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지금 보호자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그곳으로부터 다시 오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재림이라고 합니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이야기할 때, 그 높아지심, [즉] 승귀를 네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부활, 승천, 재위, 재림, 그것이 바로 그 네 가지입니다.
재림은 통치의 완성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몸은 떠나 있으나 그의 신성에 따라서는 만유의 만유이시므로, 우리 주님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지금 보호자 우편에 계심은 더욱 권능 가운데 친밀하게 우리를 다스리기 위하심입니다. 그의 다스리심은 자기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그 은혜의 통치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님은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십니다(행 1:11; 마 24:30). 주님께서 친히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엄(maiestas) 가운데, “불멸하는 광채 가운데”(cum immortalitatis fulgore), 그의 “무한한 신성의 권능 가운데”(cum immensa divinitatis potentia), 이제 “천사들의 호위 가운데”(cum angelorum satellitio),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 때 나타내신 바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시고, 그가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시고, 이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계시고, 다시 오심은 구원의 완성을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그 대심판 가운데서 선택받은 자들은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속성상 우리가 모든 잘못한 것을 알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사함받은 것을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되지만, 택함 받은 우리는 그 심판으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그 기쁨의 찬미를 끊을 수 없는, 샘솟는 듯한 그 감사로 이제 영원히 찬미의 도구가 되는 그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의 자리인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히 9:27). 누구나 심판의 자리에 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부활이 있고, 죽은 자는 다시 살고, 또 살아 있는 자는 즉시 변화됩니다(고전 15:51). 그리고 그 모두가 심판의 자리로 소환됩니다(살전 4:14-17).
[『기독교 강요』, 2.16.18.]
이로부터 놀라운 위로가 샘솟는다. 우리를 형제자매 삼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심판하는 영예를 나눠 갖도록 미리 지정하신(마 19:28) 그리스도의 수중에 심판이 있다는 소식을 우리가 듣기 때문이다. 그가 심판좌에 오르시는 것은 추호도 우리를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다(Hinc egregia exoritur consolatio, quod penes eum iudicium audimus esse, qui nos sibi in iudicando honoris consortes iam destinavit; tantum abest ut in condemnationem nostram tribunal sit conscensur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8.
여기서 보듯이, 마지막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놀라운 위로’(egregia consolatio)가 되는 것은 심판하시는 분이 그들 자신의 ‘수호자’(patronus), ‘중재자’(intercessor), ‘구속주’(redemptor), ‘가장 관대하신 임금’(clementissimus princeps)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8, 각주 908.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이 심판이 오히려 “놀라운 위로”(consolatio egregia)가 됩니다. [왜냐하면] 정죄의 심판이 아니라, 그 심판주가 되시는 보좌의 어린 양이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가신, 방면하시고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확인하는 자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죄를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모든 죄가 사함 받았음을 또한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형제 자매 삼으셔서 우리가 그와 함께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궁극적인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함께 다스린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유일하신 “중재자”(intercessor)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유일하신 중보자로 중재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끝까지 보살피고 마지막 완성의 때까지 보살핍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 구원의 과정에, 역정에 미칩니다. 그가 잉태 때부터 마지막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까지 예수님은 모든 것을 통하여서 우리의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 것 삼으시고, 끝내는 그 의의 마지막 완성까지 역사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직 그의 의로써 구원을 얻는 그러한 복음의 “영원한 복락”을 약속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심판은 이 복락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대속의 은혜를, 무조건적 은총을 입었음을 확증하는 자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이 놀라운 위로가 됩니다.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s)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를 순서에 따라 잘 기록하고 있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사도신경은 몇 마디 짧은 말로써 구속의 핵심 주제들을 요긴하게 압축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히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조목조목 명료하게 통찰할 수 있도록 마치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감당[한다](dum paucis verbis capita redemptionis perstringit, vice tabulae nobis esse potest, in qua distincte et sigillatim perspicimus, quae in Christo attentione digna su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8.
