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의 마지막 장인 17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 그것이 우리 구원을 위하여 무슨 가치(dignitas)가 있는가,’ 이것을 다룹니다. 예수님은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셨죠. 이것을 우리가 ‘의(義)의 전가(轉嫁)’라고 합니다. 이 전가는 언약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머리가 되셔서 그가 다 이루신 의가 그 지체인 우리 것으로 삼아지는 것, 이 의의 전가, 이것이 대표의 원리죠. 이러한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그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의 전가 ‘가치’가 무엇인가, 이것을 신학에서는 속죄론이라고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의의 ‘가치’는 ‘값’입니다. 그의 의의 가치는 우리 구원의 값입니다. 어떤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서 우리가 그를 닮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품으면서 내 마음의 감동을 느끼는 것, 그래서 내 마음의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거나, 내 마음의 어떤 자애로운 그런 심성을 가지는 것, 이러한 것은 구원의 본질이 아닙니다.
구원의 본질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루셨네! 무름의 값을 치루셨네! 보아스가 룻을 살 때 값을 치루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시면서 값을 치루셨네![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는 무름의 값[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그 값을 예수님이 치른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무른 것은 어떤 소유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룻 자신을 유다 지파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이곳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자애, 긍휼, 호의, 그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이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한 값을 요구하신다, 그 값이 바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meritum)다, 이 부분을 칼빈은 주목합니다.
칼빈의 이러한 비판은 동시대인 렐리오 소치니(Lelio Sozzini, 1525-1562)를 겨냥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렐리오의 신학은 그의 조카 파우스토 소치니(Fausto Sozzini, 1539-1604)에 의해서 체계화되어 일파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양성적 중보를 반대하였으며 모범설로 대변되는 주관적 속죄론을 전개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객관적인 공로(값)를 부인하였습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1, 각주 913.
‘공로’라고 했을 때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면 됐지, 왜 공로를 요구하시냐?’ 이렇게 하면서 이를 거부합니다. 특별히 소치니(Lelio Sozzini, 1525-1562), (우리가 소키누스[Laelius Socinus]라고도 하죠) 소치니가 이러한 입장에 섰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많은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심[을 알려 주고], 하나님의 또 다른 의가 나타났는데, 그 의는 아들을 주셔서 아들을 통하여 속죄를 이루시는, 아들을 통하여 죄의 값을 치르게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또 다른 의이다, 곧 복음[이다], 이런 것을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정과 은혜의 가장 밝은 빛은 구원주이신 사람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시다(clarissimum lumen praedestinationis et gratiae ipse est salvator homo Christus Iesus).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1.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과 은혜의 가장 밝은 빛은 구원주이신 사람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셔서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택하셔서 구원하시는 백성의 값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그 머리로부터 모든 지체가 각각의 분량으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그래서 예수가 은혜의 샘 자체가 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주로 이 땅에 보내셔서 그가 모든 의를 이루게 하시고, [신자가] 그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구원의 도, 이 대속의 도,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이 돼야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해 이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 그 영을 받은 자마다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삼아서 그렇게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하나님의 사랑의 값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으므로 하나님은 그 값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아들을 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 다룰 때, 그 시작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롯된다고 여길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원인이 되는 하나님의 결정으로(ad Dei ordinationem)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순전히 자기의 기뻐하심에 따라 중보자를 세우셔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획득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quia mero beneplacito mediatorem statuit, qui nobis salutem acquirer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1.
그래서 첫 번째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주시는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자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시나 그 사랑은 값을 치르는 사랑[이고] 그 값은 아들이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첫 번째 원인은 ‘하나님의 결정’,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을 찾지 아니하십니다. “순전히 자기의 기뻐하심에 따라” 아들을 ‘중보자’로 세우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순전히 기뻐하심에 따라.’ 이것은 구원의 절대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 하나님의 뜻하심, 하나님의 원하심, 이런 것은 어떤 조건하에 우리를 택하여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택하심에 따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는 그 하나님의 주권적 정하심에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그 구원의 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공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적인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성부가 성자를 주시면 성부가 자신을 주심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시면 아버지가 아버지를 주심과 다름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심은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룰 때, 다른 것을 찾으면 조건이 되지만, 그것을 베푸시는 분이 베푸시는 분 안에서 조건을 찾으신다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시되 아들의 공로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들의 값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되 그 아버지의 ‘자비’(misericordia)에 아들의 공로가 필히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호의”(gratuitus Dei favor)와 “그리스도의 순종”(obedientia Christi)은 우리의 행위와는 날카로운 대책점에 서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역시 우리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시고 하나님이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뜻하시고 아들이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에는 그 어떤 공로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는 함께 있고 이 둘이 대척점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가 함께 있고 이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는 우리의 행위와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조건을 구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무조건적 사랑, 무조건적 은혜인 것입니다. 무조건적 아버지의 사랑, 무조건적 아들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유일한 ‘방식’(modus)입니다.
