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만물에 미칩니다. 이것을 우리가 ‘일반적 섭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에게 특별히 미칩니다. 이 사람에게 미치는 섭리, 이 섭리는 또 두 가지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별한 은총’,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고, 그 구원의 백성들, 자기 자녀 삼으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그리고 이 땅의 삶을 주장하시고, 끝내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시는 그러한 ‘구원적 은총’이 있는, 그 ‘특별한 섭리’가 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러한 사람에게 특별히 베푸시는 ‘일반적 은총의 섭리’가 또한 있을 수 있습니다.
세계가 특별히 인류를 위해 지음받은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참조. 『기독교 강요』, 1.14.22.) 우리는 또한 그의 통치에서 이 목적을 바라보아야 한다(참조. 렘 10:23; 잠 20:24).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6.
하나님은 세계를 지으시고 ‘보존’, ‘운행’, ‘통치’하시는 그 창조와 섭리의 권능과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을 주장하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도 주장하시고 우리의 걸음 하나하나도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서 10장 23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이렇게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당대에 특별히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모든 백성들, 거짓 선지자들은 느부갓네살에 대항해서 애굽과 화친하자고 했을 때, 이 예레미야 선지자만은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해야 된다.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어떻게 보면 선지자가 저렇게 능력이 없는 그런 말을 전하느냐라고 오해를 했겠죠. 그러나 예레미야를 지시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하나님의 영’이었고, ‘이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죠. 울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잠언 20장 24절에 보면,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길을 알지 못합니다. 끝없이 선택하고 끝없이 애쓰지만, 그러나 여호와만이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선지자와 잠언을 쓴 솔로몬은 하나님께 권능을 돌릴 뿐만 아니라, 모든 우리의 선택과 목적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권능’은 하나님께 돌리지만, ‘뜻’은 내가 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친히 행하시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잠언 16장 1절과 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마음의 경영이 사람에게 있어도’ 이러니까 경영은 내가 하고,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니라’ 이렇게 또 전하니까 응답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 말씀이 아닙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까, 경영을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이 말은 우리가 경영하는 것 같아도 응답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므로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고 마음을 경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뜻을 정하는 것이나, 길을 정하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
참으로 성경은 세계의 그 무슨 일도 하나님의 결정이 없다면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nihil penitus in mundo geri nisi ex eius destinatione)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하여, 보기에는 가장 우연한 것들도 그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 우연에 주어질 수 있는 듯한 그 어떤 한 가지조차도 모두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증언하신다(잠 16:3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6.
성경은 세계에 그 무슨 일도 하나님의 결정이 없으면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nihil penitus in mundo geri nisi ex eius destinatione)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가장 우연하게 보이는 일조차도 하나님은 다 정하시고 뜻하셔서 때가 차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에서 가지가 부러져 다치게 되거나 목숨을 잃게 되면 우연히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라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한 상태에 두지 아니하셨으면, 사람이 전쟁에서 우연히 화살에 맞아 죽는 것 같아도 사람을 살인자의 손에 맡기셨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출 21:13).
제비를 뽑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뽑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뽑지만, 아까도 봤지만, 내가 경영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그 경영을 형통케 하시고 응답하시듯이, 제비도 내가 뽑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내 손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제비를 뽑는다는, 그 뽑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내 손이 움직여서 그 제비에 손이 가게 하시고, 그것을 뽑게 하게 하신다는 것이죠.
