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3권 1장은 성령론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4절로 이루어졌는데요. 혹자는 칼빈이 성령론을 너무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일찍이 개혁신학자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가 이야기했듯이,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다’[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개혁신학의 두 바퀴를 말씀과 성령이라고 하거든요. 말씀 있는 곳에 성령이 있고, 성령이 있는 곳에 말씀 있다[고 합니다]. 이미 『기독교 강요』 1권 13장에서 성령의 신위격, 신격에 대해서는 우리가 논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말씀에는 성령의 영감, 조명, 감화 그리고 이제 앞으로 우리가 볼 모든 구원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칼빈이야말로 성령의 신학자다, 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이] 성령론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새겨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강요』, 3.1.1.]
그는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와 교통하시기 위해서 우리 것이 되시고 우리 안에 거해야 하셨다(nobiscum quae a patre accepit communicet, nostrum fieri et in nobis habitare oport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1.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 당하신 것, [즉] 모든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전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교통하게 하시려고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제3권은 보혜사 성령의 역사에 따른 성도의 구원 서정(救援序程, ordo salutis, order of salvation)을 다루는바, 그 서장에서 먼저 보혜사 성령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를 전가해 주시는 영이시며, 그 영을 받은 성도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사실이 부각됩니다.…중보자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을 주시고자 ‘자기 자신’을 아버지께 드려(막 10:45; 엡 5:2; 갈 1:4; 딤전 2:6; 딛 2:14; 히 9:26, 28; 10:12-14; 롬 8:32)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시고(요 19:30)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 의를 전가해 주십니다(요 15:25; 16:7; 행 2:33). 이러한 보혜사 성령의 임재에 따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轉嫁, imputatio, imputation)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주셔서 성도와 함께 사시고 성도와 하나가 되시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 union with Christ)의 방식입니다(갈 2:20; 히 2:11; 요 17:21).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1, 각주 5.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caput nostrum)시요(엡 4:15), 그리고 우리의 맏형이시요(롬 8:29), 우리가 그의 의로 옷을 입었다(갈 3:27), 이게 구원받은 성도의 은혜 아닙니까. 이게 법정성이거든요. 하늘 법정에서 예수님의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고 그의 의를 옷 입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의를 우리의 머리로 삼아 주시고 우리가 그의 지체 되므로, 한 몸이 되므로 연합하거든요. 이런 것이 곧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것을 고차적으로, 높게 누리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므로,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래서 그 자신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롬 8:32) 그 은혜를 고상하고 선하게 즐겁게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은밀한 작용”(efficacia arcana)을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6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물과 피로 임하시는데, 성령이 함께 나옵니다. 이 성령이 바로 뭐냐, ‘이것을 증언한다(testificari)’라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물과 피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시는 그 역사, 그 은혜이기 때문에 물과 피와 성령으로 증언이 된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먼저는 누립니다. 그 누림이 곧 순종으로 연결이 됩니다. 우리가 향이 임하면 향기를 내잖아요. 빛이 임하면 빛을 비추잖아요. 향기를 내는 것과 빛을 비추는 게 [우리의] 순종입니다. 이것은 뭐예요? [우리가] 누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빛이 거울에 딱 비치면 자동 반사예요.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누림과 함께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순종에 뭐가 따릅니까? 상급이 따릅니다. 그러니 빛이 비추는 것도, 반사하는 것도, 다 불가향력적인 은혜거든요. 그러니까 ‘순종도 또 상급도 은혜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재미있는 표현을 여기에서 쓰는데요. “성령의 은밀한 물 댐”(arcana spiritus irrigatio)과 같이. 농부가 밭에, 논에 물을 대잖아요. 은밀히 우리에게 물 댐과 같이 씻어 주시고 의롭게 하신다, 이 말입니다. 씻어 준다는 것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고, 의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묶는 고리는 성령이시다(spiritum sanctum vinculum esse, quo nos sibi efficaciter devincit Christ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1.
