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강 [2.16.13-16]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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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 2.16.13-16 (2권 483-491페이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재위


[『기독교 강요』, 2.16.13.]

     예수님이 죽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resurrectio)이 없다면 죽음이 헛되고,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복음도 헛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것은 단지 죽으심 그 자체로 의롭지 않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부활로, 그 생명의 역사로, 죽으심이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 될 때, 그 죽음의 값이 우리의 생명의 값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생명을 떠난 믿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는 그러한 자리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으므로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의 값이 됨을 우리가 믿게 됩니다. 부활이 있으므로 예수와 함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의 길이 됨을 또한 우리가 알고, 그 유익을 누리고, 그 열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정죄입니다, 저주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걷어 내는 죽음, 그 죽음을 쏘는 죽음, 그것은 부활의 권능(potentia)입니다. 죽음이 부활로 인하여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때, 그 죽음이 우리의 대속의 죽음이 되고, 그 죽음이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통하여 거듭난 이것이 우리에게 “산 소망”(spes viva, 벧전 1:3)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그의 승리는 죽음을 죽이는 죽음, 생명의 승리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의 죽음을 믿고 그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믿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의 값임을, 우리의 대속의 의가 됨을 믿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그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죽으셨으며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죽으심과 살아나심,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심, 이 죽음과 부활은 함께 있을 때에만 그 값이 우리의 대속의 값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 구원의 질료를 나눈다. 전자를 통해서 죄가 소멸되고 죽음이 사라졌으며, 후자를 통해서 의가 회복되었으며 생명이 세워졌으므로, 후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전자에 속한 고유한 능력과 효과가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다(salutis nostrae materiam inter Christi mortem et resurrectionem partimur, quod per illam peccatum abolitum et mors exstincta, per hanc iustitia reparata et erecta vita: sic tamen ut huius beneficio vim efficaciamque suam illa nobis profera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3.

     그리하여 칼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 구원의 질료가 나누어진다’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죽음과 부활이 다른 값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대속의 값, 대속의 의는, 죽음과 부활이 함께 역사할 때, 죽음을 통하여 죄가 소멸되고, 죽음을 통하여 죽음이 사라지고, 부활을 통하여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세워질 때, 그때 예수님의 죽음의 값, 그것은 부활의 권능, 역사에 다름 아니므로, 죽음과 부활이 함께 우리에게 대속의 의로서, 값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은총이 없다면, 죽음의 고유한 능력과 효과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신 대속의 주, 우리가 그를 높이는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하신 그 하나님의 아들로 공언되는 것입니다(롬 1:4). 
     예수님은 자기의 하나님이심, 곧 “[자기의] 신성을 비추는 맑은 거울이자 흔들림이 없는 우리의 믿음의 버팀목이 되는 하늘 권능”을 보이셨는데, 그것이 비로소 나타난 것이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하나님이심, 그리고 그의 권능, 그것이 흔들림 없이 우리에게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예수님은 육신의 약하심으로 고난을 받으셨으나 영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영의 능력”(virtus spiritus)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을 뜻합니다. 인성에 따라서는 죽으셨으나, 고난을 받으셨으나, 신성에 따라서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능력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완전하신 가운데, 능력 가운데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 가는 것은 그의 죽으심과 함께 부활의 권능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빌 3:10).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에 따라 다시 사셨으므로, 그 영광이 아들에게 돌려집니다. 우리는 그를 믿고 오직 그 가운데 소망합니다(벧전 1:2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대속, 그가 죽고 그가 부활하심,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대속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죽음과 부활 가운데 역사합니다. 