잠언 29장 13절에 보면, “가난한 자와 포악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참조. 잠 22:2). 다 빛을 주시지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분별하셔서 옳고 그른 것을 우리가 알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섞여 살지만, 하나님은 보시고 그 가운데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인을 멀리하고 의인을 가까이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75편 6절과 7절에 보면,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사방에서 몰려드는 현자들, 어떤 의인을 자칭하는 그런 사람들이 재판장이 아니라, 동쪽, 서쪽, 남쪽 그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재판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전히 바라보고 높일 자는 높이시고 낮출 자는 낮추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앞서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은 ‘창세 전의 계획’이고 그 계획이 지금 ‘하나님의 현존하는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개별적 사건들이 각각 하나님의 섭리에 다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은 이 개별적 사건들을 종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어떨 때는 이것이 나쁘다, 또 저것이 나쁘다, 바람이 심히 불면 그 바람을 그저 탓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바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섭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바람이 세게 부는 자체는 당장 사람을 바다에 던지는 그러한 극악한 결과를 낳았지만, 크게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비밀스러운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풍을 사용하셔서 새들을 몰아오시고(출 16:13; 민 11:31), 그리고 출애굽 때, 10대 기적을 봤을 때, 하나님이 강도 바다도 곤충도 하늘도 별도 사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저주로 내려왔지만, 하나님은 그 우박을, 그 독종을, 그 악한 종기를 다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에 대한 지휘권’을 보유하고 계신다라고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람을 사신으로도 삼고 [불꽃을] 자기 사역자로 삼고’(시 104:4), ‘구름으로 수레를 삼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고’(시 104:3), 그렇게 시편 기자는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현존’이 만물을 통하여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바람이 선한 바람일 때도 있고, 기진하고 맥진하고 이제 광야의 태양빛에 쓰러져가는 사람에게는 선선한 바람으로 불 수도 있고, 그리고 어떤 포악한 자들에게는 악한 광풍으로도 불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하여서 광풍을 주시기도 하시고, 잔잔하게도 하시는 그 하나님이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참조. 시 107:25, 29; 암 4:9).
우리 사람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자손들을 주시고, 그러한 번성할 수 있는 생식력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참조. 시 113:9). 그래서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 상급이라’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시 127:3). 창세기 30장 2절에 보면, ‘당신에게 아이들을 갖게 하는 하나님을 내가 대신하겠느냐’라고 야곱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땅의 소산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신 8:3; 마 4:4)라고 선포하신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기르는 것은 포만감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복(arcana Dei benedictio)이기 때문이다. … 실로 이처럼 하나님이 부성적인 손으로(paternamanu) 우리에게 양식을 마련해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진지한 기도를 마음속에 품을 수가 없을 것이다(마 6:11). 이러하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심으로써 가족을 위한 최고의 아버지의 역할을 다 수행하신다는 사실로 신자들을 감화시키기 위하여, 그는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시 136:25)가 되심을 권고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7.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떡으로 삽니다. 땅의 소산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떡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도 주십니다(신 8:3; 마 4:4). 그 말씀을 통하여 ‘은밀한 언약의 복’(하나님의 은밀한 복, arcana Dei benedictio)을 베푸십니다. 육적인 것도 필요한 만큼 채우시지만, ‘영적인 복’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특별한 은총’입니다. ‘특별한 구원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부성적인 손’(paterna manu)으로 우리에게 양식을 마련해 주시고, 그 양식을 주시되 ‘기도하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일용할 것’을 구하게 하시고(마 6:11),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고, ‘예배의 자녀’로 그렇게 살게 하시는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의 섭리’인 것입니다. 칼빈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심으로써 가족을 위한 최고의 아버지의 역할을 다 수행한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아버지의 역할을 다 수행한다.’
요컨대 우리가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라는 말씀을 듣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 34:16)라는 말씀을 듣게 되는바, 위와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각각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소용에 닿게 맞추어 주시는 그의 은혜를 그것들이 누리게 됨을 깨닫도록 하자.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가 피조물들 가운데 활력을 더해서 자연의 질서가 계속될 뿐만 아니라 그의 놀라운 계획에 따라 확실하고 고유한 목적에 부합되게 한다는(non tantum generalem eius providentiam vigere in creaturis, ut naturae ordinem continuet; sed in certum et proprium finem aptari, admirabili eius consilio)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7.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도다.” 시편 34편 15절에서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바로 이어서 또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시 34:16)?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헤아리십니다. ‘의인’은 완전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 받은 자’입니다. 악인은 우리 인생이 보기에 가장 악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자, 하나님을 떠난 자가 악인입니다. 구원 백성,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헤아리시고, 지상의 삶과 천상의 삶의 그 연장선에 있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다 붙드시고 보살피시고 베푸시고 온전케 하신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따른 확실하고 고유한 목적에 부합한다. 이러한 결론에 우리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키십니다. 벌레 하나도 보십시요. 풀포기 하나라도 보십시요. 물이 흐르는 그 섭리도 우리에게 놀랍고, 사시사철, 해와 별, 달과 모든 운행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의 극장 어느 곳을 둘러봐도 하나님의 찬미거리가 하나도 없지 않는, 잠시라도 우리가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영광의 놀라운 찬미거리들이 만물에 널려있는데, 충만하게 있는데, 그중에서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일까보냐?’(마 6:30; 눅 12:28), ‘육신의 부모라도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일까보냐?’(마 7:11; 눅 11:13),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정리해 봅니다.