몇 마디의 짧은 말로써 구속의 핵심 주제들을 요긴하게 압축하고 있고, 조목조목 명료하게 통찰할 수 있도록 일람표와 같이 제시했다고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신경을 왜 이렇게 칼빈은 강조할까요? 그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전 생애의 역정을 통하여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음을 밝히 알려 주는 신앙고백이 된다고 칼빈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는 우리 믿음의 모든 역사가 간략하고도 분명한 순서에 따라 열거되어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완전한 성경의 증언들로 인증(引證)되지 않은 것은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totam in eo fidei nostrae historiam succincte distinctoque ordine recenseri, nihil autem contineri quod solidis scripturae testimoniis non sit consignat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8.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을 고백하게 하실 때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의 역사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사람의 아들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 되신 그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로 우리를 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이것이 사도신경의 간략하고 분명한 순서에 따라 잘 열거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도신경의 고백은 성경의 증언들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칼빈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곳까지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비하와 승귀를 전체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그 시작이 잉태, 곧 성육신입니다. 그리고 탄생, 사심, 고난당하심, 죽으심, 장사되심, 이 모든 것이 의를 이루심의 그 과정이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심, 그것이 나아지심, [곧] 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그 의를 아버지께서 대속의 의로 삼으심, 이것이 승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의를 대속의 의로 받으심,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죽음에 단지 복종하기 위하심이 아니라 그 복종을 통하여 죽음을 죽이시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는, 부활로부터 이제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계시고 곧 재위하시고, <재림하심으로> 그가 다 이루신 의를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우리 것 삼아 주시고, 그 보혜사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택한 받은 백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생명의 부활, 의인의 부활로 나아가고, 그 택한 받은 자들의 심판은 오히려 놀라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주가 되시는 보좌의 어린양이 구속주요, 중보자요, 중재자가 되시므로, 우리의 심판주가 곧 우리의 유일하신 구주가 되시므로, 그가 모든 우리의 죄를 다 방면하시고 사하여 주셨음을 그때 우리는 확실히 알게 되므로, 놀라운 위로가 있고 우리의 찬미가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전개하는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비하와 승귀의 요체이고, 이것이 간략하게 순서별로 사도신경에 잘 기록되어 있다고 칼빈은 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19.]
이 부분을 마치면서 칼빈은 예수님의 모든 이 지상의 역정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그 의의 다 이루심과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전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 구원의 요체 전부와 그 모든 부분이(totam salutis nostrae summam ac singulas etiam partes)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작은 한 부분이라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오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 그 자체로 인해서 구원이 그의 수중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Si salus quaeritur, ipso nomine Iesu docemur penes eum esse). 만약 우리가 성령의 어떤 다른 은사들을 진심으로 구한다면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가운데서 그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si spiritus alia quaelibet dona, in eius unctione reperien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19절에 보시면, “진정 우리는 우리 구원의 요체 전부와 그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새 생명을 얻고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의 전 생애, 우리의 잉태, 우리의 태어남, 우리가 살아감,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 것이다, 이것을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한 부분이라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 그 자체로 인해서 구원이 그의 수중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 천하 만민 중에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어떤 은사들을 구한다면,” 예수님의 기름부음, <주심> 곧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우리가 은사를 누리게 된다라고 또한 이야기합니다.
만약 우리가 힘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에(si fortitudo, in eius dominio). 순수함을 구한다면 그의 잉태되심에서(si puritas, in eius conceptione). 너그러움을 구한다면 그의 태어나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태어나심을 통해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히 2:17) 아파하는 것을 배우셨기(참조. 히 5:2) 때문이다(si indulgentia, in eius nativitate se profert, qua factus est nobis per omnia similis, ut condolescere discer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우리가 힘을 구한다면…그리스도의 주권에.” 그리스도가 만유의 만유시요,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주님의 주권하에 우리가 그와 함께 다스리는, 그와 함께 보좌에서 권능으로 그와 함께 다스리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순수함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 잉태에서 구하라고 칼빈을 이야기합니다. 모두 원죄에 속합니다. 주님만이 죄가 없는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이 사람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그래서 “순수함을 구한다면 그의 잉태”에서.