부활은 십자가에서 시작된 것을 완성하며, 십자가가 생명에 이르는 구원의 문이 됨을 계시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3, 각주 888.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하면 부활을 마땅히 생각할 것이요, 부활을 이야기하면 죽음을 마땅히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제유법’(synecdoche)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를 말하여 전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 부활을 함의할 것이요, 부활을 말하면 십자가를 함의할 것이요, 죽음과 부활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없더라도 부활을 이야기한다면 그 부활은 예수의 죽음을 전제하고 예수의 죽음을 함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 주십니다. 그가 이기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부활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부활, 의인의 부활로 나아가는 그 의가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부활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다면, 믿음도 폐하여 질 것이고, 복음도 헛되고 거짓될 것입니다(고전 15:17). 
     이러한 부활의 열매는 세 가지가 있다고 칼빈은 파악합니다. 첫째로는 부활로 인하여 “저주의 공포”(terrores damnationis)에서 벗어나서 생명(vita)으로 옮김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자로서 부활하셨으므로 그가 중보하심으로 우리는 “새 생명”(novitas vitae)을 얻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는 생명입니다, 새 생명입니다. 
     두 번째, 부활의 열매는 새로운 생활입니다. 옛 사람에게 속한 육체를 죽여 버리고 새 사람의 영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권능 가운데 속한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얻고, 부활의 삶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접붙임을 받았으면 그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새 생명 가운데 걷게 되리라’라고 로마서 6장 4-5절에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이제 새 생명을 얻고, 이전의 우리의 지체들을 죽이고, 이전의 우리 손발이 하던 행위들을 죽이고, 새로운 거룩한 삶,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바라보고(골 3:1-2), 능력으로 거듭나(regenere)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새로운 거룩한 삶을 사는 그 은혜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열매는 바로 우리 믿음의 확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함에 대한 믿음의 확실한 터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언약의 약속 가운데 우리가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약속을 인치는 사건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14.]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 이 ‘승천’(in coelum ascensus)은 부활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사”[입니다]. 이 “하늘에 오르사”라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를 창건하심(auspicari)을 이야기합니다. 하늘에 오르심은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심이요, 그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시므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가 [곧]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4:10). 예수님이 오르셔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먹어라’(요 7:37).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래서 주님은 잡히시던 밤의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했습니다(요 16:7).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그의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는 의의 전가의 영입니다. 

하늘로 들림을 받으신 그가 자기의 육체의 현존을 우리들 위로 들어내어 가신 것은(행 1:9) 여전히 지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과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심으로써 더욱 긴밀하게 현존하는 자기의 능력으로(praesentiore virtute) 하늘과 땅을 모두 다스리고자 하신 것이었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자기의 이 승천으로 자기가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성취하셨다. 자기의 몸이 모든 하늘 위로 들려진 것같이 그의 능력과 작용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경계를 넘어 퍼지고 확산되었다(qua ut corpus supra omnes coelos elevatum est, ita virtus et efficacia ultra omnes coeli ac terrae fines diffusa propagataque es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4.

여기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신인 양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 신성에 따라서 모든 곳에 계시며 인성에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현존하심으로써 다스리심을 말합니다.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4, 각주 896.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들림을 받으셔서, 이제 그의 인성에 따라서는 하늘에 오르신 [분], 그러나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신성에 따라 모든 곳에 계신 그분이 더욱 우리와 가까이 계시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심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하나님이 거하게 되시는 그 자리로 우리를 세우십니다. 그리하여 칼빈은 “더욱 긴밀하게 현존하는 자기의 능력으로 하늘과 땅을 모두 다스리고자 하신 것이었다”라고 함으로 주님의 승천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떠나심으로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현존이 더욱 우리와 친밀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올라가심으로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시므로 이제는 함께뿐만 아니라 안에 거하게 되어 더욱 친밀하게 우리와 거하시고, 그리고 친밀하게 거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권능이 더욱 편만하게 되었다, 그것이 승천의 의미라고 칼빈은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인성에 따른 주님의 현존은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 영을 받은 자는 그와 함께, 그리고 그가 속에 계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이 임마누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인성에 따라서는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가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신성에 따라서는 만유의 만유십니다.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그의 “엄위의 현존”(praesentia maiestatis)이 떠나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떠나가셨지만은 그의 현존은 더욱 친밀하게, 더욱 권능 가운데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거하신다’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엄위의 현존과 육체의 현존(praesentia carnis), 이것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현존은 물론 떠나 계시지만은 엄위의 현존, 신성에 따라서 모든 곳에 계시는 그 현존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육체로는 떠나 가셨으나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것을 승천을 이야기하면서 강조합니다. 

[『기독교 강요』, 2.16.15.]