첫째, 만물은 인류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바,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다. 만물을 하나님이 붙드시고 채우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은 인류를 위한 것이다.
두 번째, 오직 하나님이 비밀스러운 계획으로 사람의 걸음을 지도하시고 마음의 경영을 이루시며 모든 일을 주장하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사람의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세계에 대한 지휘권을 보유하시고, 바람과 구름이라도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그의 섭리를 통하여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하나님은 자기의 특별한 은혜로 우리의 가정과 자녀를 위한 최고의 아버지의 역할을 다 수행하십니다. ‘육신의 부모라도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 보냐?’ 우리 믿는 백성들은 육신의 부모를 두고 모시지만, 그 이상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이 은혜를 누리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믿는 백성을 특별히 보호하실까요? 왜 특별한 섭리로 은혜를 베푸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는 것입니다(마 7:7-8; 눅 11:9-10).
37강 이번 강의 결론
만물은 인류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바,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비밀스런 계획으로 사람의 걸음을 지도하시고 마음의 경영을 이루시며 모든 일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세계에 대한 지휘권을 보유하시고 바람과 구름이라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특별한 은혜로 우리의 가정과 자녀를 위한 최고의 아버지의 역할을 다 수행하십니다.
37강 | 1.16.6-7. (1권 452-455페이지)
사람을 다스리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만물에 미칩니다. 이것을 우리가 ‘일반적 섭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에게 특별히 미칩니다. 이 사람에게 미치는 섭리, 이 섭리는 또 두 가지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별한 은총’,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고, 그 구원의 백성들, 자기 자녀 삼으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그리고 이 땅의 삶을 주장하시고, 끝내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시는 그러한 ‘구원적 은총’이 있는, 그 ‘특별한 섭리’가 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러한 사람에게 특별히 베푸시는 ‘일반적 은총의 섭리’가 또한 있을 수 있습니다.
세계가 특별히 인류를 위해 지음받은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참조. 『기독교 강요』, 1.14.22.) 우리는 또한 그의 통치에서 이 목적을 바라보아야 한다(참조. 렘 10:23; 잠 20:24).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6.
하나님은 세계를 지으시고 ‘보존’, ‘운행’, ‘통치’하시는 그 창조와 섭리의 권능과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을 주장하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도 주장하시고 우리의 걸음 하나하나도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서 10장 23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이렇게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당대에 특별히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모든 백성들, 거짓 선지자들은 느부갓네살에 대항해서 애굽과 화친하자고 했을 때, 이 예레미야 선지자만은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해야 된다.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어떻게 보면 선지자가 저렇게 능력이 없는 그런 말을 전하느냐라고 오해를 했겠죠. 그러나 예레미야를 지시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하나님의 영’이었고, ‘이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죠. 울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잠언 20장 24절에 보면,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길을 알지 못합니다. 끝없이 선택하고 끝없이 애쓰지만, 그러나 여호와만이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선지자와 잠언을 쓴 솔로몬은 하나님께 권능을 돌릴 뿐만 아니라, 모든 우리의 선택과 목적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권능’은 하나님께 돌리지만, ‘뜻’은 내가 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친히 행하시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잠언 16장 1절과 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마음의 경영이 사람에게 있어도’ 이러니까 경영은 내가 하고,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니라’ 이렇게 또 전하니까 응답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 말씀이 아닙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까, 경영을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이 말은 우리가 경영하는 것 같아도 응답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므로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고 마음을 경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뜻을 정하는 것이나, 길을 정하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
참으로 성경은 세계의 그 무슨 일도 하나님의 결정이 없다면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nihil penitus in mundo geri nisi ex eius destinatione)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하여, 보기에는 가장 우연한 것들도 그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 우연에 주어질 수 있는 듯한 그 어떤 한 가지조차도 모두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증언하신다(잠 16:33).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6.