[『기독교 강요』, 2.17.2.]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무조건적 은혜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라고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최고의 원인이자 기원으로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priorem locum teneat Dei dilectio, tanquam summa causa vel orig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2.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원인이자 기원으로서 첫자리를 차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버지의 사랑이 제1 조건입니다. 이 제1 조건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의] 이차적이며 근접하는 원인이 된다(sequatur fides in Christum, tanquam causa secunda et propio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2.
두 번째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의 값으로, 공로로, 의로 삼으시기 위하여서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이 믿음은 우리가 세 번째 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조건 혹은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 두 번째 조건 혹은 원인은 아들의 공로, 세 번째 조건 [혹은] 원인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이 세 가지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한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우리의 무름의 값이 되셨습니다.
칼빈은 철학자들의 논법을 빌어 영생의 네 가지 원인을 설명함에 있어서, 동력인(causa efficiens)을 우리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dilectio gratuita)에서, 질료인(materialis)을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obedientia)에서, 형상인(formalis)을 믿음(fides)에서, 그리고 목적인(finalis)을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에 대한 영광(gloria)에서 찾습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2, 각주 923.
“우리 구원의 질료”(salutis nostrae materia)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구원의 실체, 구원의 값, 구원의 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입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ἱλασμὸν)로 주셨습니다(요일 4:10). 그래서 아들의 공로, 그 제물, 그 값을 보시고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피가 화평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신 것(reconciliare)은 아들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저 베푸시되, 아들 안에서 베푸십니다. 아들 안에서 선택하신 자들에게 아들 안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서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의(iustitia omnis)의 시작이십니다. 이 구원의 첫 원인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의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배치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은 분명히 값이 지불된 가운데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값은 바로 아들의 공로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사랑의 시작은 의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Principium amoris est iustitia”(the beginning of love is righteousness). 아버지의 사랑의 시작은 아들의 의[인데], 이 의는 공로, 값, 순종, 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전혀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자질이나 우리의 공로로부터 비롯된 것은 일점일획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 없음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의, 그것을 우리는 그저 누릴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아들의 공로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삼위일체적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아들의 공로, 성령의 역사, 그래서 믿음조차도 선물로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사랑의 시작은 의입니다.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우리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역정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값입니다,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를 믿고 아들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caritas Dei)이 “그리스도의 은혜”(gratia Christi)와 결합되어서 구원의 뜻, 의, 값, 그것이 우리의 것으로 제시되고 역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가 획득하신 자기의 것을 우리에게 수여하신다(eum de suo quod acquisivit, nobis largiri).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2.
그리스도가 스스로 획득하신 그 의를 아버지가 인정하신 것입니다. 아들의 공로를 아버지가 받으신 것입니다. 무엇으로 받았을까요? 우리를 위한 대속의 값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론’입니다. ‘아들의 공로가 우리 대속의 값이다.’ 이 아들의 공로를 대속의 값으로 받으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는 동일하게 귀한 것이요, 동일하게 우리에게 무한한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의 결정에 따라 값없는 구원의 호의를 베푸셔서 그 중보자로 세우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 대속의 의로 삼으십니다.
둘째, 성도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원인이자 기원입니다. 그것이 첫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 공로가 되고, 그리스도를 믿음이 그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뒤따르는 근접하는 원인이 됩니다.
셋째, 구원의 질료는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래서 그가 다 이루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데 그것은 그가 언약의 머리로서 그 지체된 자들에게 그 의를 전가해 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의의 원천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우리의 의로 삼으시는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시작은 의이다”라고 칼빈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92강 결론
하나님은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의 결정에 따라 값없는 구원의 호의를 베푸시되 중보자로 세우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속의 의로 삼으십니다.
성도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원인이자 기원으로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이 이차적이며 근접하는 원인이 됩니다.
구원의 질료는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인바, 머리이신 그로부터 모든 지체에 은혜가 퍼집니다.
하나님은 의의 원천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우리의 의로 삼으시는 무조건적 은혜의 사랑을 베푸시니, 사랑의 시작은 의입니다.
92강 | 2.17.1-2 (2권 497-502페이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
[『기독교 강요』, 2.17.1.]