     승천은 다스림의 시작입니다. 그 다스림은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이] 육체로는 떠나 계시지만은 영으로는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승천하신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해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그 ‘아버지 우편’(dextera patris)에 계심, 그것을 ‘재위’(sessio)라고 합니다. 승천이 통치의 시작이라면, 재위는 통치의 계속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늘의 권세와 땅의 주권을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계속해서 다스리십니다. 
     인성에 따라서는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신성에 따라서는 만유의 만유, 편만하시고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래서 떠나가셨으되, 여전히 계시므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만물을 그 발 아래(sub pedibus) 두시고(고전 15:27), 만물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고, 무엇보다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만유의 주로, 교회의 머리(caput ecclesiae)로 그렇게 계속해서 통치하십니다(엡 1:22).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목적은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그의 엄위를 우러러보며, 그의 손으로 다스림을 받으며, 그의 뜻을 헤아려 살피며, 그의 능력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Vides quorsum pertineat illa sessio, nempe ut eius maiestatem tum coelestes tum terrenae creaturae suspiciant, manu eius regantur, nutum intueantur, virtuti subiectae sint).
문병호 역, 『기독교 강요』, 2.16.15.

     주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음은 그 엄위로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그 손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그 뜻으로 살피시고, 그 능력으로 만유를 복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주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다라고 그렇게 증언했고요. 중요한 것은 그가 앉아 계시거나 서 계시거나 한 그런 모습이 아니라 바로 그가 다스리시는 엄위,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 성령의 권능으로 만물을 복종시키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은사를 더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권능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2.16.16.]

     주님이 보좌 우편에 계심은 세 가지 유익이 있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이 보좌 우편에 계심, 재위의 열매(fructus)라고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얻게 되는 열매입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보좌 우편에 계심을 믿음으로 우리가 하늘로 들어가는 문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하늘 문을 우리를 위하여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문을 여셨습니다. 지성소의 문을 여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다스린다’라고 에베소서 2장 6절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계심의 유익입니다. 
     두 번째 유익은 우리가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계심을 믿음으로 그가 언제든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고 중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또 예수가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그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복을 누리고 언약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좌 우편에 계심, 재위의 두 번째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유익은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서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모든 것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그 권능과 능력과 부(opes)와 그 자랑(gloriatio)이 우리의 믿음 가운데서 권능 가운데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자리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적 현존으로는 우리를 떠나 계시지만, 그가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다스리시고, 자기의 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의 선물(dotes)로 교회를 꾸미시고, 자기의 보호(protectio) 가운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존하시고, 십자가에 대적하는 온갖 삿된 것들, 악한 것들을 이기심으로 우리를 친히 다스리신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보좌 우편에 계심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regnum), 교회를 세우시는 그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구원의 질료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그 죽음으로써 죄가 소멸되고 죽음이 사라지고, 그 부활로써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그 부활로써 죽음의 능력과 효과가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둘째,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우리는 새로운 생명, 새로운 생활, 우리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라는 세 가지 열매를 얻게 됩니다. 
     셋째, 주님은 승천하셔서 아버지 우편에서 자기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 더욱 긴밀하게 현존하는 능력으로 신성에 따른 엄위의 현존과 인성에 따른 육체의 현존 가운데 우리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넷째, 주님은 아버지 우편에서 계속해서 다스리시는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여시고 우리의 대언자와 중재자로서 아버지의 면전에서 간구하시며 그 자신의 영으로 교회와 성도가 영적인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보좌 우편의 재위의 세 가지 열매, 이것으로 우리가 다스림을 받고 그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90강 결론


  1. 구원의 질료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으며 그 죽음으로써 죄가 소멸되고 죽음이 사라졌으며 그 부활로써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세워진바, 그 부활로써 그 죽음의 능력과 효과가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2.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우리는 새로운 생명, 새로운 생활, 우리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라는 세 가지 열매를 얻습니다. 
  3. 주님은 승천하셔서 아버지 우편에서 자기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써 더욱 긴밀하게 현존하는 능력으로, 신성에 따른 엄위의 현존과 인성에 따른 육체의 현존 가운데, 우리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4. 주님은 아버지 우편에서 계속해서 다스리시는바,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여시고, 대언자와 중재자로서 아버지의 면전에서 간구하시며, 자기의 영으로 교회와 성도가 영적인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