그리하여 칼빈은 성령론에서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이 바로 뭐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spiritus Christi)이다, 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고, 그 예수의 의는 자신을 주신 의이기 때문에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면,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고, 곧 우리가 예수와 연합[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묶는 고리는 성령이시다’라고 아주 멋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성령이 그리스도를 우리와 효과적으로 묶는 고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2.]
성령은 먼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어두움을 몰아내야 빛이 올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성령은] “성결의 영”(spiritus sanctificationis)입니다(롬 1:4; 참조. 살후 2:13; 벧전 1:2). 그런데 다시 질문하면, 빛이 들어오지 않고야 어떻게 어둠이 또 나가겠습니까? 그래서 성결의 영은 항상 의롭게 하는 자유의 영이거든요.
그래서 하늘 생명의 뿌리와 씨앗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늘 생명이 들어와서 이 성령이 임하면, 우리 안의 옥토에 씨가 뿌려지듯이, 우리 안에 뿌려져서 그 씨앗(semen)이 자라듯이, [우리 안에 하늘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더욱 충만한 이 임재, 이 충만한 임재가 뭐예요? 바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셔서 우리에게 들어와 사시는, 그의 의를 다 우리 것 삼아 주시는, 신약 시대의 성령의 임재거든요. 그래서 요엘서 2장 28절에 ‘그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하는 이 말씀은 신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다 이루시고 이제 보좌 우편에서 [성령을] 내려 주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베드로가 설교하면서 인용했던 구절이지 않습니까(행 2:17). 그래서 온전한 성령의 임재가 이 신약 시대 때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을 부여하신다(Deus pater propter filium suum spiritu sancto nos don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이는 성령이 ‘아버지 그리고 아들로부터’(a Patre et Filio) 나오신다는 필리오케(Filioque) 교리를 제시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각주 11.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삼위일체에서 보았듯이,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규정입니다. 성령은 영이시고, 아버지도 영이시고, 아들도 영이시니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그래서 그 성령이 이제 우리에게 임하면 신약 시대 보혜사 성령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인 것은 또 다른 보혜사를 내려 주기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 때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없어요. 왜요? 신약 시대 성령은 모두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영으로 우리가 죽고, 그 영으로 산다, [즉]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린다[라고]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롬 8:11). 내가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고 죽음에도 참여하고 부활에도 참여하고,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뭐예요? 신약 시대 백성에게 임한 보혜사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여기에서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린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이후에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또 이후에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신약 시대 보혜사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개념[이] (로마서 8장 9절, 빌립보서 1장 19절 이런 말씀에서 나오는데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그 동일하신 성령 가운데 아버지와 결합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인격 때문이라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sciendum est spiritum Christi dici, non modo quatenus aeternus sermo Dei est eodem spiritu cum patre coniunctus, sed secundum mediatoris quoque person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이와 같이 보혜사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칭함을 받으심은 성령이 성자로부터 영원히 출래하신다는 사실(필리오케)과 성령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의를 전가해 주신다는 사실(구원 역사) 모두를 지시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각주 14.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서 그 동일하신 성령 가운데 아버지와 결합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성령의 본질적인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의 영, 성자의 영,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는 것은 첫째로는 말씀의 영, 성자의 영이라는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인격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되셔서 중보자로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신 그 구원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시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의 영, 혹은 성자의 영, 그리고 중보자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린다라고 이렇게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은 “살려 주는 영”(spiritus vivificans)이다[라고 말합니다]. 첫 사람은 산 영이지만 “둘째 아담”(Adam secundus)은 살려 주는 영이다[라고 말씀합니다](고전 15:45). 바로 우리를 살려 주는 그 성령의 역사가 이 땅에 있게 되었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를 살려 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려 주는 것, 성령의 임재, 그 역사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부성적 사랑과 그리스도의 자애를 한 입도 맛볼 수 없게 될 것이[다](sine qua[communicatione spiritus] nec paternum Dei favorem, nec Christi beneficentiam quisquam gustab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는 칭의와 성화를 포함하는 성도의 구원 전 과정에 미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각주 16.