성경은 세계에 그 무슨 일도 하나님의 결정이 없으면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nihil penitus in mundo geri nisi ex eius destinatione)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가장 우연하게 보이는 일조차도 하나님은 다 정하시고 뜻하셔서 때가 차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에서 가지가 부러져 다치게 되거나 목숨을 잃게 되면 우연히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라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한 상태에 두지 아니하셨으면, 사람이 전쟁에서 우연히 화살에 맞아 죽는 것 같아도 사람을 살인자의 손에 맡기셨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출 21:13).
제비를 뽑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뽑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뽑지만, 아까도 봤지만, 내가 경영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그 경영을 형통케 하시고 응답하시듯이, 제비도 내가 뽑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내 손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제비를 뽑는다는, 그 뽑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내 손이 움직여서 그 제비에 손이 가게 하시고, 그것을 뽑게 하게 하신다는 것이죠.
잠언 29장 13절에 보면, “가난한 자와 포악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참조. 잠 22:2). 다 빛을 주시지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분별하셔서 옳고 그른 것을 우리가 알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섞여 살지만, 하나님은 보시고 그 가운데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인을 멀리하고 의인을 가까이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75편 6절과 7절에 보면,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사방에서 몰려드는 현자들, 어떤 의인을 자칭하는 그런 사람들이 재판장이 아니라, 동쪽, 서쪽, 남쪽 그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재판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전히 바라보고 높일 자는 높이시고 낮출 자는 낮추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앞서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은 ‘창세 전의 계획’이고 그 계획이 지금 ‘하나님의 현존하는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개별적 사건들이 각각 하나님의 섭리에 다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은 이 개별적 사건들을 종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어떨 때는 이것이 나쁘다, 또 저것이 나쁘다, 바람이 심히 불면 그 바람을 그저 탓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바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섭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바람이 세게 부는 자체는 당장 사람을 바다에 던지는 그러한 극악한 결과를 낳았지만, 크게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비밀스러운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풍을 사용하셔서 새들을 몰아오시고(출 16:13; 민 11:31), 그리고 출애굽 때, 10대 기적을 봤을 때, 하나님이 강도 바다도 곤충도 하늘도 별도 사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저주로 내려왔지만, 하나님은 그 우박을, 그 독종을, 그 악한 종기를 다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에 대한 지휘권’을 보유하고 계신다라고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람을 사신으로도 삼고 [불꽃을] 자기 사역자로 삼고’(시 104:4), ‘구름으로 수레를 삼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고’(시 104:3), 그렇게 시편 기자는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현존’이 만물을 통하여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바람이 선한 바람일 때도 있고, 기진하고 맥진하고 이제 광야의 태양빛에 쓰러져가는 사람에게는 선선한 바람으로 불 수도 있고, 그리고 어떤 포악한 자들에게는 악한 광풍으로도 불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하여서 광풍을 주시기도 하시고, 잔잔하게도 하시는 그 하나님이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참조. 시 107:25, 29; 암 4:9).