그리고 “너그러움을 구한다면 그의 태어나심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의 몸을 찢고 그 구유에서 누인, 강보에 쌓인 아기,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나셨습니다. 그 태어나신 분은 온유하신 분이요,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그분은 죄를 들춰내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것은, 가장 미말에 처한 것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 이 땅에 오심, ‘하늘에는 지극한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화로다.’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징계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징계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곧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은 너그러움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너그러움을 구한다면 탄생에서, 태어나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칼빈은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통하여 우리도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아파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대속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수난에 있다(si redemptio, in eius passione). 방면(放免)을 구한다면 그의 정죄받으심에서(si absolutio, in eius damnatione). 저주로부터 사함을 구한다면 그의 십자가에서(si maledictionis remissio, in eius cruc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우리가 대속을 구한다면…그의 수난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고난당함으로 우리가 대신 속함을 받았습니다. 그의 고난이 우리가 속함 받은 값입니다.
“방면을 구한다면 그의 정죄받”음에. 예수님이 그 몸의 죄를 정하셨으므로 우리가 무죄 방면을 받게 됩니다. 예수가 죄인이라고 칭해졌으므로, 우리가 풀려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오고 우리는 감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저주로부터 사함을 구한다면 그의 십자가에서”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저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를 저주로부터 구출해 냅니다.
값의 무름을 구한다면 그의 희생제물에서(si satisfactio, in eius sacrificio).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피에서(si purgatio, in eius sanguine). 화목을 구한다면 그의 지옥 강하에서(si reconciliatio, in descensu ad infero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값의 무름을 구한다면 [그의] 희생제물에.” 무름은 치르는 것입니다, 속상하는 것입니다, 배상하는 것입니다, 보상하는 것입니다. 그의 희생제물로 우리의 값이 물러진 것입니다.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피에서.” 그는 무죄한 피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의 피만이 정결합니다. 예수의 피가 없으면 모든 것이 더럽습니다.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피에서.”
“화목을 구한다면 그의 지옥 강하에서”라고 했습니다. ‘지옥 강하’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옥 강하는 영혼의 고통당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징계 받으시고 또 겟세마네에서 고민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엘리 엘리 사박다니,” 버림도 당하시고, 끝내 죽음의 고통 가운데 계심으로 그 영혼의 고통이 지옥 강화의 의미라고 했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구한다면 그의 지옥 강화에서.”
육신에 대한 죽음을 구한다면 그의 무덤에서(si mortificatio carnis, in eius sepulcro). 새로운 생명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서, 불멸을 구한다면 역시 부활에서(si vitae novitas, in eius resurrectione; si immortalitas, in eadem). 하늘 나라의 유업을 구한다면 그가 하늘로 들어가신 것에서(si haereditas regni coelestis, in coeli ingressu).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 위해서는 그의 장사되심에서. 예수님이 장사되시므로 무덤 가운데 사흘 동안 계심같이 우리도 옛것을 죽이기 위해서 이제 ‘육신의 죽음을 구한다면, 그의 무덤에서.’
그리고 ‘새로운 생명과 불멸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서.’ 칼빈은 여기에서 부활을 두 번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서, 불멸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새 생명이 없고,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영생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유업을 구한다면,” 하늘의 기업을 구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으로, 그의 승천하심으로 통치가 시작되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로 살려면, 그의 승천에서 구할 것이요.
만약 보호와 안전과 모든 복의 부함과 넘침을 구한다면 그의 나라에서(si praesidium, si securitas, si bonorum omnium copia et facultas, in eius regno). 심판에 대한 떨림 없는 대망을 구한다면 그에게 주어진 심판하는 권세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si secura iudicii exspectatio, in potestate iudicandi illi tradita). 요컨대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복으로 충만한 곳간이 그에게 있으니 다른 곳이 아니라 이 샘으로부터 우리를 가득 채우도록 하자(Denique in ipso thesauri omne genus bonorum quum sint, inde ad satietatem hauriantur, non aliund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그가 우리를 위하여 계속해서 다스리시는 보좌 우편의 재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안전함이 있고, 우리의 복의 부함이 있고, 넘침이 있다고 칼빈은 또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의 심판으로부터 우리가 두려움을 없애고 그의 심판이 우리에게 오히려 위로가 되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곳간에서 구하라’라고 칼빈이 이야기합니다. ‘그의 샘에서만 길어 먹으라’라고, ‘마시라’라고 또한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곳에서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를 채울 수 있다고, 그곳에서만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내려오셔서 최고로 현존하는 자기 능력의 분명한 증거들을 자신의 존엄, 광채, 권능 가운데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재림의 역사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써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산 자들은 변화되어 그를 영접합니다.
