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 [1.16.8-9] 하나님의 섭리 외에 운명이나 우연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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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1.16.8-9. (1권 455-461페이지)



하나님의 섭리 외에
운명이나 우연은 없음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또 ‘운행’, ‘보존’, ‘통치’하시는 ‘섭리’를 행하실 때, ‘창세전 자기의 뜻’으로 행하십니다. 그 뜻은 ‘불변’하고 ‘정해진 것’이고, 그 뜻은 ‘한 뜻’입니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곧 ‘운명’과 다르지 않지 않겠느냐?’라고 이렇게 반론을 제기합니다. 특별히 ‘공로주의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사를, 그 마음과 뜻을, 그리고 그 발걸음을, 그 일의 경영을 하나님이 주장하신다면, 사람이 그저 ‘눕자’, ‘졸자’, ‘자자’하지 않겠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잘못 오해해서 하는 반론인 것입니다. 이런 것은 디모데전서 6장 20절에, “망령되고 헛된 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하셨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달란트 받은 자들의 그 오해에 갇혀서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은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시고, 헤치지 않은 곳에서 모으시니, 그저 땅에 한 달란트를 묻어 놓으면 하나님이 하시겠거니’라고 오해한 것이죠(마 25:24, 참조. 눅 19:21). 
     그러나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그런 하나님의 일꾼들은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눈물로 씨를 뿌리고 울며 씨를 뿌리지만, 끝내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시지만, 나를 움직여서 이루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가 하고자 하신 일을 자신의 지혜에 따라 궁극적인 영원에서부터 작정하시고 이제 자기가 작정하신 것을 자기의 권능으로 수행하시는 모든 것의 감독자와 조정자(arbitrum ac moderatorem)로 확고히 삼는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늘과 땅과 생명 없는 피조물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계획들과 뜻들도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려져 그것에 의해 곧바로 지정된 목표를 향해 이끌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8.

     하나님은 자기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자기의 ‘지혜’에 따라 ‘영원’에서부터 ‘작정’하시고, 그 작정하신 것을 스스로 ‘조정’하시고 ‘감독’하시면서 자기의 ‘권능’으로 ‘수행’하십니다. 그래서 ‘감독자’(arbiter)요, ‘조정자’(moderator)로서 하나님이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세울 것은 세우시고, 폐할 것은 폐하시고, 그렇게 기르기도 하시고, 끝내 ‘열매’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원인에서부터 결과까지 하나님이 모두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 어느 과정에서도 ‘우연’(casus)이 없습니다. ‘운명’(fortuna)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열심’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끄심 가운데서 우리가 이끌림을 받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 가운데서 우리가 행하는 가운데 상급을 얻고자 하는 이것이 바로 우연에 속하거나 운명에 속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섭리를 믿는 사람’의 모습,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존재하고 그것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고 충분히 논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정하심 없이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연히 발생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 무엇도 이보다 더 불합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의 원리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또한 사람의 뜻에 의지하고 있는 우발성을(contingentiam) 배제한 후, 곧 이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의 원인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이를 더욱 분명하게 천명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8.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도 ‘운명’과 ‘우연’과 ‘섭리’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운명이나 우연은 ‘선’과 ‘악’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릇된 ‘결정론’입니다. 그냥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과 소, 우마(牛馬)에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주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되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저 우연이나 운명에 맡기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정의’(知情意) 가운데, 알고 느끼고 뜻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운명이 아니라,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필연성’에 따라, 어떤 인생의 필연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필연성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는 다 운명이나 우연이나, 어떤 그러한 우발(contingentia)적인 것에 의존하고, 또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아마’(forte), ‘혹시’(forsan), ‘설혹’(設或, fortisan), ‘어쩌면’(fortasse), ‘우연히’(fortuito), 이런 말들을 끊임없이 사용하므로, ‘만사가, 매사가 다 우연한 어떤 일에 놓여져 있다. 알 수 없는 것에 그냥 이끌려간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우린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정하신 바요, 우리가 애쓰는 것조차 하나님의 작정이요. 그런데 그 애씀이 우리의 지정의 가운데 있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 가운데서, ‘그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이 인생의 삶을 살게 하시되, 그 섭리를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그래서 ‘운명’은 ‘모든 것이 정해졌으니 그저 눕자, 졸자, 자자. 그리고 기도하면 뭐 하겠느냐? 다 정해졌는데.’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섭리’는 모든 것을 정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지금 내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주장하시는 분이니까, 하나님은 어떤 원인과 결과에 매이지 아니하시고, 과정조차도 하나님이 섭리하시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여서 매번 우리를 움직여 ‘그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섭리의 도구’가 되는, 이 자리로 우리가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의 지고한 원인이며 제일 원인이므로 그의 명령이나 허용이 없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Dei voluntatem summam esse probat et primam omnium causam, quia nihil nisi ex iussu eius vel permissione accidit).” …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이른바 실제적인 뜻으로 개입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뜻은 만물의 원인이라고 여겨질 수 없을 것이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8.

