가 자기 손으로 행하시되,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해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면서 ‘보호’해 주시고, 그 가운데 우리가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상급’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저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자기에게 비치자마자 이전에 자기를 극단적으로 누르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로부터뿐만 아니라 모든 염려로부터 위로를 받고 해방된다. 왜냐하면 의당 그는 운명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만큼, 거리낌 없이 감히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위로가 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자기의 권세로 붙드시고, 자기의 주권과 지시로 다스리시며, 자기의 지혜로 조정하시므로,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Hoc, inquam, solatium est, ut intelligat patrem coelestem sic omnia sua potentia continere, sic imperio nutuque suo regere, sic sapientia moderari). 나아가 자기가 받아들여져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천사들의 돌봄에 위탁되었으며, 물도 불도 쇠도 그것들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좋아하셔서 기회를 주지 아니하시면 자기를 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도 그에게 위로가 된다(참조. 시 91:3-6). … 이로부터 또한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확신이 솟아 나온다(시 118:6; 56:4; 27:1; 23:4; 71:14).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1.
하늘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자기 권세로 붙드시고, 그 주권과 지시로 다스리시고 조정하시되,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천사들의 돌봄, 물과 불과 쇠도, 하나님의 주장 아래 두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셔서 우리 성도를 살피시고 그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모든 영역의 사악한 무리들은 하나님의 손이라는 굴레에 제압되므로, 그가 허용하시지 않는 한, 실로 그가 명령하시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에 대한 어떤 음모를 품을 수도 없고, 품었다고 하더라도 준비할 수도 없고, 충분히 계획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마귀와 사악한 무리들은 하나님의 족쇄에 묶여 붙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굴레에 씌어 맡겨진 일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 기억하게 하자. … 이로부터 성도들이 많은 위로를 받게 하자. 왜냐하면 …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육욕에 취해서 방자하게 날뛰지 않도록 그 정도와 한계를(modum finemque) 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 사람들의 조건이 아무리 불안정하고 어떤 변화가 때에 따라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 섭리에 대한 무지가 모든 비참함의 극(極)이며 그것에 대한 지식이 최고의 복이 된다는 것을(extremum esse omnium miseriarum, providentiae ignorationem; summam beatitudinem in eiusdem cognitione esse sitam) 인식하게 될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7.11.
마귀와 사탄의 악한 무리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데, 하나님은 ‘허용’하시되 정도와 한계를(modum finemque) 정하시고, 끝내 그 일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허용은 사탄의 무제한의 방종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어느 순간에도 권세를 잡지 못합니다. 잠시 권세를 잡은 듯하나 ‘하나님의 뜻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시편 31편 15절의 노래로 하나님께 나가야 됩니다. 이러한 논의 가운데 칼빈은 다음과 같이 결론적인 언급을 합니다. ‘섭리에 대한 무지가 모든 비참함의 극(極)이며, 섭리에 대한 지식이 최고의 복이 된다.’(extremum esse omnium miseriarum, providentiae ignorationem; summam beatitudinem in eiusdem cognitione esse sitam)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섭리에 대한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하여 가장 선하고 달콤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섭리에 대한 무지가 모든 비참함의 극이고, 그것에 대한 지식이 최고의 복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만물보다 사람에게 더한 관심을 가지고, 무엇보다 ‘신자들의 구원’과 ‘교회를 향한 특별한 은혜의 섭리’를 베푸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방식대로 우리의 적들을 물리치십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 아래 우리가 감사하고 인내하고 평온하게 하십니다. 환란과 핍박이 있고, 외부의 궤계가 있고, 사탄의 책략이 있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 한 의롭고 유익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욥을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우리는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요셉을 통하여 이런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이차적 원인으로 악한 영과 무리도 사용하시나, 하나님의 결정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이 ‘허용’하신 일도 그 정도와 한계를 정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40강 이번 강의 결론
섭리에 대한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하여 가장 선하고 달콤한 열매를 얻습니다: 섭리에 대한 무지가 모든 비참함의 극極이며, 그것에 대한 지식이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사람에게 더한 관심을 가지시며 무엇보다 신자들의 구원과 교회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의 적들을 물리치심으로 우리가 그 은혜 아래 감사하고 인내하며 평온에 거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 한, 의롭고 유익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차적 원인으로 악한 영과 무리도 사용하시나 하나님의 결정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허용하신 일도 그 정도와 한계가 정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