셋째, 마지막 심판이 친히 중재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보살피고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습니다. 심판주가 나를 위해 죽으신 구속주입니다. 그러므로 놀라운 위로가 우리에게 넘칩니다.
넷째, 이러한 예수님의 모든 구원의 역정이 기록된 사도신경은 구원의 핵심 주제들이 제시된 일람표와 같은 것으로서 성경의 완전한 증언들이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요체 전부와 모든 복이 주님의 곳간과 샘에 충만합니다. 그의 의의 전가로부터, 전 생애의 의의 전가로부터 우리는 그의 곳간에서, 그의 샘에서 부요함을 누려야 됩니다. 이것이 칼빈이 다섯 번째로 이 부분에서 강조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91강 결론
그리스도는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내려오셔서 최고로 현존하는 자기 능력의 분명한 증거들을 자기의 존엄, 광채, 권능 가운데 보여 주십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써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산 자들이 변화되어 그를 영접합니다.
마지막 심판이 친히 중재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보살피고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음이 놀라운 위로가 됩니다.
사도신경은 구속의 핵심 주제들이 제시된 일람표와 같은 것으로서 그곳에는 성경의 완전한 증언들이 예외 없이 인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요체 전부와 그 모든 복이 주님의 곳간과 샘에 충만하니 오직 그의 전 생애의 의로부터 대속의 은혜의 부요함을 누려야 합니다.
91강 | 2.16.17-19 (2권 491-496페이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기독교 강요』, 2.16.17.]
주님은 지금 보호자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그곳으로부터 다시 오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재림이라고 합니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이야기할 때, 그 높아지심, [즉] 승귀를 네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부활, 승천, 재위, 재림, 그것이 바로 그 네 가지입니다.
재림은 통치의 완성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몸은 떠나 있으나 그의 신성에 따라서는 만유의 만유이시므로, 우리 주님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지금 보호자 우편에 계심은 더욱 권능 가운데 친밀하게 우리를 다스리기 위하심입니다. 그의 다스리심은 자기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그 은혜의 통치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님은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십니다(행 1:11; 마 24:30). 주님께서 친히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엄(maiestas) 가운데, “불멸하는 광채 가운데”(cum immortalitatis fulgore), 그의 “무한한 신성의 권능 가운데”(cum immensa divinitatis potentia), 이제 “천사들의 호위 가운데”(cum angelorum satellitio),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 때 나타내신 바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시고, 그가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시고, 이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계시고, 다시 오심은 구원의 완성을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그 대심판 가운데서 선택받은 자들은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속성상 우리가 모든 잘못한 것을 알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사함받은 것을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되지만, 택함 받은 우리는 그 심판으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그 기쁨의 찬미를 끊을 수 없는, 샘솟는 듯한 그 감사로 이제 영원히 찬미의 도구가 되는 그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의 자리인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히 9:27). 누구나 심판의 자리에 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부활이 있고, 죽은 자는 다시 살고, 또 살아 있는 자는 즉시 변화됩니다(고전 15:51). 그리고 그 모두가 심판의 자리로 소환됩니다(살전 4:14-17).
[『기독교 강요』, 2.16.18.]
이로부터 놀라운 위로가 샘솟는다. 우리를 형제자매 삼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심판하는 영예를 나눠 갖도록 미리 지정하신(마 19:28) 그리스도의 수중에 심판이 있다는 소식을 우리가 듣기 때문이다. 그가 심판좌에 오르시는 것은 추호도 우리를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다(Hinc egregia exoritur consolatio, quod penes eum iudicium audimus esse, qui nos sibi in iudicando honoris consortes iam destinavit; tantum abest ut in condemnationem nostram tribunal sit conscensuru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8.