     세상 사람들은 ‘운명적이다. 운명이 나를 이렇게 이끌었다.’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셨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주장하신다.’라고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의 지고한 원인이며 제일 원인이므로 그의 명령이나 허용이 없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Dei voluntatem summam esse probat et primam omnium causam, quia nihil nisi ex iussu eius vel permissione accidit).”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실제적인 뜻’입니다. 그 뜻은 ‘만물의 원인’입니다. 그 뜻은 ‘만물의 결과’에 가닿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장’하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확실한 경륜’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처음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주장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은 사실 우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행이다’ 이런 말을 우리가 많이 쓰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 이런 표현도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어떻게 하다 보니’, ‘다행이다’ 이런 말을 쓰는 것도 사람이 스스로 질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예상할 만하고 정상적이고, 이러면 ‘내가 해서 됐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내가 생각해서 내 논리가 가닿지 않고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지고 이렇게 하면, 그것은 ‘우연이다, 운명이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대로 되면 내 생각이고, 생각대로 안 되면 운명이고 우연이고. 
     그러나 우리는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 안에 두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내 생각을 억견(臆見)이라고 여기고, ‘진리에 서 있지 않은 억지 주장, 억견’이라고 여기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의 산물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만이 온전하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 ‘선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 친히 자기의 눈으로 선견(先見)하셨을 뿐만 아니라 작정을 세우셔서 그렇게 되게 하셨다. 이는 그가 … 그 끝을 정하시고 변동 없이 하셔서 아무도 이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욥 14:5). … 하나님의 섭리가 운명을 다스려 그 목적에 이르는 길을 지도했다(providentiam…Dei praefuisse…ad fortunam in suum finem dirigendam)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논리가 미래에 일어날 우연한 일들에도 적용된다. … 우리의 마음에는 여호와가 이미 선견하지 않으신 사건은 어디에도 없다(nihil eventurum quod non Dominus iam providerit)는 사실이 확정되어 남아 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9.

     우리 인생에는 우연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다가 간혹은 구덩이에 발이 빠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간혹은 길을 가다가 탈선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내 오류로 탈선하는 경우도 있지만, 옆에 차가 그저 무분별하게 끼어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고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때그때마다 우연에 돌릴 것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모든 질서를, 운행을 주장하시는 것과 함께, 만사를, 매사를, 우리 인생사를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여호와가 이미 선견(先見)하지 않으신 사건은 어디에도 없다(nihil eventurum quod non Dominus iam providerit).” 이렇게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맺히는 것, 우리가 알고 뜻하고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미리 보신 것, 선견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각조차도 그저 우리에게 맡겨두지 아니하십니다. 지금 내 생각과 내일의 내 생각을 이미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지금 너무 기뻐하다가 내일 좌절할까 봐 지금 기쁨을 조절해 주시고, 지금 너무 슬퍼하다가 또한 내일 도무지 절망에 이르고, 지금 너무 슬퍼하다가 내일은 내 공로를 헤아릴까 봐 또 슬픔도 조절하십니다. 기쁨도 조절하시고, 슬픔도 조절하시고, 기쁠 때는 오히려 절망을 헤아리시고, 슬플 때는 함께 희망도 헤아리시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어쩌다 잘 됐다’, ‘왜 이럴까?’,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돌리지 않고, 운명에 맡기는 이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도무지 가닿지 못하는.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심과 어떠하심을 알게 하시고, 무엇보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심과 어떠함을 알게 하셨는데, 그러한 ‘섬광’들 조차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아예 없어지는 이러한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우발성(contingentia)으로 보이는 것에도 하나님의 은밀한 격동(secretum Dei impulsum)이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실로 항상 똑같은 논리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에서 인식되는 변화는 그것이 무엇이든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손의 비밀스러운 운행으로부터(ex secreta manus Dei agitatione)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는 견지해야 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9.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선물’로 주어지고, 그 믿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격동’(하나님의 은밀한 격동, secretum Dei impulsus)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은밀한 격동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믿는 자들 안에서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 ‘비밀스럽고 은밀한 자극’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길로 가고 저 길로 가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이 ‘구름 기둥’, ‘불 기둥’을 따라다녔듯이, ‘우리의 영’, ‘성령’, ‘그리스도의 영’, ‘은혜 받은 영’,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 삼는 영’, ‘그 영의 이끄심’에 따라, 그 ‘격동’에 따라, 그 ‘자극’에 따라, 그 ‘박차’에 따라 우리가 움직이고 힘을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의 은밀한 운행, 비밀스러운 운행’(하나님의 손의 비밀스러운 운행, secreta manus Dei agitatio)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으로 우리를 운행하십니다. 해와 달만 운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은 반드시 일어나지만, 무조건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자체의 본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다(quod statuit Deus, sic necesse est evenire ut tamen neque praecise, neque suapte natura necessarium sit). 익숙한 예로 그리스도의 뼈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우리와 같은 몸을 취하셨으며 그의 뼈는 부러질 수 있는 것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부러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요 19:33, 36).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뼈를 연약함에 종속시키셨으나 부러짐으로부터 면제하심으로써 자연적으로 당할 수 있었던 일을 자기의 필연성으로 제한하셨던바, 이로부터 우리는 상대적 필연과 절대적 필연의 구별과, 이와 다를 바 없는 결과물의 필연과 결과의 필연의 구별(distinctiones de necessitate secundum quid, et absoluta; item consequentis et consequentiae)이 학파들 가운데 그저 무모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9.