그래서 아들의 은혜(gratia)와 아버지의 사랑(caritas)이 성령의 역사로[써], “성령의 교통하심”(communicatio spiritus)으로[써]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이 없다면, 아버지의 부성적 사랑과 그리스도의 자애를 우리가 한 입도 맛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축복기도 하듯이,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이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의 전가[가 있습니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 그런데 이 의는 아버지의 사랑에 따른 아들의 의[입니다]. 그래서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의, 이 의가 은혜니까 성자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어떻게 교통하느냐, 성령의 임재로 교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우리가 받은 영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다, 이렇게 칼빈은 여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3.]
그리고 칼빈은 성령의 칭호에 대해서, 보혜사 성령의 칭호에 대해서, 이곳에서 또 8가지 정도로 특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꽤 논하는데요, 성령의 이름을 이렇게 정리하는 곳은 많지 않은데, 간단하게 우리가 본다면, 첫째로는 양자의 영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영, “양자의 영”(spiritus adoptionis)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우리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인”(arrhabo et sigillum nostrae haereditatis)이다, 이것은 성령의 인 침을 뜻합니다. 성령의 임함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아들을 알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그러니까 보증이며 인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성령은 “생명”(vita)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생명의 임했다, 그런데 이 생명이 곧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래서 의로 말미암은 생명이 바로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성령은] “물”(aqua)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은밀한 물 댐[입니다]. 바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여기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1). 그리고 ‘마른 시내가 물이 흐르게 하겠다’(사 44:3) 그리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먹어라(요 7:37).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물이 성령이[라고 합니다]. 참 은혜롭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로 예언된 말씀, 주님이 하신 말씀[에 따르면], 그 물 댐,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성령의 이름은 “기름”(oleum), 혹은 기름부음(unctio)이[라고 합니다](요일 2:20, 27). 우리가 기름이다, 이러면 금방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 바로 그리스도를 떠올리지 않습니까, 메시아를 떠올리지 않습니까? 기름부음 받은 자, 이러면 선지자, 제사장, 왕 직분을 뜻하지 않습니까?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름부음 받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1차적으로는 직분과 연결시켜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생각할 것은 바로 그[것]에 걸맞은 권세와 신분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름과 기름부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성령은 “불”(ignis)이라고 이렇게 말합니다(눅 3:16). 그러니까 불과 같이, ‘불의 혀와 같이 임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는 성령은 “샘”(fons)이라고 또 말합니다(요 4:14). 갈하지 않는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는 “하나님의 손”(manus Dei)이[라고 말합니]다(행 11:21). ‘손’이라는 말은 칼빈은 섭리를 뜻할 때 사용하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일하는, 살며 기동하며 있는 그 하나님의 손이다, 이렇게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께 몰두되기 전까지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쉬고 계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를 우리 바깥에 계신 분으로, 참으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냉랭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donec intentae sint in spiritum mentes nostrae, Christum iacere quodammodo otiosum: quia frigide eum extra nos, adeoque procul a nobis speculam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3.
그래서 우리가 이 성령에 ‘아멘’ 하고 성령을 구하고 성령 안에 우리가 살지 않는 이상, 그리스도는 어떤 면에서는 쉬고 계신 분이다, 이렇게 칼빈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아우르시고 동시에 우리가 그를 소유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의 은혜와 능력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이다(solo autem spiritu unit se nobiscum. Eiusdem spiritus gratia et virtute efficimur illius membra, ut nos sub se contineat, vicissimque illum possidea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3.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의 맏형이 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 Unio cum Christo Mystica),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이때 ‘신비한’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의의 전가에 따른 법정적인 연합,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1.4.]
그리고 이제 이 1장 4절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2장에서 길게 다루고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서 먼저 왜 믿음을 이야기했을까요? 바로 그만큼 믿음을 전체 구원의 서론과 같이 칼빈은 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에게 믿음이 선물로 주어져서, 믿음 가운데 중생도, 회심도, 칭의도, 성화도, 자녀 삼으심도 그리스도의 삶도, 다 믿음 가운데, 그래서 믿음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진정 성령의 주요한 작품이다(Verum quia fides praecipuum est eius opus). 일반적으로 성령의 힘과 작용이 무엇인지를 일컫는 여러 표현들은 주로 믿음과 관련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4.