여기서 보듯이, 마지막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놀라운 위로’(egregia consolatio)가 되는 것은 심판하시는 분이 그들 자신의 ‘수호자’(patronus), ‘중재자’(intercessor), ‘구속주’(redemptor), ‘가장 관대하신 임금’(clementissimus princeps)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8, 각주 908.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이 심판이 오히려 “놀라운 위로”(consolatio egregia)가 됩니다. [왜냐하면] 정죄의 심판이 아니라, 그 심판주가 되시는 보좌의 어린 양이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가신, 방면하시고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확인하는 자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죄를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모든 죄가 사함 받았음을 또한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형제 자매 삼으셔서 우리가 그와 함께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궁극적인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함께 다스린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유일하신 “중재자”(intercessor)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유일하신 중보자로 중재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끝까지 보살피고 마지막 완성의 때까지 보살핍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 구원의 과정에, 역정에 미칩니다. 그가 잉태 때부터 마지막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까지 예수님은 모든 것을 통하여서 우리의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 것 삼으시고, 끝내는 그 의의 마지막 완성까지 역사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직 그의 의로써 구원을 얻는 그러한 복음의 “영원한 복락”을 약속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심판은 이 복락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대속의 은혜를, 무조건적 은총을 입었음을 확증하는 자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이 놀라운 위로가 됩니다.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s)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를 순서에 따라 잘 기록하고 있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사도신경은 몇 마디 짧은 말로써 구속의 핵심 주제들을 요긴하게 압축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히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조목조목 명료하게 통찰할 수 있도록 마치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감당[한다](dum paucis verbis capita redemptionis perstringit, vice tabulae nobis esse potest, in qua distincte et sigillatim perspicimus, quae in Christo attentione digna su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8.
몇 마디의 짧은 말로써 구속의 핵심 주제들을 요긴하게 압축하고 있고, 조목조목 명료하게 통찰할 수 있도록 일람표와 같이 제시했다고 칼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신경을 왜 이렇게 칼빈은 강조할까요? 그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전 생애의 역정을 통하여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음을 밝히 알려 주는 신앙고백이 된다고 칼빈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는 우리 믿음의 모든 역사가 간략하고도 분명한 순서에 따라 열거되어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완전한 성경의 증언들로 인증(引證)되지 않은 것은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totam in eo fidei nostrae historiam succincte distinctoque ordine recenseri, nihil autem contineri quod solidis scripturae testimoniis non sit consignatum).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8.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을 고백하게 하실 때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의 역사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사람의 아들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 되신 그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로 우리를 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이것이 사도신경의 간략하고 분명한 순서에 따라 잘 열거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도신경의 고백은 성경의 증언들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칼빈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곳까지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비하와 승귀를 전체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그 시작이 잉태, 곧 성육신입니다. 그리고 탄생, 사심, 고난당하심, 죽으심, 장사되심, 이 모든 것이 의를 이루심의 그 과정이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심, 그것이 나아지심, [곧] 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그 의를 아버지께서 대속의 의로 삼으심, 이것이 승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의를 대속의 의로 받으심,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죽음에 단지 복종하기 위하심이 아니라 그 복종을 통하여 죽음을 죽이시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는, 부활로부터 이제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계시고 곧 재위하시고, <재림하심으로> 그가 다 이루신 의를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우리 것 삼아 주시고, 그 보혜사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택한 받은 백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생명의 부활, 의인의 부활로 나아가고, 그 택한 받은 자들의 심판은 오히려 놀라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주가 되시는 보좌의 어린양이 구속주요, 중보자요, 중재자가 되시므로, 우리의 심판주가 곧 우리의 유일하신 구주가 되시므로, 그가 모든 우리의 죄를 다 방면하시고 사하여 주셨음을 그때 우리는 확실히 알게 되므로, 놀라운 위로가 있고 우리의 찬미가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전개하는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비하와 승귀의 요체이고, 이것이 간략하게 순서별로 사도신경에 잘 기록되어 있다고 칼빈은 본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19.]