우리 사람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자손들을 주시고, 그러한 번성할 수 있는 생식력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참조. 시 113:9). 그래서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 상급이라’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시 127:3). 창세기 30장 2절에 보면, ‘당신에게 아이들을 갖게 하는 하나님을 내가 대신하겠느냐’라고 야곱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땅의 소산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신 8:3; 마 4:4)라고 선포하신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기르는 것은 포만감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복(arcana Dei benedictio)이기 때문이다. … 실로 이처럼 하나님이 부성적인 손으로(paterna manu) 우리에게 양식을 마련해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진지한 기도를 마음속에 품을 수가 없을 것이다(마 6:11). 이러하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심으로써 가족을 위한 최고의 아버지의 역할을 다 수행하신다는 사실로 신자들을 감화시키기 위하여, 그는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시 136:25)가 되심을 권고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7.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떡으로 삽니다. 땅의 소산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떡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도 주십니다(신 8:3; 마 4:4). 그 말씀을 통하여 ‘은밀한 언약의 복’(하나님의 은밀한 복, arcana Dei benedictio)을 베푸십니다. 육적인 것도 필요한 만큼 채우시지만, ‘영적인 복’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특별한 은총’입니다. ‘특별한 구원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부성적인 손’(paterna manu)으로 우리에게 양식을 마련해 주시고, 그 양식을 주시되 ‘기도하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일용할 것’을 구하게 하시고(마 6:11),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고, ‘예배의 자녀’로 그렇게 살게 하시는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의 섭리’인 것입니다. 칼빈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심으로써 가족을 위한 최고의 아버지의 역할을 다 수행한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아버지의 역할을 다 수행한다.’
요컨대 우리가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라는 말씀을 듣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 34:16)라는 말씀을 듣게 되는바, 위와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각각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소용에 닿게 맞추어 주시는 그의 은혜를 그것들이 누리게 됨을 깨닫도록 하자.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가 피조물들 가운데 활력을 더해서 자연의 질서가 계속될 뿐만 아니라 그의 놀라운 계획에 따라 확실하고 고유한 목적에 부합되게 한다는(non tantum generalem eius providentiam vigere in creaturis, ut naturae ordinem continuet; sed in certum et proprium finem aptari, admirabili eius consilio)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1.16.7.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도다.” 시편 34편 15절에서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바로 이어서 또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시 34:16)?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헤아리십니다. ‘의인’은 완전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 받은 자’입니다. 악인은 우리 인생이 보기에 가장 악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자, 하나님을 떠난 자가 악인입니다. 구원 백성,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헤아리시고, 지상의 삶과 천상의 삶의 그 연장선에 있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다 붙드시고 보살피시고 베푸시고 온전케 하신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따른 확실하고 고유한 목적에 부합한다. 이러한 결론에 우리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키십니다. 벌레 하나도 보십시요. 풀포기 하나라도 보십시요. 물이 흐르는 그 섭리도 우리에게 놀랍고, 사시사철, 해와 별, 달과 모든 운행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의 극장 어느 곳을 둘러봐도 하나님의 찬미거리가 하나도 없지 않는, 잠시라도 우리가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영광의 놀라운 찬미거리들이 만물에 널려있는데, 충만하게 있는데, 그중에서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일까보냐?’(마 6:30; 눅 12:28), ‘육신의 부모라도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일까보냐?’(마 7:11; 눅 11:13),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정리해 봅니다.
첫째, 만물은 인류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바,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다. 만물을 하나님이 붙드시고 채우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은 인류를 위한 것이다.
두 번째, 오직 하나님이 비밀스러운 계획으로 사람의 걸음을 지도하시고 마음의 경영을 이루시며 모든 일을 주장하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사람의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세계에 대한 지휘권을 보유하시고, 바람과 구름이라도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그의 섭리를 통하여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하나님은 자기의 특별한 은혜로 우리의 가정과 자녀를 위한 최고의 아버지의 역할을 다 수행하십니다. ‘육신의 부모라도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 보냐?’ 우리 믿는 백성들은 육신의 부모를 두고 모시지만, 그 이상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이 은혜를 누리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믿는 백성을 특별히 보호하실까요? 왜 특별한 섭리로 은혜를 베푸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는 것입니다(마 7:7-8; 눅 11:9-10).
37강 이번 강의 결론
만물은 인류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바,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비밀스런 계획으로 사람의 걸음을 지도하시고 마음의 경영을 이루시며 모든 일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세계에 대한 지휘권을 보유하시고 바람과 구름이라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특별한 은혜로 우리의 가정과 자녀를 위한 최고의 아버지의 역할을 다 수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이 은혜를 누리도록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