그래서 ‘믿음은 진정 성령의 주요한 작품이다,’ 이렇게 칼빈은 아주 선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약속으로 인 친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니까 자녀 삼아 주시고 믿음이 주어진다, 그래서 믿음 자체가 성령에서 나온 것이다, 믿어서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니까 우리가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제1요소는 (이제 우리가 다음에 보겠지만,) 지식인데, 그 지식이 믿음과 함께 실려 오기 때문에 성령은 믿음을 주시고,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이렇게 또한 불리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적 선생”(interior magister)은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우리의 유일하신 선생님이십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우리의 유일하신 선생님이심, 선생 되심,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합니까? 어떻게 하여 우리가 예수를 선생으로, 진정한 유일한 선생, 세상에 그 많은 랍비가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랍비로, 선생으로 우리가 받아들입니까? 그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 예수께로 이끈다는 것입니다(요 6:44; 12:32; 17:6).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예수를 구주 삼고, 예수를 스승 삼고,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우리가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령은 우리의 머리이자 맏형이신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되어 그의 모든 것을 누리게 합니다.
둘째, 성령의 은밀한 물 댐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묶는 고리가 성령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셋째,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심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성령은 양자의 영, 보증과 인, 생명, 물, 기름과 기름부음, 불, 샘, 손으로 칭하여 지시는데, 이는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일하게 하심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 믿음은 성령의 주요한 작품으로서, 택한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95강 결론
성령은 우리의 머리이자 맏형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십니다.
은밀한 물댐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묶는 고리가 성령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심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실뿐만 아니라 구원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양자의 영, 보증과 인, 생명, 물, 기름과 기름 부음, 불, 샘, 손으로 칭하시니,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95강 | 3.1.1-4. (3권 29-38페이지)
성령의 은밀한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적용되어 그와 연합
『기독교 강요』 3권 1장은 성령론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4절로 이루어졌는데요. 혹자는 칼빈이 성령론을 너무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일찍이 개혁신학자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가 이야기했듯이,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다’[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개혁신학의 두 바퀴를 말씀과 성령이라고 하거든요. 말씀 있는 곳에 성령이 있고, 성령이 있는 곳에 말씀 있다[고 합니다]. 이미 『기독교 강요』 1권 13장에서 성령의 신위격, 신격에 대해서는 우리가 논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말씀에는 성령의 영감, 조명, 감화 그리고 이제 앞으로 우리가 볼 모든 구원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칼빈이야말로 성령의 신학자다, 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이] 성령론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새겨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강요』, 3.1.1.]
그는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와 교통하시기 위해서 우리 것이 되시고 우리 안에 거해야 하셨다(nobiscum quae a patre accepit communicet, nostrum fieri et in nobis habitare oport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1.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 당하신 것, [즉] 모든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전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교통하게 하시려고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제3권은 보혜사 성령의 역사에 따른 성도의 구원 서정(救援序程, ordo salutis, order of salvation)을 다루는바, 그 서장에서 먼저 보혜사 성령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를 전가해 주시는 영이시며, 그 영을 받은 성도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사실이 부각됩니다.…중보자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을 주시고자 ‘자기 자신’을 아버지께 드려(막 10:45; 엡 5:2; 갈 1:4; 딤전 2:6; 딛 2:14; 히 9:26, 28; 10:12-14; 롬 8:32)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시고(요 19:30)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 의를 전가해 주십니다(요 15:25; 16:7; 행 2:33). 이러한 보혜사 성령의 임재에 따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轉嫁, imputatio, imputation)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주셔서 성도와 함께 사시고 성도와 하나가 되시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 union with Christ)의 방식입니다(갈 2:20; 히 2:11; 요 17:21).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1, 각주 5.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caput nostrum)시요(엡 4:15), 그리고 우리의 맏형이시요(롬 8:29), 우리가 그의 의로 옷을 입었다(갈 3:27), 이게 구원받은 성도의 은혜 아닙니까. 이게 법정성이거든요. 하늘 법정에서 예수님의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고 그의 의를 옷 입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의를 우리의 머리로 삼아 주시고 우리가 그의 지체 되므로, 한 몸이 되므로 연합하거든요. 