이 부분을 마치면서 칼빈은 예수님의 모든 이 지상의 역정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그 의의 다 이루심과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전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 구원의 요체 전부와 그 모든 부분이(totam salutis nostrae summam ac singulas etiam partes)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작은 한 부분이라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오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 그 자체로 인해서 구원이 그의 수중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Si salus quaeritur, ipso nomine Iesu docemur penes eum esse). 만약 우리가 성령의 어떤 다른 은사들을 진심으로 구한다면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가운데서 그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si spiritus alia quaelibet dona, in eius unctione reperientur).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19절에 보시면, “진정 우리는 우리 구원의 요체 전부와 그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새 생명을 얻고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의 전 생애, 우리의 잉태, 우리의 태어남, 우리가 살아감,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 것이다, 이것을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한 부분이라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 그 자체로 인해서 구원이 그의 수중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 천하 만민 중에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어떤 은사들을 구한다면,” 예수님의 기름부음, <주심> 곧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우리가 은사를 누리게 된다라고 또한 이야기합니다.
만약 우리가 힘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에(si fortitudo, in eius dominio). 순수함을 구한다면 그의 잉태되심에서(si puritas, in eius conceptione). 너그러움을 구한다면 그의 태어나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태어나심을 통해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히 2:17) 아파하는 것을 배우셨기(참조. 히 5:2) 때문이다(si indulgentia, in eius nativitate se profert, qua factus est nobis per omnia similis, ut condolescere discere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우리가 힘을 구한다면…그리스도의 주권에.” 그리스도가 만유의 만유시요,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주님의 주권하에 우리가 그와 함께 다스리는, 그와 함께 보좌에서 권능으로 그와 함께 다스리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순수함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 잉태에서 구하라고 칼빈을 이야기합니다. 모두 원죄에 속합니다. 주님만이 죄가 없는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이 사람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그래서 “순수함을 구한다면 그의 잉태”에서.
그리고 “너그러움을 구한다면 그의 태어나심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의 몸을 찢고 그 구유에서 누인, 강보에 쌓인 아기,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나셨습니다. 그 태어나신 분은 온유하신 분이요,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그분은 죄를 들춰내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것은, 가장 미말에 처한 것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 이 땅에 오심, ‘하늘에는 지극한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화로다.’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징계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징계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곧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은 너그러움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너그러움을 구한다면 탄생에서, 태어나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칼빈은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통하여 우리도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아파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대속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수난에 있다(si redemptio, in eius passione). 방면(放免)을 구한다면 그의 정죄받으심에서(si absolutio, in eius damnatione). 저주로부터 사함을 구한다면 그의 십자가에서(si maledictionis remissio, in eius cruc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우리가 대속을 구한다면…그의 수난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고난당함으로 우리가 대신 속함을 받았습니다. 그의 고난이 우리가 속함 받은 값입니다.
“방면을 구한다면 그의 정죄받”음에. 예수님이 그 몸의 죄를 정하셨으므로 우리가 무죄 방면을 받게 됩니다. 예수가 죄인이라고 칭해졌으므로, 우리가 풀려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오고 우리는 감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저주로부터 사함을 구한다면 그의 십자가에서”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저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를 저주로부터 구출해 냅니다.
값의 무름을 구한다면 그의 희생제물에서(si satisfactio, in eius sacrificio).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피에서(si purgatio, in eius sanguine). 화목을 구한다면 그의 지옥 강하에서(si reconciliatio, in descensu ad inferos).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값의 무름을 구한다면 [그의] 희생제물에.” 무름은 치르는 것입니다, 속상하는 것입니다, 배상하는 것입니다, 보상하는 것입니다. 그의 희생제물로 우리의 값이 물러진 것입니다.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피에서.” 그는 무죄한 피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의 피만이 정결합니다. 예수의 피가 없으면 모든 것이 더럽습니다.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피에서.”