     하나님이 제정하시는 것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필연적’(necessarius)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님 안에서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조건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필연에 가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필연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필연성을 논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필연성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일들을 이루시는데, 그 ‘절대적인 필연성’(necessitas absoluta)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필연성에 따라 모든 일이 ‘결과’까지 미칩니다. ‘결과의 필연성’(necessitas consequentiae), 이 결과의 필연성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의 필연성을 우연에 돌리거나, 결과의 필연성을 운명에 돌리는 것, 이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필연성을 다 우연이나 운명에 돌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뼈가 꺾임을 당하지 않고 죽음을 보셨습니다(요 19:33, 36). 주님은 제구시 일찍 죽임을 당하셨습니다(참조. 마 27:46-50; 막 15:33-37; 눅 23:44-46). 이것도 하나님의 큰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섭리에 따라, 예수님은 뼈가 꺾임을 당하지 않고 죽게끔 그렇게 예언되었습니다(참조. 출 12:46; 민 9:12; 시 34:20). 그 예언의 말씀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고안한 필연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필연성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연성으로 하나님의 필연성에 가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지혜에 따라 영원히 작정하시고, 친히 자신의 권능으로 그 작정하신 것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루심에 있어서 친히 ‘감독자’가 되시고, 친히 ‘조정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의 ‘지고한 원인’이며, ‘제1원인’이요. 그 하나님의 뜻은 ‘실제적인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용이 없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하나님이 미리 보시고 자기의 경륜에 따라 모든 계획을 이미 정하시고, 그리고 이루심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밀한 비밀스러운 격동’, 그 ‘비밀스러운 은밀한 운행’으로 모든 것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의 자기 필연성은 어떤 이차적 원인에도 좌우되지 않는 ‘절대적 필연성’이고, 뜻한 바대로 다 이루어지는, 그리하여 그 결과가 처음과 끝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결과의 필연’인 것입니다. 이런 필연을 우리의 필연으로 제한하거나 또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38강 이번 강의 결론

  1. 우리가 고안한 필연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2.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지혜에 따라 영원히 작정하시고, 친히 자신의 권능으로, 감독자와 조정자로서, 그 작정하신 것을 이루십니다. 
  3.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의 지고한 원인이며 제일 원인이 되는 실제적인 뜻으로서, 그의 명령이나 허용이 없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이 미리 보시고 자기의 경륜에 따라 모든 것을 계획하시며 이루시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비밀스런 격동, 비밀스런 운행으로 생겨납니다. 
  5. 하나님의 자기 필연성은 어떤 이차적 원인에 좌우되지 않는 절대적 필연이며,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는 결과의 필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