이런 것이 곧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것을 고차적으로, 높게 누리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므로,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래서 그 자신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롬 8:32) 그 은혜를 고상하고 선하게 즐겁게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은밀한 작용”(efficacia arcana)을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6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물과 피로 임하시는데, 성령이 함께 나옵니다. 이 성령이 바로 뭐냐, ‘이것을 증언한다(testificari)’라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물과 피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시는 그 역사, 그 은혜이기 때문에 물과 피와 성령으로 증언이 된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먼저는 누립니다. 그 누림이 곧 순종으로 연결이 됩니다. 우리가 향이 임하면 향기를 내잖아요. 빛이 임하면 빛을 비추잖아요. 향기를 내는 것과 빛을 비추는 게 [우리의] 순종입니다. 이것은 뭐예요? [우리가] 누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빛이 거울에 딱 비치면 자동 반사예요.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누림과 함께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순종에 뭐가 따릅니까? 상급이 따릅니다. 그러니 빛이 비추는 것도, 반사하는 것도, 다 불가향력적인 은혜거든요. 그러니까 ‘순종도 또 상급도 은혜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재미있는 표현을 여기에서 쓰는데요. “성령의 은밀한 물 댐”(arcana spiritus irrigatio)과 같이. 농부가 밭에, 논에 물을 대잖아요. 은밀히 우리에게 물 댐과 같이 씻어 주시고 의롭게 하신다, 이 말입니다. 씻어 준다는 것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고, 의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묶는 고리는 성령이시다(spiritum sanctum vinculum esse, quo nos sibi efficaciter devincit Christ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1.
그리하여 칼빈은 성령론에서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이 바로 뭐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spiritus Christi)이다, 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고, 그 예수의 의는 자신을 주신 의이기 때문에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면,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고, 곧 우리가 예수와 연합[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묶는 고리는 성령이시다’라고 아주 멋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성령이 그리스도를 우리와 효과적으로 묶는 고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2.]
성령은 먼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어두움을 몰아내야 빛이 올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성령은] “성결의 영”(spiritus sanctificationis)입니다(롬 1:4; 참조. 살후 2:13; 벧전 1:2). 그런데 다시 질문하면, 빛이 들어오지 않고야 어떻게 어둠이 또 나가겠습니까? 그래서 성결의 영은 항상 의롭게 하는 자유의 영이거든요.
그래서 하늘 생명의 뿌리와 씨앗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늘 생명이 들어와서 이 성령이 임하면, 우리 안의 옥토에 씨가 뿌려지듯이, 우리 안에 뿌려져서 그 씨앗(semen)이 자라듯이, [우리 안에 하늘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더욱 충만한 이 임재, 이 충만한 임재가 뭐예요? 바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셔서 우리에게 들어와 사시는, 그의 의를 다 우리 것 삼아 주시는, 신약 시대의 성령의 임재거든요. 그래서 요엘서 2장 28절에 ‘그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하는 이 말씀은 신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다 이루시고 이제 보좌 우편에서 [성령을] 내려 주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베드로가 설교하면서 인용했던 구절이지 않습니까(행 2:17). 그래서 온전한 성령의 임재가 이 신약 시대 때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을 부여하신다(Deus pater propter filium suum spiritu sancto nos don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이는 성령이 ‘아버지 그리고 아들로부터’(a Patre et Filio) 나오신다는 필리오케(Filioque) 교리를 제시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각주 11.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삼위일체에서 보았듯이,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규정입니다. 성령은 영이시고, 아버지도 영이시고, 아들도 영이시니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그래서 그 성령이 이제 우리에게 임하면 신약 시대 보혜사 성령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인 것은 또 다른 보혜사를 내려 주기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 때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없어요. 왜요? 신약 시대 성령은 모두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영으로 우리가 죽고, 그 영으로 산다, [즉]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린다[라고]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롬 8:11). 내가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고 죽음에도 참여하고 부활에도 참여하고,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뭐예요? 신약 시대 백성에게 임한 보혜사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여기에서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린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이후에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또 이후에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신약 시대 보혜사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개념[이] (로마서 8장 9절, 빌립보서 1장 19절 이런 말씀에서 나오는데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그 동일하신 성령 가운데 아버지와 결합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인격 때문이라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sciendum est spiritum Christi dici, non modo quatenus aeternus sermo Dei est eodem spiritu cum patre coniunctus, sed secundum mediatoris quoque persona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이와 같이 보혜사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칭함을 받으심은 성령이 성자로부터 영원히 출래하신다는 사실(필리오케)과 성령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의를 전가해 주신다는 사실(구원 역사) 모두를 지시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각주 14.