2권의 마지막 장인 17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 그것이 우리 구원을 위하여 무슨 가치(dignitas)가 있는가,’ 이것을 다룹니다. 예수님은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셨죠. 이것을 우리가 ‘의(義)의 전가(轉嫁)’라고 합니다. 이 전가는 언약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머리가 되셔서 그가 다 이루신 의가 그 지체인 우리 것으로 삼아지는 것, 이 의의 전가, 이것이 대표의 원리죠. 이러한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그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의 전가 ‘가치’가 무엇인가, 이것을 신학에서는 속죄론이라고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의의 ‘가치’는 ‘값’입니다. 그의 의의 가치는 우리 구원의 값입니다. 어떤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서 우리가 그를 닮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품으면서 내 마음의 감동을 느끼는 것, 그래서 내 마음의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거나, 내 마음의 어떤 자애로운 그런 심성을 가지는 것, 이러한 것은 구원의 본질이 아닙니다.
구원의 본질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루셨네! 무름의 값을 치루셨네! 보아스가 룻을 살 때 값을 치루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시면서 값을 치루셨네![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는 무름의 값[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그 값을 예수님이 치른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무른 것은 어떤 소유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룻 자신을 유다 지파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이곳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자애, 긍휼, 호의, 그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이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한 값을 요구하신다, 그 값이 바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meritum)다, 이 부분을 칼빈은 주목합니다.
칼빈의 이러한 비판은 동시대인 렐리오 소치니(Lelio Sozzini, 1525-1562)를 겨냥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렐리오의 신학은 그의 조카 파우스토 소치니(Fausto Sozzini, 1539-1604)에 의해서 체계화되어 일파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양성적 중보를 반대하였으며 모범설로 대변되는 주관적 속죄론을 전개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객관적인 공로(값)를 부인하였습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1, 각주 913.
‘공로’라고 했을 때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면 됐지, 왜 공로를 요구하시냐?’ 이렇게 하면서 이를 거부합니다. 특별히 소치니(Lelio Sozzini, 1525-1562), (우리가 소키누스[Laelius Socinus]라고도 하죠) 소치니가 이러한 입장에 섰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많은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심[을 알려 주고], 하나님의 또 다른 의가 나타났는데, 그 의는 아들을 주셔서 아들을 통하여 속죄를 이루시는, 아들을 통하여 죄의 값을 치르게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또 다른 의이다, 곧 복음[이다], 이런 것을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정과 은혜의 가장 밝은 빛은 구원주이신 사람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시다(clarissimum lumen praedestinationis et gratiae ipse est salvator homo Christus Iesus). -아우구스티누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1.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과 은혜의 가장 밝은 빛은 구원주이신 사람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셔서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택하셔서 구원하시는 백성의 값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그 머리로부터 모든 지체가 각각의 분량으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그래서 예수가 은혜의 샘 자체가 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주로 이 땅에 보내셔서 그가 모든 의를 이루게 하시고, [신자가] 그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구원의 도, 이 대속의 도,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이 돼야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해 이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 그 영을 받은 자마다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삼아서 그렇게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하나님의 사랑의 값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으므로 하나님은 그 값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아들을 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 다룰 때, 그 시작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롯된다고 여길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원인이 되는 하나님의 결정으로(ad Dei ordinationem)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순전히 자기의 기뻐하심에 따라 중보자를 세우셔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획득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quia mero beneplacito mediatorem statuit, qui nobis salutem acquirer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1.
그래서 첫 번째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주시는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자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시나 그 사랑은 값을 치르는 사랑[이고] 그 값은 아들이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첫 번째 원인은 ‘하나님의 결정’,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을 찾지 아니하십니다. “순전히 자기의 기뻐하심에 따라” 아들을 ‘중보자’로 세우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순전히 기뻐하심에 따라.’ 이것은 구원의 절대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 하나님의 뜻하심, 하나님의 원하심, 이런 것은 어떤 조건하에 우리를 택하여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택하심에 따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는 그 하나님의 주권적 정하심에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그 구원의 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공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적인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성부가 성자를 주시면 성부가 자신을 주심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시면 아버지가 아버지를 주심과 다름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심은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룰 때, 다른 것을 찾으면 조건이 되지만, 그것을 베푸시는 분이 베푸시는 분 안에서 조건을 찾으신다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시되 아들의 공로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들의 값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되 그 아버지의 ‘자비’(misericordia)에 아들의 공로가 필히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호의”(gratuitus Dei favor)와 “그리스도의 순종”(obedientia Christi)은 우리의 행위와는 날카로운 대책점에 서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역시 우리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시고 하나님이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뜻하시고 아들이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에는 그 어떤 공로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는 함께 있고 이 둘이 대척점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가 함께 있고 이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는 우리의 행위와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조건을 구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무조건적 사랑, 무조건적 은혜인 것입니다. 무조건적 아버지의 사랑, 무조건적 아들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유일한 ‘방식’(modus)입니다.