“화목을 구한다면 그의 지옥 강하에서”라고 했습니다. ‘지옥 강하’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옥 강하는 영혼의 고통당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징계 받으시고 또 겟세마네에서 고민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엘리 엘리 사박다니,” 버림도 당하시고, 끝내 죽음의 고통 가운데 계심으로 그 영혼의 고통이 지옥 강화의 의미라고 했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구한다면 그의 지옥 강화에서.”
육신에 대한 죽음을 구한다면 그의 무덤에서(si mortificatio carnis, in eius sepulcro). 새로운 생명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서, 불멸을 구한다면 역시 부활에서(si vitae novitas, in eius resurrectione; si immortalitas, in eadem). 하늘 나라의 유업을 구한다면 그가 하늘로 들어가신 것에서(si haereditas regni coelestis, in coeli ingressu).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 위해서는 그의 장사되심에서. 예수님이 장사되시므로 무덤 가운데 사흘 동안 계심같이 우리도 옛것을 죽이기 위해서 이제 ‘육신의 죽음을 구한다면, 그의 무덤에서.’
그리고 ‘새로운 생명과 불멸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서.’ 칼빈은 여기에서 부활을 두 번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서, 불멸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새 생명이 없고,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영생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유업을 구한다면,” 하늘의 기업을 구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으로, 그의 승천하심으로 통치가 시작되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로 살려면, 그의 승천에서 구할 것이요.
만약 보호와 안전과 모든 복의 부함과 넘침을 구한다면 그의 나라에서(si praesidium, si securitas, si bonorum omnium copia et facultas, in eius regno). 심판에 대한 떨림 없는 대망을 구한다면 그에게 주어진 심판하는 권세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si secura iudicii exspectatio, in potestate iudicandi illi tradita). 요컨대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복으로 충만한 곳간이 그에게 있으니 다른 곳이 아니라 이 샘으로부터 우리를 가득 채우도록 하자(Denique in ipso thesauri omne genus bonorum quum sint, inde ad satietatem hauriantur, non aliunde).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9.
그가 우리를 위하여 계속해서 다스리시는 보좌 우편의 재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안전함이 있고, 우리의 복의 부함이 있고, 넘침이 있다고 칼빈은 또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의 심판으로부터 우리가 두려움을 없애고 그의 심판이 우리에게 오히려 위로가 되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곳간에서 구하라’라고 칼빈이 이야기합니다. ‘그의 샘에서만 길어 먹으라’라고, ‘마시라’라고 또한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그곳에서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를 채울 수 있다고, 그곳에서만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칼빈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내려오셔서 최고로 현존하는 자기 능력의 분명한 증거들을 자신의 존엄, 광채, 권능 가운데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재림의 역사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써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산 자들은 변화되어 그를 영접합니다.
셋째, 마지막 심판이 친히 중재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보살피고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습니다. 심판주가 나를 위해 죽으신 구속주입니다. 그러므로 놀라운 위로가 우리에게 넘칩니다.
넷째, 이러한 예수님의 모든 구원의 역정이 기록된 사도신경은 구원의 핵심 주제들이 제시된 일람표와 같은 것으로서 성경의 완전한 증언들이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요체 전부와 모든 복이 주님의 곳간과 샘에 충만합니다. 그의 의의 전가로부터, 전 생애의 의의 전가로부터 우리는 그의 곳간에서, 그의 샘에서 부요함을 누려야 됩니다. 이것이 칼빈이 다섯 번째로 이 부분에서 강조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91강 결론
그리스도는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내려오셔서 최고로 현존하는 자기 능력의 분명한 증거들을 자기의 존엄, 광채, 권능 가운데 보여 주십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써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산 자들이 변화되어 그를 영접합니다.
마지막 심판이 친히 중재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보살피고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음이 놀라운 위로가 됩니다.
사도신경은 구속의 핵심 주제들이 제시된 일람표와 같은 것으로서 그곳에는 성경의 완전한 증언들이 예외 없이 인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요체 전부와 그 모든 복이 주님의 곳간과 샘에 충만하니 오직 그의 전 생애의 의로부터 대속의 은혜의 부요함을 누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