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서 그 동일하신 성령 가운데 아버지와 결합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성령의 본질적인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의 영, 성자의 영,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는 것은 첫째로는 말씀의 영, 성자의 영이라는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인격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되셔서 중보자로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신 그 구원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시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의 영, 혹은 성자의 영, 그리고 중보자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린다라고 이렇게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은 “살려 주는 영”(spiritus vivificans)이다[라고 말합니다]. 첫 사람은 산 영이지만 “둘째 아담”(Adam secundus)은 살려 주는 영이다[라고 말씀합니다](고전 15:45). 바로 우리를 살려 주는 그 성령의 역사가 이 땅에 있게 되었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를 살려 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려 주는 것, 성령의 임재, 그 역사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부성적 사랑과 그리스도의 자애를 한 입도 맛볼 수 없게 될 것이[다](sine qua[communicatione spiritus] nec paternum Dei favorem, nec Christi beneficentiam quisquam gustabi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는 칭의와 성화를 포함하는 성도의 구원 전 과정에 미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2, 각주 16.
그래서 아들의 은혜(gratia)와 아버지의 사랑(caritas)이 성령의 역사로[써], “성령의 교통하심”(communicatio spiritus)으로[써]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이 없다면, 아버지의 부성적 사랑과 그리스도의 자애를 우리가 한 입도 맛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축복기도 하듯이,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이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의 전가[가 있습니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 그런데 이 의는 아버지의 사랑에 따른 아들의 의[입니다]. 그래서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의, 이 의가 은혜니까 성자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어떻게 교통하느냐, 성령의 임재로 교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우리가 받은 영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다, 이렇게 칼빈은 여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1.3.]
그리고 칼빈은 성령의 칭호에 대해서, 보혜사 성령의 칭호에 대해서, 이곳에서 또 8가지 정도로 특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꽤 논하는데요, 성령의 이름을 이렇게 정리하는 곳은 많지 않은데, 간단하게 우리가 본다면, 첫째로는 양자의 영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영, “양자의 영”(spiritus adoptionis)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우리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인”(arrhabo et sigillum nostrae haereditatis)이다, 이것은 성령의 인 침을 뜻합니다. 성령의 임함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아들을 알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그러니까 보증이며 인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성령은 “생명”(vita)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생명의 임했다, 그런데 이 생명이 곧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래서 의로 말미암은 생명이 바로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성령은] “물”(aqua)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은밀한 물 댐[입니다]. 바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여기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1). 그리고 ‘마른 시내가 물이 흐르게 하겠다’(사 44:3) 그리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먹어라(요 7:37).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물이 성령이[라고 합니다]. 참 은혜롭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로 예언된 말씀, 주님이 하신 말씀[에 따르면], 그 물 댐,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성령의 이름은 “기름”(oleum), 혹은 기름부음(unctio)이[라고 합니다](요일 2:20, 27). 우리가 기름이다, 이러면 금방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 바로 그리스도를 떠올리지 않습니까, 메시아를 떠올리지 않습니까? 기름부음 받은 자, 이러면 선지자, 제사장, 왕 직분을 뜻하지 않습니까?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름부음 받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1차적으로는 직분과 연결시켜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생각할 것은 바로 그[것]에 걸맞은 권세와 신분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름과 기름부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성령은 “불”(ignis)이라고 이렇게 말합니다(눅 3:16). 그러니까 불과 같이, ‘불의 혀와 같이 임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는 성령은 “샘”(fons)이라고 또 말합니다(요 4:14). 갈하지 않는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는 “하나님의 손”(manus Dei)이[라고 말합니]다(행 11:21). ‘손’이라는 말은 칼빈은 섭리를 뜻할 때 사용하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일하는, 살며 기동하며 있는 그 하나님의 손이다, 이렇게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께 몰두되기 전까지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쉬고 계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를 우리 바깥에 계신 분으로, 참으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냉랭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donec intentae sint in spiritum mentes nostrae, Christum iacere quodammodo otiosum: quia frigide eum extra nos, adeoque procul a nobis speculam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3.