[『기독교 강요』, 2.17.2.]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무조건적 은혜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라고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최고의 원인이자 기원으로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priorem locum teneat Dei dilectio, tanquam summa causa vel origo).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2.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원인이자 기원으로서 첫자리를 차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버지의 사랑이 제1 조건입니다. 이 제1 조건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의] 이차적이며 근접하는 원인이 된다(sequatur fides in Christum, tanquam causa secunda et propio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2.
두 번째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의 값으로, 공로로, 의로 삼으시기 위하여서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이 믿음은 우리가 세 번째 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조건 혹은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 두 번째 조건 혹은 원인은 아들의 공로, 세 번째 조건 [혹은] 원인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이 세 가지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한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우리의 무름의 값이 되셨습니다.
칼빈은 철학자들의 논법을 빌어 영생의 네 가지 원인을 설명함에 있어서, 동력인(causa efficiens)을 우리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dilectio gratuita)에서, 질료인(materialis)을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obedientia)에서, 형상인(formalis)을 믿음(fides)에서, 그리고 목적인(finalis)을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에 대한 영광(gloria)에서 찾습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2, 각주 923.
“우리 구원의 질료”(salutis nostrae materia)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구원의 실체, 구원의 값, 구원의 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입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ἱλασμὸν)로 주셨습니다(요일 4:10). 그래서 아들의 공로, 그 제물, 그 값을 보시고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피가 화평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신 것(reconciliare)은 아들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저 베푸시되, 아들 안에서 베푸십니다. 아들 안에서 선택하신 자들에게 아들 안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서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의(iustitia omnis)의 시작이십니다. 이 구원의 첫 원인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의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배치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은 분명히 값이 지불된 가운데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값은 바로 아들의 공로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사랑의 시작은 의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Principium amoris est iustitia”(the beginning of love is righteousness). 아버지의 사랑의 시작은 아들의 의[인데], 이 의는 공로, 값, 순종, 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전혀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자질이나 우리의 공로로부터 비롯된 것은 일점일획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 없음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의, 그것을 우리는 그저 누릴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아들의 공로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삼위일체적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아들의 공로, 성령의 역사, 그래서 믿음조차도 선물로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사랑의 시작은 의입니다.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우리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역정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값입니다,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를 믿고 아들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caritas Dei)이 “그리스도의 은혜”(gratia Christi)와 결합되어서 구원의 뜻, 의, 값, 그것이 우리의 것으로 제시되고 역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가 획득하신 자기의 것을 우리에게 수여하신다(eum de suo quod acquisivit, nobis largiri).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7.2.
그리스도가 스스로 획득하신 그 의를 아버지가 인정하신 것입니다. 아들의 공로를 아버지가 받으신 것입니다. 무엇으로 받았을까요? 우리를 위한 대속의 값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론’입니다. ‘아들의 공로가 우리 대속의 값이다.’ 이 아들의 공로를 대속의 값으로 받으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는 동일하게 귀한 것이요, 동일하게 우리에게 무한한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의 결정에 따라 값없는 구원의 호의를 베푸셔서 그 중보자로 세우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 대속의 의로 삼으십니다.
둘째, 성도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원인이자 기원입니다. 그것이 첫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 공로가 되고, 그리스도를 믿음이 그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뒤따르는 근접하는 원인이 됩니다.
셋째, 구원의 질료는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래서 그가 다 이루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데 그것은 그가 언약의 머리로서 그 지체된 자들에게 그 의를 전가해 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의의 원천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우리의 의로 삼으시는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시작은 의이다”라고 칼빈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92강 결론
하나님은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의 결정에 따라 값없는 구원의 호의를 베푸시되 중보자로 세우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속의 의로 삼으십니다.
성도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원인이자 기원으로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이 이차적이며 근접하는 원인이 됩니다.
구원의 질료는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인바, 머리이신 그로부터 모든 지체에 은혜가 퍼집니다.
하나님은 의의 원천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우리의 의로 삼으시는 무조건적 은혜의 사랑을 베푸시니, 사랑의 시작은 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