그래서 우리가 이 성령에 ‘아멘’ 하고 성령을 구하고 성령 안에 우리가 살지 않는 이상, 그리스도는 어떤 면에서는 쉬고 계신 분이다, 이렇게 칼빈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아우르시고 동시에 우리가 그를 소유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의 은혜와 능력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이다(solo autem spiritu unit se nobiscum. Eiusdem spiritus gratia et virtute efficimur illius membra, ut nos sub se contineat, vicissimque illum possideam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3.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의 맏형이 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 Unio cum Christo Mystica),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이때 ‘신비한’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의의 전가에 따른 법정적인 연합,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3.1.4.]
그리고 이제 이 1장 4절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2장에서 길게 다루고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서 먼저 왜 믿음을 이야기했을까요? 바로 그만큼 믿음을 전체 구원의 서론과 같이 칼빈은 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에게 믿음이 선물로 주어져서, 믿음 가운데 중생도, 회심도, 칭의도, 성화도, 자녀 삼으심도 그리스도의 삶도, 다 믿음 가운데, 그래서 믿음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진정 성령의 주요한 작품이다(Verum quia fides praecipuum est eius opus). 일반적으로 성령의 힘과 작용이 무엇인지를 일컫는 여러 표현들은 주로 믿음과 관련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3.1.4.
그래서 ‘믿음은 진정 성령의 주요한 작품이다,’ 이렇게 칼빈은 아주 선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약속으로 인 친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니까 자녀 삼아 주시고 믿음이 주어진다, 그래서 믿음 자체가 성령에서 나온 것이다, 믿어서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니까 우리가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제1요소는 (이제 우리가 다음에 보겠지만,) 지식인데, 그 지식이 믿음과 함께 실려 오기 때문에 성령은 믿음을 주시고,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이렇게 또한 불리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적 선생”(interior magister)은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우리의 유일하신 선생님이십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우리의 유일하신 선생님이심, 선생 되심,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합니까? 어떻게 하여 우리가 예수를 선생으로, 진정한 유일한 선생, 세상에 그 많은 랍비가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랍비로, 선생으로 우리가 받아들입니까? 그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 예수께로 이끈다는 것입니다(요 6:44; 12:32; 17:6).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예수를 구주 삼고, 예수를 스승 삼고,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우리가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령은 우리의 머리이자 맏형이신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되어 그의 모든 것을 누리게 합니다.
둘째, 성령의 은밀한 물 댐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묶는 고리가 성령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셋째,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심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성령은 양자의 영, 보증과 인, 생명, 물, 기름과 기름부음, 불, 샘, 손으로 칭하여 지시는데, 이는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일하게 하심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 믿음은 성령의 주요한 작품으로서, 택한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95강 결론
성령은 우리의 머리이자 맏형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십니다.
은밀한 물댐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묶는 고리가 성령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심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실뿐만 아니라 구원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양자의 영, 보증과 인, 생명, 물, 기름과 기름 부음, 불, 샘, 손으로 칭하시니,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믿음은 성령의 주요한 작품으로서 택함 받은 자의 선물로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